난 할 수 있어 312화
최재한은 못을 박았다.
“해주십시오. 해야겠습니다.”
“하, 무대뽀 자식.”
“해주십시오.”
보도본부장은 잔뜩 짜증 돋친 얼굴로 빽 소리를 질렀다.
“알았어, 인마! 그만 말해.”
“해주시는 겁니까?”
보도본부장은 푹, 깊은 한숨을 내쉬고 담배를 뒤지다가 빈 갑인 걸 보고 최재한에게 역정을 냈다.
“그래! 해준다고! 밑에 가서 담배나 사 와.”
“감사합니다, 선배!”
“내가 너니까 해주는 거야, 알아? 모지리들이 이 난리 쳤으면 빠따로 궁뎅이 터트리고 뺀찌 놨어.”
“압니다, 선배.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너, 대신 물증이 확실해야 돼. 어설픈 거 들이댔다가는 너도 죽고 나도 죽어, 알았어?”
“넵!”
최재한이 과장된 목소리로 외치자 보도본부장은 쯧, 마뜩잖게 혀만 걷어찼다.
최재한은 들뜬 얼굴로 담배를 사러 나갔다.
“지옥문 열어제끼고 안으로 들어가는 데 좋단다, 어이고.”
보도본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최재한은 솜씨 좋은 기자였다.
그는 보도본부장에게 무리한 요구를 관철시킬 만큼 경력에 비해 실력이 확실했다.
그건 비단 대찬이 어미 새처럼 물어다 준 아이템을 덥석덥석 잘 받아먹은 덕택만은 아니었다.
가진 게 고작 그것뿐이었다면 결코 사내외의 신망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최재한은 가동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가동했다.
그는 소위 빨대라고 불리는, 돈독한 관계를 쌓아온 취재원의 인맥을 이용했다.
타고 타고 들어가니 극동호텔의 내부자와 연이 닿았다.
그리고 음성적인 경로를 통해 마침내 홍승연이 민동철에게 적극 협조하라는 지시가 담긴 전화 통화 녹취록을 얻어냈다.
최재한이 확실한 증거를 보도본부장에게 들이밀자, 보도본부장은 굳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좋아. 버튼 누른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눌러주십시오.”
보도본부장은 고개를 떨어뜨리며 하, 한숨을 쉬고는 책상 위를 엄지로 꾹 누르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는 다시 최재한을 올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펑.”
“…….”
“터졌다. 너랑 나는 죽었다.”
“길동무가 있어서 외롭진 않네요.”
“개새끼.”
최재한은 기어코 일을 저질렀다.
그는 대찬에게 보도가 나가는 시간을 일러주었다.
워낙 쟁쟁한 이슈들이 있어 첫 꼭지는 놓쳤다.
그래도 세 번째 꼭지에서 다뤄질 것이라고 최재한은 귀띔해주었다.
이왕 터트리는 거, 차라리 세게 터트려야 안전하다는 보도본부장의 선택이었다.
대찬은 여유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얼굴로 뉴스를 지켜봤다.
“스포츠극동 기자가 개입한 이른바 ‘조지아 포도농장 사건’에 극동일보 홍구완 사장의 차녀인 홍승연 씨가 막후에서 위력을 행사한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최재한의 리포트를 보고 대찬을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판소리의 소리꾼에 장단을 맞춰주는 고수처럼 추임새를 넣었다.
“옳지.”
“홍씨는 불법 사실을 인지하고도 폭리를 취하기 위해 이를 묵인했습니다. 게다가 홍씨는 극동호텔 내에 어떠한 직함도 맡고 있지 않아, 지시 자체가 부당하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게 됐습니다.”
“잘한다.”
“한 시민단체는 이러한 정황이 홍씨의 불법행위를 뒷받침한다면서, 검찰에 고발장을 제출했습니다.”
“시민단체는 언제 또 구워삶았을까. 야무지네, 최재한.”
대찬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다소 사그라졌다.
최재한의 리포트에는 홍승연의 목소리임에 분명한 녹음파일이 재생되었다.
‘길 가다가 돈 줍는 격이니까 민 기자 하자는 대로 빨리해줘요.’
“조지아의 한 소도시 포도농장에서 시작된 사건이, 국내 최대 언론사 가문의 구설수로 번지는 가운데 공은 이제 검찰에 넘어갔습니다. ONB 뉴스, 최재한입니다.”
대찬은 소파의 팔걸이를 꽉 쥐었다.
이제 정말 돌이킬 수 없다.
“…미친놈이네, 이거 완전.”
홍승연은 입술을 비틀었다.
방방 날뛸 기분도 들지 않았다.
법인카드 갖고 난리 피울 때는 그래도 봐줄 만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주제를 모르잖아.”
뭣도 아닌 놈이 감히.
홍승연은 분노보다 웃음이 앞섰다.
그때 아버지이자 극동일보의 사주인 홍구완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홍승연은 바로 받았다.
“아버지.”
“ONB가 대가리에 총이라도 맞은 모양이다.”
“어처구니가 없어요. 뭐예요, 쟤네?”
“이 장난질을 친 주동자는.”
“조대찬. 우리 그이 죽마고우예요. 비바체 일등공신이고.”
홍구완 사장은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그놈 애비는 뭐 하는 놈이라던?”
“몰라요. 뭐 하는지.”
“입에 수저도 못 물었으면서 저렇게 난장을 쳐?”
“그러니 기가 막힌다는 거죠.”
“알았다, 끊는다.”
홍구완은 딸에게 단 한 마디의 추궁하는 말도, 질책하는 말도 없었다.
딱히 딸을 감싸고도는 성격 때문은 아니었다.
그의 기준에서는 잘못 축에도 못 드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이건 그저 맨주먹 어린애의 무력시위일 뿐이었다.
그는 바로 서청수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청수 회장 역시 저간의 사정을 이미 알고 있어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사돈, 우리 한번 봐야겠네요.”
“…지금 뵙죠.”
“우리 집으로 오시렵니까. 맛있는 차나 한잔 대접하려는데.”
“그러죠.”
서청수 회장은 가만히 외투를 챙겨 홍구완 사장의 흑석동 저택으로 향했다.
홍구완 사장의 저택은 작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밖에서는 절대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구조였다.
바로 앞마당까지 차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홍구완 사장의 집사 역할을 하는 이는 매몰차게 말했다.
“대문 앞에 차를 세우고 들어오시면 됩니다.”
대문부터 집 안까지 걸어서 오라는 뜻이었다.
서청수 회장은 끓는 속내를 억누르며 주문대로 했다.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가 서재까지 들어가서야 홍구완 사장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홍구완 사장은 안경을 콧마루까지 내린 채로 서청수 회장을 바라봤다.
“아, 오셨습니까.”
“네, 뵙기까지 절차가 까다롭군요.”
“하하, 번거로우셨던 모양입니다.”
홍구완 사장은 그렇게만 얘기하고 자리를 권하지도 않았다.
서청수 회장은 입술을 씰룩이며 알아서 자리를 찾아 앉았다.
홍구완 사장은 난초 잎을 정성스레 닦았다.
“서 회장은 난초 좀 길러보셨습니까.”
“회사 기르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다른 건 기를 여유가 없더군요.”
“아, 그래서 자식도 그 모양으로 기르셨나.”
노골적인 도발에 서청수 회장의 목소리에 노기가 실렸다.
“사돈, 마음은 알겠지만 말씀은 가려 해주시죠.”
“하하,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오늘은 감정이 잘 안 다스려져서요. 나도 아직 수양이 많이 부족한 사람이라 그래요. 이해해요.”
“모쪼록 좋은 말로 해결이 되었으면 합니다만.”
그 말에 홍구완 사장은 서청수 회장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안경을 벗어 턱, 탁자 위에 올려놨다.
홍구완 사장의 맨눈이 서청수 회장을 빤히 바라봤다.
뱀의 눈이었다.
“서 회장, 나는 언론사 사장이에요.”
“압니다.”
“언론이 언론한테 당한다는 거, 이거 보통 치욕이 아닙니다? 언론사 사장으로서 펜촉에 찔려서 피가 나는 거, 마장동 칼잡이가 발골하는 칼에 베이는 것만큼 쪽팔리다구요?”
“이번 일은 유감입니다.”
“그렇게 넘어가시려고요?”
서청수 회장은 깊은 시름을 토했다.
“홍승연은 제게도 사사로이 며늘아기가 됩니다. 저도 가슴이 아픕니다.”
“그래도 책임은 분명히 따지셔야지.”
“ONB에 넣던 광고, 빼도록 하죠.”
홍구완 사장은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ONB가 문제가 아닌데요.”
“그럼 뭐가…….”
“조대찬이. 참, 내가 그런 애송이 이름을 들먹이는 것부터가 부끄럽군요. 그 녀석이 공사 친 거라면서요?”
“알지 못합니다.”
“이거 왜 이러실까. 알 만한 양반이.”
“자꾸 하대하시는 듯한 말투, 듣기 안 좋습니다. 사돈지간 예의는 갖추시죠.”
“허허, 사돈지간의 예의를 먼저 밥 말아 자신 분이 누구신데.”
“홍 사장님.”
홍구완 사장은 휘휘 손을 저었다.
“아, 쓸데없는 예의 타령은 관둡시다. 이조시대도 아니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조대찬 해고하세요.”
서청수 회장은 딱 잘라 말했다.
“그건 어렵겠습니다.”
“고작 직원 하나 때문에 우리랑 관계를 틀어버리시겠다?”
“직원의 임면은 제 고유권한입니다. 극동일보에 제 권한을 침해받을 생각, 추호도 없습니다.”
“기어코 우리가 실력행사에 들어가야겠어요?”
“말씀대로 고작 직원 하나 때문에 어리석은 선택을 하진 않으시겠죠.”
홍구완 사장의 관자놀이가 꿈틀했다.
“어리석은 선택……?”
“우리는 전략적 제휴 관계입니다. 극동일보가 필래를 손에 쥐고 흔드는 꼴은 내가 용인 못 합니다.”
“서 회장, 감이 많이 떨어지셨는데?”
“동병상련인가요.”
“…이런 막무가내인 줄 알았다면 사돈으로 삼지 않았을 텐데.”
“저도 귀하가 이 정도 몰염치한 줄 알았다면 사돈으로 안 삼았을 겁니다.”
난초를 매만지는 홍구완 사장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귀하라는 극존칭이 더없는 멸칭으로 들렸다.
난초 잎도 그에 따라 파르르 떨렸다.
그는 분노를 억누르며 서청수 회장에게 말했다.
“차를 내려놓긴 했는데, 대접하기 좋은 날은 아닌 것 같군요.”
“저도 별로 내키지 않던 참입니다. 다음에 드시죠.”
서청수 회장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홍구완 사장은 앉은 채로 그를 올려다봤다.
“다음이 있었으면 좋겠군요.”
“언제든지 불러주시죠, 아쉬우실 때.”
서청수 회장은 외투를 입고 홍구완 사장의 저택을 나섰다.
탁, 그가 미닫이문을 닫고 나가자 홍구완 사장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악력을 주체하지 못했다.
귀하게 길러온 난초 잎이 뭉개졌다.
서청수 회장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대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대찬.”
“회장님, 이번 일은…….”
“말하지 마. 듣고 싶지 않으니까.”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게 저와 회사를 위한 최선의 판단이었습니다.”
“네 판단 물어보지 않았어. 잠자코 내 말 들어.”
“…네.”
“조대찬, 나는 네게 베풀 수 있는 최대치의 사랑을 베풀었다. 이 정도가 고작이지만 최선이었다.”
대찬은 서청수 회장의 짧은 말을 곧바로 알아들었다.
대답할 말을 찾기 어려웠다.
서청수 회장은 말을 이었다.
“그냥 생색내고 싶었다. 끊는다.”
서청수 회장은 짧은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의 차가 홍구완 사장의 밀림을 등지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서청수 회장은 홍구완 사장의 반 요청, 반 협박을 뿌리쳤다.
그건 곧 서원웅과 홍승연의 허니문 기간이 끝났다는 것.
동시에 필래 서씨와 극동 홍씨의 허니문 기간이 끝났음을 의미했다.
홍승연은 검찰에 출석했다.
ONB 정도 되는 언론에서 단신도 아니고 심층취재로 터트렸으니, 검찰도 뭉개지 못했다.
아무리 극동일보 사주일가라도 보여주기 식이라도 검찰에 출두는 해야만 했다.
결국 홍승연은 포토라인에 섰다.
역시나 포토라인은 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ONB가 알아서 총대를 메 줬으니 열띤 취재 경쟁을 벌여도 극동일보의 눈총을 맞을 일은 없었다.
기자들이 어찌나 많이 모였는지 포토라인이 무너질 듯 말 듯 위태로웠다.
홍승연은 세단에서 내려 보무도 당당히 포토라인을 향해 걸어왔다.
보통 이런 일이 있으면 세간의 이목을 의식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고개를 푹 숙이고 앞머리를 커튼처럼 내려 얼굴을 가린다든지.
화장을 거의 안 하거나 옅게 한다든지.
수수한 차림의 복장을 한다든지 해서 어떻게든 자신의 입장을 가련하고 겸손하게 보이고자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홍승연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극동일보나 필래 비바체 사옥을 드나들었을 때와 마찬가지의 걸음으로 검찰청 앞에 섰다.
플래시가 번개처럼 마구 터졌다.
기자들은 터지는 플래시처럼 중구난방으로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아무리 악한 인간이라도 자기 새끼는 제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법.
구름 떼 같은 인파에 숨어서 홍승연을 취재하는 건 가능하다.
그런데 그녀를 향해 날 선 질문을 던지면 극동일보에 단단히 찍히고 말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기왕에 버린 몸인 최재한으로 하여금 대표로 질문을 하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