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11화
대찬은 사주 일가의 개입 없이는 이렇듯 일이 일사천리로 흐를 수 없으리라고 단정했다.
사주 일가가 꼭 홍승연만 있는 법은 아니지만, 그쪽이 가장 개연성 있는 추측이었다.
이미 대찬 때문에 거하게 물먹은 전력이 있으니 동기는 충분했다.
대찬은 속으로 민동철을 꼬리, 홍승연을 몸통으로 단정 지었다.
그렇기에 최재한의 앞에서도 민동철의 뒤에 숨은 몸통을 잡아야 한다고 얘기했다.
최재한은 전처럼 쉽게 자신만 믿으라며 호언장담하지 못했다.
같은 기자 나부랭이 신세야 아등바등하면 어떻게든 맞먹을 순 있다.
그런데 사주 일가는 다르다.
더군다나 극동일보 사주 일가라면 만용으로라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현직 기자인 최재한이 그 말뜻을 모를 리는 없었다.
대찬보다 더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대찬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못하겠으면 못하겠다고 해도 돼. 내가 너라도 선뜻 결정 못 했을 테니까.”
최재한은 오래 침묵했다.
그러다 그는 대찬을 문득 응시했다.
대찬은 그 시선을 가만히 받았다.
최재한은 픽 웃었다.
“내가 여기서 못한다고 해봐.”
“응?”
“너 겉으로는 쿨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꽁할 거잖아.”
“아니라니까?”
“내가 널 모르냐. 할게.”
“정말 아니라고. 그러니까 안 한다고 해도 뭐라 안…….”
최재한은 손을 들어 대찬의 말을 막았다.
“내가 모가지 걸고서라도 리포트 내보낼 테니까 기대해.”
“괜찮겠어?”
“내가 결정한 일이야. 더 말하지 마. 이 정도 깡다구도 없어서 어떻게 기자질 하냐.”
대찬은 멀뚱멀뚱 가만히 최재한을 바라봤다.
최재한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머뭇거리던 대찬은 화답하듯 역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최재한은 단단히 벼른 표정으로 대찬과 헤어졌다.
‘극동일보 기자, 해외에서 구속당한 사연은’
-아버지 소유 포도농장 망치려는 아들의 계획에 동조하다가 ‘덜미’
-사법당국 완고해 중형 면치 못할 듯
최재한은 약속을 지켰다.
먼저 올라온 인터넷 기사는 신호탄이었다.
뒤이어 최재한은 기어코 텔레비전 뉴스의 한 토막을 얻어내는 데도 성공했다.
대찬의 도발에 어지간히도 절치부심한 모양.
“이 사건을 두고 네티즌들은 국가 망신이다, 마땅히 엄벌에 처해야 한다며 해당 기자를 지탄했습니다. 또한, 이 사건에 극동일보 계열사인 극동호텔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에 극동일보 역시 비난의 화살을 피하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ONB 뉴스, 최재한입니다.”
뉴스를 보던 서원웅은 넋 빠진 얼굴로 화면을 응시했다.
이미 최재한의 모습은 화면에서 사라지고, 앵커는 다음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화면을 가만히 응시하던 서원웅은 대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찬은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받았다.
“우리 대표님이 전화를 다 주셨네요.”
“저거 뉴스 뭐야.”
“무슨 뉴스.”
“최재한이 방금 보도한 거. 너랑 관련 있지.”
“응, 트러블이 좀 있었거든.”
서원웅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트러블이라니.”
“민동철이라고 알아? 스포츠극동에 있는.”
“…왜 모르겠어. 너한테 깝죽거렸다가 된통 당한 놈이잖아.”
“뉴스에 나온 극동일보 기자가 그 인간이야.”
서원웅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뭐? 그게 진짜야?”
“응, 무슨 꿍꿍이인지 조지아까지 따라와서 귀찮게 굴더라.”
“허, 무슨 억하심정으로.”
“억하심정이 없을 수는 없지.”
“그래도 기어코 거기까지 따라가서……?”
대찬은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귀찮게 구는 정도가 아니라 나라 망신 혼자 다 시키고 다니더라니까.”
“…뉴스 보니까 나라 망신 수준 맞던데.”
“자꾸 엄한 짓거리를 하길래 잠복근무까지 해가면서 붙잡았어.”
서원웅은 입안에 감도는 쓴맛이 내내 불편했다.
“휴가까지 가서 그런 봉변을 겪다니.”
“기분 잡쳤지, 뭐. 다시 기분 전환하고 오게 정직 한 달 더 때려줄래?”
서원웅은 싱겁게 웃었다.
“농담은.”
“내 기분이야 기분인데. 우리 서 대표님이 아셔야 할 게 하나 있거든요.”
“뭔데?”
“아무래도 민동철 개인플레이는 아닌 거 같거든.”
서원웅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럼?”
“극동일보 내부의 유력가가 손을 써주지 않고서야 그렇게 속전속결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일이 안 되거든. 너도 회사 경영해봤으니 알 거 아니야.”
“…그럼 극동일보 내부의 유력가라는 게.”
“극동이 뭐 냉철하고 합리적인 경영진에 의해서 철두철미하게 절차 지켜가면서 해먹는 회사가 아니잖아.”
“…….”
“결국 홍씨, 네 처가가 떡 주무르듯이 주무르는 회산데.”
서원웅은 한숨에 목소리를 섞었다.
“지금 내 와이프가 거기 끼어있단 소리야?”
“물증은 없지만 백 프로라고 봐야지.”
몸을 일으켜 세웠던 서원웅은 다시 소파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대찬이라고 서원웅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중간에 끼어서 답답할 거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럼 듣기만 해. 나는 이거 끝까지 팔 거야, 몸통이 보일 때까지.”
“…….”
“내가 안 파도 이미 최재한이 발 담갔어. 시작한 이상 돌이킬 수 없어.”
“대찬아.”
“미안해. 널 생각하면 그러지 말아야 하는 건데, 안 그럴 수가 없다.”
서원웅은 입이 바싹 말랐다.
이건 법인카드를 무단으로 전용했다고 아웅다웅하던 것과는 스케일이 달랐다.
홍승연이 언론에 오르내리면 대찬과 홍승연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서원웅 본인도 직간접적인 피해를 감수해야만 한다.
서원웅의 솔직한 심정으로는 대찬에게 침묵을 권하고 싶었다.
“대찬아, 극동일보를 적으로 돌리는 순간 네 일거수일투족이 도마 위에 오를 거야. 알잖아, 극동이 어떤 집단인지.”
“잘 알지. 비열함과 교묘함으로 광복 이후 이 나라를 주물럭거린 회사. 낮의 청와대도 쌈 싸 먹는 밤의 청와대.”
“그걸 아는 사람이…….”
대찬은 서원웅의 말을 싹둑 잘랐다.
“그걸 아는 사람이니까 이러는 거야.”
“뭐?”
“극동은 셰퍼드야. 한번 물면 안 놔. 난 벌써 소매 물렸어. 대충 흔들어서는 저 셰퍼드, 절대 못 떼어놔.”
서원웅의 미간에 단단히 주름이 잡혔다.
“그래서 아예 세게 흔들겠다고? 그러다 팔 떨어져.”
“팔이 떨어지든 개가 떨어지든 둘 중 하나겠지. 대충 얼버무리면 언젠간 야금야금 잡아먹히고 말 거야.”
“그래도 어떻게든 관계가 개선될 수 있잖아. 처음부터 너랑 와이프랑 사이 이랬던 건 아니잖아?”
대찬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대답했다.
“구조적인 문제야.”
“구조적인 문제라니.”
“승연 씨는 필래 비바체, 나아가 필래그룹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해. 극동 홍씨가 단순히 네 훤한 신수만 보고 널 선택한 게 아니야. 알잖아.”
“…알고 있어.”
“거기에 누군가는 브레이크를 걸어야 돼. 견제해야 돼.”
“네가 그 적임이라는 거야?”
“그렇게 됐지. 이건 단순한 애사심 때문이 아니야. 굴러온 돌은 필연적으로 박힌 돌을 빼내야 해.”
“네가 박힌 돌이고.”
대찬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어. 까놓고 말해서 내가 2인자니까. 나를 밀어내지 않으면 홍씨의 영향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
서원웅도 이 사태 해결의 실마리는 딱 하나뿐이란 걸 알았다.
대찬이 고개를 숙이고 홍씨의 의중대로 움직이는 것.
하지만 서원웅의 심리는 이중적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태가 해결됐으면 하면서도, 대찬이 지렛대 역할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했다.
서원웅은 자신의 모순된 마음이 저주스러웠다.
대찬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 야심을 위해서라도 여기서 고개를 치켜들어야 해.”
“야심.”
“왜, 너도 있는 거 나한테 없는 줄 알았어?”
서원웅은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대찬의 입에서 야심이라는 솔직한 낱말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나도 일개 부장으로, 혹은 일개 이사나 상무로 퉁 칠 생각 없어. 나, 여기서 못 물러나.”
“…그래도 이렇게 선전포고하는 건 너무 위험해.”
“선전포고는 저쪽에서 먼저 했어. 나는 휘말린 거라고.”
서원웅은 지끈지끈 오르는 두통에 이마를 매만졌다.
“내 입장이 참 곤란하다. 솔직히 말리고 싶은 심정이야. 근데 귀책사유는 와이프한테 있고.”
“그냥 중립기어 넣고 이 판에서 빠져. 홍승연 씨가 닦달하면 나도 어쩔 수 없다고 둘러대고.”
“알았어. 대신 너무 막나가지는 마.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가면 우리 전부 힘들어져.”
“알았어.”
대찬과 통화를 마친 서원웅은 부엌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생전 찾지도 않던 술을 글라스 가득 담고 서재로 들어갔다.
이런 청승이라도 떨지 않으면 안 되었다.
‘원웅이한테는 당당하게 말하긴 했지만…….’
이 결정이 잘한 결정일까.
대찬은 여전히 확신이 없었다.
극동일보의 펜촉에 죽어 나간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어깨에 힘주던 금배지도 속절없이 갈려 나가는 마당이다.
대찬이 아무리 위세 좋다 하더라도 그건 필래그룹 내에서나 그랬다.
극동일보의 앞에서는 날파리에 지나지 않는다.
대찬은 극동일보가 두려웠다.
역설적으로 두렵기 때문에 일을 크게 벌였다.
대찬은 이미 홍승연의 눈 밖에 났다.
이 일을 어쭙잖게 어영부영 처리하면 도리어 극동일보가 대찬을 요리하기 쉽다.
다른 건수를 엮어 튕겨내려 할 것이다.
극동일보가 그늘 아래서 맘 놓고 대찬을 요리하기 전에, 차라리 남들의 눈에 잘 보이는 양지로 나와 떳떳하게 맞서는 쪽을 대찬은 택했다.
서원웅이 술을 마시는 그 순간.
대찬도 혼자서 술을 마셨다.
그는 꿀꺽꿀꺽 술을 마시면서 골몰했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어.’
대찬은 주먹을 꼭 쥐었다.
그 시각.
ONB 보도본부장은 최재한을 불러 독대했다.
“야, 너 꼭 이거 해야겠냐? 이미 민동철이 뉴스 내보내 줬잖아. 꼭 극동 사주 일가 코털까지 건드려야 직성이 풀리겠냐고.”
“…….”
“왜 말이 없어. 꼭 해야겠냐?”
“네, 할 겁니다.”
보도본부장은 쓰읍, 입맛을 다셨다.
“왜 하면 안 되는지 내가 말 안 해도 넌 충분히 알 거다.”
“압니다.”
“그럼 말해봐라. 왜 해야 되는지.”
“도의적으로 비판할 건 해야죠. 사주 일가는 어쨌든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으니 치명상은 안 입어요.”
보도본부장은 허리에 손을 얹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차라리 치명상이면 낫지. 별 건수도 안 되는 거에 목숨 걸어야겠냐고.”
“책임은 제가 다 지겠습니다.”
보도본부장은 언성을 높였다.
“야! 네가 무슨 주제로 책임을 다 지겠대. 뉴스 편성은 내 권한이야. 네가 대신 짊어질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그럼 본부장님도 저랑 스크럼 짜시든지요.”
보도본부장은 기가 막힌 듯 허공에 웃음을 토했다.
“아이고, 이거 또라이인 거 진작 알아보긴 했는데 이 정도인지는 몰랐네.”
“편성 안 해주시면 제 개인 블로그에라도 올리겠습니다.”
“너 대체 왜 그러냐? 이유가 뭐야?”
“기자 될 때부터 결심한 일이에요. 취재에 성역을 두지 말 것.”
최재한이 강짜를 부리는 건 비단 대찬과의 약속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숭례문의 화마에 휩쓸려 생을 저버렸을 때.
그때 기자들의 흉한 웃음과 비정한 질문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느 날 친한 선배에게 그 기억을 털어놓으니 선배는 대답했다.
‘기자는 원래 그래야 되는 거야. 비정한 숙명을 타고난 직업이야. 비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취재를 하니?’
그래, 비정해야 한다면 누구에게나 비정하자.
누구한테는 비정하고 누구한테는 너그럽다면 그건 비정을 넘어 비열이다.
극동일보에 굽히면 다음에는 금배지들에 굽혀야 한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검사 나으리에게, 재벌 회장님들에게, 청기와집에 굽혀야 한다.
그럼 돈 없고 백 없는 사람들에게만 비정해질 수밖에 없다.
최재한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던 이들과 동격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최재한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럴 수는 없었다.
다만 이런 최재한의 신념이 보도본부장에게는 투정일 뿐이었다.
아직도 젊은 혈기를 못 버린 못난 후배의 투정.
“인마, 누구는 왕년에 낭만 한번 안 품어본 줄 알아? 그거 순 헛거야.”
“저한테는 극동 눈치 보느라 안절부절못하는 게 더 헛거 같습니다.”
보도본부장은 말없이 이마에 턱 손바닥만 얹은 채로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