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10화
“이거 괜한 말을.”
“아닙니다. 마음이 쓰이실 수밖에요.”
“하… 애써 잊으려고 해도 잊어지지가 않아. 핏줄은 질긴 거요.”
“천륜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저버리겠습니까.”
그리골은 찢던 빵을 도로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래도 용서할 수는 없어요. 그 애는 그러면 안 됐어.”
“아드님을 아끼신다면 이번에는 단호하셔야 합니다. 제3자가 주제넘게 권할 말씀은 아닙니다만.”
“아니요. 어떻게 조가 제3자겠소. 이해당사자이면서 피해자이면서 해결사이기도 하지.”
“간밤의 일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습니다.”
그리골은 입술을 꾹 다물며 고통을 삼키고 말했다.
“이건 우리 가족의 일이니 조까지 마음이 무거울 필요는 없소.”
“그래도 사람 마음이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마음은 고맙지만 안 그러셔도 돼요. 조는 아무래도 이라클리보다는 그 녀석과 한 패였던 한국인에 더 관심이 있을 텐데.”
“그건 그렇습니다. 여기 오기 전부터 악연으로 얽힌 사람이라.”
“그 사람에 대해서는 확실한 처벌을 당부해두겠소. 샬바, 그렇게 했지?”
그리골의 말에 샬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십시오. 일말의 타협도 없을 것이라고 못을 박아놨습니다.”
그리골은 대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와인 말이오. 한국으로 들여가셔야지요.”
“이런 와중에 거래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음 기회로 미루셔도 괜찮습니다.”
그리골은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순 없지. 보답은 못할망정 차려진 상마저 걷어찰 순 없어요.”
“…….”
“조가 아니었으면 깡그리 헐값에 털렸을 와인이요. 따지고 들면 저 창고에 가득한 와인은 조 덕분에 그대로 창고에 남을 수 있는 거고. 그러니 절반의 소유권은 조한테 있는 셈이지.”
대찬은 손사래를 쳤다.
“들인 노력이 차원이 다릅니다. 저는 고작 하룻밤. 그리골은 평생을 바친걸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절반은 조의 몫이니 나는 내가 가진 절반의 소유권만 그쪽에 팔지요.”
“하, 이거 참…….”
“솔직히 말하자면, 이걸 마다하면 비즈니스맨도 아니요. 그 전에 남자도 아니지!”
샬바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아버지의 말에 힘을 실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대찬도 더 착한 척 점잖게 사양만 할 수는 없게 되었다.
실은 속으로 군침이 질질 흐르기도 했고.
그리골은 대찬에게 말했다.
“하지만 헐값에 들여갔다고 헐값에 팔아치우면 안 됩니다. 나는 내 손으로 만든 우리나라 와인이 한국에서 싸구려 취급받는 건 절대 원치 않으니까.”
“물론입니다. 제 이익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싸게 내놔봤자 싼 데는 싼 이유가 있다는 소리만 듣거든요.”
“나는 이 일을 계속할 겁니다. 내 몸이 쇠해도 샬바가 내 뒤를 이을 겁니다, 맞지?”
샬바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골은 흡족하게 웃었다.
“그러니 조도 망하지 말고 꾸준히 잘해나가시오. 이 인연이 오래갔으면 좋겠소.”
“바라는 바입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골은 식탁 위에 와인 한 병을 올려놓았다.
“이건 내가 만든 와인 중에 가장 비싼 놈이오. 선물로 들여가세요.”
“아닙니다, 이 귀한걸. 구입하겠습니다.”
그리골은 이때만큼은 스탈린의 표정을 지었다.
“성의를 무시하면 재미없지.”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대찬은 멋쩍게 웃으며 그리골로부터 와인을 넘겨받았다.
샬바는 이 농장에서 가장 비싼 와인이 한화로 이천만 원 가량 된다고 했다.
‘이거 살 떨려서 위탁수화물로도 못 싣겠네. 꼼짝없이 안고 타야지.’
대찬은 귀한 물건을 귀하게 다뤘다.
조지아 사법당국은 민동철과 이라클리를 잡아갔다.
그리골은 변호사를 선임해 그들을 법정에 세울 작정이었다.
무슨 무슨 죄가 선고될 거 같고, 이런저런 절차를 거칠 것이라고 그리골의 변호사는 대찬에게도 일러주었다.
그렇잖아도 어려운 법률용어를 영어로, 그것도 한국과는 조금 다른 조지아의 체계로 설명해주니 머리가 아팠다.
대찬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 그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아무튼 잡힌 그놈들, 큰일 났다는 소리지요?”
“아, 예……. 요약하자면 그런 거지요.”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됐습니다. 저한테 더 설명하실 거 없어요. 대신 재판 절차만 서면으로 공유해주시겠습니까?”
“구두로도 별로 안 듣고 싶어 하시면서, 서면으로는 왜요?”
변호사는 내심 이러쿵저러쿵 자신의 법리적 전문지식을 멀리서 온 한국인에게 뽐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대찬이 귀찮음이 잔뜩 묻어나오는 얼굴로 사양하니 꽁해있던 차.
변호사의 목소리는 살짝 토라져 있었다.
대찬은 이 조지아 아저씨가 귀여워서 미소를 지었다.
“필요해서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혹시 저한테 바로 넘겨주시기 어려우시면 그리골을 통해서 받죠.”
“됐습니다. 이메일 알려주시면 그쪽으로 시시각각 보고해드리겠습니다.”
대찬은 눈을 찡긋했다.
“고맙습니다.”
대찬은 텔라비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고 트빌리시로 복귀했다.
그리골은 대찬과의 이별에 섭섭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며칠 같이 있었더니 너무 정이 들어버렸네.”
“올해 안에 또 뵈러 오겠습니다.”
“빈말이면 곤란해요. 나는 그렇게 믿고 있을 테니까.”
“빈말 아닙니다. 업무 때문에라도 와야 하거든요.”
대찬은 그리골과 작별의 악수를 나눴다.
그리고는 샬바에게도 손을 건넸다.
“샬바, 또 뵙죠.”
“그럽시다.”
샬바는 성격답게 짧게 인사를 건넸다.
대찬은 정말로 텔라비를 떠났다.
그는 텔라비를 떠나 수도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잠깐 뒤를 돌아봤다.
좋은 사람과 얽히고 나쁜 사람과 얽혔다.
찬물과 뜨거운 물이 섞여 미지근한 물이 되는 것처럼, 좋은 사람 보고 나쁜 사람 봤으니 이도 저도 아닌 마음이면 좋으련만.
찬물과 뜨거운 기름이 만난 듯 섞이지 않고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
대찬은 고이 가방 안에 모셔놓은 그리골의 와인을 보고 마음을 달랬다.
“그래도 좋은 것만 생각해야지.”
대찬이 탄 택시는 수도, 트빌리시로 향했다.
윤이영과 대찬은 트빌리시에서 재회했다.
윤이영은 대찬을 보자마자 그의 품에 안겼다.
“수고 많았어.”
“이영이 너도 마음 졸이느라 수고 많았다.”
“내가 뭘.”
“정신노동도 그거 보통 힘든 게 아니에요. 촬영은 잘했어?”
윤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누군데. 깔끔하게 잘 끝냈지. 사장님도 어제 비행기로 돌아갔어.”
“그 말인즉슨.”
“이제부터 휴가라는 거지. 우리 둘 다 할 일은 다 한 거야. 노는 것만 남았어.”
“방방 뛰면서 환호성 지르고 싶은데 그럴 힘이 안 나네.”
“마음은 편해졌지?”
“응.”
“그거면 됐어.”
“그래 오늘부터 맘 편하게 놀다 들어가자.”
대찬은 윤이영의 허리를 붙들고 웃었다.
윤이영도 고단한 일정 끝에 찾아온 달콤한 휴식이 반가워 배시시 웃었다.
대찬은 품 안에서 와인 한 병을 꺼냈다.
“이게 뭐게?”
“뭐야, 이게?”
“그리골의 와이너리에서 가장 비싼 와인. 2천만 원짜리.”
“그걸 들고 다녀, 왜. 그러다 깨지면 어쩌려구.”
“걱정 마. 깨질 일 없으니까.”
윤이영은 미간을 좁혔다.
“그게 무슨 말이야?”
“오늘 이거 해치워버릴 거거든.”
“…마시겠다고?”
“응.”
대찬은 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윤이영은 황당했다.
“2천만 원짜리를 손 떨려서 어떻게 마셔, 하루아침에?”
“아침 아닌데, 밤인데.”
“재미없으니까 집어치우고.”
대찬의 눈썹이 시무룩하게 밑으로 처졌다.
“윤이영, 실망이다. 이거 같이 마시자고 하면 칭찬해줄 줄 알고 잔뜩 기대했는데.”
“아니, 마음은 알겠는데…….”
“자꾸 그렇게 나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뭐 어쩌려구?”
대찬은 윤이영의 반응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알아주는 배우가 됐으면 어쩌다 한 번은 아무렇지 않게 이런 사치도 부릴 줄 알아야 하지 않는가.
게다가 생돈 들여 사온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선물이다.
그럼에도 씀씀이에 짠 내가 풀풀 풍기는 윤이영이 덜컥 잘 마시겠노라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찬은 확신했다.
그래서 그의 수트 안주머니에는 와인 오프너가 있었다.
대찬은 윤이영이 멀뚱거리는 틈을 타 재빨리 와인을 개봉했다.
윤이영이 사태를 파악했을 땐, 이미 저질러진 뒤였다.
“길 한복판에서 이걸 따면 어떡해!”
“그래야 윤이영이 자포자기하고 2천만 원짜리 와인을 제대로 즐기지.”
“못 살아, 내가 진짜.”
대찬은 흐흐 웃었다.
“빨리 호텔로 들어가자. 김빠질라.”
대찬은 윤이영을 이끌고 호텔로 돌아갔다.
“자, 건배.”
“건배.”
대찬과 윤이영은 간단히 안주를 차려놓고 잔을 부딪쳤다.
그렇게 둘은 남은 시간을 오로지 사랑과 휴식에만 전념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대찬은 마음 같아서는 남은 정직 기간을 모두 이 나라에 쏟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마냥 여유로울 수만은 없었다.
‘그 거지같은 놈 때문에…….’
민동철의 일이 남아있었다.
그의 일에서 아예 손을 털어버릴 심산이었다면 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근데 내가 성격이 워낙 개판이라.’
대찬은 민동철의 처분을 조지아 사법당국에만 맡겨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대찬은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최재한을 만났다.
“뭐야, 오랜만에 휴식 얻었는데 좀 더 쉬다 오지.”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웬 미친놈이 꼬여갖고 말이다. 너한테는 희소식이야.”
냄새를 맡은 최재한이 대찬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뭐야, 뭔데?”
“자식이 듣기도 전부터 헤벌레 입 벌어지는 것 봐라.”
“미안, 너무 표정이 솔직했네.”
대찬은 피식 웃고 자료를 내밀었다.
가장 위에 있는 건 사진 한 장이었다.
“이게 뭐야? 이 사람은 뭔데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어?”
“스포츠극동 기자 민동철.”
“무슨 사연인데? 아니, 이런 사진을 네가 왜 갖고 있어?”
“말로 하면 길고, 이 자료에 다 들어있으니까 천천히 읽어봐. 근데 좀 걱정되긴 하네.”
대찬이 건넨 자료를 찬찬히 살피던 최재한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가?”
“이거 기삿거리는 충분히 되거든. 근데 언론은 희한한 동업자 의식이 있더라.”
“도, 동업자 의식이라니?”
“남의 흠결은 뼛조각까지 갈아 마시면서 언론인 사건은 일치단결해서 묻어버리더라구.”
그 말에 최재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내, 내가 그런 인간들하고 똑같은 줄 알아?”
“당연히 넌 믿지. 근데 데스크에서 자르면 너도 짤이잖아.”
최재한은 발끈했다.
“야, 너처럼 부장급은 아니어도 나도 윗선에 고개 한번 치켜들 짬밥은 되거든?”
“그러시겠지. 그래도 편집국장이 어흥 하면 별 수 있나.”
대찬의 도발에 최재한은 탁자를 탕 쳤다.
“야! 두고 봐! 이거 내가 바로 기사로 내보낼 테니까.”
“기대할게.”
대찬은 흐흐 웃었다.
“내가 기레기 소리 안 듣겠다고 침이 마르도록 떠들고 다녔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한테 그러겠냐고.”
“아무렴, 아니지. 근데 괜히 네 성질이나 긁자고 하는 말 아니야.”
“뭐?”
“이거, 한번 물면 민동철 선에서 안 끝나.”
최재한은 대찬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그의 관자놀이가 꿈틀했다.
“…민동철은 꼬리라는 거지.”
“응, 그 위를 타고 가면 극동일보 사주 일가가 있을 거야.”
“으음…….”
대찬은 그리골의 변호사로부터 지속적으로 상황을 전달받았다.
민동철이 극동호텔과 연계하려던 정황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일개 기자인 민동철이 그런 거액의 계약을 체결하려고 했다.
극동호텔과의 연계 없이는 불가능한 일.
발뺌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민동철은 끝끝내 극동일보 사주 일가, 더 정확히 말하면 홍승연과의 연계에 대해서는 완강히 부정했다.
딱히 홍승연을 향한 충성심이 깊은 까닭은 아니었다.
민동철이 홍승연을 이 판에 끌어들이는 순간, 민동철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환심을 사보려고 저지른 일이 도리어 귀한 댁 둘째 따님을 사지로 몰아버리게 된다면.
극동일보의 사주인 홍구완 사장의 처분이야 불 보듯 뻔했다.
그 탓에 민동철의 입으로 홍승연의 개입 사실이 밝혀지지는 않았다.
다만 심증이야 차고 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