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09화
그때 그리골이 저 멀리서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샬바의 표독스럽던 얼굴이 아버지를 보고 스르르 풀렸다.
“아버지.”
그리골은 샬바를 흘끗 보고, 대찬을 흘끗 바라봤다.
“이, 이라클리는 어디에 있냐?”
“아버지는 일단 들어가 계세요.”
샬바는 점잖게 아버지를 다독였다.
그러나 그리골은 지금껏 대찬이 본 적 없는 엄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 있냐고 물었다!”
“…창고에요.”
“못난 놈! 네가 그러고도 형이냐!”
“…….”
샬바는 아버지의 질책에 한 마디도 항변하지 못했다.
그리골은 왔던 걸음 그대로 뒤뚱거리며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찬과 샬바도 천천히 그의 뒤를 따랐다.
창고 안에는 와인이 잔뜩 들어있는 오크통들이 무수히 쌓여 있었다.
오크통들은 민동철과 이라클리를 감시하듯 그들의 주변을 물 샐 틈 없이 지키고 있었다.
그리골은 민동철과 이라클리를 씁쓸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이라클리는 아버지의 시선을 애써 회피했다.
그리골은 쉽게 말을 하지 못하고 깊은 한숨만 거푸 내쉬었다.
그의 뒤에 선 대찬과 샬바 역시 착잡한 표정만 지었다.
그리골이 참담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자, 따가운 눈빛을 견디지 못한 이라클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 아버지… 뭔가 오해가 있습니다.”
“…….”
“이게 다 우리 가족을 위해서 그런 거였다고요.”
“가족을 위해서?”
“여기 리조트 부지로 넘기면 돈이 얼만 줄 아세요? 이제 아버지도 일 그만하시고 편안하게 노후 즐기셔야죠.”
“…….”
“말씀 먼저 드렸으면 절대 허락 안 하셨을 거잖아요, 네? 그건 죄송해요. 죄송한데, 다 아버지 생각해서 그런 거라고요.”
“…….”
이라클리는 아버지의 침묵을 자신의 말이 먹혀 들어간다는 증거로 여기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버지, 저한테 이러시면 안 돼요. 인생 패배자 형하고 어디서 굴러 들어왔는지도 모르는 한국 놈 말만 듣고 이러면 안 되는 거예요!”
“…….”
“아버지!”
그리골은 이라클리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없었다.
영혼이 없어졌다는 말이 꼭 맞을 정도로, 그리골의 이목구비에는 기쁨도 슬픔도 노여움도 분노도 없었다.
이라클리는 더욱 열을 올렸다.
“아버지! 당장 저 한국 놈 쫓아내세요! 우리 가족에 분란을 일으키려고 작정한 놈이에요!”
그 말에 그리골의 시선이 잠깐 대찬에게로 향했다.
대찬은 아무 말 없이 쓸쓸한 눈빛으로 그리골을 바라봤다.
그리골의 시선은 잠깐 대찬을 응시하고 다시 허공에서 초점을 잃었다.
여전히 얼굴에는 감정이 없는 채로, 그의 입술만 천천히 움직였다.
“가족을 위해서 그랬다고.”
“네, 그렇다니까요, 아버지.”
그리골은 이라클리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이라클리, 다른 변명은 무엇이든 좋았다. 욕심이었다고 솔직히 털어놔도 좋았다. 아니면 주변의 꾐에 넘어갔다고 책임을 전가해도 좋았다. 무엇이든 좋았다. 근데 그 말만큼은 하지 말았어야지.”
“아버지, 변명이 아니고요.”
그리골은 눈을 꼭 감았다.
“가족을 위해서라고?”
“…네.”
“이라클리, 너는 우리가 그렇게 바보 같니?”
“아버지…….”
“이라클리, 가족을 위한다는 걸 네가 아니.”
“…….”
“너희 형제가 어렸을 땐 우리 형편이 좋지 못했다. 공부를 시키고 대학을 보낼 수 있는 건 너희 형제 중에 하나뿐이었어.”
그리골의 시선이 샬바에게 향했다.
“그때 네 형 샬바는 이라클리 네가 자기보다 훨씬 낫다며 공부를 포기했다. 네가 인간 취급도 안 하는 네 형은 널 위했다. 널 공부시키려고 여름에는 농장에서 땀을 흘리고 겨울에는 산에서 사냥을 했다.”
“…….”
“네 어머니는 가난한 남편 만나서 평생을 고생하다가 폐병을 얻어 죽었다. 죽으면서도 원망 한 마디 없이, 너희만 잘 길러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네 어머니는 저 농장에 묻혀 있다. 기억하니?”
“…기억해요.”
“그럼 농장을 뒤집어엎으면 썩다 남은 네 어머니 유골이 불도저에 깔려 가루로 날릴 것도 알겠구나.”
“…….”
“나도 네 형과 어머니만큼은 못해도 어떻게든 가족을 건사하려고 열심히 살았다.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이라클리는 헛기침을 하며 애먼 곳을 바라봤다.
그리골은 차분함만 남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네 형과 네 어머니는 가족을 위해 살았다. 그리고 이 농장이 가족을 위해 살아온 우리 일생의 증거다.”
“…….”
“나는 네가 와줘서 고마웠다. 5년 동안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잊지 않고 와줘서 고마웠다. 그래도 네게 가족을 위하는 마음이 조금은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골은 근심 덩어리라도 내뱉는 듯, 깊은 한숨을 쉬고 이라클리에게 말했다.
“너와는 더 얘기하고 싶지가 않구나, 이라클리.”
그리골은 이라클리를 등졌다.
이라클리는 아버지의 냉소적인 태도에 적잖이 당황했다.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항상 푸근하게 안아주던 사람이었다.
더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말은, 연을 끊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이라클리는 당혹한 얼굴로 그리골의 발목을 붙들었다.
“아, 아버지! 내가 잘못했어요. 네? 내가 잘못했다니까요.”
“…….”
“내가 잘못했다잖아요! 진짜 실수 한번 한 거 갖고 왜 이래요, 아버지답지 않게!”
이라클리의 외침에 샬바는 더 참지 못했다.
그의 이마에 핏줄이 곤두섰다.
그는 이라클리의 멱살을 붙들고 주먹을 꽂으려 했다.
이라클리는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골이 샬바의 손을 턱 잡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안 때려도 된다.”
“…….”
“가자.”
그리골은 무표정한 얼굴로 걸음을 떼다가 대찬을 보며 말했다.
“우리, 할 얘기는 조금 나중에 합시다. 그럴 기분이 아니라.”
“네, 이해합니다.”
그리골은 착잡한 얼굴로 대찬의 손을 살짝 잡았다.
“고맙소. 저놈들 처분은 내 경찰한테 일러서 단단히 해놓을 테니 걱정은 마시고.”
“마음이 복잡하실 텐데 제가 샬바와 얘기해서 잘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골은 푸근하게 웃으며 대찬의 등을 두드렸다.
“그래주면 고맙고. 늦지 않게 집으로 들어와 주무시오. 당신도 피곤할 텐데.”
“알겠습니다.”
그리골은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갔다.
대찬은 초라한 꼬락서니의 이라클리와 민동철을 가만히 응시했다.
평소 같았으면 잔뜩 이죽거려줬을 테지만 그럴 기분도 안 들었다.
대찬은 샬바를 바라봤다.
“이 이상 손을 쓰면 우리도 떳떳하지 않죠.”
“…무슨 말인지 알아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는 공권력으로 해결하죠. 고생 많으셨습니다, 샬바.”
“…고맙소.”
급한 불은 꺼졌다.
그제야 잠시 마취되었던 피로가 일거에 몰려왔다.
대찬은 눈꺼풀에 추를 매단 듯 격한 피로에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와인 창고 밖으로 나오니 선선한 밤공기가 대찬의 얼굴을 감쌌다.
그 공기에 대찬은 정신을 잠시 각성시켰다.
그는 윤이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은 채 조마조마한 마음일 것이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며, 애써 마음을 달래보지만 상상력은 긍정보다 부정의 쪽으로 왕성할 것이었다.
대찬이 신호음이 한 번 채 끝나기도 전에 윤이영이 전화를 받았다.
“어떻게 됐어?”
“걱정 안 해도 돼. 다 잘 끝났어.”
“아휴, 다행이다.”
윤이영의 아휴에는 진정성 어린 안도감이 담겨 있었다.
“여기 상황만 대충 정리되면 바로 카즈베기로 갈게.”
“아냐, 텔라비에서 카즈베기까지 한세월이야. 그럴 거 없어. 나 금방 수도로 돌아가니까 수도에서 봐.”
“고마워. 나 때문에 여태 제대로 쉬지도 못했지.”
“아는구나.”
대찬은 겸연쩍게 웃었다.
“알지, 그럼.”
“알면 이제 그만 좀 사건사고에 얽혔으면 좋겠다. 코난도 아니고…….”
대찬은 깜깜한 밤하늘을 응시하며 한숨을 뿜었다.
“이게 내 팔잔가 보다.”
“그런 남자랑 얽힌 내 팔자도 인정해야지 어쩌겠어.”
“그게 맘 편하지.”
윤이영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 푹 쉬어.”
“알았어. 푹 쉬어.”
지칠 대로 지친 둘은 사랑의 미사여구를 조잘거릴 여유도 없이, 푹 쉬라는 말로 밤 인사를 대신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사이 샬바가 부른 경찰들이 와인창고 앞에 도착했다.
민동철이 동원한 인부들과 샬바가 부른 경찰들로, 시골 와인 창고 앞은 때 아닌 북새통을 이뤘다.
샬바는 대찬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내가 마무리할게요. 들어가 쉬어요.”
“그래도 될까요?”
샬바는 옅은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가족 일이잖아요. 제 손으로 끝을 봐야죠.”
대찬은 말없이 웃으며 고개만 끄덕이고, 집 안으로 힘없이 걸어갔다.
밤은 이제 완연한 새벽으로 넘어가있었다.
대찬은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그대로 베개에 코를 박고 엎드린 채로 죽은 듯 잠에 빠졌다.
날이 밝았다.
대찬은 똑똑, 노크 소리에 잠에서 깼다.
대찬이 부스스 일어나자 그리골은 웃으면서 말했다.
“더 주무실 겁니까?”
“아, 아닙니다. 충분히 잤습니다.”
“나와서 아침 식사하시죠.”
대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번 비비고 그리골에게 말했다.
“일찍 일어나서 좀 거들어드렸어야 했는데요.”
“아, 그 정도로 정성스러운 아침상은 아니오. 남자 둘이 살다 보니 정갈한 아침 식사는 아예 없다시피 하지.”
“저도 혼자 지내봐서 압니다. 아침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죠.”
“아침 식사를 거르면 농사지을 힘이 안 나거든. 자, 얼른 나오세요. 볼품은 없어도 맛은 좋거든.”
대찬은 그리골, 샬바와 둘러앉았다.
스탈린과 문신 스킨헤드와, 꾀죄죄한 동양 남자.
윤이영이라도 있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남자 셋이서 칙칙하기는 했다.
그리골의 말대로 밥상은 투박하지만 과연 맛이 좋았다.
샬바가 잡은 멧돼지로 만든 수제 햄과 베이컨.
흰자위가 군데군데 보이는 스크램블 에그.
인도의 난과 비슷한 밀가루 빵 라바쉬.
그리고 커피.
대찬은 커피를 먼저 음미하고는 그리골에게 말했다.
“조지아가 커피가 유명하다더니, 과연 향기가 좋네요.”
그 말에 그리골은 눈을 크게 떴다.
“응?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커피로 유명했나.”
“아, 아닌가요? 한국에는 제품으로 나온 것도 있는데요. 조지아 커피…….”
대찬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하자 샬바가 피식 웃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캥거루 찾는 소리 하시기는.”
“…네?”
“조지아 커피의 조지아는 미국 조지아 주입니다.”
“아.”
대찬의 뺨에 홍조가 올랐다.
샬바는 칼로 멧돼지 생햄을 썰면서 말했다.
“그렇다고 조지아 주가 커피로 유명한 것도 아닙니다.”
“그, 그럼 왜 이름을 왜 그렇게 지었을까요?”
샬바는 햄을 질겅질겅 씹으며 대답했다.
“코카콜라 본사가 거기 있어서요. 조지아 커피, 코카콜라에서 만든 거거든요.”
“그렇군요. 몰랐습니다…….”
이런 쪽으로 망신을 줬으면 줬지 당할 일은 잘 없던 대찬이었다.
샬바는 딱히 조롱하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괜히 스스로 부끄러워 대찬의 얼굴이 한참 붉었다.
그리골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샬바, 너는 어떻게 그리 잘 아니?”
“가끔 농장에 놀러 오는 외국인이 커피타령을 좀 해댔어야죠.”
“그러냐. 조, 그래도 오늘 좋은 거 알아 가시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부끄럽습니다. 본의 아니게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결례는 무슨! 오히려 고맙군요.”
“고맙다니요?”
그리골은 빵을 결대로 죽 찢어 대찬에게 주며 말했다.
“샬바가 안 그래도 과묵한 성격인데, 아침에는 더 그렇거든요? 내 아들이지만 나도 가끔 보면 무서워.”
“하하, 그런가요.”
그리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샬바가 오늘따라 수다스러운 건 그래도 조가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죠. 안 그러냐, 샬바?”
“뭐, 싫어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리골은 스탈린 콧수염을 살짝 잡아당기며 웃었다.
“부끄러워하기는. 아무튼 조 덕분에 오랜만에 아침부터 활기찹니다.”
“좋게 생각해주시니 제가 더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라클리가 조의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좋았을걸.”
“…….”
그리골은 무심결에 내뱉은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