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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308화 (308/556)

난 할 수 있어 308화

대찬은 그걸 알아듣진 못했지만 거친 목소리를 듣고 그게 욕설임을 직감했다.

“일단 흥분은 가라앉히시고요. 빨리 아버님부터 깨우세요. 침착해야 합니다.”

“보조! 보조! 보조!”

샬바는 계속 ‘보조!’를 외쳤다.

대찬은 부지불식간에 조지아 어 욕설을 배웠다.

대찬은 죽어라 달리면서 외쳤다.

“보조!”

대찬은 단신으로 와인 창고에 다가갔다.

트럭과 트레일러가 막 그 앞에 멈춰 선 순간이었다.

대찬은 이를 악물었다.

멈춘 트럭에서 인부들이 우르르 내렸다.

몸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었다.

우락부락한 이른바 생활 근육을 자랑하는 장정들이 트럭에서 쏟아져 내렸다.

어두운 시야에 들어오는 인원만 해도 종잡아 열 명은 되었다.

대찬 역시 쌈박질에 자신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저런 덩치 열 명을 상대로 어떻게 해볼 자신은 없었다.

트레일러의 헤드라이트는 대찬을 한번 확 비추더니 꺼졌다.

대찬의 시야가 확 밝아졌다가 다시 어둠으로 천천히 돌아왔다.

우르르 울리던 엔진 소리도 멎었다.

대찬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인부들은 와인 창고를 향해, 대찬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왔다.

대찬은 천안문 사태 때의 탱크를 가로막는 남자처럼 그들의 앞에 계속 서있었다.

그 남자와 대찬이 다른 게 있다면, 대찬은 의연한 결기로 당당히 버티고 있는 게 아니라, 제법 졸아든 마음으로 그들을 상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르르 내린 인부들은 대찬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들은 조지아 말로 대찬에게 뭐라 말했다.

조지아 말은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정도만 아는 대찬도 이번에는 그들의 말을 정확히 알아 들었다.

누구냐, 비켜라, 따위의 불친절한 말이었다.

거기에 대답해줄 말을 할 줄 모르는 대찬은 침묵을 지키며 굳게 선 두 다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때 트레일러의 조수석에서 누군가가 내렸다.

그는 대찬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했다.

“오랜만입니다, 조대찬 씨?”

“하, 인간성 밥 말아먹은 한국인이 누군가 했더니, 여지없네.”

대찬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민동철은 여유로운 웃음을 머금으며 트레일러에서 껑충 뛰어내렸다.

“참 여우같은 인간이에요. 본인도 인정하죠? 어떻게 알아채고 여기에 딱 버티고 서있을까.”

“누가 누구 보고 여우같다고 하는지 모르겠네. 근성 한번 대단하십니다. 나 물먹이려고 여기까지 오셨어요?”

“그렇게 싸가지 없이 지껄일 입장이 아니실 텐데, 지금?”

“그쪽이야말로 그렇지 않나요.”

“뭐, 뭐?”

“남의 재산 도둑질하려다가 딱 걸린 건데, 속으로는 오줌 질질 흘리고 계시잖아요.”

“…….”

대찬의 말에 한 박자 늦게 민동철은 픽 웃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로 대찬을 향해 비적비적 걸어왔다.

대찬은 저 불량한 걸음걸이를 보고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민동철은 대찬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대찬의 말대로 민동철은 그의 등장에 잠깐 당황했다.

군사작전을 벌이듯 야음을 틈타 순식간에 와인을 털어 물류기지로 옮기고, 자기는 손을 털 작정이었다.

그런데 땅에서 솟았는지 하늘에서 꺼졌는지 대찬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민동철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우같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놀란 기색을 들켜선 안 된다.

민동철은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이 댁 아드님이 계약 대리인인 거, 모르셨나?”

“글쎄요. 말로만 그랬지 그게 무슨 법적인 효력이 있나 모르겠네.”

“당장은 법보다 주먹이 빠를 거 같은데?”

민동철은 좌우에 거느린 든든한 인부들을 보면서 웃음을 흘렸다.

대찬은 쓴 침을 삼켰다.

그때.

탕!

깜깜한 밤하늘을 한 발의 총성이 갈랐다.

총성이 들리는 순간 거들먹거리던 인부들의 걸음이 얼어붙었다.

여유를 가장하던 민동철의 얼굴도 일순 굳었다.

대찬의 계산에도 총성은 없었다.

그는 무심결에 뒤를 돌아봤다.

탕!

한 번의 총성이 더 울렸다.

그리고 샬바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 밤에 보니까 더 무섭네.’

대찬은 아군임을 알면서도 찔끔 오줌을 지릴 뻔했다.

빡빡 민 머리에 달빛이 쪼였다.

민머리에서 반사된 달빛은 그의 전신에 둘러진 문신을 비췄다.

대찬에게 익숙하지 않은 저 비주얼은 충분히 인부들에게도 익숙하지 않았다.

조지아에서도 흔치 않은 비주얼이란 뜻이었다.

그의 모습은 대찬이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한 손에는 총이 들려 있었고 눈빛은 험악했다.

딱 하나 다른 게 있다면 반대편 손에 들려있는 게 축 늘어진 꿩의 시체가 아니라, 이 사달의 원인인 못난 동생의 머리채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라클리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잡은 채로 허공을 향해 한 손으로 총을 쐈다.

탕! 탕! 탕!

텔라비라는 시골에서 트레일러의 엔진 소리보다도 희귀한 것이 연달아 울리는 총소리였다.

샬바는 척 봐도 미치광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미치광이가 언제 자신들을 겨눌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인부들은 주춤주춤 몸 둘 바를 몰랐다.

샬바는 이라클리를 거칠게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먹물이나 찔끔 먹을 줄 알던 이라클리다.

그가 형의 우악스러운 악력을 이길 리 만무.

이라클리는 흙바닥에 그대로 처박혔다.

샬바는 인부들을 향해 눈빛을 뿌렸다.

그는 징 박힌 혀로 그들을 쏘아붙였다.

“보조!”

‘보조!’로 시작해 그는 듣기만 해도 비속어가 분명한 말들을 속사포처럼 쏘아댔다.

대찬도 샬바를 거들어 외쳤다.

보조! 보조! 보조!

샬바는 어이없다는 듯 대찬을 흘끗 보고 하던 말을 이었다.

그러자 인부들도 자존심이 있는지, 쏟아지는 욕설에 으르렁거렸다.

대찬은 샬바의 눈빛을 살폈다.

그의 눈은 보름달이 되면 늑대로 변하는 웨어울프처럼 이성이 상실되어 있었다.

샬바의 손에 들려 있는 총이 한없이 위험해 보였다.

그라면, 정말 사람을 향해 격발할 수도 있었다.

대찬은 마냥 그를 거들어 ‘보조!’만 외칠 일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인부들도 그다지 차분한 성품은 아닌 듯했다.

민동철은 차라리 샬바가 인부 하나라도 쏴 죽여주기를 바랄 것이다.

대찬은 자신의 역할이 전쟁의 치어리더가 아니라 월계수 잎을 문 비둘기라는 걸 자각했다.

그는 주춤거리며 샬바와 인부들 사이에 섰다.

이라클리는 그 순간에 후다닥 인부들의 뒤로 숨었다.

샬바는 그걸 보고 총부리를 그쪽에다 겨눴다.

대찬은 침착하게 그를 막아섰다.

“총 내려놓으세요, 샬바.”

“지금 저 인간들 봤잖아요. 도둑놈들이에요.”

“알아요. 총 쏘면 저 사람들도 다치고 샬바도 다쳐요. 일단 내려놔요.”

“내려놓으면 안 돼요.”

대찬은 편안한 웃음으로 그를 최대한 안심시켰다.

“내려놓으세요. 와인 창고는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을 테니.”

긴 영어 문장을 샬바가 이해하지 못하자, 대찬은 짧게 설명했다.

“창고, 지킬게요. 내 목숨 걸고.”

“…….”

그러자 샬바는 천천히 총부리를 아래로 내렸다.

민동철은 픽 웃었다.

“아주 쇼를 하세요. 조대찬 씨, 이쯤 하면 됐으니 그만 빠져요. 남의 일에 뭐 이리 열심이야?”

“민동철 너 같은 버러지가 낀 이상 남의 일이 아니지.”

민동철의 얼굴이 험악하게 굳었다.

“이 새끼가 꼬박꼬박 요 자 붙여가면서 대우해줬더니 본새 봐라.”

“아가리 닥쳐. 여기까지 똥내 풍긴다.”

“천지분간 못하고 날뛰네.”

“닥치라니까.”

“네가 오늘 기어코 죽고 싶구나. 어쩌려고 배짱이냐? 총 쏘면 쇠고랑 차고 안 쏘면 홀라당 와인 뜯기고 네 이목구비도 성치 않을 텐데.”

“그래? 과연 그럴까.”

“…….”

대찬의 여유로운 태도에 민동철은 일단 입을 다물었다.

대찬은 샬바에게 말했다.

“샬바, 내 말 좀 저쪽에 조지아 말로 통역해줄래요.”

“…그러죠. 영어로는 쉽게 말해줘요. 그래야 통역도 쉬워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찬은 웃으면서 정면의 인부들에게 말했다.

“일당 얼맙니까?”

샬바가 그들을 향해 외쳤다.

뜬금없는 질문에 그들은 웅성거렸다.

그들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대찬도 딱히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기에 주저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 일당의 열 배씩 드리죠.”

대찬의 말을 샬바가 통역하자 인부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대찬은 개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을 향해 말했다.

“연장자는 우대해드리겠습니다. 그쪽은 스무 배 드리죠.”

통역하려던 샬바가 대찬을 바라봤다.

“연장자가 뭡니까?”

“올드 맨.”

눈높이 단어 선택에 샬바는 부드럽게 통역했다.

그러자 올드 맨의 동공은 다른 이들보다 두 배는 더 세게 흔들렸다.

대찬은 웃었다.

“제안이 만족스러우신 분들은 이쪽으로 넘어오시죠.”

그 말을 이라클리가 민동철에게 그대로 통역해주었다.

이라클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저 인간들이 그런 얕은 꼼수에 넘어갈 거 같냐! 돌대가리 같으…….”

민동철이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에 올드 맨이 대찬 쪽으로 넘어갔다.

민동철은 사색이 되었다.

머리가 넘어오니 몸통과 꼬리가 딸려왔다.

대찬은 피식 웃었다.

“이 양반들이 뭐 당신 아들들이라도 돼? 돈이라면 별 수 없지.”

“…….”

“저 빌어먹을 그리골 네 둘째 아들이 그쪽하고 붙어먹기 전에 나하고 먼저 붙어먹으려고 했거든.”

“…….”

“그때 어쩌고저쩌고 말이 참 많았는데 지금 딱 한 마디 기억나네. 물류회산지 용역회산지 알선해준다고.”

민동철은 말없이 대찬을 노려봤다.

대찬은 말을 이었다.

“그 말인즉슨 저 양반들도 섭외된 사람들이고, 그렇다면 딱히 그쪽하고의 의리를 지켜줄 의무가 없는 사람들이란 말이지.”

“너…….”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고? 이제 법도 주먹도 우리 거네. 어쩔래?”

민동철은 할 말이 궁했다.

“내, 내가 저놈이 약속한 돈보다 더 많이 줄게! 다시 이쪽으로 건너와, 빨리!”

기껏 하는 말이라곤, 이 정도가 전부였다.

이라클리가 급히 통역했지만 대찬이 바로 약을 쳤다.

“저 인간들 돈 별로 없어요. 속지 마세요.”

인부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말은 같았지만 효과는 달랐다.

원본과 복사본의 차이였다.

대찬의 말을 그대로 흉내 낸 민동철의 제안에 인부들은 신뢰할 수도 없었고, 별로 구미가 당기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 와중에 중간에서 커미션을 챙기려고 민동철이 인건비를 최대한 후려치려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잠깐의 인상이었지만 그걸 아는 인부들이 민동철의 제안을 곧이곧대로 믿을 리가 없었다.

이제 민동철에게 남은 거라곤 만신창이가 된 채로 오들오들 떠는 이라클리뿐이었다.

대찬은 샬바에게 말했다.

“일단 상황은 정리됐네요.”

“역시 총보다 돈이 좋은 무기군요.”

“자본주의 사회잖아요.”

“이제 어떡할 거요.”

샬바의 물음에 대찬은 민동철을 가만히 응시했다.

“제가 이 나라 법전은 안 읽어봐서 모르겠는데, 이거 절도 미수 아닌가 싶네요. 사람들까지 우르르 동원해서 와인 창고를 통째로 털어가려고 했으니 죄도 보통 죄가 아니죠.”

민동철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절도 미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흐흐, 지금 쫄았지.”

“멋대로 넘겨짚지 마…….”

민동철은 말끝을 흐렸다.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기껏 비싼 돈 들여서 이쪽으로 끌어들였는데 본전은 뽑아야지.”

그는 샬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인부 분들께 수고스럽지만 저 인간들 좀 창고로 모셔달라고 해주시겠어요?”

그 말에 민동철이 먼저 반응했다.

“야! 무슨 꿍꿍이야! 너 이거 감금죄야, 알아?”

“그만 좀 짹짹대쇼. 기력도 좋아.”

대찬은 민동철과 한 마디도 말을 더 섞고 싶지 않았다.

그는 민동철을 등지고 샬바 쪽으로 걸어갔다.

대찬이 물러나고 인부들이 나서서 민동철과 이라클리를 끌고 창고로 들어갔다.

와인을 털러 온 인간들이 도리어 와인과 함께 창고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대찬은 샬바에게 물었다.

“그리골은…….”

“아버지는 굳이 안 모셨습니다. 좋은 모습이 아니라.”

“이해합니다.”

대찬은 이라클리를 보자마자 와락 끌어안던 그리골을 떠올렸다.

입 안에 쓴맛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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