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7화
엉거주춤하던 둘은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임유준과 원혜미는 무언가를 조잘대느라 대찬과 최재한을 눈치채지 못했다.
양쪽의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그런데 웬일인지 대찬은 피하지 않고 가던 길을 그대로 묵묵히 걸었다.
“죄 지었냐? 왜 피해.”
“괜찮아?”
점멸하는 신호등의 파란불을 따라 최재한의 눈도 깜빡거렸다.
대찬은 피식 웃었다.
“가던 길 가자.”
“어…….”
대찬은 그렇게 말하며 궤도를 틀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임유준, 원혜미와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어?”
이목구비가 완전히 분간되는 거리에 이르렀다.
임유준이 대찬을 발견했다.
그는 대찬을 아래위로 훑어보곤 비꼬는 시선을 유지하며 웃었다.
꼬락서니하곤.
“야, 조대찬, 여기서 만나네.”
“어, 그러네.”
대찬은 임유준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원혜미 쪽으로 흘끗 시선을 돌렸다.
굳이 인사는 하지 않았다.
원혜미는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임유준을 닮은 조소를 머금었다.
그는 대찬의 후줄근한 모습을 훑으며 대놓고 킥킥 웃었다.
그러면서 임유준의 귀에다 대고 속닥거렸다.
“이제 확실히 알겠어, 내가 똥차에서 벤츠로 갈아탔단 거.”
귓속말의 형식을 빌렸지만 대찬에게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고등학생의 유치한 발상이란.
그 말에 대답하는 임유준의 꼬락서니를 보니 유유상종이었다.
“똥차 타 봐야 벤츠 좋은 줄 알지.”
“그건 그렇네!”
둘의 대화를 들은 대찬은 덤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요즘은 벤츠에서 경운기도 만드나.”
임유준이 즉각 반응했다.
“뭐야?”
“아, 들렸어? 혼잣말이었는데.”
“야! 너 진짜 죽을래?”
원혜미가 온몸을 비틀며 격렬히 항의했다.
피식 웃은 대찬은 가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몇 걸음 가던 대찬은 잠깐 걸음을 멈췄다.
여전히 자리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임유준을 향해 몸을 틀었다.
“지금은 좋지? 한 달만 있어 봐. 똥차 소리 듣는 거 금방이다. 여자 성격이 워낙 개판이어야지. 비위 맞추기 힘들더라.”
“야!”
“아, 둘 다 개판이라 의외로 괜찮을지도 모르겠네.”
원혜미가 버럭 성질을 냈지만 대찬은 더 상대해 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임유준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수고해라.”
대찬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걸음을 뗐다.
원혜미는 얼굴이 달아오른 채 임유준을 닦달했다.
“뭐 해! 가서 한 대 패든가 해야지!”
“패, 패……?”
“그래! 가서 패라고! 그럼 저 소릴 듣고 가만히 있을 거야?”
“어, 어어…….”
임유준이 어물쩍거리는 사이에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었다.
임유준이 대찬에게 다가가려고 하자 자동차들이 쌩쌩 지나갔다.
“어휴, 등신!”
원혜미의 짜증을 푸느라 임유준은 상당한 공을 들여야만 했다.
5월이 지나고 6월로 접어들었다.
날씨가 슬슬 더워졌다.
교복도 하복과 춘추복이 반반으로 섞였다.
과연 봄과 여름 사이였다.
후텁지근한 날씨가 점점 익숙해질 즈음, 대찬은 지금의 생활에도 그만큼 익숙해졌다.
“조만간 회장 선거다.”
담임은 조례에서 그렇게 말했다.
“입후보할 사람은 교무실로 찾아와라. 이상.”
평소의 대찬이었으면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 학생회장이 되든 무슨 상관인가.
두발 자유, 교복 변경, 야간 자율 학습 폐지.
전국의 모든 학교에서 천편일률적인 공약을 내걸고 떠들썩하게 선거운동을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화장실 들어가고 나갈 때 마음 다르다.
그렇기에 학생 어느 누구도 회장 선거를 진중히 생각하지 않았다.
누가 되든 알 게 뭐야.
학생들은 유권자의 염세주의를 조기교육 받았다.
대찬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는데, 그의 마음이 이번에는 달랐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는 차에 임유준 패거리 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운운하는 소리를 듣자하니 임유준도 출마를 하는 모양이었다.
대찬은 최재한을 복도로 데리고 나왔다.
그러고는 툭 던지듯 말했다.
“회장 선거 나가.”
“뭐? 내가 왜?”
대찬의 대답은 간단했다.
“임유준이 설치고 다니는 거 꼴 보기 싫어.”
“고작 그거 때문이야?”
“학교를 생각해서도 네가 낫잖아.”
“임유준보다 내가 못할 거 같진 않지만.”
“입시를 위해서도 학생회장 경력이 있는 편이 좋아.”
최재한은 경멸하는 시선으로 대찬을 바라봤다.
“뭐 이런 속물이 다 있어. 내 대입을 위해서 학생회장을 하라고?”
“그렇지. 이런 양심적인 반응이 나와야지. 임유준이한테 이런 반응 기대할 수 있겠냐?”
최재한은 즉답하지 못했다.
“그건 잘…….”
“우리 행동하는 양심이 되자. 응?”
“애초에 당선 기대도 안 하는데 돼도 제대로 못할 거 같아.”
“아니야. 제대로 해야 돼. 왜냐, 대학을 가야 되거든.”
대찬은 자판기에서 커피 두 캔을 뽑아 하나를 최재한에게 내밀고 화단에 걸터앉았다.
“학생회장 되면 뭐, 대학이 ‘어서 오십쇼.’ 하면서 뽑아 준대냐?”
“당선만으로는 뭐가 안 돼.”
“그럼?”
“스토리를 짜야지. ‘학생회장에 당선돼서 이런저런 일 엄청 열심히 했습니다.’ 해야 대입에 도움이 되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내가 회장 되면 열심히 일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너는 아주 훌륭한 회장님이 될 수밖에 없어. 또 돼야만 하고.”
대찬은 커피를 꿀꺽꿀꺽 넘기고 말했다.
“그런 반면 임유준은? 걔는 그냥 어딜 가나 최고가 되고 싶을 뿐이야.”
“하긴 학생회 경력으로 대학 가겠단 생각은 안 하겠지. 공부 잘하는데 굳이 그런 것까지 신경 쓰겠어?”
“그래. 손톱만 한 평판을 위해서 회장을 하겠단 거야. 유백기 같은 새끼인 거지.”
“유백기가 누군데?”
아, 나도 모르게.
“아니다. 그런 놈이 있어.”
대찬은 최재한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무튼 네가 회장 해라. 무조건 해. 목숨 걸고.”
최재한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대찬을 한참 바라봤다.
“임유준을 안 뽑으면 장가를 못 가요, 아- 미운 사람-!”
“기호 1번 임유준! 기호 1번 임유준!”
대찬은 어슬렁어슬렁 교문을 기어오르면서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교문에서부터 시끄럽네…….’
고함을 꽥꽥 지르고 꽹과리를 연타하며 올라오는 학생들에게 사탕이나 껌을 뿌렸다.
그들은 모두 기호 1번 임유준이 적힌 띠를 두르게 하고 박자에 맞춰 율동을 했다.
고등학교 학생회장 선거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매머드급 유세단이었다.
다른 후보의 유세단은 임유준 쪽의 위용에 눌려 어버버, 입술도 제대로 못 뗐다.
“무슨 총선 나가나.”
대찬은 불쾌한 표정으로 입술을 씰룩였다.
최재한은 불안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대찬아, 우리는 저런 거 안 하냐?”
“필요 없어.”
객기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저렇게 떠들썩하게 놀아나는 게 저들끼리 기분은 좋을 것이다.
하지만 실상 영양가는 없었다.
어차피 이런 사소한 선거는 한순간에 결정되는 법이었다.
학생들이 일찍 귀가하는 토요일에 대찬은 움직였다.
대찬은 최재한의 포스터 한 뭉치를 들고 학교 구석구석을 쏘다녔다.
임유준 옆에 나란히 최재한의 것을 붙였다.
임유준의 포스터는 온갖 폼은 다 잡고 있었다.
머리에는 포마드를 떡칠해 놓고, 눈깔은 느끼하게 웃고 있었다.
무슨 초등학교 어린이회장, 중학교 학생회장, 피아노 콩쿠르 3위 입상, 어떤 수학경시대회 동상 수상.
임유준의 18년 인생이 총망라된 경력이 깨알 같은 글씨로 좍 쓰여 있었다.
그 옆에는 되도 않는 공약들이 또 빽빽했다.
“웩, 토 쏠려.”
대찬은 슬쩍 비웃어 주며 압정으로 최재한의 포스터를 붙였다.
이름 큼직하게, 공약은 간결하게, 사진은 딱딱하지 않게.
슬로건.
-공부 따위 안 합니다! 학생회에 올인!
최재한은 임유준의 것과 자신의 것을 번갈아보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찬에게 말했다.
“너무 가볍지 않아?”
“가볍지 않아.”
대찬은 흡족하게 포스터를 바라봤다.
“근데 포스터를 뭐 그렇게 많이 만들어 놨어? 이제 한 3장만 더 붙이면 될 거 같은데.”
“붙일 곳이 많아.”
대찬은 포스터 뭉치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러곤 좌변기가 설치된 칸마다 들어가 포스터를 붙였다.
“뭐야? 여기에 왜 붙여?”
“여기에 붙여 놓으면 포스터 보기 싫어도 보게 되거든.”
대찬은 좌변기에 앉아 한참 가늠하더니, 시선에 딱 맞는 높이에 포스터를 붙였다.
게시판에 붙은 포스터를 누가 유심히 보겠나.
대통령 선거 포스터도 그런데 학생회장 포스터는 오죽할까.
그런데 좌변기에 붙여 놓으면 별수 없이 봐야만 한다.
반복되는 단순한 노출에도 대중은 호감을 얻는다.
단순노출효과.
1968년 미국의 심리학자 자욘스가 내놓은 이래 모든 분야에서 숱하게 쓰인 마케팅 전략이었다.
첫 번째 삶, 회사에서 근무할 때 어깨너머로 배운 바를 써먹기라도 해야 그곳에서 보낸 고난의 세월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 것이다.
포스터를 붙인 대찬은 그 옆에 수성 사인펜을 부착했다.
좌변기용 포스터에는 큼지막한 글씨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학생회에 바라는 것이 있으면 적어 주세요. 수거 후 반영하겠습니다. 심심하면 낙서해도 좋아요.
“소통하는 학생회, 스스럼없는 학생회. 그게 우리 전략이야. 임유준에 맞서는.”
“저러면 내 얼굴에 수염 달고 애꾸눈 만들고 개판을 쳐 놓을 텐데.”
“그것도 좋지. 우스워 보일수록 표가 늘어날 거야.”
대찬의 전략은 한없이 가까이, 한없이 낮게 다가가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엘리트스러움을 맘껏 표출하는 임유준에 정면으로 대응하겠단 포석.
대찬은 여자 화장실에는 포스터를 붙이지 않았다.
용변 보는데 웬 남자애 사진이 응시하고 있으면 그것만큼 소름 끼치는 일은 없을 테니까.
“화장실 봤냐? 겁나 웃겨. 싸던 똥도 들어갔다.”
“거기다가 포스터를 왜 붙여 놓냐? 또라인 줄 알았잖아. 웃기긴 하더라.”
“이름이 뭐더라? 최재한?”
“엉. 임유준이랑 같은 반이라던데.”
“임유준 그 새끼는 뭔가 재수 없어. 피아노 콩쿠르에서 입상해서 뭐 어쩌라고.”
“전교 1등이잖아. 어련하시겠어.”
“난 그냥 최재한 찍어 줄란다. 뭔가 정감 가지 않냐. 공부 따윈 안 한대.”
“꼴통은 꼴통 찍어 줘야지. 나도 최재한.”
평소 같으면 심심한 선거판에 짓궂은 무효표를 만들었을 녀석들이 최재한 쪽에 동질감을 느꼈다.
“2학년 애들 선거 때문에 아침마다 시끄러워 뒤지겠네.”
“그 임유준인가 뭔가 하는 새끼 팔러 다니는 놈들이 꽹과리까지 치잖아.”
“안 그래도 스트레스 받는데. 아오.”
고3 교실에서도 간간이 학생회장 선거 얘기가 나왔다.
투표권은 있지만 그다지 선거에 관심이 없는 쪽이었다.
당장 공부가 급하고, 학교 생활도 몇 달 안 남았다.
누가 되든 알 바 아니었다.
다만, 방해 받으니 짜증날 뿐.
“화장실에 포스터 봤냐?”
“어, 봤어. 암것도 안 쓰여 있고 ‘선배님, 쾌변하십쇼!’가 뭐냐. 웃겨 가지고.”
“걔는 유세도 안 한대. ‘선배님들을 위해 유세하지 않겠습니다. 절대 친구가 없는 게 아닙니다.’ 그러던데.”
“미친놈.”
호의적인 미친놈 소리가 많아질수록 최재한에게 표가 쌓였다.
투표 당일.
투표하기 전, 각 후보들은 연설을 하기 마련이었다.
오전에 졸린 눈을 한 학생들이 운동장으로 강제로 끌려 나와 연설을 들었다.
기호순으로 임유준이 가장 먼저 단상에 섰다.
“존경하는 선배, 동기, 후배 여러분!”
멀찍이 군중 속에 섞여 연설을 듣던 대찬은 피식 웃었다.
첫 구절만 듣고 판단을 내렸다.
‘넌 아웃이다.’
나머지는 더 들을 것도 없었다.
나 잘났소, 길게 이어지는 타령에 귀 기울이는 학생들은 지극히 소수였다.
“감사합니다!”
임유준은 당당하게 연설을 맺었지만 그에 비해 박수 소리는 빈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