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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307화 (306/556)

난 할 수 있어 307화

민동철은 이라클리에게 말했다.

“다른 한국 업체가 그쪽의 와인을 전량 구입해가면 어떨까요. 꼭 조대찬일 필요는 없잖아요.”

“다른 한국 업체요? 다리라도 놔주실 겁니까?”

“네, 어렵지 않죠.”

“시간이 많지 않아요. 바로 진행해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이라도 당장 비즈니스를 진행할 수 있으니까.”

이라클리의 눈이 빛났다.

“어떻게 말입니까.”

“일단 먼저 의사를 확실히 해주시죠.”

“예예, 이미 조대찬이 거절했으니 그쪽에서도 뭐라고 못할 겁니다.”

“좋아요. 전화 한 통 할 시간만 주시죠.”

민동철은 그렇게 말하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어, 나 스포츠극동 민동철 기자입니다. 아가씨하고 통화를 좀 하고 싶은데. 급한 일입니다. 바로 연결 좀 해줘요.”

아가씨는 홍승연을 의미했다.

극동일보 소속으로 오래 있었던 그는 사모님보다 아가씨라는 호칭이 더 익숙했다.

제법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홍승연이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스포츠극동 민동철 기자입니다.”

“아, 저번에 괜히 조대찬 들쑤셨다가 된통 당하신 분이구나.”

“하하, 네, 맞습니다.”

“무슨 일이죠? 빨리 용건만 얘기하세요. 세월아 네월아 들어주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역시 극동 홍씨 싸가지는 유전이라며 민동철은 속으로 욕을 하면서, 겉으로는 살랑거렸다.

“극동호텔에 와인 들여놓으실 생각 없으십니까?”

“갑자기 그게 뭔 뚱딴지같은 소린데요.”

“헐값에 조지아 와인을 들여갈 기회가 생겨서 말입니다.”

“짜증나니까 요점만 말해요.”

민동철은 기자답게 홍승연의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모든 설명을 마쳤다.

요점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질 좋은 조지아 와인을 헐값에 대량으로 들여갈 수 있다는 것.

둘째는 대찬의 비즈니스에 훼방을 놓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와인이야 안 사면 그만이긴 했다.

하지만 이쪽은 득을 보면서 저쪽에는 득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다.

민동철도, 홍승연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한층 나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요. 호텔 쪽에 얘기해서 계약 체결하죠.”

“안 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그럼 뭐 어떡하란 말이에요?”

“제가 오늘 조지아 주재원 역할을 하겠습니다. 호텔 쪽에 언질만 넣어주시면 그쪽하고 바로 얘기하겠습니다.”

“알았어요. 상황은 저쪽이 급하니까 최대한 후려쳐봐요.”

“물론입니다.”

홍승연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으려다가 한 마디를 보탰다.

“아, 잠깐.”

“네, 아가씨.”

“민 기자 비즈니스 하러 간 거 아니잖아요. 취재하러 갔죠.”

“예, 그렇죠.”

“그럼 기자로서도 성과를 내야지. 윤이영이든 조대찬이든 어떻게 스크래치 좀 내봐요.”

“하하, 물론입니다.”

“끊어요.”

홍승연은 뚝, 전화를 끊었다.

민동철은 일사천리로 극동호텔 측과 업무를 진행했다.

호텔은 자기가 거래하는 물류회사를 급히 연결해주었다.

물류회사는 이런 절호의 기회를 너무 급하다는 이유로 튕길 만큼 여유 있는 업체가 아니었다.

그쪽에서 직원을 급파하겠다고 했다.

아가씨의 지시입니다, 그 한 마디로 일은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아, 회사 일도 쉽네. 영업맨이나 할 걸 그랬나.’

민동철은 피식 웃었다.

한국어로 여기저기 전화를 걸고 뚝딱뚝딱 해내는 민동철을, 이라클리는 멍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한참이 지나서야 민동철이 이라클리에게 관심을 주었다.

“자,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와인 실어서 물류기지까지 옮기는 건 그쪽이 해줘야겠는데.”

“무, 물론입니다.”

“급하다고 했죠? 바로 내일 새벽에 진행합시다.”

이라클리는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고맙긴. 이쪽도 재미를 봤는데요.”

둘은 가볍게 악수하고 헤어졌다.

이런 달밤의 작당모의를 대찬은 알지 못했다.

윤이영을 끌어안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다음날.

윤이영 일행은 늦은 오후에 북부의 산악지대로 촬영지를 옮길 예정이었다.

대찬도 서둘러 계약을 확정하고 일행을 따라나설 참이었다.

그런데 이라클리의 태도가 하룻밤 사이에 확연히 달라졌다.

“계약은 조금 미루시죠.”

“어제랑 태도가 다르시네요. 내가 어제 그거 깠다고 그래요?”

“아주 영향이 없지는 않죠.”

“그래도 아버님이 믿고 맡겼잖아요. 계약에 성실히 임하셔야죠.”

“조가 한번 튕겼으니 천천히 생각해보려고요.”

“하하, 생각보다 성격이 까칠하시네.”

“그러니까 줄 때 받으셨어야죠. 이걸로 헐값에 넘기는 건 물 건너 간 겁니다. 물량도 제한적일 거고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저도 급할 거 없습니다. 합리적인 가격에 합의를 봤으면 좋겠군요.”

“카즈베기로 가신다고요. 아마 며칠 있다가 수도로 돌아오시겠죠.”

“네, 그럴 예정입니다.”

“수도로 오시면 그때 뵙죠. 가격을 잘 생각해놓으세요.”

“네, 이라클리도 그렇게 하시죠.”

대찬은 유감이 없었다.

그리골의 와이너리와 계약이 불발돼도 텔라비에는 다른 와이너리가 많았다.

그리고 아예 빈손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괜찮았다.

애초에 오랜만의 휴가를 만끽하려고 이 먼 나라까지 온 거였으니까.

비즈니스는 어디까지나 부산물이었다.

대찬은 북부의 산악도시인 카즈베기로 떠날 채비를 서두를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 샬바가 대찬에게 다가왔다.

대찬은 그의 인상이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됐다.

그는 징 박힌 혀를 날름거리며 짧은 영어로 말했다.

“조, 잠깐 나랑 얘기해요.”

“아, 네…….”

샬바는 헛간 쪽으로 대찬을 이끌었다.

대찬은 긴장한 얼굴로 그를 따라갔다.

남들의 시선에서 멀어졌을 때, 샬바가 말했다.

“어제, 이라클리가 조랑 얘기 다 끝내고.”

“네.”

“다른 한국인이랑 얘기를 했어요.”

“…다른 한국인이요? 우리 일행 중의 한 명인가요?”

대찬은 왈라비 사장을 염두에 두고 물었다.

샬바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군요. 여기에 한국 사람이 우리뿐이라는 법은 없지만, 굳이 그 시간에 이라클리를 불러내서 얘기를 했다는 건 수상하긴 하군요.”

“어려운 말, 못 알아듣습니다. 쉽게.”

“아, 이상합니다. 위얼드(weird), 쏘 위얼드.”

대찬이 쉽게 말하자 샬바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해보세요. 이라클리는 이 농장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농장을 사랑하지 않는다니, 무슨 말씀이시죠?”

“항상 그랬습니다. 고향을, 그리고 자기가 자란 이 농장을 미워했어요. 더럽고 무식하다고.”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간혹 그런 시골 출신의 헛똑똑이들이 있죠.”

“아버지는 계속 부탁했어요. 고향에 오라고. 근데 계속 무시했어요, 이라클리는. 이번에 온 것도 5년 만이에요.”

“수도에서 거리도 그렇게 멀지 않은데, 무심했군요.”

샬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왜 왔는지 모르겠어요. 아버지는 동생이 와서 좋아만 하시는데 저는 그럴 수 없어요.”

“제가 샬바여도 그랬을 겁니다.”

샬바는 윗니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의심해야 해요. 분명히 의심해야 해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대찬의 기분은 찝찝했다.

이라클리의 어젯밤 제안과 더불어 대찬의 뇌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잘 쉬고 갑니다, 그리골.”

“이거 며칠 더 머물러줬으면 하는데, 내 욕심이겠지.”

그리골은 떠나는 대찬을 보고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하, 계약도 수도에서 하기로 해서요. 중간에 짬이 나면 텔라비에 한 번 더 들르겠습니다.”

그리골은 가볍게 혀를 차며 이라클리에게 말했다.

“거 계약이야 대충 해주면 되지 뭘 그렇게 배짱을 튕기니?”

“아버지, 신중히 계약을 해야 뒤탈이 없어요. 이게 다 우리 모두를 위한 길이라고요.”

“그래, 잘난 아들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조, 그래도 텔라비에 한 번 더 꼭 들러줘요.”

“그러겠습니다.”

그리골은 대찬의 손을 꼭 잡고 아쉬운 듯 주물렀다.

대찬은 당장이라도 이라클리의 시커먼 속내를 까발리고 싶었다.

하지만 저 푸근한 웃음을 오래 보고 싶어서 참았다.

“아유, 그만 들어가시라니까요.”

“알았어요. 들어갈 거예요. 요 앞까지만 나가고.”

대찬의 거듭되는 만류에도 그리골은 웃으면서 기어코 농장 바깥까지 나왔다.

그는 윤이영과 대찬 일행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윤이영은 차 안에서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나는 어렵더라도 오빠는 꼭 텔라비에 들러야겠어.”

“그래야지. 근데 생각보다 일찍 들러야 할 거 같아.”

“생각보다 일찍? 얼마나?”

대찬은 윤이영을 흘끗 보고 말했다.

“지금.”

“…응?”

“잠깐 차 좀 세워주세요.”

대찬은 그리골의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차에서 내릴 채비를 했다.

윤이영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뭐야, 왜 그래, 갑자기?”

“미안, 같이 가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어.”

“무슨 일이냐구.”

윤이영의 물음에 대찬은 짧게 간략히 설명했다.

윤이영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올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조대찬은 가는 곳마다 이러냐.”

“그러게 말이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으며 윤이영의 말에 동의했다.

“혼자서 괜찮겠어? 사람이라도 붙이지.”

“누굴 붙이겠어. 나 혼자서 괜찮아.”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야 돼, 알았지.”

“알았어.”

대찬은 웃으며 윤이영에게 가볍게 키스하곤 차에서 내렸다.

그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샬바,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 주시죠. 저는 농장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머물겠습니다.”

“알았습니다. 항상 휴대폰 벨소리를 켜세요.”

“그러죠.”

대찬은 관광청 사람의 도움을 받아 낡은 세단 한 대를 렌트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형사처럼 잠복근무를 했다.

언제 일이 터질지 몰라 잠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텔라비의 오후는 여느 때처럼 평화로웠다.

지금의 평화로운 공기가 언제 전운으로 바뀔지 대찬은 알지 못했다.

사달이 벌어진 건, 대찬이 꾸벅꾸벅 졸던 새벽 1시쯤이었다.

육중한 엔진 소리가 대찬의 잠을 깨웠다.

텔라비는 한적한 시골이었다.

이 지역에서 들리는 엔진 소리는 대개 낡은 자가용의 털털거리는 것이었다.

아니면 가끔 마슈룻카라고 불리는, 대개 낡은 승합차로 운행되는 대중교통의 것뿐이었다.

저런 커다란 엔진 소리는, 그것도 새벽 1시의 엔진 소리는 일상적이지 않았다.

대찬은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 급히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대찬의 눈에 들어온 건 곡선도로를 타고 구불구불 흔들리는 헤드라이트 불빛이었다.

그 헤드라이트 불빛은 그리골의 와이너리의 외곽, 와인 창고가 있는 곳을 향했다.

와인 창고는 그리골의 집에서 제법 거리가 있었다.

잠귀가 어둡다면 트레일러의 엔진 소리를 듣지 못할 거리였다.

대찬은 이를 악물었다.

‘미친 패륜아 새끼. 기어코 일을 저지르는구나.’

대찬은 야밤에 미친 듯이 달렸다.

가로등도 없는 길을 밝히기 위해 켜놓은 스마트폰의 플래시가 눈이 부시도록 밝은 헤드라이트를 따라잡기 시작했다.

플래시가 헤드라이트 밝은 차량의 꽁무니를 비췄다.

트레일러였다.

‘저걸로 와인을 다 실어가시겠다?’

그리고 그 트레일러의 앞에는 한 대의 승합차가 있었다.

간밤의 와인 털이를 진행할 인력이 타고 있으리라.

대찬은 저 빌어먹을 이라클리의 계획에 동참한 한국인이 도대체 누군지 알고 싶었다.

‘나라 망신은 다 시키는구만, 썩을 놈.’

대찬은 그들의 뒤를 따르는 대신, 길을 가로질러 그리골의 집으로 향했다.

플래시를 끄고 샬바에게 전화를 걸었다.

샬바는 여태 자지 않고 있었는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조.”

“지금 그쪽으로 사람들이 가고 있어요. 아마 오늘 밤에 와인을 빼돌릴 모양이에요.”

“뭐라고요! 이런 쳐죽일!”

샬바는 조지아 말로 한참 욕설을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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