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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306화 (305/556)

난 할 수 있어 306화

대찬은 그가 이러는 이유를 짐작하지 못했다.

대찬이 머뭇거리자 이라클리는 씩 웃었다.

“당신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물론 그렇습니다만. 이유 없는 호의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유가 있지만 조가 그걸 들을 필요는 없잖습니까?”

“우리 엄마가 그랬거든요. 좋다고 덥석 받아먹으면 배탈 난다고.”

“조한테 불이익은 없을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대찬은 씩 웃었다.

“안심할 수 있게 사연을 알려주시죠.”

“하, 그럼 듣기만 하시고 남들한텐 절대 발설하지 마세요. 특히 아버지, 특히 형.”

“약속하죠.”

대찬은 대답하면서 부지깽이로 모닥불을 뒤지는 샬바를 흘끗 봤다.

그는 이쪽의 쑥덕공론에 조금의 관심도 없는 듯했다.

이라클리는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살짝 핥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근무하는 회사에서 텔라비에 제법 큰 규모로 리조트를 지으려고 합니다.”

“그런데요.”

“부지를 물색하고 있는데, 마침 여기가 부지로는 그만이더군요. 국도와 맞닿아있고, 운치도 좋고.”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이 농장을 리조트 부지로 개발이라도 하겠단 말씀이십니까?”

“예, 그렇게만 되면 회사에도 이익이고, 우리 가족에게도 이익이니까요.”

대찬은 팔짱을 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회사에는 확실히 이익이겠지만, 이라클리의 가족에게도 이익일까요? 물론 돈이야 짭짤하게 만지겠지만.”

“돈을 버는 게 이익이지, 뭐가 더 필요합니까?”

“글쎄요, 그리골은 계속 포도를 수확하고 와인을 만들고 싶어 하시는 것 같은데.”

이라클리는 얼굴을 굳혔다.

“조는 우리 아버지를 오늘 처음 봤잖습니까. 설마 나보다 그쪽이 우리 아버지를 더 잘 안다고 할 순 없을 겁니다.”

“아,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그리고 설령 조의 말이 맞다 해도, 무슨 상관입니까? 조는 비즈니스맨이 아닌가요.”

“물론 저한테 이익이 되면 남의 작은 불행쯤이야 눈 감을 수 있죠.”

“그렇죠. 그래야 비즈니스맨이지. 저도 회사에 다닙니다마는.”

대찬은 이라클리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

“근데 제 이익을 생각해도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실지 대충 짐작은 갑니다.”

“만약에 이 포도농장 다 갈아엎어서 리조트로 만들면, 우리는 어떡합니까?”

“장사 한두 번 할 것도 아니고 길게 봐야 되는데, 그죠?”

대찬은 웃었다.

“네, 잘 알고 계시군요.”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우리 회사에서 여기보다 더 나은 와이너리를 알선해드리죠. 문서로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으음.”

“단, 조건이 있습니다. 이것만 들어주시면 됩니다.”

“조건이라니?”

“물류 회사를 알선해드릴 테니, 새벽에 그쪽을 동원해서 와인 전량을 싹 갖고 가주세요.”

“그리골이 눈치 못 채게?”

“바로 그겁니다.”

“도둑질은 취향이 아닌데.”

“이게 왜 도둑질입니까? 엄연히 계약을 이행하는 것뿐이죠.”

“엄연히 계약 주체는 그리골인데요. 그리골 몰래 이런 일을 벌일 순 없죠.”

“계약 주체의 대리인이 바로 나입니다.”

대찬은 고개를 까딱거렸다.

“근데 이런 일을 벌이고 속 편히 돈을 챙기기가 어려워서요.”

“뭐가 문젭니까? 어차피 며칠 있으면 이 나라를 떠날 텐데.”

“에이, 그래도 어떻게 그럽니까. 그건 양아치들이나 하는 짓이지.”

대찬의 노골적인 비아냥거림에 이라클리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이, 이봐요.”

“내가 오늘 또 하나 배워가네요. 겉모습만 보고 사람 판단하지 말아야 된다는 거.”

“뭐라고요?”

“나는 당신 형이 양아친 줄 알았는데 진짜 양아치가 여기 있었네.”

이라클리는 입술을 깨물며 항변했다.

“그렇게 무례하게 나오면 이 계약 엎어버릴 겁니다.”

“아이구, 그래요? 별로 아쉽지도 않거니와 당신, 그 계약 못 엎어.”

“뭐라고……?”

“내가 당신 그 시커먼 속내 그리골한테 일러바치면 어쩔 건데?”

“…….”

“사람 좋은 그리골 속 썩이고 싶지 않아서 참는 줄 알아요. 후려친 가격에 사갈 생각도 없으니까, 적당한 선에서 거래합시다, 오케이?”

“…….”

“왜 대답이 없을까.”

이라클리는 대찬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다시 한 번만 생각해보시죠. 단순한 의협심으로 차버릴 조건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쪽이나 다시 생각해봐요. 내일까지 사인 안 해주면 당신 아버지한테 죄다 일러바칠 테니까. 졸리네요. 자러 갑니다.”

대찬은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어기적어기적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라클리는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떨었다.

내막을 모르는 샬바는 이라클리를 흘끗 바라보고 다시 모닥불을 뒤졌다.

그러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느릿느릿 집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분에 못 이긴 표정의 이라클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안 자니?”

이라클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샬바도 딱히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무던한 얼굴로 문고리를 당겼다.

이라클리는 마당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졌다.

그때, 누군가 울타리 밖에서 휘이익, 휘파람을 불었다.

이라클리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어두운 와중에 눈을 가늘게 뜨니, 사람의 형상이 이라클리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라클리가 그쪽을 바라보고만 있자 휘파람을 분 사람은 살짝 손짓을 했다.

이쪽으로 오라고.

이라클리는 잠깐 망설이다가 비적비적 그쪽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니 이목구비가 확연히 드러났다.

그는 대찬, 윤이영과 같은 동양인의 이목구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라클리는 다소 경계하는 투로 물었다.

“누구십니까.”

“보시다시피 한국 사람입니다.”

“그건 대충 알겠습니다만. 충분한 소개는 아닌 듯합니다.”

“아, 이 주변을 산책하고 있었는데 친숙한 한국식 영어 발음이 들리길래.”

“그럼 친숙함만 느끼고 지나가시면 되지, 굳이 저를 부른 이유는 뭡니까?”

한국 사람은 비식비식 웃었다.

“한국식 발음이 들리길래 슬쩍 보니, 또 아는 얼굴이더라고요?”

“조를 아십니까?”

“잘 알죠, 아주 잘 알죠.”

“어떻게 아시죠?”

한국 사람은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그늘에 가려져 있던 그의 얼굴이 달빛 아래 확연히 드러났다.

스포츠극동 소속의 기자, 민동철이었다.

그는 윤이영이 대찬과 함께 조지아로 들어간다는 소식을 접수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민동철도 그들을 따라 들어갔다.

그는 대찬과 윤이영의 뒤를 밟았다가 흠씬 두들겨 맞은 역사가 가슴에 응어리진 상태였다.

게다가 필래와의 관계를 고려해 회사마저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풀리지 않은 한은 장독대에서 묵고 묵어 곰삭은 내가 풀풀 풍길 정도로 숙성되었다.

그는 윤이영에게든 대찬에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앙갚음하고 싶었다.

마침 타이밍이 좋았다.

홍승연이 법인카드 건으로 대찬과 대판 붙었다는 소식이 그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동안 서원웅의 아내, 그리고 서원웅의 죽마고우 겸 일등공신 겸 최측근의 물밑 대립이 이제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는 서원웅을 건드리지 않는 이상, 대찬을 건드리는 기사를 극동일보가 막지 않을 것이라고 직감했다.

게다가 홍승연의 대찬에 대한 인상이 최악으로 치달은 지금, 대찬을 찌르면 홍승연의 환심을 살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었다.

홍승연의 비위를 잘 맞춰주면, 스포츠극동으로 좌천되다시피 했던 자신이 극동일보 본사로 복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희망 섞인 관측도 내심 해냈다.

그렇기에 그는 무작정 대찬과 윤이영의 뒤를 밟았다.

딱히 무슨 건수를 잡은 까닭은 아니었다.

오래 붙어서, 그야말로 밀착취재를 하다 보면 뭐라도 하나 걸리겠지 하는 심정이었다.

그러던 그가 이번에 냄새를 맡았다.

민동철은 씩 웃으면서 이라클리에게 말했다.

“별로 좋은 관계는 아닙니다. 방금 얘기하는 걸 얼핏 들으니 그쪽도 조대찬과 얘기가 잘된 거 같지는 않은데.”

“…맞아요.”

“벌써 우린 통성명도 하기 전에 공통분모가 생겼군요.”

“…….”

“어떻게, 잠깐 얘기라도 해보시겠습니까? 우리 둘이 의기투합할 수도 있잖아요.”

“여기는 보는 눈이 있을 수도 있으니 당신이 있는 쪽으로 가죠.”

“아, 좋습니다. 별채라서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도 않을 겁니다.”

이라클리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고 민동철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런 이라클리를 주시하는 눈이 있었다.

그의 형, 샬바였다.

샬바는 집 안에서 창문을 통해 이라클리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라클리는 민동철에게 대찬과 나눈 얘기를 그대로 고해바쳤다.

얘기를 다 들은 민동철은 흐흐 웃었다.

“헐값에 와인을 처분하시겠다고요.”

“네.”

“어차피 헐값에 내놓을 거 굳이 어렵게 팔아치울 거 있습니까? 땅값에 비하면 와인 값이야 푼돈일 텐데.”

이라클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모르셔서 하는 말씀입니다. 창고에 저장된 와인은 아버지의 일평생이 담겨 있어요. 한두 푼으로 팔아치울 물건이 아니에요.”

민동철은 어이가 없었다.

그걸 아는 인간이 지금 몰래 와인을 팔아치울 꿍꿍이를 벌이고 있다니.

그는 헛웃음을 짓고는 이라클리에게 말했다.

“그럼 제값을 받으면 제법 두둑한 액수가 나온다는 겁니까.”

“네, 제값이 아니라 헐값에 팔아도요. 아마 창고에 가보시면 그쪽도 바로 알 겁니다. 5만 라리에 달하는 와인도 여러 박스가 있단 말입니다.”

5만 라리는 한화로 2천만 원.

그런 와인이 든 상자만 여러 개라니.

이거, 단순히 시골 헛간인 줄만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민동철은 더 구미가 당겼다.

“음, 그렇단 말이죠. 그럼 꼭 조대찬이 아니어도 되는 거잖아요?”

“네?”

“그런 귀한 와인을 대량에 헐값으로 판다면 다른 사람들이 앞다퉈 사들이려고 하지 않겠어요? 그럼 굳이 조대찬이 아니어도 되잖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이 기회를 저로서는 놓치기 어렵습니다.”

민동철은 입술을 비틀었다.

“어째서죠? 조대찬의 회사라고 해봤자 구멍가게 수준인데. 그 정도 구매력 가진 회사는 이 나라에도 많을 거 같은데요.”

“아버지가 저한테 이런 계약을 일임한 건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거든요.”

“어째서죠?”

“국내에서 이뤄지는 계약은 아버지가 거의 담당해요. 가까운 러시아 업체들과의 계약도 당신이 직접 하시죠.”

“그리고 얼른 사인하고 일을 저질러버리면 아버지도 어쩔 수 없으실 테니까.”

“네, 그래서 이런 기회가 왔을 때 빨리 결행해야 한다고요.”

민동철은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고는 재떨이에 꽁초를 비비며 말했다.

“근데 와인을 팔아치우는 거랑 농장을 갈아엎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 아닙니까?”

“그렇죠. 그래도 저 창고에 가득한 와인을 팔아치우면 설득하기는 한결 수월할 거예요. 미련이 안 남잖습니까.”

“그래도 완강하시면?”

“그러진 않을 겁니다.”

“어떻게 자신하시죠.”

“일단 부지로 선정이 되고 개발에 들어가면 아버지도 큰돈을 만지실 수 있으실 거예요.”

“그렇기야 하지만.”

“이제 연세도 연세시니 땡볕에서 일하시는 것도 그만하셔야죠.”

“그래도 계속 고집하시면 어떡합니까.”

“아마 많이 나무라시긴 하겠지만 결국 제 뜻을 따라주실 거예요.”

“그럴까요?”

이라클리는 씩 웃었다.

“첫째, 와인 창고의 와인들을 모두 잃는 건 농장의 역사를 잃는 거예요. 텅 빈 창고를 보시면 아버지도 살아생전 창고를 돌려놓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실 겁니다.”

“그럼 자연히 한풀 꺾일 수밖에 없다?”

“그렇죠.”

“둘째는요?”

“아버지는 절 사랑하시니까. 자식 이기는 부모 없잖아요.”

“아, 네…….”

민동철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이라클리는 쩝, 입맛을 다셨다.

“아무튼 그쪽이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있겠어요? 없다면 더 얘기할 필요가 없고요.”

“성격도 급하셔라. 도울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민동철은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이고 흡, 연기를 빨아들였다.

다시 방 안에 담배연기가 자욱하게 떠다녔다.

민동철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이거 뜻밖의 노다지를 만났다.

본업인 기자하고는 동떨어진 일이기는 했다.

그런데 이런 기회를 홀라당 날려버리기엔 아까웠다.

거기에 대찬하고도 엮여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더더욱 없다.

잠깐 바쁘면 좋은 품질의 와인을 무더기로 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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