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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305화 (304/556)

난 할 수 있어 305화

가까스로 입에 넣고 씹었다.

얼른 삼키느라 맛은 느끼지도 못했다.

그리골이 웃으면서 물었다.

“맛이 괜찮지요?”

“…예, 좋네요. 그래도 저는 익힌 편이 더 취향에 맞을 듯합니다.”

“하하, 괜히 별미겠소. 별미는 한 점까지만 맛있지. 이따가 꿩고기 스튜를 내드릴 테니 기대하시오.”

“그 편이 확실히 군침이 도네요.”

그리골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대찬이 꿩의 날고기에 질겁하는 동안, 윤이영은 짬짬이 휴식을 취하며 계속 촬영에 임했다.

윤이영은 물론이고, 이런저런 장비를 오래 들고 있어야 하는 촬영팀 사람들도 기진맥진한 기색이 역력했다.

휴식시간이 되면, 사람들은 일제히 그늘을 향해 흩어져서 살짝 얼린 수건으로 이마를 닦고 냉수를 마구 들이켰다.

대찬은 그늘 아래 바위 위에 살짝 걸터앉은 윤이영에게 냉수 한 잔을 건넸다.

“고생이 많다.”

“돈 받고 하는 건데 고생해야지. 물 말고 와인이나 한잔 줘봐.”

“낮술 하게?”

“당신은 낮술도 보통 낮술 한 게 아닌 거 같은데.”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티 나?”

“저기 백 미터 밖에서도 술 냄새가 진동을 하거든요.”

윤이영은 대찬에게 찌릿 눈빛을 쏘고 얼음을 탄 와인을 음료수처럼 대번에 들이켰다.

대찬은 윤이영에게서 잔을 넘겨받고, 손수건을 대신 건네주었다.

“땀 좀 닦아. 아휴, 에어컨도 없어서 더 힘들겠어.”

“얼른 끝내고 푹 쉬어야지. 오빠도 나 촬영하는 동안 거래 마무리 지어. 같이 움직이자.”

“알았어.”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차 한 대가 농장을 향해 들어왔다.

낡은 세단은 그리골의 집 앞에 멈춰 섰다.

윤이영에게 부채질을 해주던 대찬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부르릉, 시동 소리가 한 번 크게 울리고 꺼지자 집안에 있던 그리골이 밖으로 나왔다.

“왔구나.”

“저희 말고 손님이 오시기로 돼있었나요?”

대찬의 물음에 그리골은 푸근히 웃었다.

“피붙이도 손님이라면 손님이죠.”

“피붙이요?”

대찬이 그렇게 묻는 사이, 한 젊은 남자가 차에서 내려 그리골에게 웃으며 달려왔다.

“아버지!”

“이라클리! 어서 와라.”

둘은 기쁨의 포옹을 나눴다.

샬바도 아들이긴 마찬가지였는데, 그리골은 유독 이라클리를 더 반갑게 맞이했다.

대찬은 이라클리의 겉모습을 보고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샬바와 달리 이라클리는 말끔한 신세 그 자체였다.

머리는 단정하게 뒤로 넘기고, 몸에 딱 맞는 정장을 갖춰 입었다.

그는 웃으면서 대찬에게 악수를 건네며 능숙한 영어로 말했다.

“이라클리라고 합니다. 조대찬 씨 맞으시죠?”

“아, 저를 어떻게 아시죠?”

그리골이 대신 대답해주었다.

“내가 포도는 잘 키우는데 비즈니스에는 영 서툴러서.”

“아, 저 때문에 일부러 부르신 거로군요.”

그리골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겸사겸사 오랜만에 얼굴도 볼 겸.”

대찬은 웃으면서 이라클리의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라클리.”

“별말씀을.”

이라클리는 안경을 고쳐 쓰며 씩 웃었다.

이라클리는 조지아의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알아주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다른 겉모습만큼이나 형인 샬바와는 왠지 잘 어울리지 못했다.

샬바는 이라클리에게 짧은 인사만 던지고 안부조차 묻지 않았다.

이라클리도 그런 형을 별로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찬은 이라클리와 나란히 앉았다.

“형님과는 별로 친하지 않나요?”

“예, 뭐, 형이 그간 아버지 속을 많이 썩여오기도 했고, 그냥 저랑 잘 안 어울려요.”

“음…….”

이라클리는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여태 저 나이가 되도록 아버지한테 기생하면서, 사냥이나 하고 고기나 잡고 말이죠.”

“하하…….”

남의 형을 욕보일 수는 없으니 대찬은 맞장구 대신 멋쩍은 웃음만 지었다.

샬바는 그저 묵묵히 마당에서 꿩고기 스튜를 끓이고, 잡아온 멧돼지로 바비큐를 굽기 시작했다.

타닥, 타닥, 장작이 타는 소리가 기분 좋게 전해졌다.

대찬은 이라클리의 뒷담화보다 그쪽이 듣기 좋아 대화를 종결했다.

해가 뉘엿뉘엿 져갈 때쯤, 윤이영의 촬영도 끝났다.

샬바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장작이 타는 소리와 멧돼지가 익는 냄새를 즐기고 있던 대찬은 기진맥진한 윤이영을 보고 옆자리를 내주었다.

윤이영은 털썩 주저앉으며 대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대찬은 윤이영의 머리를 쓸면서 웃었다.

“수고했어.”

“중노동이야, 중노동.”

“그래도 내일까지만 여기서 촬영하고 모레는 시원한 곳으로 간다며?”

윤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북쪽의 산악지대로 간대. 거긴 좀 낫겠지.”

“그래, 내일까지만 고생하자.”

대찬이 윤이영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그때, 이라클리가 대찬에게 다가왔다.

“조, 거래에 대해서 얘기를 좀 나누고 싶은데…….”

“아, 그럴까요.”

대찬은 윤이영에게 웃으며 말했다.

“얘기 좀 하고 올게.”

“응, 아주 그냥 값을 후려쳐버려.”

“아유, 상도덕이 있지.”

대찬은 윤이영의 어깨를 살짝 쥐었다 놓고는 이라클리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들은 다시 밖으로 나오는 그리골과 마주쳤다.

그리골은 그들의 속내를 다 알고 있었다.

“일 얘기는 내일 하시죠. 만나자마자 돈 얘기하는 거 별로 안 좋습니다. 자, 오늘은 술과 음식만, 오케이?”

“하하, 그럼 그러시죠. 급할 건 없으니까.”

대찬은 그리골이 한아름 들고 나오는 와인을 나누어 들었다.

차차가 아니라 와인이라는 점에 대찬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골은 넉넉한 웃음을 지었다.

“와인을 시음이라도 해봐야 정확한 값을 매길 수 있지 않겠소? 오늘은 엄밀히 말하면 시음회요, 시음회.”

“단지 시음으로 끝날 것 같진 않지만… 그렇게 해두시죠.”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사람들은 바비큐가 익는 장작 주변에 모여 앉았다.

그리골은 관광청 관계자들에게 물었다.

“묵을 곳은 정해 놓으셨소?”

“아, 예, 근처의 호텔에.”

“텔라비는 트빌리시랑 달라서 호텔이라고 해봤자 영 궁색하지요?”

관계자는 하하, 멋쩍게 웃었다.

“뭐, 그렇지요, 아무래도.”

“그럼 한국에서 온 손님들은 우리 집에서 주무시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예? 아…….”

관계자는 잠깐 놀란 눈을 하다가 윤이영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영어로 의향을 물었다.

“그리골이 한국에서 온 분들은 자신의 집에서 머무시는 게 어떠냐고 하시는데요.”

“아, 저야 좋죠. 호텔에서 계속 지내는 것도 지루하거든요. 언제 조지아 가정집에서 자보겠어요. 오빠도 괜찮지?”

“그럼, 나도 호텔보다 이 편이 더 좋아.”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윤이영은 정작 자신과 동선이 같은 왈라비 사장의 의향은 물어보지 않았다.

왈라비 사장은 뚱한 얼굴로 윤이영에게 눈을 흘겼다.

윤이영이 오케이 사인을 보내자, 그리골은 흡족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집이 북적거리니 이 늙은 몸에도 활기가 돕니다. 자, 술들 마십시다.”

그리골은 흥겹게 술을 따라주고, 샬바는 퉁명스레 고기를 나눠주었다.

이라클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리골은 즐겁게 웃으며 잔을 들었다.

시끄러울 일이 없는 한적한 시골마을이었다.

그런데 모처럼 한국에서 온 손님들 덕분에 시끌벅적해졌다.

그리골은 기분이 아주 기꺼웠다.

“자, 우리 즐겁게 술을 마십시다. 이렇게 좋은 날 술을 안 마실 수 없죠.”

그렇게 술이 돌았다.

조지아의 음주예절은 한국과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달랐다.

이런 모임에서 건배사는 필수였다.

그 점은 한국과 같았다.

그런데 다른 것은 그 건배사의 길이 매우 멀고도 험난하다는 것이었다.

건배사가 짧지도 않았다.

한국 사람들은 ‘빨리빨리’를 신봉한다.

건배사도 줄임말을 선호한다.

다소 그게 유치할지라도.

그러나 조지아의 건배사는 한없이 느리고 유장하다.

한국의 건배사가 급하게 흐르는 상류라면 조지아의 건배사는 가는 둥 마는 둥 천천히 바다로 흐르는 하류다.

이 귀한 술과 음식을 내려준 신을 찬미하며 한 잔.

누구와 누구의 건강을 축원하며 한 잔.

누구와 누구의 친분이 돈독해지고.

누구와 누구의 가난이 극복되고.

누구와 누구의 사업이 잘 되고.

누구와 누구의 행복을 기원하며.

느릿한 건배사와 건배사가 끝날 때마다 잔을 비워야 되는 고된 의식이었다.

낮부터 독한 술로 속을 괴롭혔던 대찬은 이 느릿한 템포가 내심 반가웠다.

그렇게 술과 음식을 즐기고 있는데, 이라클리가 대찬에게 다가와 술을 권했다.

“한 잔 드시죠, 조.”

“아, 고맙습니다.”

대찬은 웃으면서 술을 받았다.

이라클리는 술을 따르면서 대찬에게 말했다.

“이따 자정쯤에 따로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예? 그렇게 늦은 시간에 굳이……. 날 밝은 다음에 얘기하시죠.”

대찬의 완곡한 사양에도 이라클리는 뜻을 꺾지 않았다.

“자정에 단둘이 얘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지금 따로 말씀은 안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조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시죠. 알겠습니다.”

얘기를 들어나 보는 정도야 못해줄 것도 없었다.

대찬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라클리는 빙긋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대찬은 그 잔에 자신의 잔을 챙, 부딪쳐주었다.

그렇게 날은 저물고, 자정 전에 자리는 파했다.

그리골의 집에는 대찬, 윤이영, 왈라비 사장만 남았다.

관광청 관계자들과 제법 숫자가 되는 촬영팀 스텝들은 호텔로 돌아갔다.

왁자지껄하던 집이 다시 고요해졌다.

종일 땡볕에서 촬영을 했던 윤이영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대찬은 윤이영을 침대에 눕히고 불을 끈 다음, 밖으로 나왔다.

이라클리가 대찬을 기다리고 있었다.

“밖에 나가서 이야기하시죠. 집 안에는 다들 주무시고 계시니까.”

“그러시죠.”

대찬은 웃으면서 이라클리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꺼져가는 모닥불 앞에 샬바가 앉아있었다.

대찬이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여태 안 잤어요?”

그러자 샬바는 대찬을 돌아보고 보일 듯 말 듯 고개만 끄덕였다.

대찬은 말이라도 더 몇 마디 붙여볼까 했지만, 샬바는 휙 고개를 돌려 다시 모닥불을 바라봤다.

대찬도 별 수 없이 다시 이라클리의 옆으로 돌아왔다.

이라클리가 대찬에게 말했다.

“형이 유독 붙임성이 없는 스타일입니다. 이해하시죠.”

“아, 네. 제가 이해하고 말고 할 게 뭐 있습니까.”

“형은 항상 집안의 골칫덩이였습니다. 언제까지 저렇게 살려고 하는지.”

이라클리는 쯧쯧, 혀를 찼다.

대찬은 그게 불편해서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굳이 이 시간에 얘기를 나누자고 하신 이유가 뭡니까?”

“아버지가 잠든 상태에서 얘기를 해야 하거든요.”

“비밀 얘기라도 됩니까?”

대찬은 가볍게 던진 말이었는데, 이라클리의 얼굴은 진지했다.

대찬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진짜 비밀 얘긴가 보네. 근데 아버님은 들으면 안 되고, 저기 형은 들어도 되는 얘긴가요?”

“형은 영어가 짧으니까. 입을 ‘밥 먹는 신체기관’으로 설명하면 아마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을걸요?”

“아, 예…….”

이라클리와 나란히 앉은 대찬은 잠시 침묵하다가 그에게 담배를 내밀었다.

“한 대 피우시겠습니까?”

“아, 전 안 피웁니다. 재밌죠. 사람들은 뭐 하러 돈 써가면서 건강 망치는 담배를 피워대는지.”

“하하…….”

대찬은 궁색한 웃음을 지으며 구깃구깃 담뱃갑을 안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었다.

이라클리는 대찬을 보며 말했다.

“아마 제 제안을 당신도 반길 겁니다.”

“얼마나 좋은 제안이길래 그렇게 장담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와인 가격을 얼마로 정해놓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계실 줄로 압니다.”

“심하게 후려칠 생각은 없습니다. 물론 필요 이상의 지출을 할 생각도 없지만요.”

이라클리는 웃으면서 말했다.

“생각하시는 가격의 10분의 1에 와인을 넘기죠. 그것도 보관하고 있는 전량을.”

“…네?”

대찬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골이 이라클리를 오랜만에 고향으로 부른 건, 대찬과의 협상을 맡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라클리는 지금 그런 아버지의 뒤통수를 당수로 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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