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할 수 있어-304화 (303/556)

난 할 수 있어 304화

윤이영의 손가락 끝에 더 힘이 들어갔다.

“인간이 뭐 이렇게 질겨!”

“억울해서라도 못 씻어! 네가 먼저 씻어!”

대찬은 몸을 비틀면서도 절대 윤이영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제 풀에 지친 윤이영이 일갈했다.

“초딩이야?”

“누가 누구 보고 초딩이래?”

나이에 맞지 않게 대찬과 윤이영은 티격태격했다.

둘은 침대에서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었다.

그러다 모두 지쳐 숨을 헥헥 내쉬었다.

대찬과 윤이영이 나란히 침대 위에 누워서 숨을 골랐다.

그러다 동시에,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둘은 배시시 웃고 서로를 껴안았다.

그리고 다음 전개는 대찬이 원하던 방향으로 흘렀다.

둘은 모이를 쪼는 새처럼 서로의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퍼부었다.

그리고 대찬은 슬며시 웃으며 윤이영의 얼굴을 쓸었다.

둘은 서로를 빤히 바라보며 웃었다.

그때, 누군가 호텔방의 문을 쿵쿵 두드렸다.

순간 대찬과 윤이영의 얼굴은 팍 김이 새 버렸다.

대찬은 얕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내가 나가볼게.”

“응.”

윤이영은 꽁한 얼굴로 입술을 비틀었다.

대찬은 문을 열었다.

공항에서 그들을 에스코트하던 조지아 관광청 관계자였다.

그는 대찬의 헝클어진 머리와 침대에 꽁한 얼굴로 앉아있는 윤이영의 표정을 보고 저간의 사정을 짐작했다.

그의 얼굴에 멋쩍은 빛이 떠올랐다.

“아, 이거 제가 타이밍을 잘못 맞췄나요.”

“아닙니다. 무슨 일이시죠?”

“휴식도 좋지만, 조촐하지만 저녁식사라도 대접해드리려고 해서.”

“아, 좋죠. 금방 나가겠습니다.”

“금방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관계자는 대찬을 향해 살짝 윙크를 했다.

대찬은 멋쩍게 웃으며 호텔방의 문을 닫았다.

대찬과 윤이영은 목욕재계를 하고 옷을 단정히 입고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은 둘을 인내심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조지아 관광청 관계자 서넛이 웃으면서 그들을 맞이했다.

왈라비 사장은 뒷짐을 진 채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잘 차려진 음식들도 그들을 맞이했다.

조지아 식으로 한 상 가득 차려진 진수성찬이었다.

러시아의 시인인 푸시킨은 조지아의 음식은 시와 같다고 극찬했다.

그 말은, 맛은 시의 값어치를 얼마나 매기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그래도 누구나 즐길 정도는 된다는 뜻이었다.

대찬은 잘 차려진 한 상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물론 해외에서 손님이 오면, 그것도 비즈니스로 얽힌 손님이 오면 융숭히 대접하는 게 당연하기는 했다.

그런데 준비한 음식이 비단 풍성하게만 차려진 게 아니었다.

한국 손님을 배려하려는 정성이 돋보였다.

어떻게 구했는지 조잡한 솜씨로 담근 김치와 고추장이 한국 사람들의 숫자에 알맞도록 놓여 있었다.

“이건 힝깔리라고 하는데, 한국의 만두와 맛이 비슷합니다. 아마 입맛에 맞으실 겁니다. 고수만 드실 수 있으시다면.”

관계자는 한국 사람들에게 그렇게 부연 설명까지 했다.

그들을 위해 일부러 사전에 정보를 습득했다는 뜻.

이건 조지아 사람들이 유독 인심이 후한 탓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만큼 관광청에서 윤이영의 가치를 높게 쳐주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마 텔라비의 포도농장과 커넥션이 있는 관계자는 대찬의 가치도 높게 쳐주는 듯했다.

그는 대찬에게 와인을 권하면서 말했다.

“텔라비의 포도농장에 연락을 해놨습니다.”

“아, 뭐라고 하던가요, 그쪽에서는?”

관계자는 빙긋 웃었다.

“자기 와인을 새로운 시장에 소개해주겠다는데 마다하겠습니까. 당연히 만족해하죠.”

“희소식이로군요.”

“내일 바로 텔라비로 이동하시죠.”

대찬은 웃으면서 그에게 잔을 내밀었다.

그러자 관계자 역시 잔을 내밀어 대찬의 잔에 부딪쳤다.

붉은 포도주가 살짝 일렁였다.

날이 밝자마자 일행은 텔라비로 이동했다.

양조용 포도는 일조량이 많고 습도가 적당한 기후에서 잘 자란다.

그 말인즉슨, 포도농장이 즐비하게 늘어선 텔라비는 더운 지방이라는 소리였다.

그래도 격식을 갖추겠다고 캐주얼 정장을 입었던 대찬은, 더 버티지 못하고 중도에 더위를 견디기에 나은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대찬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때, 관계자가 포도농장의 주인을 소개했다.

“자, 여기는 텔라비에서 와이너리를 운영하는 그리골이라고 합니다.”

“아, 반갑습니다. 조대찬이라고 합니다. 편하게 조라고 부르십시오.”

대찬은 그리골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골은 웃으면서 대찬과 손을 맞잡았다.

“반갑습니다. 모처럼 좋은 제안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그리골은 인상 좋은 노인이었다.

그의 콧수염은 마찬가지로 조지아 출신이자 이른바 강철의 대원수로 불리는 스탈린을 닮았다.

그런데 그리골의 인상은 냉혹한 스탈린과는 정반대였다.

언제나 술과 음식을 즐긴다는 그의 웃음에는 푸근한 인심이 내비쳤고, 풍만한 뱃살에서는 미련함보다는 온정이 느껴졌다.

그는 포도농장에서 홍보영상을 촬영해도 좋겠냐는 조지아 관광청의 요청을 흔쾌히 승낙했다.

“얼마든지! 필요하다면 중간에 포도 몇 송이 정도는 따먹어도 괜찮아요. 양조용이라 맛은 좀 덜하겠지만.”

그의 넉살 좋은 목소리에 사람들은 모두 웃었다.

“자, 우리는 우리 일을 해봅시다.”

관광청 관계자들은 포도농장을 찾은 목적인, 홍보영상 촬영을 시작했다.

조지아 관광청에서 제법 몸값 비싼 윤이영을 모셔왔다.

그만큼 한국 관광객을 유치하겠다는 열의가 돋보였다.

돈을 들인 만큼 그들은 모두 각오가 남달랐다.

그런 남다른 각오를 충족하기 위해 다른 자질구레한 출연자가 필요 없었다.

윤이영 하나면 일당백이었다.

대찬은 팔짱을 낀 채로 윤이영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역시 프로네.’

윤이영은 이 땡볕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녀는 하늘하늘한 하얀 원피스를 입고 포도밭을 누볐다.

하얀 원피스와 하얀 피부, 그리고 푸른 포도덩굴과 짙은 보랏빛의 포도송이가 화려하게 화면을 꾸몄다.

그리골은 마치 윤이영을 오랜만에 본 손녀처럼 흐뭇하게 바라봤다.

“아름다운 여인이오.”

“예쁘죠?”

“아마 당신 애인이겠죠?”

대찬이 살짝 놀라며 되물었다.

“언제 들으셨습니까?”

“꼭 그걸 들어야 아나. 여자를 보는 당신 눈빛에 사랑이 가득해서.”

대찬은 듣기만 해도 몸이 배배꼬이는 간지러운 말을 그리골은 아무렇지 않게 했다.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역시 연륜이 대단하시군요.”

“남자의 음흉한 눈빛을 감별하는 데 연륜씩이나 필요할까.”

“방금 전만 해도 사랑이 가득하다고 하시더니.”

“여자를 보는 남자의 마음은 똑같이 새까맣소. 음흉이냐, 사랑이냐를 감별하는 건 순전히 여자의 마음이니까.”

“하하…….”

대찬은 늙은 조지아 남자의 개똥철학을 오래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애정론을 설파하는 대신 그리골에게 말했다.

“그리골, 와인 수입에 대해서 얘기를 좀 나누고 싶은데.”

“하하, 한국 사람들 성격 급하다더니 정말 급하시군. 차차 얘기합시다. 아직 윤이영 씨와 어떻게 사귀게 됐는지도 못 들었어요.”

“아, 이런. 박자를 조지아에 맞춰놓는 걸 깜빡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골은 독한 담배를 뻑뻑 피우며 웃었다.

“모처럼 외국에 나왔는데 지친 심신을 조금 쉬어주는 것도 좋지 않겠소?”

“물론입니다.”

“자, 안으로 들어오시죠. 애인이 바쁜 틈을 타서 남자들은 시시콜콜한 연애의 추억이나 공유합시다.”

“그리골의 얘기도 들려주실 거죠?”

“물론! 저 포도밭에서 이뤄진 숱한 사랑의 얘기를 차근차근 들려드리지요.”

그 말에 대찬은 포도농장을 흘끗 돌아봤다.

포도농장이 왠지 야하게 보였다.

그리골은 흔들의자에 앉으려다가 대찬을 보고 말했다.

“조, 술 좀 하시오?”

“없어서 못 먹죠.”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건 달라요. 잘하시오?”

“못하진 않습니다.”

“좋은 기백이오.”

그리골은 씩 웃고는 어딘가로 걸어갔다.

잠시 후 그는, 술병 하나와 기이하게 생긴 뿔을 들고 나타났다.

대찬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건 뭡니까?”

“뿔잔이오. 술은 여기에 담아 마셔야 제맛이지.”

“술은 와인입니까?”

“노! 차차요, 차차. 술 좀 하는 사람들끼리 와인은 시시하지.”

“차차?”

“와인을 만들고 남은 포도를 증류해서 만든 술이오.”

“도수가 얼마나 됩니까?”

“가게에서 파는 건 40도 정도 하지만 집에서 만든 건 60도 정도. 아, 이건 집에서 만든 거요.”

그 말을 들은 대찬의 눈에 그리골이 들고 있는 뿔잔이 악마의 뿔로 보였다.

그리골은 다시 푸근한 노인의 웃음을 지으며 뿔잔을 건넸다.

“자, 마셔봅시다.”

대찬은 그리골이 건넨 뿔잔을 받고 나서야 그 위력을 실감했다.

뿔잔은 바닥이 없었다.

그래서 바닥에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그 말인즉, 한번 따른 술은 나눠 마시지 못하고 그대로 죽 들이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찬의 잔은 집채만 한 황소를 때려잡아 만들었는지 유독 우람했다.

그리골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잔에 독한 차차를 들이부었다.

‘아, 젠장…….’

이래서 어디 가서 술자랑은 절대 금물이다.

언제 어디서 괴물을 맞닥뜨릴지 모르는 일이거든.

그리골의 뿔잔도 만만치는 않았다.

양 뿔로 만들어 대찬의 것보다는 작았다.

그런데 이 양 뿔은 솔직한 곡선으로 만들어진 소뿔과는 달리, 여러 번 나선으로 꼬여 있었다.

그만큼 술이 많이 고인다는 뜻이었다.

‘돌겠네. 역시 세상은 넓구나. 중국에는 왕핑웨이, 조지아에는 그리골! 젠장.’

대찬은 속으로 배짱 좋게 술 자랑을 했던 자신을 자책하며 술을 받았다.

그렇게 햇볕이 쨍할 때부터 독주에 대찬의 정신이 멍해질 즈음이었다.

누군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피 냄새를 몰고 왔다.

은은한 술 향기에 비틀비틀하던 대찬의 정신이, 강렬한 피비린내에 즉시 각성되었다.

대찬의 눈에 총기가 돌아왔다.

대찬과는 달리 멀쩡하던 그리골은 피 냄새가 짙게 밴 남자를 평온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왔니.”

“네.”

둘은 조지아 말로 짧게 대화했다.

피 냄새를 몰고 온 이는 인상이 험악했다.

머리를 빡빡 밀고, 수염은 턱에만 길렀다.

잠깐 날름거리는 혓바닥에는 징이 박혀 있었고, 문신이 손바닥과 목젖까지 덮고 있었다.

그런 그가 손아귀에 꿩을 몇 마리 쥐고 있었다.

아마 밖에는 멧돼지나 노루 따위가 피를 흘리며 널브러져 있을 거 같았다.

대찬은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그는 대찬을 보더니 그리골에게 물었다.

“누구예요.”

“아, 한국에서 온 손님이다.”

그리골은 그렇게 말하고 대찬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제 아들자식입니다. 샬바라고 합니다.”

이에 대찬은 몸을 일으켜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샬바.”

“반갑소.”

샬바는 대찬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놓기만 했다.

목소리에도 별로 기꺼운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외모에 대한 편견은 없어야 한다.

그렇다지만 저렇게 이른바 양아치 종합선물세트 같은 외모를 해서야 편견이 없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대찬을 대하는 태도도 시큼털털하다.

이런 판이니 대찬이 샬바에게 호감을 느끼기란 어려웠다.

그리골은 콧수염을 잡아당기며 웃었다.

“원래 살가운 성격은 아니니 이해하시오. 그래도 나쁜 녀석은 아니니까.”

“아, 네. 저는 괜찮습니다.”

그렇게 샬바의 비주얼 쇼크에서 마음이 조금 진정되려는 찰나, 다시 샬바가 피 냄새를 풍기며 들어왔다.

그는 대찬을 무뚝뚝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음식 없이 술 먹어요?”

기초회화 수준의 짧은 영어로 물어오는 까닭에 더 차갑게 느껴졌다.

대찬은 겸연쩍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음식을 먹으면서 술을 마셔야지.”

그는 탁자에 텅, 꿩을 내려놓았다.

꿩은 모가지를 축 늘어뜨린 채로 탁자 위에 널브러졌다.

대찬은 질겁했다.

샬바는 흐흐 웃으며 즉석에서 꿩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나이프로 가슴살을 얇게 한 장 포를 떴다.

날 것의 꿩고기 포에 소금을 몇 알 솔솔 뿌리고는 대찬에게 내밀었다.

“자, 먹어요.”

“…이거를요?”

총을 맞은 동물의 고기는 비리다.

혈관이 터져 고기까지 피에 물드는 까닭이다.

그걸 굽지도 않고 소금만 뿌려 날로 먹으라니.

기생충 감염의 염려도 있다.

대찬은 별로 내키지 않았다.

근데 그리골까지 나서서 대찬에게 권했다.

“나름 별미요. 먹어봐요.”

“…….”

대찬은 영 찝찝했지만 양쪽에서 권하니 거절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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