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03화
대찬은 윤이영과 함께 비즈니스 클래스의 비행기 표를 끊었다.
돈이 좀 더 들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편하게 가려는 목적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좌석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이코노미석을 예약하면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을 것이다.
윤이영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저들끼리 숙덕거린다든지 말을 건다든지, 경우가 없는 치들은 신체 접촉까지 할 것이다.
그걸 감당하는 것도 불쾌하거니와, 윤이영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못할 짓이었다.
그렇다고 또 퍼스트 클래스를 끊으면 사치스럽네, 어쩌네 쓸데없는 뒷공론이 끓을 게 분명했다.
역시 비즈니스가 좋았다.
인천공항에서 카타르 도하까지 간 다음, 도하에서 다시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로 들어가는 일정이었다.
도하에서 트빌리시로 넘어가는 비행기에는 윤이영을 아는 얼굴이 별로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괜한 웃돈 얹지 않고 이코노미로 끊었다.
대찬이 윤이영과 함께 공항에 머문 건 파푸아뉴기니의 줄리아와 귀국하는 길에 조우한 뒤로 처음이었다.
대찬은 그녀와 함께 공항으로 향하면서 웃었다.
“그때랑 지금은 완전히 다르겠네?”
“음? 뭐가?”
“그때는 선글라스 안 껴도 사람들이 잘 못 알아봤잖아?”
윤이영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랬지.”
“지금은 선글라스 끼고 마스크 껴도 귀신같이 알아볼 거 아니냐구.”
윤이영은 대찬을 흘끔 바라봤다.
“그러겠지.”
“윤이영 출세했다, 출세했어.”
윤이영은 대찬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웃었다.
“출세했지, 그럼.”
“어우, 그런 건 좀 예고하고 해줄래. 심장 떨려서 사고 날 뻔했잖아.”
윤이영은 웃으면서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겨우 볼에 뽀뽀한 거 가지고 호들갑은.”
“너는 자기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고 있어야 돼.”
윤이영은 손가락을 오므렸다.
“오글거리니까 제발 그런 멘트는 좀…….”
대찬은 웃으면서 악셀을 밟았다.
홍승연은 한동안 극동일보 소유의 극동호텔에 머물렀다.
그녀는 양은냄비 같은 사람이었다.
쉽게 끓고 쉽게 식었다.
그런 그녀가 며칠씩이나 귀가하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분노가 들불처럼 일었다는 뜻이었다.
홍승연은 이불을 물어뜯었다.
서원웅은 홍승연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만 집으로 돌아오라고.
홍승연은 내가 알아서 들어갈 테니까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 말란다고 진짜 안 해?”
홍승연은 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세상일은 솔직한 마음으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명분이 있어야 한다.
그건 모략과 협잡으로 한국 사회를 주물러온 자신의 아버지이자 이 나라 최대 언론사의 사주가 귀에 인이 박히도록 해준 말이다.
‘명분을 줘야 할 거 아니야, 명분을…….’
내가 잘못했다고 애걸복걸하면 못 이기는 척 들어가 주려고 했다.
그런데 이건 목석도 아니고 연락하지 말란다고 진짜 안 한다.
그게 더 분하고 원통했다.
“그게 다 조대찬 그 새끼 때문이야…….”
홍승연은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대찬은 홍승연이 이를 가는지 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오랜만의 휴가에 설레는 마음으로 비행기에서 내릴 뿐이었다.
“이야, 날씨 좋다. 파푸아뉴기니는 좀 많이 더웠어, 그지? 적도 근처라.”
“거긴 로맨스보다는 서바이벌에 어울리는 곳이야.”
대찬의 말에 윤이영은 웃는 얼굴로 대찬을 올려다봤다.
그들과 동행한 이들은 왈라비 엔터의 관계자들이었다.
워낙 큰 건수이니 그 관계자들에는 왈라비 엔터의 사장도 끼어 있었다.
대찬과 사이가 영 좋은 편은 아니었던 그는, 대찬이 끼어든 것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제 왈라비 엔터는 윤이영의 말 한마디에 껌뻑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신세.
불쾌한 티를 낼 순 없었다.
하지만 대찬의 눈치가 왈라비 사장의 낌새를 금방 알아챘다.
그는 흐흐 웃으며 사장에게 말했다.
“너무 꽁해 계시지 마세요. 관광청 사람들하고 눈도장만 찍고 바로 사라져 드릴 테니까.”
“네? 아, 아뇨, 꽁해있긴요…….”
사장은 연신 헛기침을 했다.
대찬이 굳이 조지아 관광청 관계자들과의 만남에 끼겠다고 한 건, 다분히 비즈니스적인 이유였다.
조지아는 필래그룹이나 로튼 프룻츠에는 그다지 탐나는 시장이 아니었다.
한국과 조지아의 거리는 물리적으로도 멀고 경제적으로도 멀었다.
그래도 땅에 떨어진 게 십 원짜리라도 일단 줍고 보는 게 자본주의에 충성하는 인간의 행태였다.
조지아 정부 관계자들과 안면을 터놓아서 나쁠 게 없었다.
‘파푸아뉴기니하고도 게임하는데 조지아하고 못할 이유가 어디 있어.’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극에 달했을 때, 이런 말이 있었다.
자유주의 진영에는 프랑스 와인, 공산주의 진영에는 조지아 와인.
조지아의 와인은 국내에 별로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가치는 높았으니, 숨은 진주 격이었다.
여러모로 파푸아뉴기니의 커피와 비슷했다.
이미 파푸아뉴기니 산 커피로 쏠쏠한 재미를 봤던 대찬은 조지아의 와인에 흥미를 보였다.
관광청이 와인의 무역 따위를 관장하지는 않지만, 정부 쪽 인맥을 터놔서 나쁠 건 없었다.
조지아 관광청 관계자들은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반갑습니다. 한국의 아름다운 배우를 모시게 돼서 영광입니다.”
관광청 관계자는 푸근하게 웃으면서 윤이영을 반겼다.
그는 덥석 윤이영을 안으려고 했다.
그러자 윤이영은 재빨리 씩씩하게 악수를 건넸다.
“까마르조바(안녕하세요), 윤이영입니다.”
대찬은 윤이영의 재빠른 눈치에 흡족하게 웃었다.
관계자도 당황하지 않고 윤이영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그는 이어 대찬에게도 손을 뻗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대찬도 영업용 미소로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윤이영이 그에게 대찬을 소개해주었다.
“소속사 관계자는 아니지만, 저와 가까운 사이에 있는 분이에요. 한국의 큰 유통회사에 재직 중이고, 본인의 비즈니스도 경영하고 있습니다.”
“아, 가까운 사이라면 사랑하는?”
관계자의 물음에 윤이영은 웃으며 긍정했다.
“네, 생각하시는 게 맞습니다.”
“오, 그렇군요. 그저 연인 일정에 동행하시는 정도는 아니실 테고, 혹시 우리나라에 비즈니스적인 목적도 있으십니까?”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지아의 와인이 세계적으로 알아준다더군요. 그런데 아직 한국에는 조지아 와인이 생소합니다.”
“아무래도 그렇지요.”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제가 스타트를 끊어볼까 하는데…….”
대찬이 미끼를 던지자 관계자는 기꺼이 덥석 물었다.
“그렇습니까? 이거 잘 됐군요. 제 지인 중에 훌륭한 와이너리를 운영하는 사람이 있는데…….”
“혹시 한국 시장에 와인을 선보일 생각은 없으시답니까?”
“하하, 당연히 있죠. 다리를 좀 놔드릴까요?”
대찬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좋습니다. 기꺼이 그렇게 해드리죠.”
관계자는 대찬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넸다.
대찬은 그것을 받아 명함지갑 안에 보관했다.
아마 거래가 잘 성사된다면 관계자 역시 제법 짭짤한 커미션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관계자는 웃으면서 말했다.
“텔라비에는 훌륭한 포도농장들이 많습니다. 그 농장도 텔라비에 있죠.”
“그렇군요.”
관계자는 윤이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침 윤이영 씨의 관광청 홍보 촬영 장소 중에 텔라비가 있으니 함께 동행하면 되겠습니다.”
“잘 됐군요. 그러시죠.”
“자, 공항에서 너무 오래 서계시게 했군요. 일단 호텔로 모시겠습니다. 오늘은 여독을 푸시고, 내일 바로 텔라비로 이동하시죠.”
“좋습니다.”
대찬은 윤이영의 캐리어를 뺏어 자신의 것 위에 겹쳐 올리고는 공항 밖으로 나섰다.
윤이영은 빙긋 웃으면서 대찬의 어깨를 주물렀다.
일행은 웃으면서 트빌리시 공항을 빠져나왔다.
낯선 나라의 공항을 나와 새로운 공기와 마주하는 일은 항상 설렜다.
대찬과 윤이영이 트빌리시 공항을 빠져나가던 그때.
또 다른 한국 사람이 캐리어를 끌고 출국장을 나왔다.
그는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그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어, 나 지금 공항 도착했다. 걱정 마.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일 있으면 또 전화한다.”
그는 전화를 끊고 어딘가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대찬과 윤이영의 뒷모습을 끈질기게 따라갔다.
그리고 걸음은 그들의 종적을 뒤따랐다.
대찬 일행은 누군가 자신들의 뒤를 밟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
그저 오랜만의 휴가에 기분이 들떠있기만 했다.
게다가 이곳은 조지아.
서울 한복판이었으면 3초에 한 번씩 사인 요청을 받았을 테고, 지나가는 곳마다 무수한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그럴 일이 없었다.
윤이영과 대찬을 아는 사람은 이 땅에 그 누구도 없었다.
아마 극성맞은 한류 팬 정도나 윤이영의 이름을 알까.
대찬은 그 오랜만의 익명성이 더없이 반가웠다.
잠깐의 유명인 노릇도 좋기는 했지만, 역시 평범한 사람으로 남는 게 제일이었다.
대찬은 평소와 달리 잔뜩 들뜬 얼굴로 윤이영의 허리를 감쌌다.
그러면서 윤이영에게 말했다.
“이러고 있어도 아무도 신경 안 쓴다는 게 너무 좋아.”
“조대찬 씨, 언제부터 그렇게 사소한 거에 입이 째지는 사람이 됐어요?”
“사소한 거라니. 전혀 사소하지 않은데. 나한텐 중요해. 우리 윤이영 씨한테는 아주 사소한 일인가 봅니다?”
윤이영은 웃으면서 대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사실 나도 좋아.”
“급하게 수습하긴.”
“알면 좀 가만히 있자.”
둘은 킥킥 웃었다.
영문 모르는 운전기사는 해괴한 표정을 지으며 백미러로 둘을 흘끔 쳐다봤다.
대찬 일행, 아니 윤이영 일행에게 조지아 관광청은 가장 좋은 호텔의 가장 좋은 방을 내어주었다.
물론 대찬은 부록으로 딸려왔으니, 기꺼이 사비를 쓰려고 했다.
그러자 관계자가 말했다.
“어차피 윤이영 씨와 같은 방 쓰실 거 아닙니까? 편하게 쓰시죠. 이 정도 비용이야 저희가 부담하겠습니다.”
“하하, 이거 감사합니다.”
이런 넓은 아량은 과연 그의 본성일까, 아니면 거래의 커미션 덕분일까.
대찬은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대찬과 윤이영은 호텔 방에 돌아오자마자 짐도 풀지 않고 그대로 벌러덩 침대에 드러누웠다.
윤이영은 대 자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넋 나간 얼굴로 말했다.
“오빠 먼저 씻어.”
“너 먼저 씻어.”
“안 돼. 나 꼼짝도 못 하겠어.”
“나도.”
“빨리 씻어!”
대찬은 고개를 모로 돌리며 완강히 거부했다.
“못 움직인다고.”
“그래? 이래도?”
윤이영은 대찬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대찬의 위에 올라타 몸을 막 간지럽혔다.
이런 데 취약한 대찬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만해! 간지러워!”
“이래도 못 움직여? 이래도?”
대찬은 무방비 상태로 기습을 당해 한동안 윤이영에게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던 그는 윤이영의 손목을 확 붙잡더니 윤이영을 자신의 밑에 깔았다.
윤이영은 안간힘을 쓰며 대찬의 악력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대찬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만하라고 했지.”
“이거 놔!”
“먼저 씻는다고 하면 놔줄게.”
“흥,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대찬은 비열하게 웃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어쩔 건데요, 윤이영 씨?”
“나도 다 방법이 있지.”
“방법? 무슨… 읍…….”
윤이영은 양 손목이 붙들린 채로 대찬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갖다 댔다.
대찬은 미지근하게 닿는 감촉에 그만 스르르, 다시 무방비 상태로 되돌아갔다.
대찬은 이제 은근한 로맨스를 기대하며 달콤한 키스 다음의 것을 생각했다.
윤이영이 노리던 타이밍이었다.
윤이영은 무릎으로 대찬의 복부를 정확히 가격했다.
대찬의 눈이 커졌다.
“큭!”
“방심하지 말았어야지!”
대찬의 속박에서 벗어난 윤이영은 흐흐 웃으면서 다시 간지럼으로 제압했다.
대찬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절규했다.
“아, 진짜! 이럴 거야!”
“씻을 거야, 안 씻을 거야!”
“안 씻어! 못 씻어!”
대찬은 일본 순사에게 고문당하는 독립운동가처럼 완강히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