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02화
“법인카드? 법인카드를 빌려 썼어요? 총무팀에서?”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그 인간들한테……!”
서원웅은 홍승연의 말을 끊었다.
“아뇨, 중요해요. 법인카드를 당신이 왜 써요?”
“얼마 쓰지도 않았어요!”
“금액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 당신 와이프예요. 그것 좀 쓸 수 있지 이 상황에 꼭 그걸 따져야 직성이 풀리겠어요?”
“중요한 일이잖아요. 횡령이에요, 그거.”
“회계부에서 대충 수습하면 되잖아요. 그럼 나 잡아가라고 고발이라도 할 거예요? 당신이 그렇게 시킬 거예요?”
“그, 그건 아니지만…….”
“모든 죄는 들키기 전에는 죄가 아니에요.”
“…….”
“암튼, 그 막돼먹은 놈들이 당신이 회사 대푠데 그거 좀 썼다고 날 죽일 듯이 몰아세웠다니까!”
“여보,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서원웅의 그런 대답이 홍승연의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홍승연은 서원웅에게 눈을 흘겼다.
“지금 나 아니고 그 인간들 편드는 거예요, 지금?”
“여보…….”
“또 조 부장 그 인간 때문에 이러는 거지? 진짜 너무하네, 당신!”
“여보, 지금 조대찬이 중요한 게 아니고.”
“뭐가 안 중요해요! 조대찬이면 그저 천지분간 못하고 그저!”
“여보, 말 좀 가려서 해요. 천지분간 못하는 건 오히려 당신이야.”
서원웅의 입에서 나오는 말 치고는 이례적으로 수위가 높은 말이었다.
그만큼 서원웅도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자 홍승연의 얼굴이 싹 굳었다.
“진짜 정 떨어지게 이럴래요?”
“여보, 이건 누구 편을 들고 안 들고의 문제가 아니라니까.”
“됐어요. 나 가요. 오늘 호텔에서 잘 거니까 찾지 마.”
홍승연은 가방을 들고 신경질적인 걸음으로 대표실을 나섰다.
서원웅은 주저앉은 채로 깊은 한숨을 뿜었다.
“하…….”
쾅!
홍승연은 대표실의 문을 일부러 세게 닫았다.
그녀는 당연히 서원웅이 자기를 붙잡을 줄 알았다.
제법 긴 시간 대표실 문 앞에 서있었다.
그런데 서원웅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홍승연은 닫힌 문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기가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안 따라 나와? 그래, 그렇게 살아봐.”
홍승연은 주먹을 꽉 쥐고 대표실에서 멀어졌다.
한동안 감정을 다스리는 데 시간을 쓴 서원웅은 인터폰의 버튼을 누르고 비서에게 말했다.
“조대찬 부장 좀 올라오라고 해요.”
“네, 대표님.”
“아, 그리고 나 냉수 한 잔만.”
“…알겠습니다.”
서원웅이 냉수를 석 잔째 비웠을 때, 대찬이 대표실 안으로 들어왔다.
대찬이 늦은 게 아니라 서원웅이 그만큼 물을 빨리 마신 것이었다.
한바탕 난리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대찬의 얼굴에도 피로가 가득했다.
서원웅은 그를 보자마자 쓴웃음을 지었다.
“고생했다.”
“지금은 말 좀 편하게 해도 됩니까.”
서원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찬은 서원웅과 마주앉지 않고 그의 옆에 앉았다.
그는 넉 잔째 마시던 서원웅의 컵을 빼앗아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서원웅은 그를 보며 물었다.
“자세히 좀 얘기해줘. 무슨 일이야?”
“내가 진짜 남의 와이프, 특히 네 와이프 가지고는 뭐라 안 하려고 했는데.”
“…사태가 심각했구나.”
“지금 육두문자가 목구멍에 달랑달랑 걸려있다.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붙잡고 있어.”
“법인카드 어쩌고 하던데, 와이프는.”
“총무팀에서 삥 뜯다시피 법인카드 빌려가서 멋대로 긁어대고는, 회수요청에도 불응.”
“하…….”
대찬은 탕, 컵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몰랐어?”
“몰랐어. 알았으면 가만히 안 뒀지.”
“하긴. 그래, 그래 뭐 그럴 수 있어. 사모님이 법인카드 쓸 수야 있다고. 원랜 안 되는데 그렇게 하는 회사들도 허다하니까.”
“…….”
“근데 필래 비바체 사모님은 그러면 안 돼. 왠 줄 알지?”
서원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후계자로 낙점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괜한 구설수에 오르면 안 되니까.”
“응, 안심할 단계가 아니란 말이야. 한바탕 난리 피우고 안도의 한숨 쉴 때가 가장 위험하다고.”
“그래, 그렇지.”
대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홍승연 씨도 그런 자기 위치를 알고 있어야 해. 삐끗하면 자기만 넘어지는 게 아니야. 너도 2인3각으로 묶여 있다고.”
“미안해. 내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괜히 너한테 피해만 끼쳤다.”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나야 잠깐 뒤집어쓰면 그만이지만 너한테는 치명타가 될 수도 있어. 근데 홍승연 씨를 제어할 책임은 1차적으로 너한테 있어. 너 아니면 누가 저 왈가닥을 상대하냐.”
“알아. 부부는 일심동체라는데, 와이프 죄가 내 죄지, 뭐. 다음부턴 이런 일 없도록 할게.”
대찬은 서원웅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야 애초에 사고 칠 마음으로 들이받았지만, 옥 상무님은 괜히 일에 휘말렸어.”
“아…….”
“골치 아프게 됐지.”
서원웅은 대찬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이번 건은 내가 책임지고 무마시킬게.”
“무마시킨다니?”
“징계위원회 내 직권으로 안 여는 걸로 결정할 거야.”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되지.”
“안 된다니.”
“나나 옥 상무님이나 억울하긴 하지만 저지른 게 없진 않으니까.”
“그래도 와이프가 그렇게 난장판 친 걸 알면 모두 이해해줄 거야.”
“모두가 이해해도 안 돼. 사규는 괜히 있는 게 아니잖아. 나도 그렇지만 옥 상무님은 폭력까지 행사했다고.”
“…….”
주먹을 휘두르거나 발길질을 한 건 아니었지만, 접촉이 있었으니 폭력은 폭력이었다.
“이거 그대로 눙치고 넘어가면 내내 네 발목 잡을 거야. 확실하게 해. 나도 옥 상무님도 각오는 돼있으니까.”
서원웅은 한숨을 푹 쉬었다.
“옥 상무님은 정말 중징계 피하지 못할 거야.”
“옥 상무님께 덜 죄송할 수 있는 방법은 나한테 더 큰 중징계 내리는 거야.”
“네가 물리력을 행사하진 않았잖아?”
“응, 옥 상무님은 감봉 정도 받으시겠지?”
서원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럼 나한테는 정직 때려줘. 한 1개월.”
“너도 감봉만으로 끝날 수 있어. 말만 잘하면 경고 정도로 끝날 수 있고. 상욕을 한 것도 아니잖아.”
“사실, 나 이번에 휴가 좀 길게 내려고 했거든. 아예 정직 받고 푹 쉬자.”
서원웅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너 나중에 승진할 때 불이익 있어.”
“정직 1개월 맞는다고 나 승진 안 시키게?”
대찬이 익살스럽게 말하자 서원웅은 피식 웃었다.
“그건 아니지만.”
“인사고과 그런 거 나한테 무의미하잖아. 서원웅이 취하냐 버리냐 선택에 달렸지.”
“그럼 진짜 정직 때린다? 나중에 딴 소리 하지 마?”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해. 대신 카드는 확실하게 회수해줘.”
“…그건 당연하지. 와이프도 저지른 일이 있어서 버티지는 못할 거야.”
“그래. 너무 닦달하진 말고. 어쨌거나 극동일보는 들고 있으면 남들이 쉽게 못 덤비는 칼이니까.”
“알았어.”
서원웅은 씁쓸하게 웃었다.
홍승연은 집으로 가지 않고 극동일보 소유의 극동호텔의 스위트룸에 틀어박혔다.
그녀는 들끓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그러는 와중에 누군가 그녀를 찾아왔다.
필래 비바체에서 사람이 나왔다는 말에,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서원웅이 찾아왔다면 못 이기는 척 집으로 돌아가 줄 의향이 있었다.
근데 직원 하나를 달랑 보내서 화해를 시도한다?
‘장난해, 지금?’
홍승연은 더 부글부글 끓는 속으로 직원을 들여보냈다.
그녀는 직원을 아래위로 훑으며 말했다.
“뭐예요?”
“대표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나 집으로 안 가요. 데려갈 거면 직접 오라고 해요.”
“네? 아, 그게 용건이 아니고요.”
홍승연의 눈꺼풀이 잠깐 경련했다.
“그게 아니면 뭐?”
“갖고 계신 법인카드, 돌려받으러 왔습니다.”
“…뭐라고?”
홍승연은 기가 막혔다.
제발 집으로 돌아가 달라고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카드 뺏으러 왔단
홍승연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가요.”
“사모님.”
“안 나가요……?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나가요!”
“안 주시면 카드를 아예 해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가라고!”
직원은 순순히 돌려받기는 어렵다고 생각해 그대로 물러났다.
홍승연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때까지 자신을 이렇게 괄시했던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이런 푸대접을 하는 장본인이 자신의 남편이라니.
홍승연은 자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남편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은 의심의 여지없이 대찬이었다.
‘조대찬… 이렇게 날 괴롭혔다 이거지.’
홍승연은 이를 갈았다.
총무팀의 법인카드 정지.
폭행을 저지른 옥문영 상무, 감봉 2개월.
품위를 지키지 못하고 언어폭력을 자행한 조대찬 부장, 정직 1개월.
총무팀에서의 난리가 낳은 결과였다.
대찬은 정직을 당하고 가뿐한 마음으로 회사를 잠시 떠났다.
그렇다고 마냥 온전히 휴식에만 투자하지는 못했다.
선인장이 물 없이 햇볕만으로 잘 자란다지만 아예 물을 주지 않으면 말라버리는 법이었다.
로튼 프룻츠는 대찬이 깊숙이 개입하지 않아도 잘 크는 선인장이기는 했다.
커피수입 사업이 민승기의 진두지휘 하에 안정세에 접어들었다.
연구실에 틀어박힌 은오영 교수와 다르샨 싱의 머리털이 빠질수록 경제성 있는 배양육 사업을 향해 성큼성큼 큰 걸음이 내디뎌졌다.
대찬은 조지아로 휴가를 떠나기 전, 로튼 프룻츠 사무실에 출근했다.
업무를 보던 민승기는 대찬에게 눈도 마주치지 않고 물었다.
“우리 조 공동대표님이 여기까지 뭐 하러 오셨을까.”
“공동대표니까 우리 민 대표님하고 일 좀 나누려고 왔죠.”
“조지아 간다며. 빨리 휴가 보내러 썩 꺼지지 않고 일은 무슨.”
“그래도 양심이 있잖아요.”
“당신 양심은 중림대 연구실에 오또 오백 박스 보낸 것으로 이미 지켜졌어.”
대찬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은 교수가 오또만 오백 박스 샀어요? 이 인간 융통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네.”
“오또 타령하던 연구생은 삼시 세끼 오또만 먹는다더라. 불쌍하게 됐지.”
“저런 제가 괜한 짓을.”
민승기는 살피던 서류철을 다시 책꽂이에 꽂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민승기는 대찬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너, 서원웅이 마누라랑 한 따까리 했다며?”
“소식 한번 빠르네요.”
민승기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과를 모아놓은 곳으로 향했다.
“커피 한잔 줄까?”
“이제 파푸아 커피라면 아주 이골이 났어요. 그냥 유자차 마실게요.”
민승기는 유자차를 타서 대찬에게 내밀며 웃었다.
“서원웅이 나를 찾아와서 신세한탄을 다 하더라.”
“선배한테요? 나한테 오지 않고.”
“너한테 와이프 얘기를 털어놓으면 네 입에서 무슨 좋은 얘기가 나오겠어.”
“하긴 그래요. 원웅이도 답답하긴 한가 보네요.”
대찬과 민승기는 동시에 차를 후루룩 마셨다.
민승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엄하신 회장님의 명령이고 또 극동일보가 자기한테 도움이 된다는 걸 아니까 꾹 인내하는 모양이다만.”
“신혼이랑 인내는 진짜 안 어울리는 단어들이잖아요?”
“내 말이. 이래서 얼마나 가겠느냐고. 만약 이혼이라도 해봐. 남보다 못하지.”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혼이야 하겠어요?”
“내내 시시콜콜한 일로 시달리느니 요즘은 빠른 이혼이 정답이야.”
“제3자 둘이서 이혼 운운하는 것도 안 좋잖아요.”
민승기는 얕은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죽 답답하면 이러겠어. 마냥 남의 일이 아니야. 나도 혼기가 꽉 찬 걸 지나서 넘칠 지경이니까.”
“그렇게 치면 저도 해당되는 말이네요.”
민승기는 장난 식으로 대찬을 노려봤다.
“옆구리에 윤이영 끼고 있는 사람은 좀 빠지지?”
“하하…….”
“암튼 여기는 안심하고 푹 쉬다 와. 너 너무 무리했어.”
“무리하기는 선배도 마찬가진데요. 병원에서 나온 지 얼마나 되셨다고…….”
“너 다녀오면 나도 좀 쉴게.”
“얼른 다녀와야겠네요.”
“그러란 뜻은 아니고.”
대찬은 민승기와 웃으면서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