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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301화 (300/556)

난 할 수 있어 301화

이미 각오를 하고 온 대찬은 홍승연의 말장난에 휘말리지 않았다.

그는 웃으면서 김 차장을 바라봤다.

“차장님, 사모님이 왜 이렇게 뿔이 났어요?”

“저, 그게… 법인카드 때문에…….”

김 차장은 대찬이 뻔히 아는 말을 물어와도 처음 대답하는 것처럼 답변했다.

“법인카드가 왜요?”

“총무팀에서 사모님께 법인카드를 대여해드렸는데 반납을 안 하셔서요…….”

대찬은 홍승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시면 안 되죠, 승연 씨!”

대찬은 홍승연을 사모님이 아니라 승연 씨로 불렀다.

그게 또 홍승연의 성질을 건드렸다.

“승연… 씨?”

“네, 외부인이 총무팀 법인카드를 맘대로 유용하면 어떡해요. 승연 씨 그러다 쇠고랑 찹니다.”

“내가 누군지 몰라서 지금 그러는 거예요?”

“왜 몰라요. 알죠. 잘 알죠. 우리 친하잖아요.”

“누가 조 부장하고 친해? 그리고 승연 씨? 여기가 사석이에요? 말본새가 왜 그러지?”

“그럼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홍승연은 김 차장을 돌아보며 물었다.

“김 차장, 지금까지 날 뭐라고 불렀어요?”

“사모님이요…….”

홍승연은 다시 대찬을 바라봤다.

“나이가 열 살은 더 많은 김 차장도 저렇게 부르는데 왜 조 부장 혼자 삐딱선이에요?”

“김 차장님이 유독 예의가 바르신가 보죠.”

“조 부장.”

“존중을 받으시려면 먼저 존중해주셔야죠. 저한테 반말하시기에 사석인 줄 알았죠.”

“말장난하지 마요. 짜증나니까.”

“왜 이렇게 당당하세요? 지금 승연 씨는 회사 돈 맘대로 유용하셨거든요. 형사처벌 대상이에요. 아세요?”

“조 부장, 당신이 뭔데 여기 와서 설교질이야. 조 부장 총무팀 직원이었어요?”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는 승연 씨는 총무팀 직원, 아니 우리 회사 직원도 아닌데 여기서 뭐 하세요?”

“하, 진짜 말 안 통하네.”

“우리 통했네요. 방금 저도 그 생각 했는데.”

홍승연은 대찬을 쏘아보다가 실소를 터트렸다.

대찬은 홍승연과의 갈등을 피하지 않았다.

법인카드로 몇 천만 원 사적 용도로 사용하는 것, 시각에 따라 별 것 아닌 일일 수도 있었다.

아마 적지 않은 사모님들이 당연스레 그럴 것이다.

제동을 걸자면 총무팀이나 그 위의 옥문영 상무가 걸면 그만이다.

대찬이 관계할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대찬은 굳이 나섰다.

만일 여기서 수수방관한다면 홍승연은 계속 제멋대로 행동할 것이다.

서원웅이 직접적으로 홍승연을 통제하려 든다면 일은 꼬일 것이다.

필래 비바체에서 홍승연을 통제할 수 있는 건 대찬이 유일했다.

물론 홍승연은 자기한테 어깃장을 놓는 대찬이 어이없을 뿐이었다.

둘은 강 대 강으로 대치했다.

그 사이에 놓인 총무팀 직원만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치를 봤다.

그 시각.

옥문영 상무가 혁신경영팀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녀를 먼저 본 허운이 일어나서 꾸벅 인사했다.

“상무님 오셨어요?”

“어, 조 부장 자리에 없네? 어디 갔어?”

“잠깐 총무팀에 다녀온다고 하시던데요.”

“총무팀? 왜.”

허운은 이유를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옥문영 상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사모님, 사모님 하니까 아주 여기가 자기 안방인 줄 아네?”

옥문영 상무의 격한 반응을 보고 허운은 그제야 대찬의 당부를 떠올렸다.

“아, 맞다. 팀장님이 상무님한텐 말씀드리지 말라고 했는데…….”

“어디서 건방지게! 총무팀은 내 관할이야! 나한테 보고 안올리고 자기들끼리 쑥덕공론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해!”

옥문영 상무는 입에서 불을 토할 지경이었다.

허운은 슬그머니 자리를 찾아 앉으며 중얼거렸다.

“난 몰라…….”

옥문영 상무는 쿵, 쿵, 쿵, 쿵, 홍승연보다 곱절은 더 큰 발소리로 총무팀으로 쳐들어갔다.

그즈음 홍승연의 분노가 극에 달하고, 대찬도 슬슬 짜증이 동하던 참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총무팀이랑 알아서 얘기한다고요. 조 부장은 빠져요.”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찍어 누를 게 뻔한데 내가 어떻게 빠집니까, 이 시점에서?”

“왜 못 빠져? 지금 나한테 월권한다고 뭐라고 할 게 아니야. 월권은 그쪽이 하고 있지.”

“나는 최소한 목에 사원증 걸고 있습니다. 승연 씨 이 회사 직원이에요? 뭔데 남의 회사 법인카드를 자기 용돈처럼 씁니까? 극동일보 돈도 많은데 친정에 손 좀 벌리시죠.”

“남이사 여기 손을 벌리든 저기 손을 벌리든 무슨 상관이에요? 그리고 내가 직원은 아니어도 대표 와이프예요. 그거면 된 거 아닌가?”

“되긴 뭐가 돼요. 그리고, 반말하지 말랬지.”

조금만 놔두면 주먹까지 나올 듯 분위기가 험악해진 시점.

옥문영 상무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지금 여기서 뭣들 하는 짓거리야?”

대찬과 홍승연의 얼굴이 옥문영 상무의 그림자에 가려졌다.

옥문영 상무는 고리눈을 뜨고 대찬과 홍승연을 번갈아봤다.

그녀의 성질을 아는 대찬은 슬쩍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상무님 오셨어요.”

“조 부장, 허 과장한테 얘기 다 들었어.”

내가 얘기하지 말라니까!

대찬은 입술을 꽉 깨물며 속으로 허운을 원망했다.

옥문영 상무는 대찬을 대신해 홍승연을 쏘아봤다.

“이봐요, 사모님.”

“다, 당신은 뭔데요?”

홍승연은 옥문영 상무의 압도적인 외관에 본능적으로 주눅 들었다.

그래도 자존심은 있어서 아예 굽히진 않았다.

옥문영 상무의 시선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옥문영 상무는 거대한 몸집을 홍승연 쪽으로 한 발 가까이 들이댔다.

홍승연은 그 거리만큼 주춤 뒤로 물러났다.

“나 옥문영 상뭅니다. 그쪽이 위력을 행사해서 총무팀 법인카드를 멋대로 반출하고, 돈을 써재끼고, 반납도 안 하고 있다는데 맞아요?”

“마, 말씀이 좀 그렇네요?”

“뭐가 좀 그럴까요?”

“허락 맡고 빌려 갔고, 빌려 갔으니 당연히 돈 쓸 줄 알았을 거고, 반납은 차차 하려고 했거든요?”

“물정 모르는 극동일보 홍 씨네 여식이라지만 이게 잘못됐다는 걸 모르진 않을 거 아니에요?”

“그, 그게 상무님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내가 총무팀 상위부서 경영지원부문의 부문장입니다. 내가 상관없으면 누구랑 상관있어요?”

“......”

옥문영 상무의 말에 홍승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총무팀장 김 차장과 옥문영 상무의 말은 비슷했지만 위력이 달랐다.

옥문영 상무는 홍승연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는 홍승연을 똑바로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반납해요, 카드.”

“…내가 왜 그래야 되죠?”

“왜 그래야 되는지는 김 차장이랑 조 부장이 충분히 설명한 걸로 아는데요.”

“…싫어요.”

옥문영 상무는 피식 웃었다.

“싫어요?”

“난 그쪽이랑 생각이 달라요. 난 충분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아, 그러세요.”

홍승연도 여기서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단순히 법인카드를 내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여기서 밀리면 조대찬한테 밀리는 거야.’

옥문영 상무든 김 차장이든 그녀의 안중에는 없었다.

어차피 정년 되면 짐 싸 들고 회사 밖으로 나갈 사람들이다.

하지만 대찬은 달랐다.

직급은 상무보다도 두 단계나 낮은 부장이었지만, 대찬은 명실상부 비바체의 2인자였다.

서원웅과 서청수 회장이 그만큼 신임하고, 우리사주조합장 선거에서 도진석 전무를 손쉽게 찌그러뜨릴 정도로 사내의 신망도 얻고 있었다.

게다가 업무능력 또한 발군이었다.

그런 대찬이 자신에게 일부러 어깃장을 놓고 있었다.

만일 여기서 순순히 물러난다면, 훗날 서원웅이 필래그룹의 정점에 올라서도 자신의, 또 극동일보의 영향력이 대찬의 장벽에 가로막힐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그렇기에 홍승연도 이 몇 푼 안 되는 법인카드 때문에 벌어진 실랑이에서 반드시 이겨야 할 이유가 있었다.

대찬과 홍승연의 기 싸움은 옥문영 상무에게는 성층권의 싸움이었다.

대류권의 아랫공기를 마시는 그녀에게는, 그저 홍승연의 고집이 참을 수 없을 뿐이었다.

“빨리 카드 내놔요.”

“싫다고 했어요.”

“내놔요!”

옥문영 상무는 묵직한 뱃살을 홍승연에게 들이댔다.

홍승연은 사무실의 구석까지 내몰렸다.

“뭐, 뭐 하는 거야! 치워요! 몸뚱이 치워요!”

“카드 줘요.”

“일단 치우라고요! 배!”

“카드 줘요!”

“이거 폭행이에요, 알아요!”

“그러는 당신은 절도야, 절도!”

코끼리가 생쥐 한 마리를 밟아 죽이듯 옥문영 상무는 거대한 몸뚱이로 홍승연을 짓눌렀다.

이러다 정말 일을 치를지도 몰랐다.

대찬은 황급히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사, 상무님! 그만하세요!”

“야! 조대찬이! 네가 원하던 게 이거 아니야? 엉! 내가 대신 조져주잖아! 좋으면서 내숭 떨지 마, 새끼야! 비켜!”

“이러지 마세요, 상무님! 큰일 나요!”

“큰일은 벌써 났어, 저 여자 초상났어, 새끼야!”

대찬은 낑낑거리며 옥문영 상무를 홍승연에게서 떼 놓으려고 했지만 무소용이었다.

대찬은 급히 총무팀 직원들에게 외쳤다.

“뭣들 하세요! 빨리 와서 옥 상무님 좀 말려 봐요! 퓨즈 끊기기 전에!”

대찬의 구원 요청에 직원들은 우르르 달려와 옥문영 상무의 두 팔을 단단히 잡았다.

그 틈에 홍승연은 겨우 옥문영 상무가 만든 뱃살 감옥에서 탈출해 급히 총무팀을 뛰쳐나갔다.

옥문영 상무가 빽 소리를 질렀다.

“카드 놓고 가, 카드!”

홍승연이 달아나고도 옥문영 상무는 한동안 성질을 다스리지 못했다.

온몸이 뜨겁게 달궈진 채로 씩씩, 분에 못 이긴 거친 호흡을 뱉었다.

잠깐 옥문영 상무의 폭주를 말린 것만으로도 대찬은 팔뚝에 알이 배길 지경이었다.

대찬은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는 옥문영 상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럴 줄 알고 상무님께 따로 말씀 안 드린 거라고요.”

“미친년한테는 매가 약이야. 조잘조잘 재잘재잘 네가 따진다고 저년이 눈썹 하나 꿈쩍일 거 같아?”

“…그래도 이러면 중징계를 못 피해요.”

“까짓것 징계 때리려면 때리라고 해!”

“저도 징계 받을 텐데요.”

“조대찬이한테 징계가 무슨 의미가 있어, 엉?”

“…….”

옥문영 상무는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넘기며 총무팀장 김 차장에게 말했다.

“야, 김 차장.”

“네, 상무님.”

옥문영 상무의 부름에 김 차장이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바보냐? 이걸 왜 혼자 끙끙 앓고 있어?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그, 그게 아니고요, 상무님.”

“아, 됐어. 다음부터 이런 일 있으면 나한테 재깍재깍 보고해, 알았어?”

김 차장은 꼴깍 침을 삼켰다.

“아, 알겠습니다.”

“사모님이 카드 반납 안 하면 나한테 말해. 내가 대표실 쳐들어가서 우리 서 대표 멱살이라도 잡아갖고 카드 토하게 할 테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어떻게 보고드려요.”

“아, 차장씩이나 돼서 그 정도 강단이 없어!”

“이건 강단이 아니라…….”

강도 수준인데요.

김 차장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할 만한 말은 생략했다.

자포자기의 심정이 된 대찬은 주저앉은 채로 쩝, 공연한 입맛만 다셨다.

홍승연은 바로 대표실로 달려갔다.

그녀의 가슴에는 분노가 잔뜩 응어리진 상태였다.

“사, 사모님 지금…….”

“아씨! 서 대표 어딨어!”

“외근 나가셔서 아직…….”

“냉커피 갖고 와!”

홍승연은 카랑카랑하게 소리를 지르고 텅 빈 대표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한테 지랄이야.’

비서는 티스푼을 입 안에 들락날락 시키고 커피를 탔다.

서원웅은 꼬박 2시간 뒤에야 대표실로 돌아왔다.

건설현장에서 날리던 흙먼지가 땀에 엉겨 붙고, 날씨도 갑갑해 그렇잖아도 불쾌했다.

그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대표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가장 먼저 반긴 건 홍승연의 사나운 눈총이었다.

“어디 갔다가 이제 와요!”

“아, 나 건설현장에 잠깐…….”

“내가 아까 무슨 봉변을 당했는지 알기나 해요?”

“보, 봉변이라니? 무슨 일 있었어요?”

“아까 총무팀에 다녀오는 길이에요. 굴욕도 이런 굴욕이 없어.”

서원웅은 업무시간에 쳐들어와 다짜고짜 짜증부터 내는 그녀가 곱게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신혼의 단꿈이 남아있으니 짜증보다는 반려자를 아끼는 마음이 더 컸다.

서원웅은 홍승연의 옆에 앉아 등을 쓰다듬었다.

“무슨 일이에요?”

“조대찬 부장, 옥문영 상무, 그냥 저렇게 둘 거예요?”

“대찬이? 옥 상무님? 왜요?”

“내가 법인카드 좀 잠깐 빌려 썼다고 나를 아주 죽일 기세로…….”

그 말에 서원웅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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