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할 수 있어-300화 (299/556)

난 할 수 있어 300화

대찬은 홍은주에게 말했다.

“휴가 잘 다녀오시고요.”

“네, 팀장님.”

대찬은 다른 팀원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또 휴가 쓰실 분?”

나머지는 모두 잠잠했다.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수고들 좀 해주세요.”

다른 직원들의 휴가는 결재를 올리고 사인을 받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대찬이 회사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직급 이상이었다.

그렇기에 서원웅을 따로 찾아가 협의는 아니어도 통보는 해주어야 했다.

대찬은 대표실로 걸음을 옮겼다.

모퉁이를 돌면 대표실이었다.

그런데 모퉁이를 미처 돌기 전에 대찬은 누군가와 마주쳤다.

총무팀장인 김 차장이었다.

그는 대찬을 보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나이는 족히 열 살 넘게 차이나지만 대찬이 직급은 더 높았으니 깍듯했다.

“아, 조 부장님,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대표님 뵙고 나오는 길이신가 봐요.”

“뵈려고 했는데 못 뵙고 나오는 길입니다.”

“지금 대표님 안 계세요?”

김 차장은 떨떠름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필드 업 건설현장에 가셨대요.”

“열심이시네. 다음에 다시 와야겠네요.”

“네, 그래야죠.”

그렇게 말하는 김 차장의 얼굴이 평소와 달랐다.

어딘가 개운치 못했다.

하기야 직접 대표를 만나러 올 때는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인 경우가 잦다.

이 세상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직장에 있을 때 표정이 개운하지 않으니, 대찬도 딱히 개입할 의지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김 차장이 먼저 대찬을 붙들었다.

“저, 조 부장님.”

“네?”

“잠깐 커피 한 잔…….”

“아, 그러시죠. 1층 카페로 가시죠. 제가 사겠습니다.”

“아유, 아니에요. 제가 살게요.”

대찬은 거듭 손사래를 쳤다.

“김 팀장님 덕분에 땡땡이도 치고 얼마나 좋아요. 커피 한 잔 정도는 제가 사게 해주시죠.”

“하하…….”

대찬은 김 팀장과 마주 앉았다.

김 팀장은 기껏 대찬을 불러놓고 커피만 축냈다.

참을성 있게 들어주던 대찬이 먼저 얘기를 꺼냈다.

“커피 한 잔 하자시던 게 정말 커피 드시려고 말씀하신 거였어요?”

“아, 하하, 그건 아닌데…….”

김 차장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대찬을 불러내기는 했는데 얘기를 꺼내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대찬은 난산을 겪는 김 차장의 목구멍을 위해 산파 노릇을 해주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어차피 하실 말씀 아닙니까.”

“그럼 너무 무겁게는 말고, 가볍게 편하게 들어주십시오.”

“하하, 김 팀장님이 너무 망설이셔서 가볍게 듣기는 이미 글렀습니다.”

“이것 참.”

“어서 말씀하세요.”

김 차장은 입술에 침을 한번 바르고 입을 열었다.

“사모님 있잖습니까.”

“사모님이요? 우리 대표님 사모님? 홍승연 씨?”

“네.”

총무팀, 홍승연.

두 키워드만 듣고도 대찬은 김 차장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대강 짐작했다.

그는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커피를 마셨다.

김 차장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문제가 있습니다. 사모님 때문에.”

“문제가 뭐죠?”

“총무팀이 관리하는 법인카드 한 장을 빌려 가셔서는.”

“안 돌려준다는 거죠.”

“네.”

“애초에 사모님한테 법인카드 발급해주는 거 자체가 문제잖아요?”

친절한 투로 일관하던 대찬의 목소리에 짜증이 깃들었다.

그건 홍승연을 향하기에 앞서 총무팀을 꼬집는 말이었다.

김 차장도 받아칠 말이 궁색해 뒤통수를 긁적였다.

“예, 1차적으로는 저희 책임이 큽니다.”

“사모님께 법인카드를 대여하는 건 어렵다고 딱 잘라 말씀하셨어야죠.”

“맞습니다. 조 부장님 말씀이 맞아요.”

대찬은 한숨을 토하며 말했다.

“현실적으로 사모님 말씀을 거스르긴 어려우셨겠죠. 거기다 사모님도 그냥 사모님이 아니니까.”

“예, 궁색한 변명이지만 그렇습니다…….”

대찬도 김 차장의 현실적인 판단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다.

사모님이 어디 그냥 사모님인가.

남편의 위상을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리는 부류가 아니었다.

필래와 극동일보의 결합은 대등한 관계에서 이뤄졌다.

그러다 보니 홍승연은 대표인 남편의 위상에 더해, 오너 가문의 중요 파트너라는 이중의 위세를 떨쳤다.

그런 홍승연을 총무팀에서 제어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대찬은 팔짱을 끼고 김 차장에게 물었다.

“상황이 그런데도 팀장님이 직접 대표님을 뵈러 오셨다는 건, 정도가 좀 심하다는 뜻이겠죠.”

“…맞습니다.”

“얼마나 썼습니까, 그 양반이.”

“법인카드를 빌려 가신 게 3개월 전입니다. 지금까지 7천만 원 넘게 쓰셨습니다.”

대찬의 상상력 안에 있는 금액이었다.

대찬은 입술을 비틀었다.

“우리랑 사는 세계가 다르신 분이니까 용돈쯤일 수도 있겠죠. 근데 회사 입장에선 그렇게 봐줄 순 없죠.”

“네…….”

“세 달에 7천이면 일 년에 2억 8천. 대졸 사원 열 명 분의 액수예요. 홍승연 씨가 회사 돈을 맘대로 유용할 자격도 없는 걸 차치하더라도 그 돈만큼 회사에 이익을 가져다준다고는.”

“할 수 없죠.”

대찬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폐부에 공기가 팽팽하게 차는 느낌이었다.

대찬은 김 차장을 보고 말했다.

“왜 대표님을 직접 만나려고 하셨습니까? 팀장님하고 대표님 사이에는 옥문영 상무님이 계신데.”

“압니다. 결재라인 따라서 보고하는 게 맞죠.”

“근데 왜……?”

“특수한 케이스잖아요.”

대찬은 슬쩍 웃었다.

“특수한 케이스?”

“옥 상무님께 보고를 올리면 제 몸은 편하겠죠. 아마 대표님 멱살을 잡고서라도 일을 해결하시겠죠.”

“옥 상무님은 원래 그런 분이시니까.”

“그래서 보고를 못 올렸습니다.”

“왜죠? 팀장님께서 전전긍긍하던 문제를 대번에 풀어줄 구세주인데. 옥 상무님 성격 화끈하시잖아요, 아시다시피.”

“그 화끈한 성격이 마음에 걸려서요.”

대찬은 팔짱을 끼며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왜죠?”

“특수한 케이스잖습니까. 일을 크게 만들었다가는 옥 상무님 커리어에 치명타를 입을 수도 있어요.”

“팀장님이 이렇게 인정이 많으신 분인지는 몰랐네요. 이런 와중에 상사 커리어까지 걱정해주시고.”

김 차장은 칭찬인지 비아냥거림인지 모르는 대찬의 말에 기분 좋은 웃음도, 쓴웃음도 아닌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냥 제 성격입니다. 불편하거든요.”

“그런 위험을 감수하라고 옥 상무님이 차장님보다 월급을 더 많이 받는 거 아닙니까?”

“물론 그렇죠. 그래도 싫어요.”

“별나시네요.”

대찬의 말은 완연한 칭찬이었다.

남한테 떠넘길 기회가 있으면 자기 책임을 떠넘기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김 차장은 별종이었다.

대찬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부담 없이 남의 손을 빌릴 방법을 알려드릴까요.”

“제발 좀 알려주십시오. 머리 빠지겠습니다.”

“저한테 떠넘기세요.”

“예? 조 부장님께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홍승연 씨에게서 법인카드를 회수하세요. 그게 안 되면, 아예 해지해버리세요.”

“그, 그래도…….”

“옥 상무님 화끈한 성격 때문에 입지가 흔들릴까 봐 걱정되신다면서요? 제 성격이 화끈하던가요.”

“옥 상무님만큼은 아니지만 듣기로는 부장님도 한 성깔…….”

대찬은 성깔이라는 김 차장의 단어 선택에 피식 웃었다.

“그래도 제 위신을 해치면서까지 그러진 않아요. 보신주의자거든요, 전.”

“괜찮을까요?”

“네, 오늘 보세요. 팀장님이나 저나 연차랑 직급 따지면 비슷하잖아요. 오히려 제가 못하죠. 보직도 똑같이 팀장이고.”

“연차랑 직급이라면 그렇죠.”

“그런데 팀장님은 참다 참다 못해서 부담을 안고 대표님 뵈러 오셨죠.”

“네.”

“저는 오늘 장기 휴가 낸다고 통보하려고 왔습니다, 대표님께.”

“아…….”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저는 제 주제 이상의 혜택을 받고 있어요. 밥값은 해야죠, 안 그런가요?”

“부장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고맙긴 합니다만…….”

“기어코 싫으시다면 저도 하는 수 없죠. 하지만 괜히 저한테 폐 끼치기 싫으셔서 그러신 거라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부탁을…….”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회수조치 하겠다고 통보 후, 불응 시 카드 해지해버려요. 그럼 분명히 항의할 겁니다.”

“그러겠죠.”

“그때 저를 부르세요.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신세 좀 지겠습니다.”

“신세는요.”

대찬은 웃으면서 김 차장과 헤어졌다.

총무팀장 김 차장은 홍승연에게 빌려 간 법인카드를 반납하라고 요구했다.

당연히 홍승연은 가볍게 묵살했다.

김 차장은 준비된 다음 수순을 밟았다.

카드를 해지했다.

효과는 즉각 발생했다.

쾅, 쾅, 쾅, 쾅.

총무팀 직원들의 귀에는 점점 가까워지는 구두소리가 굉음으로 들렸다.

직원들은 바짝 긴장했다.

김 차장 역시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업무에 집중하는 척을 했지만, 가슴은 쿵쾅쿵쾅 다듬이질을 했다.

쿵.

구두소리가 멈췄다.

김 차장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홍승연이 사나운 도끼눈을 치켜뜬 채로 총무팀 사무실을 노려봤다.

“누구 짓이야?”

그녀의 목소리에는 잔뜩 가시가 돋쳐있었다.

홍승연의 잔뜩 뻗치는 짜증에 직원들은 목을 움츠렸다.

말단들은 나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총무팀장 김 차장은 숨을 한번 훅 들이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모님.”

“어, 그쪽이 그랬어요? 그쪽이 내 카드 막았어요?”

“사모님 카드가 아니라 회사 법인카드입니다.”

홍승연의 미간에 단단히 주름이 잡혔다.

“이봐요. 나 여기 대표 와이프야. 몰라요?”

“압니다.”

“근데? 그럼 법인카드 내가 쓸 자격 충분히 되는 거잖아요?”

“아니, 그 자격이…….”

“영부인도 대통령 전용기 타고 세금 쓰잖아요? 같은 차원의 문제 아닌가?”

“…….”

김 차장은 홍승연의 말을 받아치지 못했다.

논리는 차고 넘쳤지만 현실적인 힘의 논리에서 그는 완벽한 열세였다.

김 차장은 근처의 직원에게 슬쩍 눈짓을 보냈다.

직원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홍승연은 김 차장을 노려보며 닦달했다.

“왜 말이 없어요? 대답을 해봐요. 내 말이 틀려?”

“사모님… 그래도 법인카드는 엄연히…….”

김 차장이 홍승연에게 실컷 깨지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직원은 사내 메신저로 대찬에게 SOS를 보냈다.

-조 부장님, 지금 총무팀에 사모님 오셨습니다.

-지금 갈게요.

대찬은 바로 총무팀으로 향했다.

넉넉히 오십 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오십 보를 걷는 그 잠깐의 시간 동안, 김 차장은 홍승연에게 호된 질책을 받았다.

총무팀 사무실에 닿기도 전에 홍승연의 앙칼진 목소리가 대찬을 반겼다.

대찬은 김 차장에게 자기한테 떠넘기라고 호언장담했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성질머리가 더럽긴 진짜 더럽다니까.’

대찬은 심호흡을 하고 총무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홍승연의 목소리가 더 적나라하게 들렸다.

“내가 총무팀까지 와서 일개 차장하고 이렇게 입씨름이나 하고 있어야겠어요!”

“사모님, 그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지 말고!”

짜증이 극에 달한 홍승연은 머리를 싸쥐면서 꽥 소리를 질렀다.

마음의 준비를 마친 대찬도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짝 물러설 만큼 대단한 성량이었다.

김 차장은 그런 위세에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고 있었다.

사람이 좋아서 일단 자기가 해결하겠다고는 했는데, 배짱은 없었다.

김 차장은 홍승연에게 목숨 걸고 뻗대지는 못했다.

그러던 와중에 대찬을 발견하고 김 차장은 은연중에 웃음기를 띠었다.

그러자 홍승연의 눈이 뒤집혔다.

“지금 웃었어요?”

김 차장은 대답 없이 목을 옹송그렸다.

대찬에게 빨리 구원해달라는 표시였다.

대찬도 더 지체하지 않고 개입했다.

“사모님, 여기서 뭐 하십니까?”

대찬의 목소리에 홍승연의 얼굴에 짜증이 더 번졌다.

그녀는 휙 대찬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기 사무실도 아닌데 여긴 왜 왔어요, 조대찬 차장님?”

“이제 부장입니다.”

“아, 그래요? 차장이나 부장이나.”

홍승연은 가뜩이나 미운 대찬이 이 상황에 등장해서 더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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