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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99화 (298/556)

난 할 수 있어 299화

서청수 회장은 빙긋 웃었다.

“그건 경찰을 통해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그 편이 좋겠습니다. 그럼 이만.”

서청수 회장은 가볍게 목례하고 바로 차에 올라탔다.

그는 아주 멀쩡했지만 일부러 다리를 절었다.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았음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저, 저 인간…….”

백양옥 여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죽지 않은 것은 물론 자기가 배후에 있다는 것까지 알아냈다.

“망할 놈의 새끼가……!”

가능성은 단 하나.

박 선장이 돈을 꿀꺽한 그 더러운 입으로 음모의 전말을 고스란히 일러바친 것이다.

김 실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백양옥 여사에게 말했다.

“여사님, 일단 몸을 피하시죠.”

“젠장……!”

“비행기 티켓을 구해놓겠습니다. 바로 공항으로 이동하시죠.”

백양옥 여사의 눈에 눈물이 솟구쳤다.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어…….”

“경찰에서 움직이면 도리가 없습니다. 빨리 출발하시죠.”

“…이럴 수는 없어.”

보다 못한 김 실장은 백양옥 여사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녀는 납치되듯 자동차에 올랐다.

김 실장은 급히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백양옥 여사는 뒷좌석에서 애처럼 울었다.

서청수 회장이 던진 돌멩이는 큰 파문을 낳았다.

서청수 회장 독살설은 이제 백양옥 여사 살인미수설로 전환되었다.

서청수 회장은 전모를 밝히지 않았다.

기자들은 오히려 그쪽을 좋아했다.

완벽히 맞춰진 퍼즐로는 한 가지 기사밖에 못 쓴다.

그런데 퍼즐 한 조각만 있다면, 무수히 많은 예상과 추측을 던질 수 있다.

제멋대로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무수한 기사를 써낼 수 있으니 어찌 마다하겠는가.

서청수 회장이 완도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사이만 해도 엄청난 양의 기사가 포털사이트를 도배하다시피 했다.

경찰은 즉각 수사에 착수했다.

재벌 총수가 살인미수의 당사자였다.

아무래도 경찰의 움직임이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서청수 회장이 기자들 앞에서 생중계로 떠들어댄 덕에 관심을 두는 이목이 많았다.

꾸물거릴라야 꾸물거릴 수가 없었다.

박 선장은 별장에서 체포되었다.

박 선장은 김 실장과의 통화 녹음을 들려주었다.

김 실장에 대한 수배령이 즉시 떨어졌다.

문제는 김 실장과 백양옥 여사 사이의 관계였다.

김 실장은 자신의 단독범행이라는 진술을 절대 번복하지 않을 것이다.

경찰 수사의 성패는 최종적으로 이 사건의 몸통이 백양옥 여사라는 걸 밝혀내는 여부에 달려 있었다.

굳이 서청수 회장이 사사로운 힘을 쓰지 않아도 경찰은 백양옥 여사를 주목했다.

김 실장이 백 여사의 수족이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리고 수 억 원을 턱턱 쉽게 건넬 만큼 김 실장의 재력이란 게 대단하지 않음을 알았다.

결국 정황상 백양옥 여사가 몸통이었다.

관건은 물증.

경찰은 대대적으로 백양옥 여사의 주위를 털었다.

벽호문화재단과 벽호학원에 수사인력이 들이닥쳤다.

재단 직원들과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경찰들이 재단의 모든 자료를 압수수색했다.

그 과정에서 비자금 장부가 발견되었다.

차명계좌를 통해 김 실장에게 거액이 전달된 정황도 포착되었다.

백양옥 여사는 즉시 피의자로 전환되었다.

경찰은 인터폴에 협조를 요청하고 백양옥 여사의 행방을 쫓았다.

경찰은 중앙아메리카의 소국인 벨리즈의 한 휴양지에서 백양옥 여사의 꼬리를 잡았다.

경찰이 들이닥쳤을 때, 백양옥 여사는 별장 앞의 흔들의자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백양옥 씨.”

경찰들이 험악한 표정으로 접근했을 때, 백양옥 여사의 시선은 무기력 그 자체였다.

얇은 손목에 수갑이 차는 그 순간에도 백양옥 여사는 반항하지 않았다.

서청수 회장에게도 이 소식이 들어갔다.

장백주 실장이 바로 그에게 보고했다.

“회장님, 백 여사가 체포되었답니다.”

“…….”

서청수 회장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길고 복잡했던 인연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서청수 회장의 마음도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백주야.”

“네, 회장님.”

“앞으로 백양옥이 얘기는 나한테 안 해도 된다. 내가 먼저 물어보기 전까지는.”

“…알겠습니다.”

박 선장은 법망을 피했다.

서청수 회장은 그를 살인미수로 감방에 처넣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은 건 박 선장을 지극히 아끼는 마음 탓이 아니었다.

“구 여사 얼굴 봐서 자네를 그냥 놔두는 거야, 알아? 마누라한테 평생 속죄하면서 살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죄송하다는 소리는 더 듣고 싶지 않군. 자네랑 이렇게 마주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야.”

“…….”

죄송하다는 말을 더 못하게 되니 박 선장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서청수 회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를 내쫓았다.

대찬은 백양옥 여사, 그리고 서승학과의 인연이 짧았다.

그 짧은 인연은 오로지 악연으로만 점철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서청수 회장의 경우처럼 마음의 바닥에 씁쓸한 앙금이 남지 않았다.

도리어 더 호되게 탈탈 털지 못한 것이 아쉽기까지 했다.

필래지주와 계열사의 주가는 서청수 회장의 복귀와 동시에 원상복구되었다.

대찬이 사들였던 필래 비바체의 주식도 마찬가지였다.

대찬은 꽤 짭짤한 부수입을 올렸다.

대찬은 오른 만큼의 주식을 팔아치워 현금으로 바꿨다.

대찬과 오랜만에 만난 윤이영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 돈으로 뭐 할 거야?”

“글쎄, 윤이영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도배나 해줄까?”

윤이영은 얼굴을 찡그렸다.

“명품은 무슨. 협찬으로 충분해. 그런 쓸데없는 데다 돈 쓰려고 주식 판 거야?”

“왜 쓸데가 없어? 내 여자 치장 좀 해주겠다는 게 쓸데없는 거야?”

“자기는 5만 원짜리 시계 차놓고 누군 명품으로 도배를 해주겠대. 그럼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

“뭐라고 하는데?”

“저 사치스런 년이 제 욕심만 채울 줄 알고 남자는 비렁뱅이인 채로 놔둔다고 하겠지.”

그 말에 대찬이 발끈했다.

“지금 5만 원짜리 시계 찼다고 나더러 비렁뱅이라고 하는 거야?”

“사람들이 그런다는 거지, 사람들이. 내 생각이 아니고.”

윤이영은 큭큭 웃으면서 대찬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대찬은 웃으면서 윤이영을 꼭 껴안았다.

“일부는 사업 자금으로 좀 써야겠어. 자본이 달리는 편은 아닌데, 은 교수 쪽 연구실이 너무 자린고비더라.”

“자린고비라니?”

“그 밑에 연구생 하나가 간식으로 오또를 샀다나 봐.”

“응.”

“그랬더니 은 교수가 아주 노발대발하더래.”

윤이영은 풋 웃었다.

“왜? 왜 노발대발해?”

“연구비 아끼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더니 어떻게 오또를 살 수가 있냐고.”

“그럼 뭘 사야 안 화냈을까?”

대찬은 풋 웃었다.

“카나파이가 천이백 원 싼데 왜 카나파이를 안사고 오또를 사냐는 거지.”

“…뭐야? 구질구질하게.”

“그렇지? 그래서 품위유지비 명목으로 지원 좀 해주려고. 카나파이 대신 오또를 먹을 수 있는 품위.”

“그 양반도 참 어지간하시네.”

“뭐, 회사 돈을 아껴주는 건 감사한데 그렇게까지 할 건 아니지.”

윤이영은 웃으면서 말했다.

“나머지는?”

“차나 한 대 뽑으려고 하는데.”

“그래, 신차 좀 뽑아. 아버님 물려주신 차 몇 년 됐다고?”

대찬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12년.”

“이제 보내줄 때가 됐어. 노인학대야.”

“노인학대하지 말고 아예 고려장을 해라?”

“오빠는 그렇게 꼬치꼬치 따지는 버릇 좀 고쳐. 내가 고려장은 실은 없는 풍속이었는데 어쩌고 하면 좋겠냐고!”

“미안.”

“꼭 이런 타이밍에 순순히 사과해서 나만 나쁜 년 만들지.”

대찬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또박또박 받아치면 또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뭐라 할 거잖아?”

“아, 몰라.”

윤이영은 아예 대찬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대찬은 웃으면서 윤이영의 어깨를 슬슬 쓸었다.

잠시도 쉴 틈이 없던 며칠간의 긴장 끝에 찾아온 편안한 일상이 대찬에게는 더없이 소중했다.

대찬은 신차를 구입했다.

시계, 수트와 더불어 남자의 몇 안 되는 로망 중에 하나다.

대찬의 씀씀이를 생각하면 제법 큰 결단이었다.

대찬은 흐뭇하게 웃으며 차의 보닛을 아기 만지듯 살살 쓸었다.

그걸 보고 윤이영도 웃었다.

“암튼 남자들 다 똑같아. 여자들 명품에 사족 못 쓰는 것처럼 차라면 그저.”

“나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말이지.”

“지금 차 보는 눈빛이 나 볼 때보다 더 사랑스러운 거 알아?”

“아유, 그럴 리가.”

윤이영은 팔짱을 낀 채로 대찬과 마찬가지로 흐뭇하게 웃으며 차를 요리조리 뜯어봤다.

“좋다, 예쁘네.”

“옆에 윤이영 끼고 7번 국도 달리면 그 이상 더 바랄 게 없겠네.”

“그래? 그럼 말 나온 김에 드라이브나 나가자. 7번 국도는 아니더라도.”

“그러자. 타.”

신차는 기운도 좋게 시동이 걸렸다.

한창 한가한 도로를 내달리던 중, 윤이영이 대찬에게 말했다.

“이번에 큰 건수 하나 올렸잖아.”

“건수라면 건수지. 나 아니었으면 오늘쯤 회장님 49재였을 테니까.”

“그럼 휴가 좀 길게 내도 눈치 안 보이지 않을까? 회사 일 많이 바빠?”

대찬은 운전대를 잡은 채로 웃으며 윤이영을 흘끗 봤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사설이 길까?”

“이번에 조지아에서 초청장이 왔거든?”

“조지아? 미국 조지아 주?”

윤이영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말고, 러시아랑 터키 사이에 있는. 예전에 그루지야라고 했던 나라 있잖아.”

“아, 알아. 근데?”

“날짜는 긴데 일정이 드문드문 있어.”

윤이영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더 말하지 않았다.

알아서 행간을 짚으라는 의미였다.

대찬은 씩 웃었다.

“휴가 내볼게.”

“정말?”

윤이영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게 귀여워서 대찬은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요즘 회사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거든. 벌려놓은 일들을 실무 쪽에서 처리하는 기간이라. 우리 차기 회장님도 일이 손에 잘 잡히진 않을 테고.”

“그럼 같이 조지아 가는 거야?”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별난 나라만 다니게 된다니까. 조지아라.”

“좋다더라. 오빠랑 같이 간다고 하면 우리 소속사에서도 뭐라고 못할 거야.”

“왈라비는 완전 을이잖아, 너한테.”

“우리한테.”

두 갑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대찬은 윤이영의 뭉친 어깨를 가볍게 주무르면서 말했다.

“휴가 결정되는 대로 알려줄게.”

“응, 꼭 모든 일정 같이 안 해도 며칠간은 나랑 있어. 오빠 요즘 너무 고생했어. 좀 휴식도 취해야지.”

윤이영의 말이 옳았다.

지금껏 너무 열심히 달려왔다.

나 즐겁자고 하는 일이니 몸에 무리가 안 갈 거라고 자위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완도 일정을 마치고 온 대찬은 심신이 지쳐 있었다.

한번 심신을 환기해주는 것도 필요했다.

대찬은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팀원들에게 말했다.

“혹시 다다음 주에 휴가 내실 분 계세요?”

그러자 한태윤 차장이 대찬의 뜻을 간파하고 되물었다.

“다다음 주에 휴가 내시려고요?”

“네, 혹시 휴가 계획 있으신 분 계시면 감안해서 내려고 합니다.”

그러자 김산호가 웃으면서 말했다.

“팀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내려던 분들도 못 내시겠는데요.”

“왜, 김 대리 휴가 계획 있었어?”

“아뇨, 저는 아직.”

대찬은 팀원들을 보면서 말했다.

“계획 있으신 분들은 말씀하세요. 우리가 이런 일로 내외하고 그런 팀은 아니잖아요?”

“저 다다음 주 월요일에 휴가 계획 있었습니다.”

홍은주의 말이었다.

그러자 송희근 과장이 그녀에게 눈치를 줬다.

“휴가 계획을 말하더라도 사유를 밝혀야지. 그냥 휴가 쓴다고 쓰면 다야?”

홍은주가 나서서 냉랭한 반격을 가하기 전에, 대찬이 먼저 나섰다.

“과장님, 우리 사유 같은 거 안 밝히기로 했잖아요.”

“아…….”

“휴가는 쓰면 그냥 쓰는 거예요. 내 휴가 내가 쓰는데 구구절절 이유가 왜 필요해요.”

“그, 그건 그렇지만 부서장이 휴가 가겠다고 하는데 자기 휴가 관철시키려면 그래도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야…….”

“저 생각해주시는 건 고마운데 자꾸 휴가사유 말씀하시라고 하면 저도 궁색해지거든요.”

“궁색해지다뇨.”

“놀러가려고 휴가 쓰는데 사유 갖고 홍 대리 면박 주면 제가 뭐가 돼요.”

송희근 과장은 머쓱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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