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할 수 있어-297화 (296/556)

난 할 수 있어 297화

대찬의 체온이 닿자마자 구 여사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대찬의 가슴이 미어졌다.

물론 박 선장의 죄야 밉다.

그러나 구 여사에게 잘못은 없었다.

지금껏 쌓아온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으니 마음이야 오죽할까.

대찬의 눈에도 눈물이 어른거렸다.

그는 구 여사를 꽉 안아주었다.

지금껏 차분함을 유지하려던 구 여사의 몸이 대찬의 품에서 무너졌다.

서청수 회장의 주치의가 서울에서 급히 완도 별장으로 내려왔다.

서청수 회장의 상태가 위중하다는 거짓된 힌트를 주기 위함이었다.

서청수 회장은 주치의가 내려오자마자 웃으면서 말했다.

“우 박사, 바쁠 텐데 미안해. 그래도 당분간은 여기 좀 있어줘야겠어.”

“덕분에 휴가 얻은 기분입니다. 오히려 좋습니다.”

“자, 여기 와서 장기나 한 판 두지. 데리고 있는 친구가 똘똘하긴 한데 장기 두는 건 유치원생 수준이더구먼.”

서청수 회장은 대찬을 흘끗 보며 웃었다.

대찬은 겸연쩍게 웃었다.

서청수 회장은 우 박사와 장기를 두기 시작했다.

그는 완도에 머무르는 내내 이런 소일거리로 시간을 보냈다.

보안은 장백주 실장에게 맡기고, 나머지 일은 대찬에게 맡겼다.

대찬은 박 선장과 마주 앉았다.

그는 구 여사를 대할 때와는 달리 박 선장을 대할 때는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아무래도 좋게 봐줄 수가 없었다.

“박 선장님, 저희 쪽에 적극 협조해주셔야 선장님께도 유리합니다. 아시죠.”

“…알아요.”

“김 실장에게 전화를 거세요. 목소리가 떨려도 좋습니다. 떨리는 쪽이 오히려 더 좋습니다.”

“…걸어서?”

“회장님이 중태에 빠졌다고 전하세요. 길어야 사흘일 거라고.”

박 선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믿을까요, 그 쪽에서.”

“당연히 믿습니다. 그 말만 하시면 됩니다.”

대찬의 지시에 박 선장은 떨리는 손으로 김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실장은 신호음이 한 번 울리기도 전에 박 선장의 전화를 받았다.

“박 선장님.”

“기, 김 실장님…….”

“어떻게 됐습니까.”

이 통화는 대찬 역시 듣고 있었다.

그리고 녹음되고 있었다.

대찬은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

그 손짓에 박 선장은 입을 다물었다.

김 실장이 재차 물었다.

“어떻게 됐냐고 물었습니다. 회장님, 그거 드셨습니까.”

됐다.

김 실장이 서청수 회장의 독살에 관여한 사실이 저 말로 증명되었다.

대찬은 입술에서 검지를 떼었다.

박 선장이 대답했다.

“…네.”

“어떻게 됐습니까.”

“중태, 중태에…….”

“중태요? 목숨은.”

“사흘을 못 버티신답니다.”

박 선장의 대답에 김 실장은 잠깐 침묵하고 대답했다.

“좋습니다. 잘했습니다. 휴대폰은 바로 폐기하십시오. 우리가 더 연락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약속은 확실히 지킬 테니 염려 마시고요.”

“알겠습니다.”

김 실장은 먼저 전화를 끊었다.

대찬은 녹음파일을 확보하고 바로 박 선장의 휴대전화도 확보했다.

“박 선장님은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아시죠.”

“…알아요.”

김 실장은 백양옥 여사에게 그대로 보고했다.

서청수 회장은 길어야 사흘이다.

백양옥 여사의 표정은 묘했다.

기뻐하는 듯하면서도 슬픈 듯했다.

그녀는 김 실장에게 말했다.

“시장에 흘려. 힌트만 줘도 기자들이 개떼처럼 달려들 거야.”

“알겠습니다. 주가 폭락하면 확보해둔 현금으로 지분 매집에 들어갈까요.”

백양옥 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확보해. 뭐, 그 인간 지분 상속받으면 넉넉하긴 하지만 지분이 많아서 나쁠 건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서청규 사장에게는…….”

“서청규 그 말종하고는 이제 손 안 잡아. 우리 힘만으로 가능해.”

“알겠습니다.”

김 실장이 흘린 정보는 즉각 주가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필래지주의 주식이 뚝뚝 떨어졌다.

소위 증권가 찌라시를 통해 서청수 회장의 소문이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게다가 서청수 회장의 주치의인 우 박사가 급거 완도로 내려갔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소문은 걷잡을 수없이 번졌다.

기자들은 서청수 회장의 완도 별장으로 총출동했다.

‘처의 난’을 진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상태가 위중해졌다.

그가 소문대로 사망이라도 하면 필래그룹의 운명은 다시 안갯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기자들에게는 놓칠 수 없는 먹잇감이었다.

“벌써 부지런한 놈들이 대포를 들이대고 있습니다.”

장백주 실장은 서청수 회장에게 보고했다.

그의 말마따나 기자들은 대포 같은 카메라로 별장을 겨누고 있었다.

서청수 회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당분간 하늘 구경은 글렀구만.”

“답답해도 참으셔야 합니다.”

별장의 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검정색 커튼이 쳐져 있었다.

서청수 회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정도 불편이야 감수해야지. 차라리 비라도 시원하게 내렸으면 좋겠네. 소리라도 듣게.”

“아쉽지만 당분간 비 예보는 없습니다.”

“한 줄기 희망마저 꺾어버리는군.”

“기상청 타율이 별로 좋지 않으니 희망이 아주 없진 않습니다.”

“하긴 그래.”

그렇게 서청수 회장이 비 타령을 하는 사이, 대찬의 휴대폰이 울렸다.

최재한이었다.

대찬이 전화를 받자마자 최재한이 질문부터 던졌다.

“야, 너네 어르신 진짜 위중하시냐?”

“미안하지만, 노코멘트.”

“아니면 아니라고 했을 텐데, 진짜야? 진짜 위험해?”

“섣불리 추측하지는 마. 일단 노코멘트야. 내 입장 알잖아. 말 못 해줘.”

“알기야 알지만…….”

“조금만 참을성 있게 기다려. 특종 줄 테니까.”

이 이상 밀어붙일 수 없다는 건 최재한도 알았다.

그는 한발 물러섰다.

“알았다. 기다리고 있을게.”

“그래.”

대찬은 전화를 끊자마자 준비한 자료를 들고 서청수 회장에게 갔다.

그는 자료를 건네면서 말했다.

“회장님, 필래지주 주가가 15% 이상 빠졌습니다.”

“이거, 감동인데. 나 하나 죽었다고 이렇게 손 털고 나가다니.”

“회장님에 대한 신뢰도 신뢰지만, 서승학 전 사장에 대한 불신도 깊을 겁니다.”

“하기야 나 같아도 그 핏덩이가 나를 대신한다고 하면 투자금 바로 회수할 거야.”

“백 여사 측은 바로 매집에 들어가는 듯합니다. 벽호문화재단 소유의 부동산이 대부분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팔렸다고 합니다.”

서청수 회장은 얼굴을 뻣뻣하게 굳히며 고개를 내저었다.

“쯧, 멍청하긴.”

“우리도 매집에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청수 회장은 피식 웃었다.

“뭐가 그렇게 급해. 15% 가지고는 만족 못 하지. 이 서청수가 고작 15%짜리라고는 생각 안 한단 말이야.”

“예, 물론 그렇지만.”

“조금만 더 기다리자고. 백주야.”

“네, 회장님.”

“내 음식 갖다 주는 애들 옷 검은색으로 입혀라.”

“알겠습니다.”

어두운 색상의 복장은 서청수 회장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효과를 줄 것이다.

아마 주가는 더 곤두박질칠 것이다.

서청수 회장은 대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주식이나 좀 사두지? 이거 순 땅 짚고 헤엄치기 아닌가.”

“하하, 필래지주 대신 필래 비바체 주식이나 좀 사둘까 합니다.”

“비바체를? 왜? 비바체 주식도 떨어지긴 하겠지만 지주만큼은 아닐 텐데.”

대찬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우리사주조합원들하고 같이 비바체 주식을 사보려고 해요.”

서청수 회장은 대찬의 말뜻을 이해했다.

“놈들이 더 잘 속게 액션을 취하겠다는 거지.”

“네, 미력이나마 저도 힘을 보태려고요.”

서청수 회장은 익살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상황 끝나고 나한테 얼마나 뜯어내려고 이렇게 예쁜 짓만 하는 건가?”

“뜯어내다뇨, 무슨 말씀을.”

대찬과 서청수 회장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럼,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음, 나는 우 박사랑 장기 두고 있을 테니 천천히 다녀와.”

“알겠습니다.”

그렇게 떠나려는 대찬의 걸음을 서청수 회장이 붙들었다.

“대찬아.”

“네, 회장님.”

“나가면 기자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을 게다.”

“그렇겠죠.”

“가서 몇 마디 먹이 좀 던져주고 와라.”

“가장 먼저 회장님 생존 여부를 물을 겁니다.”

“그렇겠지. 살아있다고 해라. 안 그러면 나중에 왜 구라를 쳤느냐고 발광들을 할 테니까.”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별장에 오래 머무르시고 언론 노출을 꺼리시는 건, 몸이 다소 편찮으신 탓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지. 그렇게 해야지.”

대찬은 서청수 회장에게 인사를 올리고 별장 밖으로 나왔다.

그가 별장 밖으로 나오자마자 기자들에 완전히 포위되었다.

예견된 수순이었다.

대찬은 당황하지 않았다.

기자들은 자신들이 찾아낸 정보를 마구 기사로 써서 내보내고 있었다.

‘완도 별장에는 누가 남았나’ 같은 제목의 기사들도 게재되었다.

개중 대찬에 대한 내용도 실려 있었다.

그 기사는 대찬을 이렇게 소개했다.

-서청수 회장의 복심으로 알려져 있는 장백주 비서실장과 더불어, 조대찬 필래 비바체 부장이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조대찬 부장은 서청수 회장이 경영권 분쟁까지 불사하며 후계자로 내세운 서원웅 필래 비바체 대표의 최측근으로 꼽힌다.

그는 서 대표와 고등학교·대학 동문으로 입사 전부터 매우 친밀한 사이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월드몰 합병·SSM 사업 안착·PB브랜드 성공·필래유통 택배사업부 인수 등 필래 비바체의 급성장을 주도한 인물로 알려졌다.

그는 유명 배우인 윤이영과 교제 중으로, 한때 ‘커피남’이라는 별명으로 세간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이렇듯 대찬은 대중에게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언론인 사이에서는 이름이 분명히 각인된 존재였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기자들이 일제히 들이댔다.

“지금 서청수 회장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이미 사망했다는 추측도 나오는데, 이에 대해 뭐라고 답변하시겠습니까?”

“필래지주의 주가가 폭락하고 있는데 회사 측의 대응 방안은 무엇입니까?”

쏟아지는 질문에 대찬은 가벼운 웃음만 보였다.

그리고 짧게 대답했다.

“회장님께서는 몸 상태가 좋지 않으셔서 당분간 완도 별장에서 요양하실 계획입니다.”

“그럼 서청수 회장이 아직 생존해있다는 말씀입니까?”

“물론이죠.”

대찬은 서청수 회장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긍정했다.

그러자 기자들은 더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그럼 왜 언론 취재를 차단하는 겁니까!”

“오히려 여러분이 회장님의 요양을 방해하고 계십니다.”

“세간에는 서청수 회장님의 사망으로, 경영권 분쟁을 벌였던 백양옥 여사와 서승학 전 사장에게 지분이 상속될까 봐 은폐하고 있다는 의혹이 있습니다.”

“얼토당토않군요.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서청수 회장님은 사망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의혹을 불식시키고 싶다면, 서청수 회장은 건재하다고 말하는 편이 전략적이었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고 외치면 오히려 사람들은 코끼리를 생각한다.

닉슨 대통령의 신뢰도에 가장 큰 타격을 입혔던 것도 그가 외쳤던 말,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라는 한 마디였다.

그렇기에 회장이 죽지 않았다는 말은 오히려 의혹을 불러일으키기에 족했다.

그 의혹이 활활 타오르라고 대찬은 의식적으로 그렇게 답변했다.

“회장님이 건재하시다면 잠깐 밖으로 나오시면 안 됩니까?”

“안 됩니다.”

“이유가 뭐죠?”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요.”

“지금 필래지주의 주가가 곤두박질치고 있습니다. 회장으로서 여기에 적절히 대처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대찬은 웃으며 답변했다.

“제가 회장님이 아니라 자세한 답변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일시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금세 주가를 회복할 겁니다.”

할 말은 다 했다.

이걸로 서청수 회장이 고의로 사망설을 불러일으켜 주가를 갖고 놀았다는 의혹에 최소한의 방어선은 갖추게 되었다.

대찬은 기자들을 헤치고 나가 차에 올라탔다.

기자들은 대찬의 뒤에 따라붙었지만 대찬은 아랑곳하지 않고 악셀을 밟았다.

완도에서 서울로 향하는 고속도로는 텅 비어있었다.

신나게 밟으니 서울까지 금방이었다.

대찬은 비바체 사무실로 들어갔다.

실로 오랜만에 대찬이 모습을 드러내자, 직원들이 기자들처럼 달라붙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