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95화
그런 대찬의 복잡한 속내를 알 리 없는 구 여사는 그를 기특하게 바라보며 등을 툭툭 두드렸다.
“맛있는 거 많이 들고 가. 그래야 서울 돌아가서도 열심히 일하지.”
“그럴게요.”
구 여사는 흐뭇하게 웃고는 음식을 준비하러 안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남자들은 우르르 갑판 위로 올라갔다.
박 선장의 낚싯배는 바다의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서청수 회장은 박 선장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이봐, 왜 그렇게 죽상을 하고 있어?”
“예? 아, 아닙니다, 회장님…….”
“뭐 안 좋은 일 있나?”
“아유, 아, 안 좋은 일은요.”
대찬은 박 선장의 모습을 유심히 봤다.
자꾸 그쪽에 신경이 쓰여 낚시에 집중을 못했다.
그걸 바닷고기들도 알았는지 대찬의 미끼만 물지 않고 유유히 피해 갔다.
김태준 사장이 대찬의 텅 빈 아이스박스를 보고 웃었다.
그의 아이스박스에는 우럭이 한가득이었다.
“고기가 초보를 아는구만.”
“그런가 봐요.”
대찬은 어정쩡하게 웃었다.
“뭐야, 무슨 고민 있나?”
“아뇨, 고민은.”
“귀신을 속여.”
“정말 없어요, 고민.”
김태준 사장은 대찬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꼬치꼬치 캐묻는다고 속내를 나불거릴 위인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렇기에 김태준 사장은 더 묻지 않았다.
“나중에라도 털어놓을 생각 있으면 언제든지 털어놔.”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사장님.”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하란 말이야. 뚱해갖고 아랫입술 툭 튀어나와 있는 거 보기 어려우니까.”
그 말에 대찬은 웃으면서 냉큼 입술을 안으로 집어넣었다.
고기가 영 물지 않는 건 서청수 회장도 마찬가지였다.
김태준 사장은 서청수 회장 보고는 고기가 초보를 아네 어쩌네 말하지 못했다.
서청수 회장은 애꿎은 선장을 탓했다.
“박 선장, 오늘 좀 포인트가 이상한 거 같아.”
“그, 그런가요?”
“내가 재미를 영 못 보고 있잖아. 태준이 놈만 던지는 족족 물고. 이거 위아래도 못 알아보는 고기들만 득실거리니 이게 제대로 된 포인트야?”
김태준 사장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고기들이 죄다 반골 고기들만 모인 포인트인가 봅니다.”
“내 말이 그거야. 생선들 반란 모의하는 아지트일지도 몰라. 영 재미가 없구만. 오늘은 이쯤 철수하지.”
“그러시죠, 회장님. 어떻게 맨날 만선이겠습니까.”
“매번 잘 됐으니 오늘은 세금 낸 셈 치지. 그래도 세금은 항상 아까워.”
“기분 좋게 내는 거면 그게 세금이겠습니까. 기부죠.”
“태준이 말이 구구절절 옳아. 자, 이만 철수하자고.”
서청수 회장은 뱃머리를 다시 별장으로 돌렸다.
그렇게 별장으로 돌아갈 때까지, 대찬은 자꾸 박 선장을 흘끔흘끔 바라봤다.
어딘지 자꾸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
묵은 체증 같던 거액의 채무를 해결한 덕분에 구 여사의 표정은 밝았다.
그런데 가장 기뻐해야 할 당사자의 얼굴이 저렇다니.
역시 그의 채무를 일거에 해결해준 그 돈에는 찝찔한 대가의 책무가 묻어있는 게 분명했다.
낚싯배가 항구에 접안할 때쯤, 툭, 툭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졌다.
그걸 보고 동행한 장백주 실장이 서청수 회장에게 말했다.
“회장님이 역시 선견지명이 있으십니다. 뭍에 올라오자마자 비가 오네요.”
“아무튼 백주는 틈만 나면 아부를 해요.”
“아부는 없는 말을 지어내야 아부죠. 있는 사실을 말하는데 왜 아부가 됩니까.”
서청수 회장은 기분 좋게 웃으며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박 선장이 얼른 그에게 우산을 씌워주었다.
서청수 회장을 오래 모신 구 여사는 날씨가 꾸물꾸물한 것만 보고도 남자들이 금세 집안으로 기어 들어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기실 선견지명이란 서청수 회장보다는 구 여사에게 가당한 말이었다.
구 여사는 이미 한 상 가득 안주를 차려놓고 있었다.
술은 이가 시리도록 차갑게 해놓은 상태였다.
“어서들 앉으세요.”
“역시 구 여사가 센스가 좋아.”
“당연하죠.”
그렇게 또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대찬은 매형인 서인태 차장과 나란히 말석에 앉았다.
서인태 차장은 대찬보다도 이 자리를 더 어려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기도 먹어본 놈이 맛을 안다고 했다.
대찬이 서청수 회장의 배낚시에 동행한 건 이번이 세 번째였다.
그런데 서인태 차장은 서청수 회장의 조카임에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니 자세가 아무래도 딱딱했다.
그는 난처한 얼굴로 대찬에게 속닥거렸다.
“처남, 나 토할 거 같아.”
“아직 술도 안 드셨는데 왜 그러세요. 어려워하실 게 뭐 있어요. 회장님이 아니라 큰아버지라고 생각하세요.”
“생각을 그렇게 하려고 해도 그렇게 안 돼서.”
대찬은 빙긋 웃었다.
“그럼 저랑 둘이 마신다고 생각하세요. 어차피 윗분들은 윗분들끼리 드시느라 정신없으시니까.”
“그래, 그 편이 좋겠어.”
서인태 차장은 미소를 지었다.
장백주 실장이 와인 한 병을 꺼냈다.
서청수 회장이 즐겨 마시는 와인이었다.
한두 방울 내리던 비는 이내 장대비가 되어 쏴아, 시원하게 쏟아졌다.
지붕에 맹렬하게 부딪치는 빗소리에 서청수 회장은 웃음을 지었다.
“술 마시기 좋은 날이구만.”
“그렇습니다, 회장님. 분위기가 딱입니다. 한 잔 받으시죠.”
“음.”
그렇게 술이 몇 순배 돌았다.
장백주 실장의 와인은 바닥을 드러냈다.
서청수 회장이 구 여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구비해놓은 것 중에 어울리는 술이 있나?”
“아르메니아 꼬냑 어떠세요, 회장님.”
“좋지. 그거 한잔 하지.”
“알겠습니다.”
구 여사가 술을 가지고 오려고 일어나자, 내내 구석에서 잠자코 있던 박 선장이 입을 열었다.
“회장님, 와인 다음에 꼬냑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그래? 안 좋아?”
“네, 너무 서양 술만 마시면 속이 느글거린다니까요.”
서청수 회장은 흐흐 웃었다.
“고기 잡는 건 박 선장이 프로지만 먹는덴 구 여사가 프로야. 참 별일이구만. 박 선장이 마누라 선택에 딴죽을 다 걸고.”
“하, 하하, 그게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
“예, 잠시만요.”
박 선장은 어딘가로 주춤주춤 걸어갔다.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웠다.
대찬은 의구스럽게 그를 바라봤다.
‘있어, 있어, 뭔가 있어…….’
박 선장은 냉장고에서 페트병 하나와 소주 여러 병을 들고 왔다.
서청수 회장이 넌지시 바라보며 물었다.
“그게 뭔가?”
“이게요, 영지버섯 물입니다, 영지버섯 물.”
“영지버섯?”
“네, 산에서 채취해갖고요, 볕에 잘 말려갖고요, 엑기스를 뽑아온 겁니다.”
“그거 약효가 대단하겠군.”
박 선장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영지버섯이 십장생 중에 하나 아니겠습니까. 드시고 만수무강하십시오, 회장님.”
“얘기를 들으니 확실히 꼬냑보다는 이쪽이 좋겠어.”
서청수 회장이 허허 웃으면서 말하자, 구 여사도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인간이 저런 비밀무기를 준비해놨을 줄은 몰랐네요. 이번엔 제가 졌어요, 회장님.”
“허허허허, 구 여사까지 두 손 두 발 다 드니까 더 구미가 당기네.”
모두가 웃는 와중에 대찬만 심각했다.
그는 박 선장이 들고 있는 영지버섯 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박 선장에게 누군가 돈을 주면서 대가를 요구했다.’
박 선장은 어정쩡하게 웃으면서 영지버섯 주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소주에 저 엑기스를 섞는 것.
맑은 소주에 짙은 황토색의 엑기스가 섞였다.
‘박 선장에게 몇 억씩이나 쥐여 주면서 득 볼 일이 뭐가 있을까. 배 한 척이 전부인 양반인데. 그 돈이면 저 배를 사고도 남을 텐데.’
만약 정말 선심 쓰는 독지가에게 돈을 받았으면 구 여사에게 굳이 숨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박 선장은 그저 훔친 돈은 아니라고 둘러댔을 뿐, 자금의 출처를 아내에게도 밝히지 못했다.
‘박 선장의 자산이라고는 어선 한 척, 그리고…….’
대찬의 시선은 서청수 회장에게로 향했다.
‘서청수 회장을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다는 사실, 그 인연뿐.’
박 선장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서청수 회장에게 술을 따랐다.
서청수 회장이 빙긋 웃었다.
“뭘 그렇게 떨어? 나랑 한두 해 본 사이도 아니면서 오늘따라 유독 어려워하는군.”
“하, 하하… 어른을 모실 땐 초면이든 오래 봤든 어려워해야 잘 모시는 법이죠.”
“틀린 말은 아니다만.”
대찬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수 억 원을 쾌척하는 재력가가 굳이 서 회장과 안면을 트겠다고 박 선장 같은 이에게 돈을 허비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 돈이면 더 나은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영롱한 빛깔의 영지버섯 주가 서청수 회장의 잔에 꼴꼴 흘러 들어갔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박 선장을 통해 도모하려는 건…….’
서청수 회장은 술잔을 흐뭇이 바라봤다.
“오늘 잠 못 자겠구만. 보기만 해도 기운이 솟아.”
대찬의 시선이 술잔에 꽂혔다.
‘설마.’
그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서청수 회장은 기분 좋게 웃으며 술잔을 자기 쪽으로 가까이 가져갔다.
그때 대찬이 벌떡 일어났다.
“음?”
좌중의 시선이 일순 대찬에게 쏠렸다.
곁에 앉은 서인태 차장의 눈이 커졌다.
그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대찬을 말렸다.
“왜 그래, 처남……!”
대찬은 서인태 차장과 알고 지낸 이후 처음으로 그의 말을 묵살했다.
그리고는 저벅저벅 서청수 회장의 곁으로 걸어갔다.
장백주 실장의 얼굴이 구겨졌다.
“야, 너 뭐 하는 거야.”
대찬은 대답하지 않고 서청수 회장에게 말했다.
“회장님.”
“엉?”
“오늘 박 선장님이 수고하셨는데, 먼저 한 잔 주시죠.”
“뭐……?”
어디서 건방지게!
대찬의 행동은 비상식적이었다.
박 선장이 서청수 회장에게 술을 먼저 따랐다.
애초에 박 선장에게 먼저 마시게 하는 건 서청수 회장에게도, 박 선장에게도 예의가 아니다.
하물며 그걸 결정하는 건 전적으로 서청수 회장의 재량이다.
최대한 양보하더라도 그런 얘기를 김왕장이 올리면 올렸지 부장 따위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대찬을 각별히 아끼는 서청수 회장도 대찬의 이런 언행이 황당하기만 했다.
장백주 실장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알아서 이런 짓을 벌여주니 고맙기까지 했다.
“조대찬이, 너 미쳤냐?”
“결례인 거 압니다만. 그렇게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대찬은 서청수 회장을 바라보며 당당하게 요구했다.
서청수 회장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는 말없이 대찬을 빤히 바라봤다.
저럴 녀석이 아닌데.
아무 이유도 없이 저렇게 뻗댈 녀석이 아닌데.
‘…그럼 이유가 있어서 저러는 것인가.’
서청수 회장은 박 선장을 바라봤다.
박 선장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서청수 회장은 천천히 그에게 잔을 내밀었다.
“…조대찬이 말이 맞아.”
“회장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이건 아닙니다. 이게 무슨……!”
장백주 실장의 말에도 서청수 회장은 박 선장에게 내민 잔을 거두지 않았다.
“수고 많았어, 박 선장. 한 잔 해. 먹고 오래 살아. 그래야 나도 오래 배 얻어 타지.”
“회, 회장님…….”
“어려워할 거 없어. 마셔.”
박 선장은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청수 회장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안 마실 거야?”
“제, 제가 어떻게 회장님 드릴 술을 먼저 마시겠습니까.”
“왜 못 마셔. 내가 주는 술 안 마시는 게 더 무례한 거야. 안 그런가?”
지금껏 잠자코 있던 왕윤수 사장이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회장님. 박 선장, 사양 말고 들지.”
“아, 아니 그, 그게…….”
이쯤 되니 대찬을 깔아뭉갤 궁리만 하던 장백주 실장의 시선도 박 선장을 향했다.
박 선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쌕쌕 내뱉었다.
서청수 회장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그는 잔을 확 내팽개치며 일어났다.
“왜 못 마셔!”
“회장님!”
“왜 못 마시느냐고! 왜!”
박 선장은 어깨를 움츠리며 서청수 회장의 앞에 엎드렸다.
“아이고, 회장님, 회장님…….”
서청수 회장이 장백주 실장에게 말했다.
“지금 부를 수 있는 경호 인력 다 동원해. 별장 안팎으로 누구도 못 드나들게 경계해.”
“알겠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박 선장을 내려다보며 으르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