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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94화 (293/556)

난 할 수 있어 294화

뉴욕 주 검찰은 폴 로젠버그의 배임에 대해 대대적인 수사에 들어갔다.

소식을 듣고서야 서청수 회장의 오래 묵은 화병이 씻은 듯 완치되었다.

돈의 힘이란 이리도 짜릿한 것을.

화이트이글의 공식적인 철수로 서청규 사장의 입지도 줄어들었다.

한때 서청수 회장의 아성을 위협하며 그룹 내 2인자가 아니라 1.5인자라는 평가까지 들었던 서청규 사장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처지가 퍽 궁색하게 되었다.

필래푸드와 필래건설.

자신의 입김이 지배적이던 계열사에서 줄줄이 가신들이 갈려나갔다.

서승학도 재기불능의 상태.

서청규 사장은 필래그룹의 경영권을 형님으로부터 빼앗아 올 가능성이 0에 수렴한다고 판단했다.

단 한 가지 변수가 있을 수는 있었다.

서청수 회장이 자신에게 주어진 생물학적 수명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

서원웅이 어설프게 경영권을 이어받으면 허점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매우 적다.

그 가능성에 매달려 형님의 따가운 견제에 시달릴 필요는 없다.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이었다.

그는 서청수 회장을 찾아갔다.

서청수 회장은 그를 안으로 들였다.

“형님, 이제 그만 싸웁시다.”

“내가 살면서 너한테 들었던 말 중에 가장 좋은 말이구나.”

“깔끔하게 계열분리 할게요. 그룹 계열사 지분 전량 매각하겠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가로 내가 필래유통에서 아예 손을 떼면 되겠지.”

“네, 그건 제도로도 규정돼있으니까 당연히 해주셔야지.”

“좋아, 알았다.”

서청규 사장은 만족한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낯간지러운 소리는 서로 싫으니까 더 말 주고받지 맙시다.”

“그러든지.”

“깔끔하게 딴 살림 차려서 나가는 거니까, 꼭 필요한 일 아니면 얼굴 보고 살지 맙시다.”

서청규 사장은 굳이 시시콜콜 정떨어지는 소리만 골라서 했다.

그런 아우가 형님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사 때는 얼굴 비춰라. 제사는 같이 지내라는 게 아버님 생전에 유언이다.”

“삼라그룹 꼬락서니 보고 특별히 강조하셨으니까. 내 또 창업주 유훈은 잘 따르잖아요? 알았어요. 이만 갑니다.”

“배웅 안 나간다.”

“아유, 기대도 안 했어요.”

서청규 사장은 비적비적 불량한 걸음으로 형님을 떠났다.

서청수 회장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저건 나이 먹고도 변하질 않아.’

이제 서청수 회장의 곁에 가족이라고는 서원웅 하나뿐이었다.

아내와 장남과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백양옥 여사는 무릎까지 꿇는 수모를 감수했지만 조금의 자비도 얻지 못했다.

그 이후로도 백양옥 여사는 여러 번 서청수 회장에게 읍소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매몰찬 거절.

게다가 서청수 회장은 한 술 더 떠 백양옥 여사에게 이혼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 소식을 들은 백양옥 여사는 눈이 뒤집혔다.

“이 미친놈이 지금 누구한테 이혼소송을 걸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이었다.

다른 여자랑 놀아나서 혼외 자식까지 나은 주제에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오히려 백양옥 여사는 계열사 분할의 대가로 맞출 패를 이혼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쪽에서 순순히 이혼해줄 테니 계열사를 달라고.

그런데 서청수 회장의 행동은 백양옥 여사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백양옥 여사는 당장 변호사를 호출했다.

“오변, 이거 그 인간이 미친 거 맞지? 지금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상황이야?”

“여사님, 서 회장이 소를 제기할 자격은 됩니다.”

“어째서!”

“결혼생활의 파탄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이혼을 청구할 수 없지만.”

“없지만?”

“세월의 경과에 따라 쌍방 책임의 경중을 따지는 게 무의미한 경우 예외가 됩니다.”

“내가 다른 남정네랑 놀아나서 혼외 자식을 싸질렀어? 왜 경중을 못 따져?”

“또, 오기나 보복 감정에 의해 이혼에 응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혼인을 계속할 의사가 없는 경우도 예외에 해당합니다.”

“이건 아니라고 잡아떼면 그만이지.”

오변은 머쓱하게 웃었다.

“법원은 아마 주총에서의 공방전을 보고 저 예외를 인정할 듯합니다.”

“그래서 뭐 어떻게 해?”

“서 회장 측의 청구를 막지는 못할 듯합니다.”

그러자 백양옥 여사의 이마에 핏줄이 곤두섰다.

“오변, 내가 왜 당신한테 돈 많이 주는데. 누가 예측이나 하고 있으래? 정답을 찾으라고, 정답을.”

오변은 안경다리를 잡고 들썩였다.

“에, 일단 우리는 재산분할 소송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래, 재산분할이 50%까지 가능하다며. 그럼 내가 서 회장 지분을 따먹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이론상을 그렇지만 그게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습니다.”

죄다 비관적인 말만 쏟아내는 오변에 백양옥 여사는 폭발 직전이었다.

“간단하지 않다니.”

“큰 덩어리를 먹으려면, 여사님이 그 재산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 바를 확실히 밝혀야 합니다.”

“우리 아빠가 필래 도와줘서 바로 세웠어!”

“혼인하기 전의 일은 고려대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래서 뭐 어떡할 건데!”

“서청수 회장은 분명 엄청난 변호인단을 꾸릴 겁니다. 우리도 대응은 하겠지만 쉽진 않습니다.”

백양옥 여사는 화를 참지 못하고 오변의 멱살을 콱 움켜쥐었다.

“방법을 얘기하라고! 방법을!”

“서 회장도 아마 매끄러운 해결을 원할 겁니다. 법정에 서기 전에, 여사님이 직접 만나 해결을 보시는 게…….”

“이거 완전 또라이 아니야!”

백양옥 여사는 오변의 뺨을 짝 내리쳤다.

오변의 헐거운 안경이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오변은 몸을 떨었다.

백양옥 여사는 카랑카랑한 소리로 외쳤다.

“야, 이 새끼야. 내 돈 먹을 때 체하지 않디? 판세예측이나 하면서 돈을 그렇게 받아가는 게 부끄럽지 않아? 방법을 말하랬더니, 뭐? 나더러 해결하라고? 이런 시답잖은 새끼가 다 있어.”

“…여, 여사님…….”

“내 눈앞에서 당장 꺼져! 양심 없는 새끼. 무능한 새끼.”

백양옥 여사가 으르렁거리자 오변은 안경을 줍지도 못하고 허겁지겁 자리를 떴다.

백양옥 여사는 치를 떨었다.

서청수 회장을 만나서 교섭을 한다고 해도 득은 없을 것이다.

무언가 바라는 게 있었다면 이혼을 청구하기 앞서 거래를 시도했을 것이다.

이건 정말로 마음을 단단히 벼르고 별렀다는 증거.

백양옥 여사는 주체할 수 없는 화증으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서청수… 날 이렇게까지 몰아……? 아직 네놈 새끼가 백양옥이 성질머리를 덜 배웠구나. 이렇게까지 몰아대면 나도 뒷일 생각 안 하고 덤빈다는 거, 여전히 모르는구나…….”

백양옥 여사는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원한을 제도권이 풀어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제도의 바깥에 있는 수단만이 그녀의 아군이었다.

백양옥 여사는 잠깐 손톱을 물어뜯다가 인터폰을 눌렀다.

“김 실장, 잠깐 들어와 봐.”

서청수 회장은 회장실이 오늘따라 유독 넓게 느껴졌다.

필래그룹 회장.

이쯤 되면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서도 적다.

자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많지만, 자기를 편하게 여기는 사람은 적다.

자기의 돈을 원하는 사람은 많지만, 자기의 마음을 원하는 사람은 적다.

재벌 회장은 고독한 자리였다.

배때기 부른 놈의 팔자 좋은 투정이라고 하겠지만, 고독한 건 고독한 것이다.

그나마 진실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가족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돼버렸다.

결국 아쉬운 대로 차선책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헛헛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

“완도나 한번 가야겠구만.”

서청수 회장은 장백주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백주야, 큰 건 끝났으니까 한번 쉬자. 완도 가자. 주말에.”

“알겠습니다. 누구까지 부를까요.”

“너희 3인방에 청운이, 원웅이, 아, 인태도 불러볼까?”

“사촌끼리 친하게 지내면 좋죠.”

“그래, 같은 항렬에 지지자가 있는 게 좋단 말이야. 그런데 듣자 하니 인태가 오히려 조대찬이하고 가깝고 원웅이하고는 그냥 그렇다는 말이 있어.”

장백주 실장은 기회가 생기자 얼른 대찬을 참소했다.

“그렇다니까요. 그게 다 조대찬이가 중간에서 자기 정치를 하니까 그런 겁니다.”

“뭘 또 그러나. 처남 매형 사이면 친할 법도 하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조대찬이 서원웅 대표가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되긴 했지만 지금부턴 아닐 겁니다.”

서청수 회장은 픽 웃었다.

“그럼, 이제 와서 팽이라도 할까.”

“못할 것도 없죠. 집게 아시죠? 조개껍질 안에 들어가서 사는 게 말입니다.”

“알지.”

“그 집게가 다 크면 살던 껍데기를 버리고 다른 껍데기로 옮긴단 말입니다. 그거랑 같습니다. 집게가 살던 껍데기를 돌아보기나 하겠습니까.”

서청수 회장은 잠깐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백주야.”

“네, 회장님.”

“헛소리 하지 마라.”

“…네.”

“백주야, 내가 널 조개껍데기로 생각했으면 너 지금 그 자리에 없다.”

“…….”

“네가 나보다 잘나서 여태 그 자리에 있는 줄 아냐?”

“…아닙니다, 회장님.”

“아니지. 근데 조대찬이는 원웅이보다 잘났다. 네가 조대찬이를 팽해라 말아라 할 주제가 되냐?”

“아닙니다, 회장님.”

“그래, 원웅이가 조개껍데기 신세가 안 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

“조대찬은 원웅이의 가장 큰 자산이야. 인적 자산이라고. 다시는 그런 헛소리 지껄이지 마라.”

“…알겠습니다.”

“이번 배낚시에도 조대찬이 불러. 앞으로는 내가 특별히 빼라는 말 없으면 명단에 포함시키도록.”

“…알겠습니다.”

전화가 끊어지고, 장백주 실장은 거칠게 휴대폰을 집어던졌다.

“이런 개 같은……!”

이번 배낚시는 일전의 심각한 대책회의와는 달랐다.

정말 배낚시를 위한 배낚시였다.

서청수 회장이 완도에 내려가자, 구 여사가 반갑게 맞이했다.

“회장님! 주총에서 완승 거두신 거 뉴스로 봤습니다! 연락드릴까 했지만 귀찮으실까 봐 안 했습니다.”

“아, 고마워. 진땀 좀 흘렸지.”

“역시 회장님은 승부사이십니다! 주총에서 이기시자마자 아주 속전속결로 정리할 사람 정리하시고.”

“허허, 오늘따라 사탕발림이 심하구만. 천하의 구 여사가 왜 이렇게 신났어?”

“아유, 사실만 말씀드린 건데요, 뭘.”

“허허, 띄워주니 기분은 좋구만 그래. 오늘은 뭐가 맛있을까?”

“흑산도 홍어 A급으로 들여놨어요. 돼지고기 부들부들하게 삶아서 숭덩숭덩 자르고, 곰삭은 김치 척척 썰어서 삼합으로 내드릴게요.”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도는구만.”

“많이 드세요.”

넉살 좋게 웃는 구 여사를 보고 대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오늘은 왜 저렇게 밝으셔.’

구 여사는 분명히 말했다.

산더미 같은 빚을 졌다고.

그것 때문에 생계가 위태로울 지경이라고 했다.

그런데 구 여사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 보였다.

경우의 수는 두 가지다.

경우의 수 하나.

상황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아예 미쳐버렸다.

경우의 수 둘.

일이 말끔히 해결돼서 지나가는 똥개만 봐도 절로 웃음이 새어 나온다.

서청수 회장과 정상적으로 말을 주고받는 걸 보니 미친 건 아닌 듯했다.

그럼 일이 말끔히 해결됐다는 건데.

구 여사의 말마따나 서청수 회장은 주제넘은 금전 요구에 학을 떼는 성품이다.

그렇다면 그 큰돈이 어디서 났다는 것인가?

‘로또라도 맞았나.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에 신경을 쓴 덕분에 방지된 문제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대찬은 신경 쓰지 말자고 속으로 되뇌면서도 계속 신경을 썼다.

대찬은 여유가 좀 생기자 구 여사에게 슬금슬금 다가갔다.

“여사님.”

“조대찬 부장은 이제 회장님 최측근 다 됐네?”

“하하, 뭘요. 근데 뭐 하나만 여쭤봐도 돼요?”

“뭘?”

“아뇨, 여사님 표정이 전하고 달리 밝으신데…….”

“아, 티나?”

“좋은 일 있으세요?”

구 여사는 대찬의 팔을 살짝 잡아당기며 속닥거렸다.

“조 부장만 알고 있어?”

“네.”

“바깥양반이 어디서 돈을 땡겼는지 빚을 다 갚았다 그러더라고?”

“네? 그 돈이 어디서 났데요?”

“나야 모르지. 어디서 훔쳐 왔냐니까 그건 또 아니래. 그럼 됐지, 뭐.”

“네, 그럼 되긴 했는데…….”

세상이 어디 그렇게 호락호락하던가.

빚더미에 앉은 이에게 대가 없이 거액을 턱턱 내주는 물렁한 사람이 한국 땅에 존재하기는 하겠는가.

그런 호구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하필이면 볼품없는 박 선장에게 그런 행운이 돌아갈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구 여사는 훔친 게 아니라면 됐다며 희희낙락했지만 대찬의 생각은 달랐다.

‘뭔가 구린 구석이 있을 거야.’

남들이야 뒤가 구리든 향기롭든 제3자가 관여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박 선장은 서청수 회장이 옆자리를 내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뒤가 구려서는 곤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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