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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93화 (292/556)

난 할 수 있어 293화

서승학은 뚱한 표정인 채로 있고, 서청규 사장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 이거 골치 아프게 됐어요. 형수, 이제 어떡할 겁니까.”

“…화이트이글을 한 번 더 설득해봐야지.”

서청규 사장의 귀에는 뜬구름 잡는 소리였다.

그는 픽 웃었다.

“그놈들이 계속 남아준답니까? 벌써부터 지분 팔겠다고 영국하고 홍콩 쪽 은행이랑 짬짜미 벌이고 있답디다. 꿈 깨요.”

“…….”

“에휴, 형수 믿고 끼어든 내가 병신이죠.”

서청규 사장은 탁탁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는 백양옥 여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자, 동맹은 여기서 끝입니다. 각자도생합시다. 수고해요, 형수. 수고해라, 승학아.”

그 말에 서승학이 벌떡 일어나 항의했다.

“삼촌! 이대로 가면 어떡해요!”

“이대로 안 가면 뭘 어떡할 거냐?”

“대책을 강구해야죠!”

“대책? 무슨 대책. 누굴 위한 대책?”

“삼촌!”

“난 더 볼일 없다. 설마 날 원망하는 건 아니지? 그럴 자격 없잖아, 너. 싸가지 없는 새끼가.”

“삼촌!”

“징그러, 인마. 나이 서른 훌쩍 넘어서 삼촌, 삼촌 거리는 거.”

서청규 사장은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그는 내상은 입었어도 치명타는 입지 않았다.

서청수 회장이 그룹을 꽉 쥐고 있는 것만큼이나 필래유통에 대한 지배력이 여전했다.

여차하면 계열분리를 하고 독립하면 그만이었다.

서청규 사장은 뒤도 안 돌아보고 형수와 조카에게서 떠나갔다.

백양옥 여사는 참담한 마음에 주먹을 꽉 쥐었다.

눈물이 솟구치는 걸 억지로 참았다.

그녀는 아들을 바라봤다.

“엄마가 아빠하고 얘기 좀 하고 올게.”

그녀는 바로 서청수 회장을 만났다.

이번에 싸늘한 쪽은 서청수 회장이었다.

그는 백양옥 여사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았다.

백양옥 여사는 큼큼,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계열사 5개 우리한테 줘. 깔끔하게 물러날게.”

“…….”

“맨입으로 달라는 거 아니야. 나랑 승학이가 가진 필래지주 지분, 전부 내놓을게.”

“계열사 5개.”

백양옥 여사는 힘 있게 끄덕였다.

“더 욕심 안 부려.”

“5개부터가 이미 욕심 부릴 만큼 부린 거야.”

“당신도 이번에 알았잖아. 이런 일이 또 없을 거 같아? 나랑 승학이 지분 넘기면 안전해.”

“그 지분 없어도 회사 지키는덴 아무 문제없어.”

“…나쁜 거래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서청수 회장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좋은 거래든 나쁜 거래든 나는 당신하고 거래 자체를 할 용의가 없어.”

그는 그렇게 통보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백양옥 여사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부탁할게.”

“살다 보니 천하의 백양옥이 무릎 꿇는 걸 다 보네.”

“승학이 당신 자식이야. 목숨은 붙여줘야지.”

“내가 언제 죽이겠대?”

“서청수!”

“다른 사람들은 계열사 5개 없어도 잘 먹고 잘 살고 있어. 열심히. 승학이도 이제 좀 그렇게 살라고 해. 당신 앞으로 재단도 두 개나 있으면서 뭐가 부족하단 거야.”

서청수 회장은 등을 돌리고 걸어나갔다.

백양옥 여사는 악에 받쳐 절규했다.

“내가 혼자 망할 거 같아? 너, 후회할 거야! 후회할 거야!”

서청수 회장은 응답 없이 내딛던 걸음을 계속 내디뎠다.

일명 ‘처의 난’은 그저 주총에서 서청수 회장이 경영권 방어에 성공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서청수 회장은 끝까지 가족의 울타리를 유지하려고 했으나, 백양옥 여사와 서승학은 끝까지 그의 손길을 저버렸다.

그 이후에도 관용을 베풀 만큼 서청수 회장은 자비롭지 않았다.

그만큼 자비로웠다면 여기까지 올라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는 아내와 자식을 버리기로 했다.

서청수 회장은 칼을 빼들었다.

필래지주의 주주총회가 끝나자마자, 필래기획과 필래푸드, 필래건설의 주주총회가 동시에 열렸다.

필래기획의 대표는 서승학.

필래푸드의 대표는 곽동성.

필래건설의 대표 역시 서승학과 서청규를 지지하는 측이었다.

그간 그룹의 내분이 우려되어 필래푸드와 필래건설을 서청규 측이 쥐고 있도록 두고 있었다.

필래푸드와 필래건설은 인지도와 매출은 높았지만 실상 영업이익은 별로 보잘것없었다.

그걸 뺏어오겠다고 한바탕 전쟁을 벌이느니 그냥 서청규가 주무르도록 두었다.

미친개한테 뼈다귀나 던져주어 그거나 빨고 있으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용인하지 않았다.

서청수 회장은 이 3개 계열사에 연쇄적으로 주주총회를 열었다.

안건은 대표이사 해임의 건.

이 계열사들의 지분구조는 필래지주와는 달랐다.

필래지주가 1대 주주였고, 나머지 주주들의 지분은 미미했다.

대개 외국인이나 기관, 개인투자자들이 주류를 이뤘다.

이들은 서청수 회장의 결정에 찬성 표를 던져주었다.

주주들은 더 이상 서승학, 그리고 서청규 일당을 옹호할 이유가 없었다.

차라리 서청수 회장에게 전권을 몰아주고 안정적으로 수익추구에만 전념하게 만드는 게 이득이었다.

세 계열사에서 열린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 해임의 건은 압도적인 찬성률로 모두 가결되었다.

서승학은 바로 필래기획 대표이사 자리에서 쫓겨났다.

하루아침에 백수가 됐다.

서청수 회장은 한 술 더 떴다.

백양옥이 이사장으로 있던 백호문화재단에 대한 필래그룹의 지원이 일절 차단되었다.

백호학원만큼은 당분간 지원을 유지하기로 했다.

학생들의 편의를 생각해서, 궁극적으로는 필래그룹의 이미지를 생각한 처분이었다.

김태준 사장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서청수 회장에게 말했다.

“너무 가혹하신 거 아닙니까?”

“뽑은 칼 아래 정을 두면 내가 다치는 법이야.”

“그래도 아직까진 백 여사님을 부인으로 두셨잖습니까. 또 서승학 사장하고의 천륜은 끊을 수 없는 거 아닙니까.”

“됐어, 더 얘기하지 마.”

“회장님, 백 여사님 무서운 분입니다. 한을 품으면 어떤 일을 벌이지 모릅니다. 걱정됩니다.”

서청수 회장은 그럼에도 입술을 꾹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쯤 해두라는 강력한 경고의 표현이었다.

왕윤수 사장이 김태준 사장에게 말했다.

“이미 백 여사님이 들춰낼 수 있는 약점은 다 커버해놨어. 걱정하지 마, 김 사장.”

“허어, 그래도 찜찜하단 말이야.”

“그건 김 사장이 너무 온정적이라 그래. 이 자리까지 올라왔는데도 사람이 이렇게 물러.”

“허허, 나도 왕 사장처럼 냉정했으면 좋겠네. 유전이야, 그것도.”

왕윤수 사장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커피만 홀짝였다.

서청수 회장은 대찬에 대한 약속을 지켰다.

정말로 남해 별장을 턱 건네주었다.

서청수 회장은 별장에 매겨지는 무거운 재산세가 걱정된다면 영구히 임대해주는 형식으로 건네주겠다고 했다.

대찬은 더 폐를 끼치기 싫다며 양도받는 쪽을 선택했다.

이 선물에 가장 기뻐한 건 역시 부모님이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입가가 주체할 수 없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정말이냐? 회장님이 쓰던 별장을 꽁으로 넘기겠다고?”

“네, 잘 됐죠? 한번 가봤는데 좋더라고요, 회장님 별장답게.”

어머니는 아버지의 옆구리를 쿡쿡 쑤셨다.

“여보, 얼른 이 집 복덕방에 내놔.”

“좋아, 빨리 팔아치우고 내려가자고.”

대찬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서울살이에 미련 없어요?”

“미련은 무슨! 아유, 지긋지긋해. 서울에 뭐 좋은 거 있다고 그렇게 다닥다닥 붙어사는지. 우린 더군다나 직장도 없는데 무슨 상관이야.”

“좋아하시니까 다행이네요.”

어머니는 흐흐 웃었다.

“징그럽게 다 큰 아들 밥상 안 차려줘도 되는 것도 좋고.”

“걸핏하면 남해로 쳐들어가서 엄마 밥 먹을 거예요.”

“그럼 올 때 순이네 두부에서 두부 한 판씩 좀 사와라. 그건 그리울 거 같거든.”

“갓 만든 두부가 맛있지, 묵혀두면 맛이 나겠어요. 그럼 아예 때때로 서울 올라와서 두부도 사고 아들 밥상도 차려주는 건 어때요?”

그러자 어머니는 숟가락으로 대찬의 이마를 냅다 후렸다.

“이런, 싸가지!”

“숟가락으로 얻어맞을 일 없어서 나도 좋네요, 뭐!”

아버지는 피식 웃고 말했다.

“그래, 이제 그럼 너도 집을 새로 구해야겠구나. 이 집에서 계속 살겠다면 놔두겠지만.”

“직장하고 거리도 멀고 단지가 너무 낡았어요. 혼자 살긴 너무 넓기도 하고.”

“그래, 집은 어디로 구할 셈이야.”

“음, 성수동으로 구해볼까.”

어머니는 쯧쯧 혀를 찼다.

“아주 폭 빠졌구나, 윤이영한테 폭 빠졌어.”

“기왕이면 다홍치마죠, 뭐. 직장하고도 가깝고.”

“그래, 네 맘대로 해라. 나는 남해 내려갈 생각에 네 집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니까.”

“엄마, 변했네요. 나 일산으로 집 구할 때는 극구 따라다니시더니.”

“그때는 코흘리개였고.”

“그때나 지금이나 뭐 다르다고.”

“지금은 미국 상원 의원도 떡 주무르듯이 주무르는 놈의 새끼, 뭐가 불안해서 졸졸 따라다녀?”

“하긴 그러네.”

대찬은 싱겁게 웃었다.

그렇게 부모님은 남해로 내려갔다.

적잖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아니 한 시간이 멀다 하고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 : 이것 봐라. 고추 심었다.

엄마 : 이것 봐라. 통발 사서 게 잡았다.

엄마 : 공기가 너무 좋다. 새벽 공기 마시려고 요즘 일찍 깬다.

엄마 : 옆집 할머니 개가 강아지 낳았단다. 한 마리 받아왔다. 구경하러 와. 이름은 조수찬이다.

엄마 : 수찬이가 너보다 낫다. 얘 똥오줌도 가린다?

대찬 : 나도 똥오줌 변기에 싸요.

엄마 : 수찬이 꼬리 흔드는 것 좀 봐. 너무 귀엽다.

대찬 : 엄마, 동영상 보내지 마요. 데이터 없어요.

엄마 : 싸가지.

대찬의 가족이 오래 살던 아파트는 금세 팔렸다.

거저 남해의 별장을 얻었으니 살던 집도 거저에 내놓은 덕택이었다.

부모님이 남해로 내려가자마자, 대찬도 집을 구했다.

이로써 아들과 딸이 모두 완전히 독립했다.

윤이영의 집에서 도보로 2분, 성수역까지 도보로 2분.

최적의 조건이었다.

소형 평수의 아파트였다.

일부러 지하주차장과 연결된 곳을 고집했다.

윤이영이 이목을 피해 안전히 자신의 집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음흉한 속내를 윤이영도 흡족하게 생각했다.

미국의 헤지펀드 화이트이글은 필래지주의 지분을 전량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영국의 투자은행과 노르웨이의 국부펀드, 태국 투자청 등.

외국계 자본에 장외거래를 통해 지분의 대부분을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필래그룹으로서는 반길 만한 일이었다.

모두 장기투자를 통한 수익창출을 목표로 하는 기관들이었다.

무리해서 경영권을 흔들 만한 존재들은 아니었다.

설혹 그렇다 할지라도 한곳에 모인 지분이 여러 곳으로 흩어지는 일이었으니 반길 만했다.

이로써 백양옥 여사와 서승학은 완전히 우군을 잃었다.

정상적인 방법을 통한 경영권 확보의 가능성은 이제 없다.

서청수 회장은 화이트이글의 철수를 반기면서도 내심 괘씸했다.

“쌍놈의 새끼들, 그놈들 차익실현했지?”

왕윤수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는 톡톡히 봤죠. 조정 들어가긴 했지만 워낙 주가가 껑충 뛰어놔서.”

“남의 안방을 이렇게 들쑤셔놓고 제 놈들은 돈 보따리까지 챙겨서 도망을 치더란 말이지?”

“약이 오르긴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별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팔짱을 끼고 발을 까딱거렸다.

“왜 없어. 조대찬이가 삼백 억으로 장난질 좀 쳤잖아. 우리도 한번 해보자고.”

“회장님.”

“화병 날 거 같아. 이 타이밍에 화병 나서 나 죽으면 그룹 공중분해야. 그것보단 돈 좀 쓰는 게 낫잖아.”

“…….”

“플랜 좀 짜봐. 돈 좀 써서 그 양키 새끼들 혼구멍나도록.”

“알겠습니다. 청문회 운운하면서 지펴놓은 불씨가 있으니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겁니다.”

“왕윤수가 불가능하지 않다고 하면 무조건 된다는 뜻이지. 탈 나지 않게 잘 결행해.”

“알겠습니다, 회장님.”

왕윤수 사장은 마이크 햇치가 아니라 상원 금융위원장인 론 와이든 상원의원과 직접 접촉했다.

왕윤수 사장이 그를 직접 만났다.

말이 오가고 돈이 오갔다.

상원 금융위원회는 기어코 폴 로젠버그를 청문회에 세웠다.

그리고 다소간의 세월이 경과한 후.

그가 거주하는 뉴욕 주 검찰은 폴 로젠버그가 자신을 향한 공세를 무마하기 위해 대규모의 자금을 살포한 사실을 포착했다.

그건 자신의 재산이 아니라 그를 믿고 각국의 투자자들이 건넨 투자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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