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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92화 (291/556)

난 할 수 있어 292화

서청수 회장은 언론의 앞에서 한 글자 한 글자 신중하게 말하는 덕택에 양윤희를 보지 못했다.

“앞으로 필래그룹은 어떠한 풍파에도 흔들림 없이 나아가겠습니다. 불안한 표정은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서청수 회장은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사옥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사옥 안으로 들어가자, 양쪽으로 도열한 임직원들이 동시에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훈련병보다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

가장 먼저 장백주 실장이 척 허리를 꺾었다.

“회장님! 축하드립니다!”

그러자 사옥 로비를 새까맣게 메운 필래그룹의 직원들이 동시에 외쳤다.

“축하드립니다!”

서청수 회장은 탁, 이마를 짚었다.

“아이고야, 이거 또 장백주 작품이지. 암튼 어지간히 군대놀이 좋아해.”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은 듯, 묘한 웃음을 지으며 허리 숙인 직원들 사이를 지나갔다.

서청수 회장은 여태 허리를 숙이고 있는 장백주 실장의 꼬리뼈를 툭 건드렸다.

“허리 펴라. 그래야 다른 애들도 편하게 있지.”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그래, 축하는 그쯤 해둬라.”

서청수 회장은 회장실로 향했다.

그는 흐뭇하게 웃으며 회장실을 훑어봤다.

“하마터면 뺏길 뻔했잖아.”

“스릴이 넘쳤습니다.”

김태준 사장은 그제야 긴장이 풀린 얼굴로 서청수 회장에게 말했다.

서청수 회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근데 마냥 기쁘지만은 않군. 그러기엔 잃은 게 너무 많아.”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대표이사 회장 서청수’, 아홉 글자가 박힌 검은 명패를 손으로 슬슬 쓸었다.

“집안 꼴이 말이 아니게 됐어…….”

서청수 회장이 주총 전날, 백양옥 여사와 서승학을 찾아간 건 급한 마음에 화친을 요청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최후의 아량이었다.

그때 다시 힘을 합치겠다고 말했더라면.

아니, 가족으로서 남은 최후의 자비심이라도 발휘해줬다면.

서청수 회장 역시 그들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할 각오가 돼있었다.

그에게도 원죄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내도, 장남도 그가 내민 최후의 손길을 뿌리쳤다.

서청수 회장은 천천히 고개를 저어 그들을 잊었다.

웨이스티드 삭스, 그러니까 양윤희에게 2.4%의 지분을 건넨 건 서청수 회장이었다.

필래그룹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할 때였다.

당시 주가가 형편없었던 계열사 하나를 지주회사로 전환했다.

전환하기 전, 차명계좌를 통해 이 회사의 지분을 구입해 양윤희에게 건넸다.

그리고 양윤희는 웨이스티드 삭스라는 페이퍼컴퍼니를 세웠다.

웨이스티드 삭스, 버려진 양말이라는 뜻은 서청수 회장과 헤어질 때 양윤희가 건넨 마지막 말이었다.

‘나는 꼭 버려진 양말 같네요.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져서, 도저히 빨아서도 쓸 수 없으니까 버리는 양말.’

서청수 회장은 백양옥에게도, 양윤희에게도 죄인이었다.

내부자거래, 차명계좌에는 어떠한 죄책감도 느끼지 않으면서 저 두 여자에게는 죄책감을 느낀다.

웃기는 일이었다.

서청수 회장은 측근들을 죽 거느리고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았다.

소식을 들은 서원웅도 회장실에 와있었다.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오늘은 아버지라고 불러줘라. 막 아들 하나를 잃고 오는 길이라.”

서원웅은 안타까운 미소를 지었다.

“축하드려요, 아버지.”

“고맙다, 아들아. 너도 축하한다.”

서청수 회장은 서원웅의 어깨를 꽉 잡았다.

그는 아들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네가 필래그룹의 후계자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는 당연하지. 잘해야 한다.”

“잘하겠습니다.”

“오냐, 그거다.”

서청수 회장은 아들의 등을 힘 있게 두 번 두드렸다.

서청수를 오래 모신 측근들은 만감이 교차했다.

그들은 서청수 회장이 선대회장인 서광구로부터 후계자로 지목됐을 때를 떠올렸다.

벌써 세월이 그렇게 흘러버렸다.

서청수 회장은 흐뭇하게 아들을 바라보던 시선을 대찬에게로 옮겼다.

“조대찬.”

“네, 회장님.”

“잘했다. 고맙다.”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1억 불 업어온 게 그저 할 일이었다면 여기 있는 사람 중에 할 일 해낸 사람, 아무도 없다. 지금은 겸손이 욕설이 되는 거야.”

“죄송합니다. 그럼 조금 우쭐해 있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소원 들어주신다는 거,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이런, 모른 척 잡아떼려고 했더니 기어코 짚고 넘어가는군.”

“절호의 찬스를 어떻게 그냥 흘려보내겠습니까.”

그 말에 대찬을 기특하게 여기는 김태준 사장이 흐뭇하게 웃었다.

“이거, 값은 톡톡히 치르셔야겠습니다.”

“암, 그렇고말고. 조대찬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청규 그 자식이 내 명패 집어던지고 자기 명패 세워놨을 거야.”

“하하, 그랬을 수도 있겠군요.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자다가 그런 꿈꾸고 오줌을 지릴 뻔했지 뭔가.”

“그럴 만도 하죠.”

서청수 회장은 탁자에 몸을 기대며 대찬에게 말했다.

“말해봐. 뭘 줄까. 이 회장 자리만 빼놓고는 다 주지.”

“지금 당장은 말씀 안 드리겠습니다.”

“묵혀두겠다? 김치는 묵을수록 맛있지만 기회는 묵혔다가 똥 되는 수가 있어.”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은 배포가 작아서 대범하게 지르질 못합니다.”

“좋아. 나중에 꼭 기회를 써먹길 바라네. 나는 원래 이런 약속 잘 잊어먹는 사람인데, 자네한테는 다르지.”

김태준 사장이 말을 얹었다.

“조대찬 부장도 이제 위상이 달라졌습니다. 후계자의 최측근이니까요.”

“그렇지. 원웅이가 세자가 되었으니 조대찬이도 이제 세자사(世子師·세자의 스승)가 아닌가.”

“아유, 세자사는요. 호위무사입니다.”

서청수 회장은 대찬의 두 손을 꼭 붙잡았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자네를 필래로 끌고 온 건 내가 오십 넘어 한 결정 중에 가장 잘한 결정이었어.”

“과찬이십니다.”

서청수 회장은 뿌듯하게 웃고는 왕윤수 사장에게 말했다.

“왕 사장.”

“네, 회장님.”

“화이트이글이 언제쯤 지분을 뺄까?”

“예단하긴 어렵습니다만, 오래 들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입질을 해오는 세력과 장외거래를 시도할 겁니다.”

“음, 지주회사의 자금력을 좀 강화할 필요가 있겠어. 정관도 수정하고.”

왕윤수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조만간 TF를 설치해서 전체적으로 보수를 해놓겠습니다. 언제 또 제2의 화이트이글이 등장할지 모르니까요.”

“힘든 싸움이었어.”

“예, 창사 이래 전례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였습니다.”

“대응 TF팀 직원들한테 금일봉 넉넉히 지급해. 집에도 못 들어가고 며칠째 회사에서 숙식했잖나.”

“그러겠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대찬을 바라봤다.

“조대찬.”

“네, 회장님.”

“소원이야 소원이고, 그래도 사례는 해야지. 혹시 부모님 아직 직장 다니시나?”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두 분 다 집에 계십니다.”

“그래? 그럼 적적하시겠구만. 백주야.”

“네, 회장님.”

“남해 별장 짐 빼라. 이제부터 조대찬이 거다.”

그 말에 대찬의 눈이 커졌다.

“회장님.”

“왜, 재산세 때문에 그래?”

“아, 아뇨… 귀농하시겠다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사셔서 아마 집 팔고 기쁘게 내려가시긴 할 텐데…….”

“그럼 뭐가 문젠가.”

“그게, 너무 얼떨떨해서요.”

그러자 김태준 사장이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조대찬이 말은 이겁니다. 별장 하나로 입 싹 닦겠다는 거 아니냐고.”

“아닙니다, 사장님.”

서청수 회장은 능글맞게 웃었다.

“그런 걱정이라면 하지 마. 이건 자네가 잘한 것도 있지만, 명색이 사돈지간인데 내가 너무 무심했던 거 같기도 해서 그래. 부담 가지 마. 나 거기 말고도 별장 많아.”

“조대찬 아니었으면 어차피 지분 사느라 팔아치웠을 건물 아닙니까.”

김태준 사장이 거들었다.

그제야 대찬은 겸연쩍게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여러모로 만감이 교차하는 날이구만.”

서청수 회장은 복잡한 얼굴로 유리창 바깥으로 보이는 잠실의 바쁜 풍경을 내려다봤다.

서원웅은 대찬을 비롯한 필래 비바체에서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을 모았다.

면세점을 맡은 오윤 전무를 비롯해 옥문영 상무, 한태윤 차장 이하 혁신경영팀 직원 전원이 모였다.

서원웅은 한결 홀가분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은 제가 살 테니까 마음껏 드세요. 지금까지 수고 많으셨습니다.”

흥이 오른 송희근 과장이 일어나 잔을 높이 들었다.

“서원웅 대표님과 비바체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위하여!”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기분 좋게 첫 잔을 대번에 들이켰다.

옥문영 상무는 걸걸하게 웃으면서 서원웅의 잔을 채워주었다.

“오늘은 맘껏 드시고 맘껏 취하십시오!”

“고맙습니다.”

“미래 필래그룹의 회장님이 되실 몸이니, 앞으로 잘 모시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잘 안 그러셨다는 말씀이세요?”

옥문영 상무는 쾌활하게 웃었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 더 그러겠단 말씀이죠! 벌써부터 회장 티내시는 겁니까?”

“방금 너무 건방져보였나요?”

“대표님은 좀 건방져 보일 필요가 있어요.”

“하하…….”

서원웅은 멋쩍게 웃었다.

서원웅을 바로 상대하기는 어려우니 송희근 과장은 대찬을 공략했다.

그는 대찬의 잔에 술을 채웠다.

“우리 조 부장님도 지금까지 출세 가도 달렸지만 앞으로 신세가 더 폈습니다?”

대찬은 하하 웃으면서 서원웅에게 말했다.

“대표님, 들으셨죠? 제 신세 펴주셔야 돼요.”

“지금까지 혼자서 잘만 신세 펴왔으면서 새삼스럽게.”

그 말에 대찬이 황당한 듯 눈을 크게 뜨고 송희근 과장에게 말했다.

“지금 저 말씀, 완곡한 거절로 들어도 되겠죠?”

“조 부장님 단물 빠진 껌 되신 거 같은데요?”

“와, 역시 재벌의 세계는 냉혹하네요.”

서원웅이 진땀을 흘리며 급히 해명했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됐습니다. 대표님 뜻은 아주 자알 알았습니다.”

회장이 되면 이런 시시한 농지거리도 할 수 없다.

대찬은 놀릴 수 있을 때 단단히 놀려두었다.

그렇게 서원웅과 그의 ‘측근’들은 제법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시고 각자의 집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대찬은 서원웅과 따로 적막한 골목을 걸었다.

한참 조용히 걷던 서원웅은 속닥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그렇지?”

대찬은 서원웅을 흘끗 보다가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그렇지. 모르지.”

“여전히 얼떨떨해. 내가 회장이 된다고 하니까.”

“예상 못 하던 건 아니었잖아?”

서원웅은 살짝 웃었다.

“솔직히 못했어. 아무리 그래도 나 같은 서자를 후계자로 지목하실 줄은.”

“못난 이복형을 둔 게 행운이었지. 아니었으면 비집고 들어갈 자리도 없었을 거야.”

“…그랬겠지. 근데 네가 없었으면 자리가 있어도 비집고 못 들어갔을 거야.”

대찬은 피식 웃었다.

“이제부터 그런 말 하지 마. 넌 좀 뻔뻔해져야 해. 일일이 고마워하면서 살면 중심을 잃는다고.”

“다른 사람한텐 그래도 너한텐 안 그럴 거야.”

대찬은 장난스럽게 서원웅의 팔을 주먹으로 툭 건드렸다.

“자꾸 그러지 마. 이러니까 홍승연 씨가 나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잖아?”

“여기서 와이프 얘기가 왜 나와?”

“딱 봐도 날 눈엣가시로 생각하고 있잖아. 네가 날 특별대우해서 그래.”

“에이, 눈엣가시는.”

“너 아닌 남을 평등하게 대해. 죄다 평등하게 아래로 깔아뭉개주라고.”

“진짜 그렇게 하면 섭섭해할 거면서.”

“당연하지.”

둘은 오랜만에 고등학생처럼 시시덕거리며 밤거리를 오래 걸었다.

주주총회가 끝나고 둘러앉은 백양옥 여사와 서청규 사장, 서승학, 그리고 그들의 끄나풀들의 상태는 공황 그 자체였다.

지금껏 패배의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럴 줄은 몰랐다.

만약 웨이스티드 삭스의 2.4%가 없었다면 다시 한 번 주총을 열어 반격을 시도할 수 있었다.

2.4%가 아니었다면, 서청수 회장이 용케 경영권을 방어했어도 근소한 차이에 불과했을 테니까.

그런데 이 2.4%는 절대로 자신에게 넘어오지 않을 지분이었다.

저 주식이 휴지조각이 된데도 양윤희가 백양옥에게 넘기는 일은 없을 테니까.

게다가 이번에 크게 데인 서청수 회장은 대대적으로 장악력을 증대하려고 들 것이다.

“그 인간이 그년한테 지분까지 들려줬을 줄이야…….”

백양옥 여사는 멍한 시선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허탈감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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