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91화
이어서 화이트이글의 법무대리인이 참석했다.
한국인 변호사였다.
기자들이 몰리자 그는 충분히 준비한 듯, 정제된 목소리로 말했다.
“작금의 사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오너 가의 집안싸움이 경영에 실질적인 손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화이트이글은 필래지주의 대주주로서, 마땅한 권리행사에 들어갈 것입니다.”
화이트이글의 대리인은 준비된 말만 짧게 전하고 일절 질문을 받지 않은 채로 주총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어 서청수 회장이 등장했다.
그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기자들이 우르르 그쪽으로 몰려갔다.
서청수 회장은 사람들의 번거로운 시선을 꺼렸다.
그럼에도 그가 주총장에 모습을 드러낸 건, 혹여 대리인을 내세우면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개미들의 마음이 흔들려 끝내 이탈할 것을 염려한 탓이었다.
그는 백양옥 여사가 터트린 비자금 조성 사실로 인해 몸가짐에 유의해야 했다.
백양옥 여사처럼 따가운 눈빛을 뿌리며 기자들을 뿌리치기는 어려웠다.
기자들도 그걸 알고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오늘 경영권 방어를 자신하고 계십니까?”
“네, 자신합니다.”
“여전히 표 대결에 들어가면 누구도 안심할 수 없다는 게 중론인데요, 허장성세 아닙니까?”
평소 같았으면 재벌 회장님 앞에서 찍 소리도 못했을 기자가 이때다 하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럼에도 서청수 회장은 허허 웃으며 외투의 단추를 여몄다.
“하하, 두고 봅시다.”
그의 유쾌한 말은 주총 결과를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질문을 던진 기자에게는 나중에 두고 보자는 말로 들렸다.
기자는 지레 겁을 먹고 어깨를 움츠렸다.
서청수 회장은 피식 웃으며 그 기자의 팔을 툭 건드렸다.
다른 기자가 외쳤다.
“주총 이후, 사모님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실 거라고 예상하십니까?”
“당장 주총이 급해서 그건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해결이 되겠지요.”
“해결이란 건 다시 관계를 회복하시겠다는 뜻입니까?”
“주총에 주주들의 이익과 국가 경제의 일각이 걸려있습니다. 개인사를 길게 말하는 건 부적절한 것 같군요. 이쯤 합시다.”
서청수 회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사옥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주총장은 잔뜩 늘어선 카메라들과 자리를 찾지 못하고 결국 서서 주주총회에 참석한 주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주주총회는 필래지주의 공동대표이사인 왕윤수 사장이 진행했다.
“그럼 지금부터 필래지주 임시주주총회의 개회를 선언합니다.”
왕윤수 사장은 침착한 목소리로 주주총회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오늘 상정된 안건은 대주주 화이트이글 측에서 건의한 대표이사 해임의 건과 사외이사 선임의 건입니다.”
왕윤수 사장이 대표이사 해임이라는 낱말을 발음할 때, 서청수 회장의 입가가 살짝 떨렸다.
그게 또 별거라고 기자들이 폭죽처럼 플래시를 터트렸다.
“그럼, 상정된 의안에 대해 발언하실 주주께서는 손을 들어주십시오.”
그때 백양옥 여사가 손을 들었다.
왕윤수 사장은 그녀를 지목했다.
“말씀하십시오.”
백양옥 여사가 일어나자 다시 또 플래시.
“본 투표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미 언론에도 충분히 공개가 됐다시피 이 의안은 찬반이 뚜렷하게 갈립니다.”
“맞습니다.”
“이미 상당 부분의 주식은 찬반 양측에 대한 입장을 밝혔습니다. 우선 그 지분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의사를 밝히는 것으로 투표를 대신했으면 합니다.”
“주주님의 말씀에 반대 의견을 가지신 분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그러자 저 뒤편의 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왕윤수가 그를 지목하자 일어났다.
백발이 성성하고 개량한복을 입은 노인이었다.
뻣뻣한 수염도 가슴께까지 기른, 겉으로 보기에는 기인 그 자체였다.
그는 마이크를 쥐고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발언했다.
“필래지주의 주식 1주를 보유한 불암산 도사이올시다.”
“…….”
“난 저 여자의 말에 반대요! 반대! 결사반대! 눈에 흙이 들어가도 반대! 모가지가 떨어져도 반대! 반대요, 반대!”
“…반대 근거가 있으십니까.”
“저 년이 나쁜년이잖아!”
돌발 발언에 주총장이 술렁였다.
속이 확 뒤집힌 백양옥 여사가 따갑게 그를 쏘아봤다.
그래도 저런 무지렁이하고 엮이면 체면이 깎이니 성질대로 버럭 소리를 지르진 못했다.
불암산 도사는 멋대로 지껄였다.
“이 회사가 자기 건 줄 알아! 부부 싸움은 안방 문 걸어 잠그고 애들도 안 보이게 해야 하는 거야!”
꽥꽥 내지르는 목소리에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의장인 왕윤수 사장은 질서유지를 위해 불암산 도사를 퇴장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방관했다.
왜냐, 불암산 도사는 그가 심어놓은 ‘꾼’이었다.
개인투자자들이 표 대결에 들어가기 앞서, 백양옥의 이미지를 집안싸움 때문에 회사를 말아먹으려는 말종으로 만들려는 수작이었다.
불암산 도사는 입에 모터를 달았다.
“그런 부부 싸움을! 전 국민이 다 알도록! 망신을 자초해가면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이렇게 해서 일반 주주들의 이익을 침해하고! 이제는 양키들까지 끌어들여? 에에잇! 에에잇!”
불암산 도사는 괜히 도사가 아니었다.
주총장에 몇 탕씩 아르바이트를 뛰어본 경험이 있었다.
막 내지르는 것 같으면서도 발음은 남들이 알아듣기 좋게 또박또박했다.
“이게 어디 제대로 된 자본주의 주총장이냔 말이야! 에잇, 썩을 년! 망할 년!”
정제되지 않은 욕설이 튀어나왔다.
지나친 욕설은 도리어 이쪽에 안 좋다.
흥이 올라 멋대로 지껄이는 불암산 도사를 그제야 왕윤수 사장이 제지했다.
“자, 상대방의 인격에 흠집을 내는 과한 언행은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의장님! 당장 퇴장시켜주세요!”
백양옥 여사 측 주주가 항의했지만 왕윤수 사장은 묵살했다.
불암산 도사는 유사시에 분위기를 흐리는 좋은 요원이었다.
퇴장시킬 이유가 없었다.
“자, 이외에 더 반대의견이 없으신 분은 박수로 호응해주십시오.”
주주들은 박수를 쳐서 백양옥 여사의 제의에 동의했다.
서청수 회장의 해임에 찬성하는 측이나 반대하는 측이나 기왕이면 빠른 표결이 좋았다.
이미 다들 뻔히 아는 지분까지 일일이 표결할 이유는 없었다.
왕윤수 사장은 능숙하게 회의를 이끌어나갔다.
“자, 그럼 우선 대표이사 해임안에 동의하는 대주주들께서는 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화이트이글은 19%의 지분으로 서청수 대표이사 해임에 찬성하겠습니다.”
화이트이글의 법무대리인이 말하자, 이어 백양옥 여사가 말했다.
“저 역시 개인 소유한 지분과 위임받은 지분 도합 25%의 지분으로 대표이사 해임에 동의해요.”
역시 계산된 대로 44%의 지분이 서청수 회장의 해임에 찬성 표를 던졌다.
왕윤수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대표이사 해임의 안에 반대하시는 대주주께서는 손을 들어 말씀해주십시오.”
대표이사의 자격으로 사측 자리에 앉아있는 서청수 회장을 대신해, 장백주 비서실장이 일어났다.
그는 이 자리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백양옥 여사, 그리고 서승학의 반란이 괘씸할 뿐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자연히 격앙되어 있었다.
“저는 제가 보유한 지분과 위임받은 지분 45.1%로 대표이사 해임의 안에 절대적으로 반대합니다!”
“나도! 나도 반대야! 내 1주로 나도 반대야!”
흥을 주체하지 못하는 불암산 도사가 제멋대로 끼어들어 소리를 질러댔다.
서청수 회장 측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에, 왕윤수 사장은 가드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가드는 불암산 도사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불암산 도사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불암산 도사가 도로 착석하는 걸 곁눈으로 확인한 대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서원웅 주주의 지분 0.2%를 위임받았습니다. 저는 이 0.2%의 지분으로 대표이사 해임의 안에 반대합니다.”
서원웅의 지분을 장백주 실장에게 한꺼번에 위임하지 않은 건, 아버지의 편을 드는 아들의 이미지를 주기 위함이었다.
주총장에 등장하진 않았지만 존재감이 아예 사라지는 건 곤란했다.
서원웅의 이름 석 자가 분명히 서청수 회장의 편에 선다는 걸 각인시키면서, 혈통으로는 서자이지만 필래그룹의 실질적인 적자라는 걸 외치는 것이었다.
대찬은 그렇게 주총장에서 부여된 자신의 짧은 소임을 마치고 다시 착석했다.
45.3%.
이게 서청수 회장 측이 보유한 지분의 전부였다.
그런데 왕윤수 사장은 서둘러 다음 순서로 넘어가지 않았다.
꼭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런데 그 침묵에 응답하듯 누군가 천천히 일어났다.
‘뭐야, 또 불암산 도사야?’
대찬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살짝 성가신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대찬의 시선도 마찬가지.
대찬의 동공이 그쪽을 바라보고 마구 흔들렸다.
일어선 사람은 불암산 도사가 아니었다.
중년 여성.
그것도 대찬과 면식이 있는 중년 여성이었다.
양윤희.
서원웅의 친모였다.
그녀는 마이크를 잡고 차분하게 말했다.
“저는 웨이스티드 삭스가 보유한 필래지주의 지분 2.4%로 대표이사 해임의 안에 반대표를 던지겠습니다.”
그 말에 주총장이 발칵 뒤집혔다.
지금까지 수면 아래 잠겨 한 번도 노출되지 않았던 2.4%.
그 2.4%의 대주주가 주총장에서 실력을 행사했다.
서청수 회장이 보유한 45.3%에 웨이스티드 삭스, 양윤희가 보유한 2.4%를 더하면 47.7%다.
과반에는 못 미친다.
하지만 주총장에는 모든 주주가 참석한 게 아니었다.
게다가 아직 입장을 정하지 않은 개인투자자들이 남아있었다.
이들의 표심은 이 2.4%를 보고 대표이사 해임의 반대쪽으로 확 쏠릴 것이다.
이 2.4%는 확인사살에 준하는 지분이었다.
‘뭐야… 웨이스티드 삭스가 어머님 소유였어……?’
대찬의 동공은 계속 흔들렸다.
짧은 발언을 마치고 다시 자리에 앉는 양윤희는 인파의 틈바구니에서 대찬을 발견했다.
그녀는 대찬을 향해 살짝 웃었다.
그 웃음에도 대찬은 웃지 못했다.
치과를 다녀왔다가 마취가 덜 풀린 것처럼 얼떨떨했다.
대찬의 시선은 왕윤수 사장에게로 향했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놀라움의 기색도 없었다.
아무리 피가 차가운 왕윤수 사장이라지만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면 놀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얼굴이 평온하다는 건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이래서 더 원웅이를 안 부르려고 했구나.’
생모를 보고 눈물을 질질 흘리는 장면이 전파를 타기를 원하진 않았을 테니까.
이것으로 주총의 하이라이트였던 표 대결은 김이 팍 새 버렸다.
백양옥 여사는 양윤희의 등장에 기절할 지경이었다.
분노가 치밀고 억울함이 치밀고 놀라움이 치밀고 온갖 안 좋은 감정이란 감정은 죄다 분출되었다.
여기 더 앉아있다가는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 피가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이미 표 대결은 의미가 없다.
백양옥 여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총장을 나가버렸다.
그게 또 기자들에 의해 속보로 퍼져 나갔다.
-백양옥 주총장 퇴장…徐 회장 경영권 방어 ‘유력’
왕윤수 사장은 편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이것으로 대표이사 해임의 안은 부결이 유력해졌습니다. 의장은 투표 절차를 생략하고자 하는데, 반대 의견 있으신 주주 계십니까.”
그 말에 화이트이글의 대리인이 벌떡 일어났다.
“의장께서는 자의적으로 주주들의 권리를 훼손하지 마십시오. 투표 절차를 꼭 준수할 것을 요구합니다.”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죠.”
“투표에 들어가기 앞서 응당 찬반 토론을 해야 할 겁니다!”
“아, 그것도 좋습니다. 반대 측에서 발언하실 분 계십니까?”
이미 승부의 추가 기울었다.
뭐 하러 입 아프게 토론을 하겠는가.
반대 측은 잠잠했다.
“찬성 측에서 발언하실 분은 일어나주십시오.”
이에 화이트이글 측이 일어나 따따부따 장광설을 풀어냈다.
하지만 그 말을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죽은 자식 불알을 짓무르도록 만지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결국 대다수가 지루해하는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화이트이글 측은 제풀에 지쳐 털썩 주저앉았다.
왕윤수 사장은 속전속결로 투표를 진행했다.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서청수 회장은 경영권 방어에 성공했다.
그는 주총이 열리기 전보다 한결 가뿐해진 얼굴로 기자들 앞에 섰다.
“저를 신임해주신 주주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못난 모습을 보여드려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앞으로 주주의 이익과 국가 경제의 발전에 기여하도록 성실히 경영에만 전념하겠습니다.”
“오늘 백양옥 여사님을 만날 계획이 있으십니까?”
그 질문을 받은 서청수 회장은 싸늘하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그렇게 서청수 회장이 기자들이 둘러싸여 있는 사이, 양윤희는 유유히 주총장을 빠져나갔다.
몇몇 기자들이 따라붙었지만 경호원들이 제지해 그들은 끝내 웨이스티드 삭스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