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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90화 (289/556)

난 할 수 있어 290화

TV화면을 통해 지켜보던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절제된 눈물, 좋아. 즙이 질질 새면 오히려 뵈기 싫거든. 회장님도 연기에 일가견이 있으시네.”

서청수 회장은 잠깐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또한 주주 여러분과 필래를 사랑해주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쳤습니다. 경영권분쟁에 휘말려 더 나은 서비스와 제품을 제공하는 데 써야 할 여력을 세력다툼에 쓰고 있습니다.”

그는 침울한 표정을 하면서도 발음만큼은 또박또박 이어나갔다.

“하지만 이제 이 추잡한 싸움의 끝이 보입니다. 화이트이글의 자금줄이었던 미네소타 주 투자위원회는 자금을 회수했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회수’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발음했다.

“그리고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천억 원의 사재를 출연하여 필래지주 지분을 매수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이 지루한 싸움을 종결하겠습니다. 그럼에도 화이트이글이 침투를 멈추지 않는다면, 더 확실한 조치를 취할 것임을 이 자리에서 알립니다.”

서청수 회장은 천억 원을 마련하기 위해 본인이 소유하고 있던 골프장을 팔았다.

선친이 물려준 농장을 팔았다.

거기에 해외에 보유한 부동산 일부마저 처분했다.

그는 이 이상으로 사재를 더 털고 싶은 마음이 없었음에도 그렇게 허장성세를 부렸다.

“저는 앞으로도 굳건히 필래그룹을 이끌어나가며 국가경제와 국민행복에 기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심려를 끼쳐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서청수 회장이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기자회견은 종료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이제 기자들은 우르르 백양옥 여사에게로 몰려갔다.

기실 기자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표정은 폴 로젠버그의 얼굴이 아니라 백양옥 여사의 얼굴이었다.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전무후무한 ‘처의 난’으로 기록했다.

웬만하면 서승학을 내세워 ‘왕자의 난’이라고 해줄 법도 했다.

하지만 서승학이 그럴 깜냥이 안 된다는 건 경제부 기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백양옥 여사는 어떻게든 기자들을 피하려고 애썼지만 기자들의 집착은 한 술 더 떴다.

지하주차장에서 급히 사무실로 출근하는 백양옥 여사에게 기자가 달려들었다.

“백 여사님! 이번에 화이트이글이 상당한 치명타를 입었는데, 여전히 지분싸움에서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백양옥 여사는 선글라스를 낀 채 종종걸음으로 기자를 지나쳤다.

기자는 끈질기게 쫓아갔다.

“여사님! 만약 지분싸움에서 패할 경우, 서청수 회장과의 관계회복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던지는 질문마다 백양옥 여사의 성질머리를 단단히 건드렸다.

매스컴에 익숙하지 않은 백양옥 여사가 휙 몸을 돌리며 기자를 노려봤다.

그녀의 표독스런 눈빛이 선글라스를 뚫고 기자에게 전해졌다.

“짜증나니까 찍지 마! 어디서 버르장머리 없이!”

“지금 버르장머리라고 하셨어요?”

“아, 비켜!”

그 장면은 그대로 전파를 탔다.

-‘어디서 버르장머리 없이!’…백양옥 인성 논란 ‘모전자전’인가

상황은 서청수 회장, 서원웅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대찬은 당당히 필래그룹 사옥으로 금의환향했다.

왕윤수 사장은 좀처럼 보기 힘든 웃음을 대찬에게 보여주었다.

“우리 그룹에 이렇게 훌륭한 로비스트가 있을 줄은 몰랐네.”

“저는 말만 몇 마디 보탠 것뿐입니다. 일이야 돈이 다했죠.”

“그렇게 치면 여긴 다 백수 천지야. 회사원이 회사 돈 짊어지고 일하는 거야 매한가지지.”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왕윤수 사장과 덤덤한 인사치레를 나누고 있던 중, 서청수 회장이 대찬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조대찬,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구만.”

“회장님.”

대찬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네 덕에 싸움이 한결 수월해졌다. 뉴스 터진 이후로 우리한테 위임장 던지는 개미들이 많아졌어.”

“다행입니다.”

서청수 회장은 흐뭇하게 웃었다.

“이 싸움이 무사히 넘어가면 소원 하나 들어주지. 유치한 말이지만 이것보다 나은 말이 생각이 안 나.”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말씀만 아니야. 날 쪼잔한 놈으로 만들지 마. 조대찬은 이걸로 밥값 다 했으니 요술램프에 무슨 소원 빌지 상상이나 하고 있으라고.”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네요.”

“기분 좋을 자격이 충분히 있지, 자네는.”

서청수 회장은 상기된 웃음을 지으며 대찬의 등을 탁탁 두드렸다.

승부의 추가 서청수 회장 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화이트이글도 체면이 구겨진 채로 후퇴할 생각이 없었다.

여기서 짐 싸들고 한국을 떠버리면 화이트이글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다.

서청수 회장이 쏟아냈던 온갖 음해들이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꼴이다.

당장에는 돈지랄이라는 손가락질이 따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비판을 감수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대로 고객들의 신뢰를 잃으면 장기적으로 더 손해라는 게 폴 로젠버그의 판단이었다.

화이트이글은 3천억 원을 추가로 투입해 지분을 매수하겠다고 공시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필래지주의 주가가 출렁거렸다.

이걸로 화이트이글은 필래지주의 지분 19%를 소유하게 되었다.

양쪽은 모두 표 계산에 들어갔다.

서청수 회장이 새로 천억 원을 투입하고, 화이트이글이 삼천억을 투입했다.

이렇게 해서 서청수, 서원웅 측은 보유한 지분 32.8%에 더해 확보한 백기사 지분 2%, 국민연금 6%, 추가적으로 4%만큼의 위임장을 확보했다.

도합 44.8%.

백양옥, 서승학 측은 기존에 보유한 21%에서 사재를 털어 지분을 22%로 끌어올렸다.

여기에 화이트이글의 19%를 더하면 41%, 또 여기에 서청수 측만큼은 아니었지만 확보한 2%만큼의 위임장을 더하면 43%였다.

여전히 지분으로만 따지면 상황은 안개 속이었다.

미네소타 투자위원회가 자금만 회수하지 않았더라도, 화이트이글은 자금을 더 투입할 수 있었다.

위임장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

눈앞까지 다가온 경영권을 놓치고 말았다.

백양옥 여사와 서승학의 속이 쓰리고 쓰렸다.

화이트이글은 경영권을 확보하면 소액주주를 위해 배당률을 높이겠다고 광을 팔았다.

그 호소가 효과가 있었다.

서청수 회장 측이 0.5%만큼의 위임장을 확보할 때 1%의 위임장을 확보했다.

45.3% 대 44%.

이제 둘 중 어느 편도 들지 않은 지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니 자연스레 그 지분 중에서 가장 큰 덩어리에 시선이 갔다.

웨이스티드 삭스(Wasted Socks).

버려진 양말.

무려 필래지주의 지분을 2.4%나 소유하고 있었다.

웨이스티드 삭스가 어디 붙느냐에 따라 경영권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난장판에 웨이스티드 삭스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언론은 이 회사의 정체를 밝히려고 취재력을 총동원했지만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다.

아는 게 없으니 ‘버려진 양말, 이름에 숨은 뜻은 무엇?’ 같은 가십성 기사만 양산했다.

하물며 기자들도 그럴진대 웨이스티드 삭스의 지분이 절실한 양측은 더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럼에도 별 다른 소득은 없는 듯, 양측은 웨이스티드 삭스의 지분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그렇게 마른 걸레까지 쥐어짜다가 확보할 수 있는 지분이 최대한도에 이르렀을 때.

서청수 회장은 백양옥 여사와 서승학에게 만남을 요청했다.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만남이었다.

백양옥 여사는 남편의 방문에도 커피 한 잔은커녕 냉수 한 잔 권하지 않았다.

백양옥 여사, 서승학은 서청수 회장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않았다.

어차피 환대를 기대하지도 않았던 서청수 회장은 덤덤하게 말했다.

“부끄러운 일이야. 일을 왜 이렇게 크게 벌렸어.”

“어디서 남 탓이야.”

“경영권 승계는 내 고유 권한이야. 당신, 그리고 승학이는 내 고유 권한을 인정하지 않고 집안을 둘로 쪼갠 거라고.”

“당신이 집 밖에서 씨 뿌릴 때부터 집안은 이미 둘로 쪼개져 있었어.”

“…그건 백 번 사죄하지.”

“말로는 착한 척 씨불이면서 행동은 정반대잖아? 사죄한다는 사람이 바깥에 뿌린 씨한테 가업을 통째로 넘겨줘?”

서청수 회장은 백양옥 여사를 바라봤다.

백양옥 여사는 시선을 맞춰주지 않았다.

서청수 회장은 한숨을 뿜었다.

“여보, 눈에서 콩깍지를 벗고 승학이를 봐. 어머니가 아니라 대주주의 눈으로 봐봐. 승학이가 회장이 되는 게 맞아?”

그 말에 서승학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잘못했다. 널 차기 회장으로 지목할 테니 그만하자.’

아버지가 그렇게 말해주지 않을까, 품었던 손톱만 한 희망을 버렸다.

“에이씨!”

그는 아버지더러 들으라는 듯 으르렁거리고는 자리를 떴다.

서청수 회장은 참담했다.

상황이 여기까지 치달았는데도 여태 일곱 살짜리 심술만 부리는 아들이 딱하고 딱했다.

백양옥 여사는 싸늘하게 말했다.

“필래는 가업이야. 서씨만의 가업이 아니라 백씨 가업이기도 해.”

“계열사 다섯 곳 분리해줄게. 그걸로 만족해. 그 정도면 회장 소리 들으면서 떵떵거릴 수 있어.”

“웃기지도 않네. 백씨 아니었으면 필래 지금 과자공장 하나밖에 안 남았을 거야. 근데 계열사 다섯 개만 먹고 빠지라고?”

“장인어른 도움 많이 받은 거 맞아. 하지만 창업도 경영도 아버지와 내가 한 거야.”

“됐어. 30년 넘게 이런 말다툼 맨날 답 없이 끝났으니까.”

“…….”

“난 이번 싸움에서 빠질 생각 없어.”

“여보.”

백양옥 여사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빽 소리를 질렀다.

“여보라고 부르지 마!”

“허.”

“됐어. 더 말하지 마. 목소리 역겨우니까. 이제 와서 반반 싸움으로 가니까 착한 척하면서 끝내고 싶은 모양인데, 나 이대로 안 끝내.”

서청수 회장의 눈꺼풀에 피로가 내려앉았다.

백양옥 여사는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당신 자존심에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니 상황이 어지간히 급하긴 한가 봐? 주총에서 보자고.”

백양옥 여사는 그렇게 말하고 더는 서청수 회장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며 자리를 떴다.

서청수 회장은 물 한 잔 얻어 마시지 못해 입안이 뻑뻑한 채로 물러났다.

이제 말로 다툴 여지는 끝났다.

냉혹한 돈놀이만 남았다.

필래지주의 주주총회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언론은 ‘오리무중’, ‘시계제로’, ‘박빙’ 따위의 수사를 동원해가며 떠들어댔다.

필래그룹에 돈을 밀어 넣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이 걸려있어 애간장을 태웠다.

비단 주식의 얘기만은 아니었다.

뭐든지 노름의 대상으로 삼는 불법 도박 사이트는 필래그룹의 경영권 분쟁마저 노름판으로 전락시켰다.

배당률은 팽팽해서, 이 승부가 정말 안갯속이라는 걸 무엇보다 진실하게 드러냈다.

이제 결전의 날이 밝았다.

필래지주의 임시주주총회가 열리는 필래그룹 사옥.

대찬은 넥타이를 꽉 맸다.

그는 서원웅이 보유한 지분 0.2%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는 대리인으로 지목되었다.

서청수 회장은 서원웅에게 주주총회장에 등장하지 않을 것을 권고했다.

진흙탕 개싸움이다.

이겨도 내상은 깊다.

이미 세간은 필래그룹의 집안싸움을 두고 설왕설래하며 비웃었다.

게다가 한 손에 꼽히는 재벌기업이 외국자본의 침투로 악전고투를 벌인다는 사실 또한 굴욕.

서청수 회장은 굳이 서원웅을 주총장에 등장시켜 이 얼룩이 튀도록 만들고 싶지 않았다.

죄가 있다면 서원웅을 낳은 서청수에게 있다.

그저 낳아졌을 뿐인 서원웅에게는 없다.

“넥타이 비뚤어졌어, 잠깐만.”

윤이영은 꽉 조여진 넥타이를 조금 헐겁게 풀었다.

대찬은 웃었다.

“나도 모르게 긴장했나 봐.”

“긴장을 왜 해. 오빠 돈 날아가는 것도 아니면서.”

“경영권 방어에 성공하면 회장님이 소원 하나 들어준다고 했거든. 설레잖아, 두근두근.”

대찬이 농담조로 말하자 윤이영은 배시시 웃었다.

“왜, 무슨 소원을 빌려고 조대찬이 이렇게 긴장을 다해?”

“우리 국민배우 윤이영이 타고 다닐 전세기라도 하나 사달라고 할까?”

“그 돈 있으면 이렇게 표 대결까지 안 갔지.”

윤이영은 한번 웃고는 대찬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잘하고 와. 나도 뉴스 계속 보고 있을게.”

“알았어. 금방 돌아올게.”

“금방 오면 안 되지. 이기고 나서 자축의 낮술이라도 한잔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 그렇게 되나.”

대찬은 윤이영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리고 주총장으로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윤이영이 대찬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진하게 다시 키스했다.

대찬은 윤이영의 허리를 얌전히 잡고 살짝 눈을 감은 채 입술을 받아들였다.

필래그룹 사옥은 주말의 명동 한복판보다 더 인파가 들끓었다.

기자들이 운집한 탓도 있었지만 워낙 초미의 관심사라 필래그룹의 주주 대부분이 참석했다.

그 와중에 주주총회의 주인공들이 등장했다.

백양옥 여사는 트레이드마크인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하얀 정장을 입은 채로 차에서 내렸다.

기자들이 달라붙어 고함에 가까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는 응답하지 않았다.

서청수 회장이 서원웅을 주총장에 등장시키지 않았듯, 백양옥 여사 역시 서승학을 주총장에 내보내지 않았다.

백양옥 여사가 스스로 서승학의 대리인이 되었다.

이러나저러나 부모 마음은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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