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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89화 (288/556)

난 할 수 있어 289화

대찬도 옅은 웃음을 머금은 채로 말했다.

“동맹에게서 지원군을 얻는 것도 방법이지만, 적의 보급을 차단하는 것도 방법이지. 오히려 후자가 더 효과적이야.”

“음, 그래서?”

“나는 햇치 상원의원께 적의 보급을 차단해 달라 로비하러 왔어.”

유진 깁슨은 대찬을 바라봤다.

이마에 잔뜩 주름을 잡으며 웃었다.

“이봐, 우리가 화이트이글의 물주라도 된단 말이야?”

“간접적 물주지.”

“간접적 물주?”

“MSBI가 화이트이글에 1억 불 위탁운용하고 있어.”

유진 깁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대찬이 대응TF가 작성한 700페이지짜리 보고서에서 눈여겨본 내용이 바로 그것이었다.

MSBI는 Minnesota state board of investment.

즉, 미네소타 투자위원회의 약자였다.

미네소타 주 거주민의 퇴직기금, 신탁기금, 현금계좌의 관리를 담당하는 단체.

MSBI에서 굴리고 있는 돈은 한화로 약 600억 달러였다.

한화로 약 70조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그리고 투자위원회의 수장은 미네소타 주지사였다.

마이크 햇치가 주지사에 당선되고 상원의원에 당선되면서, 미네소타 주의 모든 정치는 마이크 햇치로 통했다.

불과 만 나이로 서른둘에 불과한 유진 깁슨이 유력한 하원의원 후보로 거론되는 것만 해도 그랬다.

주지사 역시 마이크 햇치의 정치적 동반자였다.

결국 마이크 햇치가 힘을 쓰면 화이트이글에 위탁된 1억 불을 회수할 수 있다.

화이트이글이 당장 운용할 수 있는 5천억 원 중, 약 천억 원을 빼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 말을 들은 유진 깁슨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초! 비약이 심하네.”

“비약이라니?”

“아무리 햇치 상원의원이 미네소타 정가에서 대단한 거물이라지만, 그 정도 결정을 뚝딱 해내지는 못한다고.”

“물론 간단한 일은 아니겠지.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아.”

“하하… 이거 곤란한데.”

유진 깁슨은 난감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대찬에게 쑥 고개를 내밀었다.

그때의 유진 깁슨의 얼굴에는 조금의 웃음기도 없었다.

“설마 이게 네 말 한 마디로 될 거라고 생각해?”

“…….”

“햇치 상원의원의 주지사 당선 때, 네 덕을 분명히 봤어. 그건 사실이야. 하지만 벌써 10년이 넘었다고, 초.”

“알고 있어.”

“정치인들은 전부 선택적 기억장애 환자라는 것도 알고 있지?”

“알아.”

유진 깁슨은 말 다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햇치 상원의원이 MSBI를 맘대로 주무를 순 없어. 그렇게 해두자고. 그러는 편이 네 마음도 편할 테니까.”

유진 깁슨은 그것으로 논의를 끝내려고 했다.

둘은 워싱턴 한복판을 말없이 천천히 걸었다.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대찬은 미지근하게 식은 커피를 술처럼 마셨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나는 오늘 로비스트로 왔다고 했지.”

“…응?”

“로비스트의 힘은 결국 돈에서 나오는 거지. 유진,”

유진 깁슨은 굳은 표정으로 대찬을 바라봤다.

대찬도 유진 깁슨을 바라보며 웃었다.

“여론조사에서 독주 중이라고? 거짓말에 너무 능숙하잖아, 유진. 조쉬 칼튼 후보랑 비등비등하던데?”

“…….”

“선거자금으로 500만 불 지원할게. 세탁기 여러 대 돌려서 깨끗하게 빤 돈이야.”

한국도 그렇지만 미국의 선거판은 더 심한 돈 잔치였다.

아무리 유망한 정치인이라도 돈 앞에는 장사 없다.

대찬은 말을 이었다.

“500만 불은 착수금이야. 일이 잘되면 더 푸시할 거야.”

“…잠깐 안에 들어가서 얘기할까.”

유진 깁슨은 대찬을 자신이 사는 집으로 데려갔다.

중요한 얘기는 대로변에서 해야 된다더니.

대찬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를 따라갔다.

대찬과 유진 깁슨은 거실의 소파에 마주앉았다.

대찬은 종이컵 대신 머그컵에 담긴 따뜻한 우유를 마셨다.

“네 구미가 당긴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지. 결국 햇치 상원의원이 부담을 감수해야 하니까.”

“…맞아.”

“햇치 상원의원에게도 쏠 실탄이 준비돼있어.”

“들어볼게.”

“아니, 유진 너한테는 얘기하지 않을 거야.”

그 말에 유진 깁슨이 잠깐 멈칫했다.

“…뭐라고?”

“햇치 상원의원을 만나게 해줘.”

“그, 그건…….”

“그게 네 500만 불에 대한 내 요구, 아니 필래그룹의 요구야.”

대찬은 마이크 햇치와 직접 교섭하기를 원했다.

굳이 유진 깁슨을 전서구 삼아 편지를 띄우고 기약 없이 답변을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이건 부탁이 아니라 거래다.

대찬은 마이크 햇치와 대등한 입장에서 교섭할 자신이 있었다.

유진 깁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의원님을 만나게 해줄게.”

“시간이 없어.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자리를 만들어줘.”

“그러지.”

마이크 햇치는 이틀 후, 대찬을 자신의 사무실로 맞이했다.

오랜만에 만난 마이크 햇치는 많이 늙어있었다.

워싱턴의 정치에 찌들대로 찌들었는지, 인상이 약간 고약하게 변했다.

어쩔 수 없는 정치인의 숙명이었다.

그는 푸근하게 웃으며 악수를 건넸다.

“초, 오랜만이군. 어엿한 비즈니스맨으로 성장했다는 걸 유진을 통해 들었네.”

“저도 의원님이 미네소타를 넘어 미국 정계의 거물이 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거물은 무슨, 낯 간지럽군. 앉게.”

마이크 햇치가 자리를 권하자 대찬은 착석했다.

따뜻한 인간적인 대화는 여기까지였다.

마이크 햇치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대강의 상황은 유진을 통해 들었어. 나더러 MSBI에 영향력을 행사하라고?”

“네.”

“그건 자칫 잘못하면 날 한 방에 날려버릴 수도 있는 폭탄 같은 일이야.”

“네, 그래도 폭발물처리반이 왜 있겠습니까. 기술만 좋으면 아무 탈 없이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허허…….”

마이크 햇치는 웃기만 했다.

얼른 가지고 온 선물보따리를 풀어보라는 뜻이었다.

대찬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필래정보통신의 정밀기기 생산공장을 미네소타에 세우겠습니다.”

“음, 주민들의 일자리창출에 기여하겠군. 세금도 걷고.”

마이크 햇치의 얼굴에는 어떤 변화도 없었다.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

마이크 햇치는 그렇게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대찬은 덤덤히 두 번째 보따리를 풀었다.

“저희는 의원님의 정치후원금으로 3천만 불까지 기꺼이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다.”

“3천만 불이라. 생각보다 통이 크군.”

아무리 내로라하는 미국의 상원의원이지만 3천만 불은 구미가 안 당길 수가 없는 액수였다.

마이크 햇치는 깍지를 낀 채로 대찬을 바라봤다.

“덩어리가 크면 쉽게 들킬 텐데.”

“걱정 마십시오. 먹기 좋은 크기로 잘게 잘라서 여러 채널을 통할 겁니다.”

“그 부분이야 한국의 재벌들이 능숙하니까 믿을 만하지.”

“의원님께는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맞아. 좋은 조건이야. 그건 부정할 수 없네.”

“그럼 받아들이시는 겁니까.”

“기꺼이 낼 수 있는 돈이 3천만 불이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마이크 햇치는 빙긋 웃었다.

“그럼 기껍지 않게 낼 수 있는 돈은 얼마까지인가.”

저 망할 수전노 같으니.

대찬은 피식 웃었다.

“50만 불을 기껍지 않게 더 낼 수 있습니다.”

마이크 햇치는 쩝, 입맛을 다셨다.

“그럼 안 되겠군. 그걸 누구 코에 붙여? 됐네. 50만 불 덜 받고 자네랑 웃으면서 악수하지.”

“결정에 감사드립니다, 의원님.”

“아, 근데 공장은 미네소타에 짓지 말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리건에 지어.”

마이크 햇치의 뜬금없는 말에 대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오리건에 지으라고 하십니까.”

“혼자 먹으면 배탈이 나. 나눠먹어야지. 어차피 그쪽은 미네소타나 오리건이나 거기서 거기 아닌가.”

“그렇긴 합니다만.”

“그러면 됐군. 그렇게 해주게.”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미네소타든 오리건이든 대찬이, 필래가 알 바 아니었다.

대찬은 마이크 햇치와의 교섭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 교섭의 결과는 며칠 지나지 않아 바로 드러났다.

대찬은 뉴스를 통해 소식을 접했다.

“미 상원 금융위원회가 각국의 대형은행들의 도움을 받아 수십억 달러의 세금을 회피해온 헤지펀드들에 대한 규제방안을 마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왔구나.”

대찬은 또박또박한 발음을 뱉는 앵커의 입술에 집중했다.

“미 상원 금융위원회 소속의 론 와이든 상원의원은 이 같은 헤지펀드의 편법 조세회피를 사실상의 탈세로 규정했습니다.”

앵커의 말 다음에 론 와이든 상원의원이 화면에 등장했다.

그는 격앙된 목소리로 목에 핏대를 세웠다.

“헤지펀드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있으면서도, 당연한 납세의 의무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

화면에는 론 와이든의 말과 함께 그의 소속과 출신이 자막으로 등장했다.

-민주당, 오리건 주

대찬은 그제야 마이크 햇치가 오리건에 공장을 지으라고 했던 이유를 알았다.

화면은 다시 앵커에게로 돌아왔다.

“미 상원 금융위원회는 이와 같은 내용의 조사보고서를 채택하고, 청문회를 준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다음이 대찬이 가장 듣고 싶어 하던 말이었다.

“이 청문회에는 현재 필래그룹 경영권 분쟁의 핵심인 화이트이글의 대표 폴 로젠버그가 포함되어 귀추가 주목됩니다.”

“됐다!”

대찬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청문회는 열리지 않았다.

마이크 햇치가 소위 ‘먹튀’를 했는가.

그건 아니었다.

아마 천만 불쯤을 더 풀었다면 론 와이든은 정말 폴 로젠버그를 청문회 자리에 세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헤지펀드, 그중에서도 화이트이글을 정조준한 건 그저 명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대찬에게, 그리고 서청수 회장과 서원웅에게 가장 반가운 소식은 뉴스를 통해 전해지지 않았다.

대응TF는 화이트이글의 자금운용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유의미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직원 하나가 왕윤수 사장에게 보고했고, 왕윤수 사장이 서청수 회장에게 즉각 보고했다.

새벽 4시에 보고를 올렸으니, 그만큼 위중한 사안이었다.

“회장님! 미네소타 주 투자위원회가 화이트이글에 위탁했던 1억 불을 회수했습니다!”

“좋아. 그놈들도 적잖이 당황했겠군.”

“놈들의 자금조달에 적신호가 들어왔습니다.”

“이 좋은 소식을 널리 알려줘야겠지.”

“네, 분명 시장이 반응할 겁니다.”

마이크 햇치는 대찬과의 약속을 지켰다.

그는 미네소타 주지사를 통해 미네소타 주 투자위원회의 자금을 회수했다.

주지사 역시 부담 없이 결정을 내렸다.

상원 금융위원회에서 잔뜩 군불을 지펴놨으니 명분이 충분했다.

600억 불에 달하는 자금을 운용하는 투자위원회였다.

개중 1억 불을 거둬들인다고 해서 거세게 항의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얍삽한 헤지펀드에게 한 방 제대로 먹여줬다며 좋아하는 사람들은 있었다.

화이트이글이 떠안은 1억 불짜리 썰물은 그 자체로도 충격이었다.

하지만 여파는 1억 불, 그 이상이었다.

사람들은 화이트이글의 자금조달능력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저 1억 불이 썰물의 신호탄은 아닐까 의심했다.

게다가 좋지 않은 일로 상원이 폴 로젠버그를 들먹이고 있었다.

방귀가 잦으면 똥이 나온댔다.

자꾸 여기저기서 푹푹 가스가 샌다.

이러다 저 살찐 독수리가 정말 지려버리는 건 아닐까, 사람들은 의심했다.

서청수 회장은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을 줄 알았다.

그는 미네소타 주 투자위원회의 자금회수 소식이 충분히 퍼졌을 즈음, 카메라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서청수 회장의 비자금 조성과 곧바로 이어진 백양옥과 화이트이글이 합작한 경영권 분쟁.

필래그룹 사태는 단연 뜨거운 감자였기에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카메라 앞에 서서 차분하게 말했다.

“제 부도덕의 소치로 인해 외국자본의 침투를 허용했습니다. 이 일로 크게 분노하셨을 주주 일동과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서청수 회장은 직각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미국의 헤지펀드 화이트이글은 제 집안의 분란을 야기했습니다. 작은 갈등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재벌총수가 아니라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면목이 없고 참담한 심정입니다.”

서청수 회장은 그러면서 손등으로 슥, 눈물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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