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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88화 (287/556)

난 할 수 있어 288화

이글은 날카로운 발톱과 빠른 활강속도로 물고기를 사냥하지만, 벌쳐는 썩은 시체를 먹는 것으로 연명한다.

하지만 그렇게 툴툴거리며 주저앉는 건 꼴 사납다.

돈으로 찔러 들어오는 적에게 가능한 대답은 오로지 돈으로써 가능했다.

대찬은 서원웅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도 움직여야 해요. 지주회사 리스크관리팀만 믿고 손가락 빨고 있을 순 없죠.”

“그렇지. 근데 우리가 뭘 할 수 있어?”

“하다못해 주주들한테 전화를 돌려서 위임장이라도 확보해야죠. 대표님은 더 큰물에서 노시고. 면식 있는 은행사람들을 계속 만나셔야 할 거예요.”

“알았어. 바로 움직이지.”

“알겠습니다.”

대찬은 혁신경영팀의 업무를 모두 중단시켰다.

그리고 각자의 책상 위에 서류를 한 뭉텅이씩 올려놨다.

“오늘부터 우리는 텔레마케터예요. 주주들한테 전화 돌려서, 위임장 받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직원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냐며 뒷북을 치지는 않았다.

대찬 역시 팔을 걷어붙이고 전화기를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주주님. 필래지주에서 연락드렸습니다. 다름이 아니옵고…….”

직원들은 칼칼해진 목을 냉수로 달래며 위임장 확보에 열을 올렸다.

이건 비단 혁신경영팀만의 모습이 아니었다.

필래 비바체는 물론, 필래지주 대부분의 직원들이 위임장 확보에 뛰어들었다.

한 주, 한 주를 애타게 모았다.

구슬도 서 말은 꿰어야 보배라고 하는데, 이렇게 해서는 서 말은커녕 한 줌도 안 될 판이었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해.”

대찬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한 주, 한 주 모으면 뭘 하나.

8.8%의 지분을 매입하겠다고 공시한 화이트이글은 두 번째 총알을 발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몇 퍼센트가 될지 아무도 몰랐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는 격도 아니고, F22 날아가는데 종이비행기 날리는 격이었다.

서청수 회장은 각종 은행으로부터 급히 2%의 지분을 백기사로 확보했다.

거기에 서원웅의 우호지분으로 참여하겠다며 위임장을 낸 주주들의 지분 0.5%를 합치면 33.1%.

서승학은 기존의 21%에 화이트이글의 13.8%를 더해 34.8%였다.

이제 서원웅의 우호지분이 열세에 놓였다.

물론 아직 시간은 있었다.

외국자본의 대대적인 침투에 국민연금이 동조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국민연금의 지분은 6%.

아직 숫자상으로는 서원웅이 우세했다.

그러나 언감생심 안심할 수 없었다.

국민연금이 서원웅의 우호지분에 붙는다고 해도, 개미들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서승학이 경영권을 훔쳐갈 수도 있었다.

화이트이글이 추가로 지분 매입에 나서면 정말로 곤란한 상황이 펼쳐질 마당이었다.

그때 왕윤수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대찬은 바로 받았다.

“사장님.”

“지금 우리 모가지 달랑거리는 거 알죠.”

“네, 실감하고 있습니다.”

“대응TF 꾸렸으니까 조 부장도 여기에 끼도록 하세요. 어쨌거나 서원웅 대표도 당사자니까. 서 대표가 직접 참여할 수는 없으니 조 부장이 역할을 해줘야겠어요.”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기존에 하던 업무는 올스톱입니다. 회사의 주인이 바뀌면 우리도 마냥 이 자리에 비비고 못 있어요.”

“알고 있습니다.”

“그럼 바로 TF팀 사무실로 와요. 38층으로 오면 직원이 안내해줄 겁니다.”

대찬이 들어간 대응TF의 사무실은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당연했다.

왕윤수 사장은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와중에 대찬을 발견했다.

그는 어깨를 살짝 들어 어깨와 뺨 사이에 휴대폰을 끼우고 대찬에게 책자 하나를 건넸다.

-對화이트이글 대응 기본 숙지사항

일단 기본적인 정보는 알고 있으라는 뜻이었다.

대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걸 받아들었다.

책자에 적힌 화이트이글의 전체 자금규모는 한화로 약 10조 원이었다.

그중 필래지주에 투입된 자금이 약 6천억 원이었다.

대찬은 책자를 꼼꼼히 살폈다.

‘이미 대부분의 자금은 다른 회사에 흩뿌려져있어. 그걸 거둬서 필래에 집어넣는 건 무리수.’

필래지주의 두뇌들이 모여 만든 책자에도, 화이트이글의 남은 여유자금이 1조 원 미만이라고 짚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투입할 것으로 예상되는 최대 액수는 5천억 원.

만일 저 5천억 원이 모두 필래지주에 쏟아져 들어오면 화이트이글의 지분은 20%를 상회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서승학과 화이트이글의 지분만으로 40%를 넘게 된다.

그 지경에 이르면 경영권은 서승학, 혹은 화이트이글에 넘어간다고 봐야 했다.

그 정도의 지분을 쏟아 부으면 화이트이글도 끝까지 싸울 것이다.

그들의 퇴로가 확보되어있는 지금, 결판을 내야만 했다.

대찬은 이 대응TF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했다.

그는 대응TF에서 작성한 화이트이글의 핵심 정보를 비롯해서, 무려 700페이지 분량으로 작성한 세부정보까지 닥치는 대로 읽었다.

싸움에서 이기려면 정보의 취득, 그리고 취득한 정보의 분석이 필수였다.

대응TF에서 작성한 이 거대한 정보의 더미는 잘 쌓은 토산이었다.

그 토산에 올라 화이트이글, 그리고 그곳의 수장인 폴 로젠버그를 내려다봐야 했다. 속속들이.

밤낮 없이 이 700페이지를 읽고 또 읽던 대찬의 눈에 띄는 한 대목이 있었다.

대찬의 시선은 그 대목에서 한참 머물러 있었다.

눈은 오랫동안 깜빡이지 않았다.

오랫동안 깜빡이지 않는 만큼, 눈동자에는 그 대목이 반사되어 비췄다.

‘이거라면 해볼 만할지도……. 밑져야 본전이니까.’

대찬은 주먹을 꽉 쥐었다.

대찬은 대응TF에서 논의되는 모든 사항을 서원웅과 공유했다.

이 전쟁은 서청수가 서원웅을 위해 자기의 운명마저 걸고 치르는 대리전이었다.

당장 전쟁의 승패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서원웅의 존재감이 제로가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 경영권 분쟁은 절체절명의 위기인 동시에 기회이기도 했다.

영웅은 난세에 등장하는 법이다.

물론 이는 서원웅이 이 난관을 극복한 다음의 일이었다.

모 농구감독의 말마따나, 승리했을 때 영웅이 나타나는 법이다.

대찬은 서원웅에게 말했다.

“우리도 이 싸움의 당사자야. 싸움의 주도권을 지주사 쪽에만 넘겨놓고 강 건너 불구경 할 처지가 아니야.”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 이미 지주 쪽에서 대응TF 만들고 컨트롤타워 단일화했잖아. 너도 대응TF에 들어갔고.”

“알고 있어.”

“그런데 왜? 우리가 힘을 보태는 건 사족이야.”

“물론 우리가 대응TF에서 지휘권을 빼앗아올 순 없어. 그럴 필요도 없고.”

“당연하지.”

대찬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지원사격은 얼마든지 가능하잖아? 별동대로.”

“별동대?”

“비바체의 힘으로 지원사격을 해주자고.”

서원웅은 미간을 찌푸렸다.

“계열사 자금으로 지주사 지분을 사들이는 건 위법이야.”

“알고 있어.”

“그럼 어떻게 지원사격을 해주자는 말이야?”

“좀 복잡한 쓰리쿠션인데.”

“쓰리쿠션?”

“우리 면세점 따오면서 현금 많이 보유하고 있잖아.”

“필드 업쪽에 꽤 들어가고 있지만 적지는 않지.”

비바체가 보유한 필래면세점의 2014년 매출은 2조 5천억 원, 영업이익은 2천억 원 가량이었다.

2015년이 상당기간 경과된 지금, 영업이익이 1천5백억 원 가량.

서원웅의 말마따나 필드 업을 비롯해 유통 인프라 구축까지, 돈 들어갈 구멍이 많았다.

하지만 면세점 사업은 비바체에게 충분한 쌈짓돈을 남겨주었다.

“그걸 좀 써도 될까.”

“…실패 위험이 있어?”

“있어. 하지만 돈을 날릴 일은 없어.”

대찬이 서원웅을 빤히 바라봤다.

그 눈빛은 서원웅을 필래그룹 후계자의 문턱까지 이끌어온 눈빛이었다.

서원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을 만나서 다른 계열사도 좀 이용해야겠다고 말씀드려줘.”

“다른 계열사?”

“응, 필래정보통신 정도면 괜찮을 거 같은데.”

“그러려면 나한테 부연설명을 해줘야 할 거야. 그래야 회장님을 설득할 수 있으니까.”

“당연하지.”

서원웅은 대찬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청수 회장은 서원웅의 보고를 듣고 반신반의했다.

만약 대찬이 아니라 비슷한 직급의 다른 이가 제안했더라면.

허튼 짓 말라며 호통을 쳤을 것이다.

괜히 나서서 일을 벌였다가 골치 아픈 후환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찬은 달랐다.

서청수 회장에게 그는 훌륭한 조력자였다.

“일단 진행해봐. 대신, 신중해야 해. 진행상황은 바로바로 왕윤수 사장한테 보고하게 하고.”

“알겠습니다, 회장님.”

“나 참, 이런 일에까지 그 새파란 고사리 손을 빌려야 하나.”

“집에 있는 돼지저금통까지 털어야 하는 판에 고사리 손이든 엄마 약손이든 관계할 여유가 없잖습니까.”

“네 엄마 약손이 우릴 죽이려고 드는데? 약손이 아니라 독약손이다.”

그렇게 싱거운 농담을 던진 서청수 회장은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네 엄마는 백양옥이 아니구나. 그래, 네 말이 맞다. 알았다.”

서청수 회장의 승낙을 받은 대찬은 바로 미국으로 떠났다.

대찬은 워싱턴의 의회의사당에 도착했다.

백색으로 좌우대칭을 이룬 의사당은 흡사 타지마할을 보는 것 같은 위압감을 내뿜었다.

아니, 저기서 세계의 정치와 경제가 주물러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타지마할을 ‘따위’라고 할 정도로 거센 압박을 느꼈다.

대찬은 미국 정치, 세계 정치의 상징과도 같은 의사당을 한참 바라봤다.

“헤이, 초.”

반가운 목소리가 대찬을 불렀다.

대찬은 빙긋 웃었다.

유진 깁슨이었다.

둘은 반갑게 웃으며 악수를 나눴다.

유진 깁슨은 여전히 마이크 햇치 상원의원의 보좌관을 하고 있었다.

유진 깁슨은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초, 오랜만이야. 잘 지냈지?”

“덕분에. 너도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네.”

“바빠. 내년 선거에 하원의원으로 출마할 거거든.”

“오, 정말이야?”

“응.”

대찬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지근한 반응보다는 화끈하게 놀라주는 편이 좋았다.

내년은 2016년.

도널드 트럼프가 그야말로 쇼킹하게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는 해였다.

‘이번에도 트럼프가 될까.’

대찬은 궁금해졌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툭 던지듯 말했다.

“내년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될까?”

“뭐? 누구?”

“도널드 트럼프.”

유진 깁슨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지도 않았다.

“내가 아는 도널드 트럼프 말인가? 레슬링 나와서 빈스 맥마흔이랑 생쇼하는 트럼프?”

“아, 응.”

“…내가 한국식 유머를 잘 이해 못하고 있는 거야, 초?”

대찬은 웃으면서 얼버무렸다.

“아니, 세상에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

“그건 심슨가족에서나 가능한 일이야. 아직 시차적응이 덜 됐나봐?”

“그래, 그런가?”

정말 이번에는 트럼프가 대통령이 안 될 수도 있었으니 대찬은 말을 아꼈다.

아무튼 트럼프든 누구든 내년에 미국 대통령이 바뀐다.

그 선거에서 미국 전역의 하원의원들도 결정된다.

유진 깁슨은 미네소타 주지사를 지내고 상원의원까지 지내고 있는 마이크 햇치의 최측근.

그러니 오히려 하원의원 선거에 도전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대찬은 웃으면서 축하했다.

“유진 포 콩그레스(Eugene for congress·유진을 의회로). 꼭 당선됐으면 좋겠다.”

“아마 될 거야. 여론조사에서 독주하고 있거든.”

대찬은 젊은 예비정치인의 당당한 모습이 보기 좋아서 웃었다.

둘은 뜨거운 김이 오르는 커피를 한 잔씩 손에 쥐고 걸었다.

유진 깁슨은 한 곳에 앉아 진득하게 얘기를 나누는 것보다, 많은 인파 속에서 걸으면서 얘기 나누는 것을 선호했다.

“초, 그냥 안부나 물으러 여기까지 온 것 같지는 않고.”

“응, 오늘 난 로비스트야.”

“로비스트라. 자국 로비스트들도 따가운 눈총을 받는 마당에 한국의 로비스트라니. 절대 다른 사람 눈에 띄면 안 되겠는데.”

“그런 사람이 워싱턴 대로 한복판을 걷고 있어?”

“모르는 말씀. 오히려 여기가 안전해.”

“그래?”

“다른 사람들도 죄다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덕분에 누가 엿들으려고 해도 엿듣질 못하거든.”

대찬은 뜨거운 커피를 조심스럽게 마시며 말했다.

“지금 우리 회사 상황이 퍽 어렵게 됐어.”

“네가 온다고 하길래 나도 체크했어. 로젠버그한테 시달리고 있다고.”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집안싸움에 미국 독수리까지 끌어들였어. 상황은 마냥 좋지만은 않고.”

“백기사가 필요하다면 의회의사당이 아니라 비즈니스센터를 찾는 게 합리적인 선택 아닌가?”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방법은 다양해.”

“조대찬의 군사학 강의 시작인가.”

유진 깁슨은 웃으며 가볍게 조롱하면서도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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