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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87화 (286/556)

난 할 수 있어 287화

“앞으로 날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마. 더 이상 서청수 그 인간한테 종속된 존재가 아니니까.”

“아… 알겠습니다, 이사장님.”

“그 편이 훨씬 낫군.”

백양옥은 혈혈단신 미국으로 떠났다.

대외적으로는 뉴욕의 모 갤러리에서 유망한 화가를 만난다고 알렸다.

하지만 그녀는 예술적인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물감 냄새 대신 돈 냄새를 풀풀 풍기는 비즈니스맨을 만났다.

덩치가 좋은 중년의 백인 남성이었다.

“미세스 팩, 저를 만나러 뉴욕까지 오실 줄은 몰랐는데요.”

“그럴 만하니까 온 겁니다.”

“필래그룹에서 지금껏 우리 지분에 주목한 경우는 없었는데요.”

백양옥 여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이는 폴 로젠버그.

헤지펀드 화이트이글의 CEO였다.

화이트이글은 필래지주의 지분 5%를 갖고 있는 대주주였다.

백양옥 여사는 폴 로젠버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지금도 화이트이글의 지분에는 관심 없어요.”

“그래요? 그럼 저를 왜 만나자고 하셨을까요, 필래그룹의 사모님께서.”

“5%의 지분 정도는 필요하긴 하지만 절실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화이트이글이 날개를 더 크게 펼친다면 절실해지죠.”

“날개를 크게 펼치라고요? 필래에 대한 지분을 더 확보하라는 겁니까?”

백양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주 적극적으로.”

폴 로젠버그는 푸흐흐,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한국 아줌마가 뉴욕까지 날아와서 흰소리를 늘어놓으니 웃을 수밖에.

“두 가지 의문이 드는데요. 일단 먼저 하나 물어보죠. 그게 왜 여사님께 필요합니까?”

“아마 두 번째 의문은 그렇게 해서 화이트이글에 무슨 득이 되냐는 것이겠죠?”

“맞습니다.”

“두 가지 의문을 동시에 해결해드리죠. 곧 필래그룹에 경영권 분쟁이 있을 거예요.”

“음?”

지금껏 별 흥미를 느끼지 않던 폴 로젠버그의 눈에 불이 켜졌다.

살찐 독수리가 돈냄새를 맡았다.

“남편은 혼외자에게 후계를 맡길 생각이에요. 저는 받아들일 수 없어요.”

“남편의 지분에 맞서기는 힘들고.”

백양옥 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화이트이글이 전격적인 투자를 결단해주면 우리가 이겨요.”

“으흠…….”

고심의 으흠이 아니었다.

얼마를 벌 수 있을까 생각하니 저절로 나오는 즐거운 으흠이었다.

박 터지는 지분싸움이 벌어지면 주가는 수직상승한다.

싸움이 벌어지기 전에 거액을 필래지주에 밀어 넣으면, 폭리를 취할 수 있다.

백양옥 여사의 제안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폴 로젠버그는 살찐 배 위에 손을 올려놓고 웃었다.

“그런데 집안일은 집안에서 풀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한국사람들은 외부, 특히 외국의 간섭을 싫어하던데.”

“집안에서 풀자면 결국 내 뜻을 꺾어야 하니까요. 난 싫어요.”

“한국 국민들도 그렇게 용인해줄까요?”

“주주도 아니고 국민의 생각이 뭐가 중요해요?”

폴 로젠버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중요해요. 필래는 한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기업이에요. 그런 기업에 외국자본이 손을 뻗치면 정부도 예의주시할 거예요.”

“국민의 감정이 들끓으면 정부에서 손을 쓸 거다?”

“네, 저희는 그런 리스크를 감당하고 싶지 않아요.”

백양옥 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틈을 만들어드리죠.”

“틈?”

“네, 부담 없이 화이트이글이 필래에 지분을 넓힐 수 있도록 틈을 만들어주겠어요.”

폴 로젠버그는 흥미를 보였다.

“그 틈이라는 거, 어떻게 만들 겁니까.”

“오너 리스크를 만들면 돼요. 도덕적인 이슈를.”

“…부군을 감방에라도 보내겠다는 겁니까?”

“못할 것도 없죠.”

백양옥 여사는 간단히 대답했다.

폴 로젠버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만한 건수가 있긴 하고요? 서 회장은 철두철미해서 흔적을 잘 남기지 않았을 텐데.”

“폴, 당신은 부인하고 잘 때도 수트를 입나요?”

“아, 부인하고 자본 지는 오래돼서.”

“백인이나 황인이나 남자들은 똑같군요.”

“하하, 틀렸어요. 돈 있으면 다 똑같아요. 백인이든 황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백 여사님은 애인 없나요?”

폴 로젠버그의 짓궂은 농담에 백양옥 여사는 반응하지 않았다.

“어쨌든 말이에요. 우리 그이가 아무리 철두철미해도 나한테까지 꼬리를 다 숨기진 못해요.”

폴 로젠버그는 잇바디를 드러내며 웃었다.

“틈이 보이면 안 들어갈 이유가 없습니다.”

“실탄이나 장전해놔요.”

폴 로젠버그는 웃으면서 백양옥 여사에게 두툼한 손을 내밀었다.

백양옥 여사는 손끝만 잠깐 잡고 위아래로 흔든 뒤, 손을 놓았다.

둘의 공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한 익명의 고발자가 서청수 회장이 30억 대의 비자금을 조성했다며 그를 검찰에 고발했다.

검찰은 즉각 수사에 착수하겠다고 선언했다.

서청수 회장을 모시는 김왕장 세 사람의 발등 위에 불이 떨어졌다.

즉각 대책회의에 들어갔다.

김태준 사장은 대찬을 불러 정보를 공유했다.

이는 대찬의 의견을 듣기 위함과 동시에 서원웅과도 자연스레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일이었다.

소식을 전해들은 대찬은 낯빛을 흐렸다.

“검찰이 제법 쪼잔하군요. 재벌회장한테 이 정도야 부스러기일 텐데요.”

“허허, 조대찬이, 이젠 30억 정도는 부스러기라고 하는군.”

“저한테는 바위지만 회장님께는 먼지 수준 아니겠습니까.”

김태준 사장은 대찬이 선물한 커피를 음미했다.

“먼지까진 아니야. 현금으로 그 정도면 꽤 큰 덩어리지. 하지만 이번에 검찰에서 일부러 칼을 벼린 건 맞아.”

“고발자가 익명이라고 하던데, 아마 그냥 평범한 사람은 아니겠죠.”

김태준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승학 쪽에서 움직인 것 같아.”

“서승학 사장이……?”

김태준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면 검찰 쪽에서 쳐다나 봤겠나. 이 정도로 꽁꽁 감춰둔 걸 알 만한 사람은 사모님밖에 없고.”

“으음…….”

“사모님이 흘리고 CG가 자기 쪽 대관업무팀을 가동한 거야.”

대찬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로 노골적이라면 이미 비상한 각오를 하셨다는 건데, 그럼 회장님이 서원웅 대표를 후계자로 지명하시겠다는 결정을 눈치 채신 걸까요?”

“그렇다고 봐야지. 아무튼 눈치가 빠른 양반이니까.”

“그래도 이 악물고 꺼낸 카드 치고는 좀 약하지 않습니까? 30억 정도로는 실형 살 일도 없는데.”

김태준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30억짜리 비자금이면 일부러 힘 조절 좀 하셨구만.”

“그러니 이해가 안 됩니다. 유효타를 먹일 거면 얼마든지 더 큰 건수를 풀 수도 있었을 텐데요.”

“실형 살 정도로 치부를 들췄으면 회장님도 전면전에 돌입할 테니까. 백 여사님도 줄줄이 엮일 일이 많으니까.”

“그저 흠집 내기일까요?”

“흠집 내기. 그런데 그게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겠지.”

“그럼…….”

“맨살에 소금 뿌려봤자 아무 데미지가 없으니까, 일단 생채기를 낸 거야. 상처가 나야 소금이 따갑거든.”

“말씀하시는 소금이 뭡니까?”

“글쎄. 일단 알아봐야지.”

대찬과 김태준 사장이 차분히 얘기를 나누는 와중.

왕윤수 사장은 장백주 실장과 회장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장백주 실장은 차분한 왕윤수 사장과는 달리 씩씩거리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여사님이 이러실 수는 없지! 아무리 그래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데!”

“진정해, 장 실장. 그런 성토는 무의미해.”

왕윤수 사장은 차분한 목소리로 장백주 실장을 다독였다.

그때 서청수 회장이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냅둬라. 나 대신 분통 터트려줄 사람도 하나 정돈 있어야지. 다들 침착하기만 하면 좀 섭섭해.”

“회장님.”

“허허, 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돼버렸군.”

장백주 실장은 근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어떡합니까?”

“어떡하긴. 윤수 말대로 이 정도는 생채기다. 검찰 출두해서 기자들 침 튀기는 거 얼굴에 좀 맞아야겠지만 별 건 아니다.”

왕윤수 사장이 말했다.

“이 건을 터트리기 전까지 사모님도 고심을 많이 하셨을 겁니다. 고심 끝에 이걸 결정하셨다는 건…….”

“내가 승학이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는 걸 눈치 챈 거겠지.”

“그렇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난감한 듯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왕윤수 사장이 말했다.

“회장님이 검찰수사로 번잡하게 만들려고 사모님이 이런 무리수를 두셨을까요.”

서청수 회장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네?”

“오너 리스크를 일으키려는 거야.”

왕윤수 사장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회장님을 흔들어서 얻을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와이프가 대놓고 칼을 뽑았다면, 당장 결판을 낼 준비가 돼있다는 거야. 결판을 낼 수단은 지분뿐이야.”

“회장님을 흔들어서 지분을 확보한다고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해 안 되지? 나도 안 돼. A도 알고 C도 알겠는데 B를 모르겠어.”

왕윤수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B를 찾는 게 저희 임무겠군요.”

“맞아. 밥값들 하지.”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건 윤수가 맡아서 하고. 백주.”

서청수 회장이 장백주 실장을 부르자 그가 얼른 대답했다.

“네, 회장님.”

“너는 검찰 쪽 등 좀 긁어줘라. 살살 해달라고.”

“알겠습니다.”

“휠체어는 준비 안 해도 된다. 난 왜 아픈 척을 못할까.”

서청수 회장이 쯧, 혀를 차는데 김태준 사장이 말했다.

“회장님, 사모님 쪽에는 응수 안 하실 겁니까?”

“생채기 내봤자 우리 꼴만 우스워져. 가만히 있자고.”

“알겠습니다.”

“오랜만에 서초동 바람 좀 쐬고 와야겠군.”

서청수 회장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청수 회장은 검찰에 출두했다.

재벌총수가 검찰을 드나드는 건 항상 경제면의 톱기사로 다뤄졌다.

때문에 경제부 기자들이 잔뜩 몰려와 열띤 취재경쟁을 벌였다.

서청수 회장은 짜증이 치밀었지만 겸손한 표정을 유지했다.

“30억 비자금 조성 사실 인정하십니까!”

“의혹이 회장님의 사내장악력의 부족으로 내부에서 흘러나왔다는 소문이 있는데, 인정하십니까?”

“이 일로 필래그룹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데 국민께 사죄하실 생각 있으십니까!”

기자들은 저들끼리 밀치며 질문들을 쏟아냈다.

서청수 회장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검찰 조사에 성실히 임하겠습니다.”

그는 그 말만을 남기고 검찰청 안으로 들어갔다.

재벌총수의 비자금 치고 30억 원 정도는 쌈짓돈도 못 됐다.

사람들 중에는 오히려 회장님 통이 작다고 수군대는 치들도 있었다.

하지만 필래그룹의 위신에는 그래도 생채기가 나서, 주가가 제법 하락하기는 했다.

‘이걸 노리지는 않았을 거야.’

왕윤수 사장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다 그의 정보망에 무언가가 걸렸다.

왕윤수 사장은 끼고 있던 안경을 벗으면서 보고를 받았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젠장! 화이트이글! 폴 로젠버그하고 접촉했구만!”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왕윤수 사장의 직원이 우당탕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화이트이글이 필래지주 지분을 매입하겠다고 공시했습니다!”

“이런, 젠장! 지분 얼마나!”

“8.8%입니다!”

8.8%를 새로 매입한다면, 기존의 5%와 합쳐 도합 13.8%다.

이 지분이 서승학 쪽에 붙으면 경영권이 넘어갈 수도 있다.

게다가 8.8%의 매입은 첫 번째 공습에 불과하다.

화이트이글이 얼마나 더 많은 자금을 투입할지 알 수 없었다.

왕윤수 사장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오너의 도덕적 실추로 인해 저평가된 회사를 경영투명성 제고를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 매입 목적이라고 적긴 했습니다만…….”

왕윤수 사장은 이를 악물었다.

“그럼 회사 도둑질하겠다고 순순히 적어놨을 거 같아! 당장 리스크관리팀 소집해!”

“네, 넷! 알겠습니다!”

서청수 회장 측은 긴급히 대응에 나섰다.

각 은행에 구원의 손길을 요청했다.

화이트이글의 공습에서 구원해줄 백기사(white knight·경영권 방어에 우호적인 개인 혹은 세력)가 되어달라고 SOS 사인을 보냈다.

이 소식은 주식시장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서청수 회장의 검찰조사로 소폭 하향세를 그리던 주식이 일거에 수직상승하기 시작했다.

대찬 역시 소식을 접했다.

“백 여사가 외국자본까지 끌어들여서 서승학한테 경영권을 넘겨주려고 하네.”

서원웅의 얼굴은 어두웠다.

“심정이야 이해는 되지만…….”

“화이트이글은 앉아서 돈을 긁어모으는 격이야.”

“그쪽에서 지분을 더 확보해서 아예 필래를 집어삼킬 수도 있지 않아?”

“지금 지분이 13.8%인데 더 넣으면 1대주주로 올라설 가능성도 있지.”

“배당률을 극적으로 끌어올린다고 해서 개인투자자 지분을 자기 쪽으로 돌려놓을지도 몰라.”

“큰일인데……. 화이트이글이 어부지리를 취할지도 모르겠어.”

“이글이 아니라 벌쳐야.”

대찬은 툴툴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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