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86화
서원웅은 미간을 좁혔다.
“공표를 하시려거든 지금이 적긴데.”
“하하, 너도 은근히 자리를 욕심내고 있었네. 침이 바짝 마르는 걸 보니.”
“없던 욕심도 네가 주입해줬잖아?”
“이제 와서 남 탓이야?”
서원웅은 멋쩍게 웃었다.
“지금 비바체는 누가 봐도 완연한 상승세고, 서승학은 따빛의 실패로 주가가 더 떨어졌어. 이렇게 대비가 이뤄졌을 때 결행하셔야 하는데.”
“나도 그렇게 건의 드렸는데.”
“드렸는데?”
“아무래도 안팎으로 동요가 심할 테니까 그걸 걱정하시는 거 같아.”
“으음…….”
“회장님 방침이 그렇게 굳은 이상, 우리도 정중동해야지.”
“그래야지, 별 수 있나.”
“그래도 우리도 물밑에서는 열심히 움직여야 해.”
“열심히 움직인다면?”
“서승학이든 서청규든, 아니면 백양옥 여사든 잠재적인 적수, 아니 이제는 노골적으로 우리 주적이 된 사람들의 약점을 쥐어야 해.”
서원웅은 주먹을 꼭 쥐었다.
“이제부터 시작이구나.”
“마음을 다잡아야 돼.”
“…응.”
대찬과 서원웅은 서로를 보며 의지를 다졌다.
대찬의 예상대로 서승학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서청수 회장이 완도로 내려가 있는 사이, 서승학은 어머니 백양옥 여사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호텔 스위트룸에서 오가던 고성을 고스란히 전했다.
물론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잔뜩 가위질이 이뤄진 형태였다.
백양옥 여사도 그걸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전적으로 자신은 아들의 편이었기에 개의치 않았다.
“그 영감이 이제 아주 미쳐버렸구나, 미쳐버렸어.”
“어떡하죠, 엄마?”
백양옥 여사는 아들의 엄마, 엄마 소리를 귀엽게 들었다.
“걱정하지 마라. 누누이 말하지만 이 회사는 서씨만의 회사가 아니야.”
“하지만 어머니가 가진 주식만으로는 아버지에게 대항하기 어려워요.”
“게임은 주식만으로 하는 게 아니야. 걱정 마라. 그 근본도 없는 서자새끼가 넘볼 자리가 아니니까.”
서승학은 침을 꼴깍 삼켰다.
“청규 삼촌도 도와주시겠죠?”
“그러겠지. 나도 그 망나니 같은 인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만, 어쩌겠니. 전략적으로 제휴해야지.”
“청규 삼촌 너무 미워만 하지 마세요. 그래도 화끈한 사람인데.”
백양옥 여사는 서청규 사장을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아들의 모자란 구석이 다 서청규 사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된 마당에 그런 사소한 미움이야 얼마든지 쓰레기통에 버릴 수 있었다.
“내가 알아서 하마. 너는 일단 빠져 있어라. 몸을 숙이고 더 틈을 내주지 마.”
“알았어요.”
백양옥 여사는 서승학을 잘 다독이고 푸근하게 웃어 보였다.
조금 모자란 아들이면 어떤가.
아무리 아들이 모자라도 생판 모르는 남, 아니 그것보다도 못한 첩년의 자식에게 회사를 넘길 수는 없었다.
아들이 모자란다면 차라리 전문경영인을 세워 회사를 꾸려나가면 그만이었다.
서승학을 다독인 백양옥 여사는 서청규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 저간의 사정을 파악하고 있던 서청규 사장은 느물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형수님, 웬일로 전화를 다 주셨어요.”
“삼촌, 상황은 대충 알죠.”
서청규 사장은 여유롭게 웃었다.
“듣기야 들었습니다만, 제가 무슨 힘이 있겠어요. 팔다리 잘리고 변방 야인 취급 받는 마당에.”
“힘을 합쳐야지. 안 그러면 삼촌 팔다리 자른 그 녀석한테 경영권 넘어가요.”
“아유, 그런 상황이 되면 계열분리하고 딴 살림 차려야죠.”
백양옥 여사는 한숨을 쉬었다.
“자꾸 이렇게 비싸게 굴 거예요?”
“비싸게 굴긴요. 제 발등에 불 떨어졌을 때 형수님은 팔 걷어붙이고 도와주진 않으셨잖아요?”
백양옥 여사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서청규 사장은 자신의 힘을 원하면 미끼를 던지라는 뜻이었다.
결국 백양옥 여사는 그가 원하는 말을 해주었다.
“어차피 서 회장 뒷방으로 내보내면 승학이가 바로 그룹 떠안긴 어려워요. 짧지 않은 기간일 거예요. 그 기간, 삼촌이 회장 맡아요.”
“빈자리 조카한테 넘겨주기 전까지 자리나 데워놓고 있으라고요?”
‘미친 새끼.’
백양옥 여사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서청규 사장의 도움 없이 서승학의 대권은 얻어낼 수 없었다.
내줄 건 내줘야 했다.
“승학이가 회장에 취임한 이후로도 삼촌이 원하는 시점까지 공동회장 체제를 유지할게요.”
“좋습니다. 역시 우리 형님이 결혼은 참 잘했어요, 분수에 안 맞게.”
“끊을게요.”
백양옥 여사는 뚝, 전화를 끊었다.
동맹은 체결되었다.
백양옥 여사는 비서에게 명령했다.
“지주회사 주주명부 좀 뽑아 와봐.”
그건 백양옥 여사의 말임과 동시에, 대찬의 말이기도 했다.
대찬은 김산호가 건네준 주주명부를 받았다.
그걸 들고 대찬은 서원웅을 만나러 갔다.
서청수 회장은 우선 관망세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가 발포명령을 내리기 전에 방아쇠에 손가락을 얹어놓기는 해야 했다.
필래지주의 지분구조를 파악하는 건 방아쇠에 손가락을 얹는 것도 아니고, 그 전에 총이란 게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 알아보는 일이었다.
그 정도 예습이야 대견한 일도 아니고 하지 않으면 경을 칠 일이었다.
대찬은 서원웅에게 말했다.
“대표님을 지지해줄 확실한 지분은 총 30.6%입니다.”
“일단 아버지 주식이 21%지.”
“네, 필래제과가 5%, 컬처인더스트리가 2%, 필래장학재단이 1%, 필우회가 1%, 서청운 사장님 개인 주식이 0.4%, 그리고 대표님 소유 주식이 0.2%예요.”
필래제과는 사세가 약했지만 필래지주의 지분을 상당부분 지니고 있었다.
필래제과로부터 필래그룹이 탄생했기 때문이었다.
그 상징성 덕분에 필래그룹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된 이후에도 5%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필래제과는 서청수 회장이 지분 90%를 갖고 있었다.
필래컬처인더스트리는 서청운 사장이 지분 45%, 서인태 차장을 포함한 서청운 사장의 일가가 지분 6%를 보유하고 있었다.
즉, 서청운 사장 일가가 좌지우지하는 지분이었다.
장학재단 역시 서청수 회장이 이사장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필우회는 서청수 회장의 측근인 임원들이 결성한 모임이었다.
그들은 1%라는 무시 못 할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지분에 대한 권리는 장백주 실장이 대표로 행사하고 있었다.
당연히 서원웅의 지지세였다.
이렇게 해서 도합 30.6%의 지분.
대찬의 시선은 이제 반대편으로 옮겨갔다.
“서승학 쪽에 있는 지분은 총 21%입니다.”
“그쪽도 만만하지는 않네. 서청규 사장 쪽이 좀 세지.”
대찬은 찬찬히 명단을 살폈다.
“네, 서청규 사장이 10%, 벽호문화재단이 7%, 벽호학원이 1%, 서승학 개인 소유 주식이 2%, 백양옥 여사 소유 주식이 1%예요.”
벽호는 백양옥 여사의 아버지이자 서청수 회장의 장인인 백 장군의 호(號)로, 이미 작고한 상태였다.
백양옥 여사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재단과 학원의 이사장을 맡았다.
그렇기에 벽호문화재단의 7%, 벽호학원의 1%는 백양옥 여사의 낭중물이었다.
이렇게 해서 차기 회장으로 서승학을 지지하는 지분은 도합 21%.
대찬은 다리를 꼬며 말했다.
“양쪽 다 과반에는 모자라요.”
필래지주의 개인투자자 지분은 35%였다.
뚜렷한 의지를 가진 단일 세력은 아니다.
다만 자신들에게 이익이 된다는 확실한 판단이 선 다음에 움직이는 지분이었다.
대찬은 말을 이었다.
“대표님 측 30.6%, 서승학 측 21%, 개인투자자 35%를 제외하면 13.4%가 남아요.”
“일단 우리 쪽이 유리하다고 말하는 게 건방진 일은 아니네.”
“네, 이미 30.6%를 확보했으니 서승학 쪽보다 더 확보하지 못해도 경영권 확보에는 무리가 없어요.”
“음.”
“반대로 서승학 측은 13.4% 전부를 가져와야 겨우 우리를 조금 넘는 수준이에요. 회장님의 반대를 고려하면 저쪽의 승산은 높지 않죠.”
“하지만 누구도 과반을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이야. 그러니까 서승학에게도 여전히 승산은 있는 것이고.”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양측 지분과 개인투자자 지분을 제외한 13.4%가 차기 필래그룹의 권좌에 누가 앉을지 결정하는 스윙보터가 될 겁니다.”
서원웅은 대찬을 향해 조금 더 가깝게 다가가 앉았다.
“13.4% 중에서 가장 큰 덩어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국민연금이요. 6% 가지고 있어요.”
“이쪽도 섣불리 어느 쪽으로 입장을 정하진 않겠지.”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권의 입지를 고려해야 하니까요. 불필요한 오해의 소지는 남기지 않을 겁니다.”
“아마 대세에 손을 들어주는 쪽으로 결정하겠지. 그게 부담을 최소화하는 길이니까.”
대찬은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덧붙였다.
“하지만 저쪽의 얼굴마담인 서승학이 계속 개판을 쳐준다면 우리 쪽에 붙을 공산이 더 커요. 정부가 망나니 수발 들어준다는 뒷공론이 나오니까.”
“그렇다면…….”
“서승학 쪽은 운신의 폭이 더 좁아지는 거죠. 13.4%에서 국민연금 6% 빼면 7.4%밖에 안 남아요.”
“나머지 7.4%는?”
“7.4% 중에서 미국계 헤지펀드인 화이트이글이 5% 갖고 있고요.”
“응.”
“그리고 또 미국에 적을 두고 있는 웨이스티드 삭스가 나머지 2.4%를 보유하고 있어요.”
“거기는 뭐 하는 회사야?”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냥 투자회사라고만 돼있고 별다른 정보는 없어요.”
서원웅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쪽의 입장에 대한 정보도 아예 없고?”
“네, 딱히 행동주의 성향을 보이는 것도 아니라서요. 지금까지 경영에 깊숙이 개입한 전례는 없습니다. 다만 화이트이글은 주총에서 배당률을 높이라는 요구를 꾸준히 해오긴 했어요.”
“그쪽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그렇기야 하죠.”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 정도 지분으로 당장 주총에서 뒤집어엎거나 하는 일은 없겠네.”
“네, 이 정도 지분은 도박 밑천으로도 모자라요. 일을 내더라도 이 상태로는 안 낼 겁니다.”
서원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찬은 회사 일에는 이골이 났다.
무슨 업무가 주어지든 무난히 해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분이 어떻고 의결권이 어떻고 지배구조가 어떻고 하는 경영에는 초짜였다.
반대로 백양옥 여사는 회사 일에는 까막눈이었다.
그러나 지분을 셈하는 일은 암산으로도 해냈다.
“일단 서청규 지분은 확실히 우리 쪽으로 붙들어놨어……. 돈으로 맺은 관계니 믿을 수 있어.”
그러나 그녀는 안심하지 못했다.
서청규 사장의 지분은 최소한의 안전은 보장하지만 상대의 목을 물어뜯지는 못한다.
백양옥 여사는 지금의 상황을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미우나 고우나 서청수 회장과 30년 넘게 살을 맞대고 지낸 사이다.
‘남들은 예삿일이라 해도 나는 알아. 예삿일이 아니야.’
서청수 회장은 서승학을 불러들여 좋은 말로 다독였다.
그러나 좋은 말로 시작된 자리는 폭언과 고성으로 끝났다.
권위적인 아버지와 싸가지 없는 아들의 일상적인 말다툼이 아니었다.
‘그 인간의 최후통첩은 항상 좋은 말이지.’
백양옥 여사가 아는 서청수 회장은 항상 그랬다.
등 뒤에 칼을 숨기고, 최후의 통첩, 교섭, 포섭은 항상 좋은 말로 한다.
상대가 그걸 거스른다면.
일말의 주저 없이 바로 칼로 상대방의 배를 뒤진다.
‘아들이라고 봐줄 위인이 아니지.’
아니, 이미 많이 봐줬다.
서청수 회장의 도량으로 치자면 서승학에게는 거의 부처님과 흡사한 자비를 베풀었다.
숱한 사고를 치고도 알짜 계열사를 맡겼으니까.
그렇기에 호텔방에서 지어준 부처님의 미소야말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최후통첩이었다.
‘그 인간은 기어코 서자한테 회사를 넘겨줄 거야.’
안 될 말이었다.
‘필래가 이만큼 큰 건 우리 집안의 공이야.’
창업주 서광구 회장이 이끌어오던 필래는 무리한 인수합병으로 탈이 나고 만다.
배가 터져 죽을 위기에 처한다.
그때 손을 뻗어준 것이 백양옥 여사의 백씨 집안이었다.
백양옥 여사의 부친은 호를 따서 세칭 벽호 장군이라고 불렸다.
육사출신으로 군사정권이 청와대와 정부를 장악하던 시절.
벽호 장군은 정부와 국회의 요인들과 친분이 돈독했다.
서광구 회장과 모종의 인연이 있었던 벽호 장군은 정부의 알짜 국책사업을 필래에 넘겨주었다.
그 덕에 필래는 위기를 탈출했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레 필래 서씨와 벽호 장군의 백씨 사이의 밀월을 낳았다.
밀월은 필래의 후계자였던 서청수와 벽호 장군의 막내딸 백양옥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무너질 뻔한 회사가 자기 집안 덕분에 살아났다.
백양옥 여사는 필래그룹에 대한 당연한 소유욕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자기 혈육 대신 회사를 넘겨주겠다는 녀석이 남편의 혼외자라니 더더욱 용납할 수 없었다.
백양옥 여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김 실장, 나 모레쯤 미국 다녀와야겠어. 뉴욕.”
“알겠습니다. 갤러리들하고 스케줄 세팅해놓을까요.”
“대외적으로는 갤러리하고 미팅한다고 해. 근데 그쪽하고 스케줄 잡을 필요는 없어.”
“아, 네, 알겠습니다.”
“수행원도 필요 없어. 나 혼자 다녀올 거야.”
“알겠습니다, 사모님.”
백양옥 여사는 김 실장에게 눈빛을 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