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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85화 (284/556)

난 할 수 있어 285화

대찬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서승학 사장이 아예 감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대권이 넘어온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내 뜻이 자기한테 없다는 건 감지했을 거야.”

“그런 상황에서 아무리 교묘하게 신중을 기한다 해도, 서승학 사장이 자신의 주변을 옭아매려는 시도를 모를 리 없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렇다면, 한 번에 도려내야 합니다.”

“…한 번에 도려내라?”

“네, 단칼에 서승학 사장은 무력화시켜야 합니다.”

그 말에 장백주 실장이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

“그건 그룹을 아예 망가뜨리는 일입니다. 서승학 사장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사모님은 물론이고 서청규 사장이 이 기회를 그냥 놓칠 것 같습니까?”

“과감히 선수를 치지 않으면 도리어 당해버릴 겁니다. 서승학 사장도 지금 손 놓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서 사장이 손 놓고 있지 않으면 어쩔 거야. 그쪽은 지금 별 카드가 없다고.”

“별 카드가 없는데 왜 두려워하십니까? 그럼 더 과감히 선수를 쳐야죠.”

“조대찬, 너 같은 애송이가 혈기만으로 쫑알댈 자리가 아니야.”

서청수 회장은 점잖게 장백주 실장을 제어했다.

“혈기로 쫑알대라고 조대찬 불러놓은 거야. 인신공격은 삼가지.”

“…네, 회장님.”

대찬은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말을 이었다.

“회장님께서 확실한 결단을 보여주셔야 모든 조직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겁니다.”

“으음…….”

“간 보는 식으로 지나치게 신중을 기하면, 도리어 그룹의 요인들은 회장님의 뜻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할 겁니다.”

한 번 제지를 받은 장백주 실장은 대찬의 의견에 반박하지 못하고 쓴 침만 삼켰다.

그의 격앙된 목소리와는 달리, 왕윤수 사장이 특유의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조대찬 부장의 말을 무조건 신용하는 건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음? 자네도 조대찬의 말이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나?”

“일리는 있습니다. 하지만 순수한 의도에서 나온 발상이 아니기 때문에 심사숙고 하셔야 합니다.”

대찬은 숨을 죽인 채 왕윤수 사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장백주 실장과 왕윤수 사장은 다르다.

장백주 실장이 미친 황소라면 왕윤수 사장은 현명하고 교활한 원숭이다.

미친 황소가 날뛰면 맞대응으로 들이받아도 정당방위로 인정된다.

하지만 저 얌전한 원숭이의 앞에서라면 얘기는 다르다.

저 원숭이는 대찬을 부르는 호칭부터가 달랐다.

장백주 실장은 조금만 긁어도 바로 애송이라는 거친 표현을 서슴지 않고 쓴다.

하지만 왕윤수 사장은 점잖게 꼭 부장 직급을 붙여서 호칭했다.

대찬은 방종하지 않고 침묵했다.

서청수 회장 역시 왕윤수 사장의 말은 귀담아 들었다.

“순수한 의도에서 나온 발상이 아니다?”

“네, 조대찬 부장은 속전속결로 서원웅 대표가 후계자로 굳어지는 게 가장 이득이니까요.”

“음, 그런가?”

“그룹의 크고 작은 이익이야 조 부장한테 의미가 있겠습니까.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고, 기세가 올랐을 때 얼른 확정시키고 싶겠죠.”

“당신들도 원웅이를 지지하는 편이잖아?”

“그건 어디까지나 그룹의 미래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서승학 사장보다 낫다는 판단 하에 서원웅 대표를 지지하는 거죠.”

“조대찬은 다르다, 이거야?”

왕윤수 사장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원웅 대표가 서승학 사장보다 못했어도, 조 부장은 서원웅 대표를 지지했겠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서청수 회장은 흐흐 웃으면서 대찬을 바라봤다.

“왕 사장 얘기를 어떻게 생각해?”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틀리진 않다. 대체로 공감은 하지만 백 퍼센트는 아니란 뜻이군.”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 사장님께서 저를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 지극히 당연합니다.”

“뭐, 나도 왕 사장의 말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저 말씀은 저를, 그리고 서원웅 대표를 과소평가하는 말씀입니다.”

서청수 회장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과소평가하는 말씀이라?”

“네, 저도, 서원웅 대표도 필래그룹의 차기 회장 자리에 목매지 않았습니다.”

“별로 간절하지 않다는 건가? 승학이한테 넘겨줘도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 반대입니다.”

“반대라니.”

“차기 회장은 너무나도 당연히 서원웅 대표의 몫이기에 목매지 않는 겁니다.”

서청수 회장의 얼굴에 더 큰 웃음이 번졌다.

“건방진 소린데.”

“건방지지 않습니다. 서승학 사장의 퍼포먼스가 그만큼 최악이니까요. 반대로 서원웅 대표는 확실한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혈통이 달라.”

“서원웅 대표가 아예 서씨가 아니라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적서의 차이는 충분히 메워지고도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서청수 회장은 그제야 식욕이 도는 듯, 이미 식어버린 구 여사의 한우 샌드위치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그 덕분에 나머지 사람들도 음식을 들 수 있었다.

서청수 회장은 음식을 우물거리면서 대찬을 빤히 바라봤다.

“원웅이가 내 뒤를 잇는 건 너무나도 자명하기 때문에.”

“서원웅 대표가 이어받을 그룹의 크고 작은 이익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서청수 회장은 큭큭 웃으면서 왕윤수 사장을 바라봤다.

“그렇다는구만. 어떻게 생각해.”

“…젊은이의 패기가 훌륭하네요.”

“하하하, 그럼 조대찬이를 신용한다는 가정 하에 자네의 생각을 얘기해봐. 장백주의 플랜A, 가랑비에 옷 젖듯. 조대찬의 플랜B. 쇠뿔도 단김에.”

“그럼에도 저는 가랑비에 옷 젖는 쪽을 지지하겠습니다.”

“어째서?”

“이유는 같습니다. 단칼에 내리치는 쪽은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서청수 회장은 서청운 사장을 바라봤다.

“청운이 네 생각은 어떠냐.”

“…저도 그렇습니다.”

서청운 사장은 애초에 후계구도에 어떤 욕심도 없는 사람이었다.

대찬의 누나인 조수진이 차남 서인태 차장과 맺어지면서 대뜸 서원웅 쪽으로 분류되었다.

어떻게 보면 대찬 때문에 서원웅을 강제로 지지하게 된 입장.

물론 심정적으로 서원웅을 지지하는 편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격한 풍랑보다는 잔바람을 선호했다.

서청수 회장은 김태준 사장을 바라봤다.

“태준아, 너는.”

“저는 조대찬 부장을 지지하겠습니다.”

그 말에 장백주 실장이 속으로 궁싯거렸다.

‘밸도 없는 새끼. 어린애 똥구멍이나 빨아대기는.’

시선을 느낀 김태준 사장이 장백주 실장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장백주 실장도 다른 쪽으로 시선을 회피했다.

왕윤수, 장백주, 서청운이 점진적인 방법을 선호한다.

대찬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는 서청수 회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회장님, 한 말씀만 더 올려도 되겠습니까.”

“자유롭게 발언하라고 만든 자리야. 해봐.”

“왕윤수 사장님께서는 제 개인적인 입장 때문에 그룹의 크고 작은 이익을 중요시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지.”

“저는 도리어 왕윤수 사장님의 말씀이 당신들을 향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외람되지만.”

그 말에 시종 평온하던 왕윤수 사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장백주 실장은 그 말에 즉각 반응했다.

“조대찬! 건방진 것도 정도가 있지!”

“그룹의 크고 작은 이익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건, 도리어 여러분 아닙니까.”

“조대찬!”

서청수 회장은 가벼운 손짓으로 장백주 실장을 제지하고 물었다.

“어째서.”

“서원웅 대표가 경영권을 승계하는 건, 아무리 빨라도 10년 안에는 불가능합니다.”

“한국 남자의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그렇지.”

“그때쯤이면 자타가 공인하는 회장님의 최측근인 저 분들 역시 물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생물학적으로.”

“…그렇지.”

“그러니 당장의 리스크를 꺼리시는 겁니다. 미래에 다가올, 이자까지 쳐서 더 불어난 리스크를 감당할 일이 없을 테니까요.”

“자리가 파하면 백주가 네 녀석 멱살을 잡겠어.”

대찬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허수아비를 때리는 게임이 아닙니다. 바둑이나 장기입니다. 소극적인 자세는 아무런 수도 두지 않고 그대로 상대방에게 턴을 넘기는 격입니다.”

“으음.”

“선수필승, 그게 변함없는 제 생각입니다.”

대찬의 말이 끝나고도 서청수 회장은 웃기만 할 뿐, 한동안 침묵했다.

그는 흐흐 웃다가 대찬에게 말했다.

“좋아. 잘 들었어. 하지만 이번에는 플랜A로 가자고.”

“…….”

“조 부장의 생각은 너무 혈기왕성에서 나도 감당하기 어려워.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할 여유는 있어야 할 거 아닌가. 백주야.”

“네, 회장님.”

“네 의견을 받아들였으니 전략은 네가 주도해서 짜도록 해. 승학이랑 청규 쪽 동향도 꼼꼼히 살피고.”

“알겠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한우 샌드위치를 다 먹어치우고 손가락에 질질 흐르는 육즙을 티슈로 닦으며 웃었다.

“조대찬이, 너무 실망하지 마. 모든 건의가 다 억셉 될 수는 없어.”

“알고 있습니다. 실망 안 합니다.”

“조금 한 거 같은데.”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실은 많이 했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흐흐 웃으며 다리를 꼬았다.

“그래도 배낚시에 조대찬이를 데려온 보람이 있어. 핑퐁게임이 되잖아. 조대찬이가 없을 때는 왕윤수 원맨쇼였는데 말이야. 조대찬이, 종종 배낚시 가자고.”

“알겠습니다, 회장님.”

대찬은 쓴 침을 삼켰다.

‘서 회장도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어.’

대찬은 서청수 회장 역시 왕윤수가 말한 함정의 당사자라고 생각했다.

친아들을 내치는 일이다.

부인과 척을 지는 일이다.

그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속에서는 용암과 빙하가 동시에 맹위를 떨치고 있을 터다.

그도 이 싸움을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것이다.

단칼에 내리치는 대신,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자리를 물려주고 싶은 거다.

하지만 적자 대신 서자가, 형 대신 아우가 대권을 물려받을 때 피 한 방울 나지 않은 역사가 없다.

주저하는 쪽이 반드시 칼을 뒤집어썼다.

조선 이성계의 서자 이방석은 이방원의 칼을 받았다.

당나라 고조 이연의 태자 이건성은 아우 이세민의 칼을 받았다.

서청수 회장은 어쩌면, 서승학에게서 회장의 자질을 찾으려는 희망은 버렸지만 여전히 착한 아들에 대한 희망은 버리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대찬의 입 속에서 쓴 맛이 오래 감돌았다.

배낚시는 당일에 끝났다.

서청수 회장은 구 여사를 보며 슬쩍 물었다.

“구 여사, 무슨 일 있어? 오늘따라 표정이 영 아니네.”

“아, 아니에요, 회장님.”

“박 선장도 죽상이더만. 왜, 무슨 병이라도 얻었어? 말만 해. 주치의 보내줄 테니까. 오래 살아야 맛있는 밥 오래 얻어먹지.”

구 여사는 멋쩍게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아유, 그런 거 아니에요.”

대찬은 구 여사를 넌지시 바라봤다.

사정이 있는 걸 왜 말하지 않느냐는 표정이었다.

구 여사는 아무 소리도 말라는 뜻으로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

서청수 회장은 허허 웃었다.

“박 선장도 구 여사도 참 사람이 좋아. 부부가 잘 만났어. 시시콜콜 사람을 귀찮게 안 하잖아.”

“하하… 우리 전에 회장님 모시던 통영 송씨네는 아들 아파트 한 채 장만해달라고 졸랐다가 그 자리에서 모가지가 날아갔잖아요.”

“그 소문이 구 여사 귀에까지 들어갔어?”

“아무렴요, 장백주 실장님이 어디 보통이던가요. 신신당부 받았죠.”

서청수 회장은 흐뭇하게 웃으면서 장백주 실장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이러니 내 여태 데리고 있지. 금전적으로는 문제없잖아? 내가 막 퍼주고 있는데.”

“아유, 그럼요, 그럼요.”

구 여사는 대찬에게 은밀한 눈빛을 보냈다.

거 보라는 뜻이었다.

대찬은 침만 꼴깍 삼켰다.

역시 촉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경험적인 지식이 있다.

대찬은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서원웅을 만났다.

대찬이 부른 게 아니라 서원웅이 부른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대찬을 비롯한 측근들을 완도로 불러 모은 게 단순한 배낚시를 위함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무슨 얘기가 나왔어?”

“회장님이 너를 후계자로 지목하셨어. 암묵적이지만.”

대찬은 사석이기에 말을 높이지 않았다.

말을 들은 서원웅은 침을 한 번 삼킬 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결정하시기까지 쉽지 않으셨을 텐데.”

“서승학이 어지간히 쓰레기니까.”

서원웅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대? 작업은.”

“정중동하실 모양이야.”

말이 좋아 정중동이지, 까놓고 말하면 별 다른 움직임이 없을 것이란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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