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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84화 (283/556)

난 할 수 있어 284화

그런데 상황은 대찬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심각했다.

며칠 후, 대찬은 김태준 사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주말에 시간 비워놔.”

“알겠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회장님께서 배낚시를 가자시는군.”

“…알겠습니다.”

대찬은 그 자리에 참석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구태여 묻지 않았다.

아마 저번의 배낚시처럼 방태열 같은 쭉정이가 끼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대찬은 주말, 배낚시가 있다는 완도로 내려갔다.

모르긴 몰라도 부름을 받은 인원 중 자신이 가장 직급이 낮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금요일 퇴근하자마자 완도로 미리 내려갔다.

그가 먼저 모습을 드러내자, 안면이 있는 박 선장의 아내가 반겼다.

별장의 식사를 담당하는 이였다.

“뭘 이렇게 급하게 내려왔어?”

“늦잠 자다가 경을 칠까봐 미리 왔습니다. 실례가 되면 근처 모텔에서 자고 내일 오겠습니다.”

그러자 박 선장의 아내, 구 여사는 손사래를 쳤다.

“아유, 우리 인심이 그렇게 야박하지는 않지.”

“하하, 감사합니다.”

“피곤할 텐데 먼저 주무셔.”

“여사님은 안 주무세요? 꼭두새벽인데.”

구 여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요새 잠을 잘 못 자. 내일 회장님 오시면 드리려고 준비를 다 해놨는데, 준비한 거 안주 삼아 술이나 한잔 하려고.”

“아이고, 이 시간에.”

“알아서 잘 테니 먼저 눈 붙여. 서울서 오느라 수고했네.”

대찬은 웃으면서 구 여사의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도 혼자 드시는 것보다는 누구 하나 데리고 드시는 게 낫지 않겠어요?”

“괜찮겠어?”

그렇게 묻는 구 여사의 목소리는 은근히 그래주기를 바라는 듯했다.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회장님보다 더 신선한 안주를 먹는 게 오늘 아니면 어디 쉽겠어요.”

“그렇긴 하지. 그럼 둘이 기미상궁 노릇 제대로 해보자고. 잠깐 앉아있어. 안주 준비해올게.”

대찬은 엉거주춤하게 일어났다.

“도와드릴까요?”

“아유, 초짜가 돕는 건 도리어 방해지. 자네 회사일 할 때 내가 돕는다고 하면 그러라고 할 거야?”

“하하, 그건 그렇네요. 다들 자기 전문분야가 있으니까.”

“그럼! 완도 제철 해산물 조지는 건 내 전문이지.”

“그럼 염치불고하고 앉아서 기다리겠습니다.”

구 여사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째 그 미소의 끝에는 씁쓸한 뒷맛이 감돌았다.

구 여사는 야무진 솜씨로 금세 훌륭한 술상을 차려냈다.

보기만 해도 탱탱한 굴을 얇게 썬 무채에 입맛을 돋우는 매운 양념으로 슥슥 무쳐 내왔다.

전복은 술의 증기로 뭉근히 찌고 내장은 녹진한 소스로 만들어 내왔다.

잡어들은 뼈째 썰어 막회로, 씨알 굵은 우럭은 반건조 한 놈은 찜으로, 생물은 무와 쑥갓을 듬뿍 넣어 진한 매운탕으로 내왔다.

“아유, 그만 내오셔도 되는데.”

“기미상궁이 그러면 쓰나? 수라상 열두 첩 조금씩 맛을 봐야지.”

구 여사의 요리는 끝이 없었다.

기름기 적은 학꽁치는 튀김으로 내오고 상큼한 다시마장아찌도 올렸다.

대찬은 폭주하는 구 여사를 간신히 말려 그쯤에서 관두게 했다.

“술은 미리 딸 수가 없으니까 소주로 하자고.”

“좋습니다.”

구 여사와 대찬은 잔을 주고받았다.

잡담으로 시간을 때우다가, 대찬은 슬며시 구 여사에게 물었다.

“근데 무슨 걱정 있으세요?”

“응? 걱정?”

“네, 안색이 어째.”

구 여사는 소주를 넘기며 쓴웃음을 지었다.

“티나?”

“조금요.”

“아휴, 바깥양반 때문에 그러지.”

“박 선장님이요? 왜요?”

“이 인간이 회장님 모시더니 자기도 회장님 된 줄 아나봐. 갑자기 무슨 투자니 어쩌니 헛바람이 들어서.”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돈놀이도 하던 사람이 해야 되는데요.”

“내 말이. 선물이라고는 프레젠트밖에 모르는 양반이 무슨 투자를 한다고, 참나.”

“선물 위험한데. 돈 잃으셨어요?”

“응, 잔뜩 잃었어. 빚까지 졌다니까.”

구 여사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해서 그렇지, 대수로웠다.

대찬은 미간을 좁혔다.

“얼마나요?”

“2억 날리고 여기저기 달달 빚 끌어 모아서 2억 또 날렸어.”

“아이고.”

“내가 그 인간만 생각하면, 진짜!”

구 여사가 자작하려는 걸 대찬이 급히 술병을 빼앗아 따라주었다.

“어쩌다 빚까지…….”

“그 양반 성격이 원래 그래. 뱃사람으로 평생 살더니 성격이 바다랑 똑 닮았어. 평소에 잠잠하다가 한번 바람이 불면 휘몰아친다니까.”

“날 밝고 회장님 오시면 슬쩍 귀띔이라도 해볼까요?”

대찬의 말에 구 여사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유, 절대 그러지 마.”

“그래도 회장님한테는 푼돈이잖아요. 아량을 베푸실 만도 한데.”

“깜냥도 안 되면서 주변에서 돈타령 하는 치들을 제일 싫어해, 그 양반. 괜히 우리 밥줄 자르지 말고 암 소리도 말아.”

“그래도 뭐라도 도와드리고 싶은데 답답하네요.”

구 여사는 눈을 찡긋했다.

“오늘 술친구 해주는 것만으로도 도움 충분히 됐네. 그렇게 사람이 착해서 저 서슬 퍼런 판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나 몰라.”

“하하, 남 안 보이는 데서는 나쁜 짓 많이 해서요.”

“에휴, 여기서 판만 더 안 벌리면 돼. 그래도 회장님이 삯은 화끈하게 쳐주니까. 차근차근 갚다가 나중에 은퇴할 때 되면 배 팔아서 시마이 쳐야지.”

“박 선장님이 늦게라도 정신 차리셨으면 좋겠네요.”

“내 말이!”

둘은 새벽 4시까지 떠들다가 잠을 청했다.

대찬은 4시간만 눈을 붙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목욕재계를 하고, 단정한 옷차림으로 서청수 회장 일행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서청수 회장은 열두 시 정각에 맞춰 별장에 도착했다.

서청수 회장은 대찬을 보고 웃음을 지었다.

“뭐야?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지각하기 싫어서 아예 서둘렀습니다.”

“잘했구만.”

서청수 회장의 차림은 편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낚시 가는 차림은 아니었다.

“오늘 낚시는…….”

“낚시는 구실이야. 중요한 일을 좀 논의하려고.”

“아, 네.”

서청수 회장의 등 뒤로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다 아는 사람들이구만.’

대찬의 눈에도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김태준 사장, 왕윤수 사장, 장백주 실장, 소위 서청수의 최측근으로 불리는 김왕장.

그리고 서청운 컬처인더스트리 사장이었다.

그야말로 서청수 회장이 자신의 간을 떼서 맡길 수 있을 정도의 사람들이었다.

저 사이에 대찬이 끼어있었으니, 부담감이 없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별장의 2층에 마련된 넓은 서재에 착석했다.

당연히 대찬은 말석을 꿰찼다.

구 여사가 서청수 회장에게 말했다.

“식사 좀 내올까요?”

“아니, 간단히 요기할 간식만 준비해줘요. 술 대신 커피 준비해주시고.”

“알겠습니다, 회장님.”

서청수 회장의 말을 따라 구 여사는 한우 채끝을 그릴에 미디움으로 구워 볶은 버섯, 고추냉이 소스, 식빵과 함께 샌드위치로 내놨다.

간식을 내오라고 했지만 시간이 시간인 만큼 충분히 허기를 달랠 정도는 돼야 했다.

미디움도 미디움레어나 레어는 핏물이 너무 많이 나와 거추장스럽다는 걸 고려한 굽기였다.

거기에 참석한 사람들의 입맛에 맞춰 커피를 내왔다.

서청수 회장은 믹스커피를 고집했고, 왕윤수 실장은 라테를 좋아했다.

대찬에게도 얼음을 띄우고 에스프레소 투샷을 넣은 아메리카노를 주었다.

이렇게 세심한 구 여사이니 서청수 회장이 신임했다.

서재에 모인 이들은 구 여사의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얘기를 나눴다.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무거웠다.

서청수 회장은 무거운 입술을 뗐다.

“아무래도 승학이가 내 뒤를 잇기는 힘들 거 같다.”

“…….”

“원웅이를 후계로 정한다.”

그 말에 서청운 사장이 침을 꼴깍 삼키며 말했다.

“형님, 너무 급하게 정하시는 거 아닙니까?”

“너는 내가 급하게 결정하는 거 봤냐? 신중하게 내린 결정이다.”

김왕장 세 사람은 모두 서원웅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김태준 사장이 말했다.

“회장님, 서원웅 대표를 후계로 세우시는 순간 우리는 엄청난 내홍에 직면합니다.”

“알아. 그러니까 내 힘이 확실할 때 매듭을 지으려는 거야.”

“서승학 사장, 서청규 사장, 그리고 사모님까지……. 셋이 힘을 합치면 쉽지 않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천천히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지. 하지만 그쪽이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경영권이 넘어가진 않을 거야.”

“으음……. 이미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셨을 줄로 압니다.”

서청수 회장은 주먹을 쥐었다 펴며 말했다.

“응, 피해는 분명히 있을 거야. 하지만 승학이는 안 돼.”

“무슨 일 있었습니까?”

“저기 앉은 녀석한테 물어봐.”

서청수 회장은 턱짓으로 대찬을 가리켰다.

그러자 김왕장, 서청운 사장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저는 스쳐 지나가면서 서승학 사장을 봤을 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뻔뻔하긴. 서승학이 표정 구경하려고 로비에서 죽치고 있던 거 내가 모를 줄 아나?”

그 말에 대찬은 어깨를 움츠렸다.

서청수 회장이 자신이 떠나고도 눈을 붙여놨을 줄은 몰랐다.

대찬은 더 멋쩍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방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여전히 모릅니다.”

“대강의 감은 있을 거 아니야. 저놈이 끝끝내 입을 안 열겠다니 내가 말하지.”

“…….”

대찬은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승학이는 개과천선의 여지가 없어. 그날 그걸 확인했어. 그놈한테 그룹을 맡겼다간 3년 안에 결딴나고 말 거야.”

“하지만 너무 홧김에 결정하신 건 아닌지…….”

장백주 실장의 말에 서청수 회장은 눈을 부라렸다.

“백주야, 내가 그럴 위인으로 보이냐? 이런 일을 홧김에 처리할 위인으로 보여?”

“그, 그건 아닙니다.”

“승학이는 아웃이다.”

서청수 회장은 분명하게 선언했다.

짧은 말이었지만 자리에 앉은 모두의 마음에 납덩이처럼 묵직하게 깔렸다.

그건 말을 한 서청수 회장 본인에게도 해당되었다.

대찬은 감개무량했다.

인생의 한 페이지에 호쾌한 종지부를 찍는 기분이었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성경의 한 구절로 대찬과 서원웅의 인연은 설명되었다.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대학에서 다시 뭉치고, 그것이 다시 회사로 이어지고, 그것이 이제 여기까지 왔다.

서원웅 회장.

비현실적인 호칭에 대찬은 속으로 웃었다.

심각한 분위기에 얼굴마저 웃지는 못했다.

왕윤수 사장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의 말씀은 한동안은 비밀로 해야겠죠.”

“물론이야. 다들 함구하고 있어야 돼.”

“알겠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찬을 불렀다.

“조대찬.”

“네, 회장님.”

“너는 원웅이한테 이 사실을 귀띔해주도록. 절대 대외적으로 티내면 안 된다고 전해.”

“알겠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이마를 긁적였다.

그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결정을 내려놓긴 했지만, 모두가 주지하듯 서원웅에게 회장 자리를 넘겨주기까지는 무수히 많은 난관을 돌파해야만 했다.

그는 그 고민을 측근들과 나누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최대한 출혈 없이 원웅이한테 자리를 넘길 수 있을까.”

그 말에 김태준 사장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서승학 사장의 명성에 치명타를 입히는 것이죠.”

“이미 놈은 만신창이야. 경영도 엉망, 이미지도 엉망. 얼룩 한두 방울 튀는 것 정도로는 끄떡도 없다고.”

서청수 회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말대로 지금까지 외부에 드러난 서승학의 행보는 엉망 그 자체였다.

그게 지금에 와서는 웬만한 패악질은 패악질로 느껴지지 않는 방패가 되었다.

막말을 일삼던 정치인이 다시 막말을 뱉는다 해도, 사람들이 저놈은 원래 저렇다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과 같았다.

그게 본디 청렴하고 윤리적인 정치인에게는 목이 달아날 정도의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할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장백주 실장이 말했다.

“가랑비에 옷 젖듯, 차근차근 서승학 사장의 주변을 쳐내야 합니다. 개구리가 들어있는 냄비를 천천히 가열하면 개구리는 죽는지도 모르고 죽는 것처럼 말입니다.”

“음, 조대찬은 어떻게 생각하나.”

서청수 회장은 대찬에게 물었다.

대찬은 지체 없이 대답했다.

“장백주 실장님이 말씀하신 개구리 얘기, 실상은 다릅니다.”

“음?”

“천천히 가열하든 한 번에 가열하든 개구리는 뜨거운 거 바로 압니다.”

대찬이 자신의 말을 걸고넘어지자 장백주 실장의 얼굴이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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