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83화
서승학은 대찬을 보고 잠깐 생각하다가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의 얼굴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너 서원웅이 똘마니 아니냐?”
“비바체 직원입니다.”
“맞네, 똘마니. 네가 왜 여기 있냐. 그것도 혼자.”
“회장님이 부르셔서 뵙고 나오는 길입니다.”
그러자 서승학의 얼굴이 더 굳었다.
“네가 뭔데 아버지랑 독대를 해.”
“그건 회장님께 여쭤보십시오.”
“이 새끼가 건방지게…….”
서승학과 단둘이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성질머리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초면부터 사람 속을 뒤집어놓을 줄은 몰랐다.
대찬이 저런 싸가지를 가만히 용인해줄 이유는 없었다.
서승학은 대찬에게 어떤 위협도, 어떤 이익도 줄 수 없는 존재였다.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왜 반말이야.”
“뭐? 이 새끼가 뭘 잘못 먹었나.”
“넌 뭘 처먹었길래 싸가지가 그 따위냐.”
“야, 죽고 싶냐?”
서승학은 무수한 사람들을 굴복시켰을 부리부리한 눈을 대찬에게 부라렸다.
저런 비슷한 눈빛을 숱하게 겪은 대찬에게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대찬은 주먹으로 서승학의 배를 쿡 찔렀다.
매일 퍼마시는 술 때문에 물렁해진 뱃가죽이 안으로 쑥 들어갔다.
서승학의 눈이 뒤집혔다.
서원웅이 이런 짓을 했어도 기가 막힐 노릇.
그런데 서원웅도 아니고 그의 하수인, 불가촉천민이나 다름없는 놈팡이가 몸에 손을 댄다.
서승학은 냅다 대찬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 새끼가 진짜……. 야! 너 미쳤어!”
“추하게 굴지 마. 나한테 뻗댈 기운 있으면 회장님 앞에서 정신 차리는 데 쓰라고.”
“이 개새끼가!”
서승학은 대찬의 아래턱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대찬은 그 느려터진 주먹을 한손으로 잡고 가볍게 비틀었다.
“크악!”
“네 주먹이 날쌔서 다른 사람들이 가만히 처맞은 게 아니야. 맞아준 거야. 안 맞으면 더 지랄 나니까.”
대찬은 비튼 주먹을 꽁초 버리듯 내팽개치며 말했다.
“내세울 게 핏줄밖에 없으면 겸손하게 좀 살자.”
대찬은 뚜벅뚜벅 걸어 서승학에게서 멀어졌다.
서승학은 관자놀이의 핏줄이 터질 듯이 불거졌다.
심장도 터질 듯이 박동했다.
“저 개, 개새끼가…….”
생애 저렇게 무례하게 군 놈은 없었다.
모두가 자신의 발 아래 있었다.
참을 수 없는 노기에 그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그는 그렇게 주체하지 못하는 심장박동을 껴안고 서청수 회장이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대찬은 로비로 나오면서 생각했다.
‘그렇게 동요된 정신머리로 서청수 회장 앞에서 어떻게 버티려고 그래.’
대찬은 미소를 머금었다.
서승학은 씩씩 숨을 뱉으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서청수 회장은 그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앉아라.”
서승학은 털썩 주저앉자마자 말했다.
“아버지, 방금 나간 놈 이름이 조대찬 맞죠. 저 새끼 뭡니까?”
“이 새끼 저 새끼 하지 마라. 보기 안 좋다. 품위가 있어야지.”
서청수 회장의 얌전한 지적은 서승학의 분노를 잠재우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화를 더 돋웠다.
“너무하시네요, 진짜! 저는 찬밥 취급하시더니 서자 놈 어화둥둥 하는 걸로 모자라서 이제 그 밑에 똘마니까지 귀여워하십니까?”
“입조심 해라.”
“대답부터 해보세요! 제 말이 틀렸어요?”
“승학아.”
“조대찬 저 새끼가 나한테 반말 했다니까요? 그냥 반말도 아니고 육두문자를 뱉더라니까요?”
서청수 회장은 대찬이 밑도 끝도 없이 서승학에게 육두문자를 뱉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아들의 성질머리나 대찬의 품행으로 봤을 때, 분명히 선수를 친 쪽은 서승학이 분명했다.
서청수 회장은 두통이 도져 이마를 매만졌다.
자기 잘못을 돌보지 않는 건 좋다.
도리어 재벌총수의 자질로서 좋게 평가해줄 수 있다.
뻔뻔한 태도는 무능한 리더의 위상을 지키는 가장 간편한 방법이다.
그러나 자기 잘못을 돌보지 않을 거면 남의 잘못도 들추지 말아야 한다.
남의 잘못을 들추면 나의 잘못도 드러나니, 자충수다.
내 잘못을 덮으려면 남의 잘못도 덮어야 한다.
그것도 모르고 왕왕 짖어대는 아들이 서청수 회장에게는 정말로 슬펐다.
‘호부 밑에 견자 없다더니, 내 앞에 있는 개새끼는 그럼 누구의 자식이냐. 아니면 나도 실은 개새끼라며 짖어대는 것이냐…….’
서청수 회장은 서승학을 바라봤다.
“승학아, 조대찬이야 어떻든 무슨 상관이냐. 조대찬으로 시간을 죽일 셈이냐.”
“그건 아니지만요.”
듣는 귀가 아예 먹은 것은 아닌 서승학은 억지로 노기를 가라앉혔다.
서청수 회장은 잠깐 한숨을 쉬고 말했다.
“이제는 나 혼자 그룹을 경영하는 게 힘에 부친다. 어느덧 돌아보니 환갑 고개를 한참 넘겼어.”
“…….”
서청수 회장이 차분한 어조로 말하자 서승학도 우선 분을 삭였다.
“내 아들들이 내 뒤를 잘 받쳐줬으면 한다. 그래야 나도 경영에 자신이 없어질 때 미련 없이 짐을 떠넘길 거 아니냐.”
“아들들이라뇨. 아버지 짐을 떠안을 아들은 저 하나뿐이거든요.”
“내 뒤를 누가 이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원웅이도 그룹의 일익을 맡고 있잖냐.”
그 말에 서승학의 목소리가 다시 커졌다.
간신히 억눌렀던 분노가 다시 뚜껑을 박차고 솟았다.
“아버지! 그 자식은 지금 자리도 과분해요!”
“승학아, 네가 회장자리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냐?”
“제가 적합한지 따지기 전에, 애초에 서원웅은 이 판에 낄 수가 없다고요.”
“…너는 인정하기 싫겠지만 원웅이도 내 아들이다.”
“아버지 아들이면 다 돼요? 어머니 아들이 아닌데? 반쪽짜리가 어떻게 회장이 돼요?”
서청수 회장의 얼굴이 굳었다.
“이 회사는 네 엄마 회사 아니다. 네 할아버지가 세워서 내가 키워서 내 아들에게 물려줄 회사다.”
“회사는 전제왕정이 아니에요. 지분만큼 입김 불 수 있는 자본주의 집단인 거,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엄마랑 결혼했고.”
“주제넘은 소리는 관둬라. 안 좋다.”
“일단 서원웅은 빼시라고요. 저를 두고 저울질 하시다가, 제가 맘에 안 들면 차라리 전문경영인 세우시라고요.”
불쑥불쑥 고개를 내미는 아들에 서청수 회장은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가 억지로 참았다.
그는 술을 꿀꺽꿀꺽 삼켰다.
차분하게 얘기를 나누려고 부른 자리다.
괜한 악감정을 분출하려고 서승학을 부른 게 아니었다.
서청수 회장은 짧은 숨을 토했다.
“나는 원웅이와 네가 선의의 경쟁을 하기를 바랐다. 네가 원웅이를 보고 자극 받아서 분발해주기를 바랐어.”
“서원웅을 경쟁상대로 인정 못합니다.”
“네가 인정하지 않는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야. 애처럼 생떼 부리지 말아라.”
“아버지는 항상 이런 식이죠. 제 의견은 그냥 다 생떼로 취급하시죠. 이래놓고 저랑 무슨 대화를 하시겠다는 거죠.”
서청수 회장은 착잡한 얼굴로 서승학을 바라봤다.
“네가 숙이지 않으면 나도 너에 대한 신임을 거둘 수밖에 없다.”
“하! 저에 대한 신임이요? 단 한 번이라도 절 신임한 적이 있으세요?”
“승학아.”
“됐어요. 그런 사탕발림으로 어르고 달래면 제가 굴복할 거 같아요?”
“나도 혈통에 아무런 하자가 없는 너한테 이 자릴 물려주고 싶다.”
“그럼 그렇게 하시면 되잖아요!”
“네 지금까지 행실이 어땠는지, 보여준 능력이 어땠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냐?”
서승학에게도 할 말은 있었다.
“아버지가 절 이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은 안 하세요? 서원웅 애지중지한 것만큼만 절 위하셨으면 지금보단 나았을 거예요.”
“이 자식이 듣자듣자 하니까……?”
서청수 회장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그는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서승학의 뺨을 냅다 후렸다.
짝!
가죽을 치는 소리가 넓은 호텔방을 울렸다.
서승학은 고개가 돌아간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서청수 회장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널 이렇게 만들어? 내가 널 어떻게 만들었냐?”
“…….”
“너 서른도 안 됐을 때 계열사 대표 맡겼다. 뽕 처맞고 정신 못 차릴 때도 참았다. 네 똥오줌 치워준 늙은 비서 뺨 때릴 때도 아예 내치지 않았다.”
“…….”
“지금은 계열사 일감 몰아주는 필래기획 맡겼다. 내가 너를 어떻게 더 위해야 만족하겠냐?”
서청수 회장의 목에 핏대가 곤두섰다.
그는 참았던 말들을 쏟아냈다.
“네놈 새끼가 사람이면 그런 말은 하면 안 되지. 내가 서원웅을 애지중지해? 원웅이 입사했을 때 어디로 보냈는지 아냐? 필래유통, 청규 아가리 속에 집어 처넣었다. 너라면 견뎠을 거 같냐?”
“…….”
“형편없는 새끼!”
“그럼 계속 그렇게 서원웅 물고 빨고 곁에 두세요.”
서승학은 외투를 거칠게 손에 쥐고 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서청수 회장은 그의 뒷모습에 형형한 눈빛을 뿌리며 외쳤다.
“너, 지금 그 문 밖으로 나가면 영영 끝이다.”
서승학은 아버지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미 나는 옛날에 끝났잖아요? 아버지만 참은 줄 아세요? 지금까지 나도 참았어요. 두고 보자고요. 어떻게 되는지.”
서승학은 아버지의 경고에도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서청수 회장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형편없는, 형편없는 놈……!”
서승학이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호텔 직원이 다가왔다.
“대표님, 저 로비로 모시겠…….”
“꺼져! 따라붙지 마!”
서승학은 거칠게 직원을 물리치고 쿵쿵 걸어갔다.
그는 빠드득 이를 갈았다.
아버지의 전향적인 태도를 손톱만큼이나마 기대했던 자신을 원망했다.
“젠장! 내가 뭘 바라고 여기까지 순순히 기어온 거야!”
그는 발에 채는 건 뭐든지 뻥뻥 차버리며 로비로 내려갔다.
승강기 안에서는 닫히는 문을 쾅 걷어찼다.
도저히 분노가 참아지지 않았다.
그래도 열린 마음으로 말을 들어주려고 아버지는 아들을 여기로 불렀다.
하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둘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서승학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찬을 떠올렸다.
첫 단추부터 잘못 꿰였다.
‘그 새끼 싸가지 없는 태도에 화가 치민 채로 들어가고 말았어…….’
서승학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게 다 그 새끼 때문이야……. 개 같은 새끼.’
성찰하는 자세는 긍정적이지만, 성찰도 제대로 해야 한다.
고작 말 몇 마디에 평정을 잃어버리는 자기를 탓할 일이었다.
서승학에게 그걸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서승학이 로비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수행원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유명했던 손찌검 사건으로 늙은 비서가 그만둔 이후 서른 번째 서승학을 모시는 비서였다.
그는 서승학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외투를 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서승학은 눈만 부라리고 탁, 그의 손을 뿌리쳤다.
비서는 고개를 굽실거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가 사라지자, 로비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신문을 보던 대찬은 신문을 접어 내려놨다.
대찬은 웃음을 머금었다.
‘대판 싸웠나본데.’
그는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대찬은 서승학의 표정을 보기 위해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서청수 회장은 대찬을 부르고, 그 다음 서승학을 불렀다.
그저 말벗이나 하려고 호출한 것은 아니었다는 걸 대찬은 대번에 알아차렸다.
서청수 회장은 누구에게 필래그룹의 왕좌를 넘겨줄지 고민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당장 앉은 자리에서 결정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면담은 그의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서청수 회장의 호출은 서원웅보다는 서승학에 방점이 찍혀 있을 것이다.
서원웅 대신 대찬을 부른 것이 그 증거였다.
서청수 회장은 이미 서원웅에 대한 판단은 끝내놓은 상태였다.
성격, 능력, 비전, 주변상황.
그렇기에 오히려 서원웅보다는 그의 주춧돌이나 다름없는 대찬을 불렀다.
물론 서승학에 대해서도 대강의 판단은 서있었다.
하지만 이 판단을 그대로 유지하자면 서승학은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한 번 더 기회를 주고자 했다.
그가 그래도 이를 악물고 분발하겠다고 말하면 너른 아량을 베풀 용의가 있었다.
일부러 대찬을 부르고, 그 다음에 서승학을 불러 서승학에게 대찬이 서청수 회장을 찾아왔음을 알려주었다.
상황이 이렇게 막중하니 자극을 받으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서승학은 자극을 받긴 받았지만 서청수 회장이 원하는 방향의 자극은 아니었다.
서승학은 서청수 회장이 건넨 아량의 손길을 거칠게 뿌리쳤다.
대찬은 서승학이 어떤 표정으로 자리를 떠날지 알고 싶었다.
서승학이 웃고 있었다면 대찬은 울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승학은 지금 분노를 좀체 감추지 못한다.
대찬으로서는 더 없는 호재였다.
이로써 서승학은 경영승계구도에서 한 발 더 멀어졌다.
대찬은 남은 커피를 대번에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