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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82화 (281/556)

난 할 수 있어 282화

요리들의 국적도 다양했다.

육개장, 스키야키, 고추잡채, 푸팟퐁커리, 폭립, 홍합토마토스튜.

대찬은 그걸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이거 너무 족보가 꼬인 거 아니야?”

“얼른 먹기나 해.”

대찬은 음식을 하나씩 맛봤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음, 맛있다. 근데 좀 익숙한 맛인데?”

“이, 익숙하긴 뭐가! 맛있으면 됐지.”

“그래, 맛있으면 되는데…….”

대찬은 밥을 먹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이영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대찬은 저벅저벅 휴지통을 향해 걸어갔다.

윤이영이 급히 그를 말렸다.

“밥 먹다 말고 어딜 가!”

“잠깐만. 뭔가 수상해서 말입니다.”

대찬은 휴지통에 마구 버려진 포장지를 꺼냈다.

대찬은 씩 웃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

대찬은 휴지통에 버려진 포장지 중에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 포장지에는 ‘셀프셰프-혼자서도 쉽게 만드는 일품요리! 화끈한 불맛, 고추잡채’라고 쓰여 있었다.

대찬은 그걸 윤이영에게 팔을 쑥 뻗어 내밀었다.

윤이영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대찬은 큭큭 웃으며 도로 포장지를 휴지통에 버렸다.

“내가 모를 줄 알았어?”

“…….”

“사올 거면 다른 마트에서 사오든지. 하필 필래에서 사오고.”

“주변에 필래마트밖에 없단 말이야.”

윤이영은 입술을 삐죽 내민 채로 툴툴거렸다.

대찬은 흐흐 웃으면서 다시 식탁 앞에 앉았다.

윤이영은 대찬에게 눈을 흘겼다.

“아니, 아무리 자기 회사 제품이라도 그렇지, 어떻게 한 입 먹고 바로 알아?”

“그거 있잖아, 셀프셰프.”

“응.”

“내가 만든 거야.”

“뭐?”

“각 메뉴 별로 한 2백 번씩은 먹어본 거 같은데. 못 알아채는 게 이상하잖아.”

“아유, 우리 조대찬 부장님 대단하다, 대단해! 무슨 이런 데까지 손을 다 댔데.”

대찬은 웃으면서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그래도 잘 먹을게?”

“미안해. 도구는 엄청 사놨는데 막상 하려고 하니까 엉망이더라. 다음에는 진짜 내 손으로 만들어서 대접할게.”

“같이 만들면 되지. 차근차근 해. 재미를 붙여야 요리도 재밌다니까.”

대찬은 웃으면서 음식을 다시 먹었다.

그렇게 배를 채우고 윤이영의 어깨를 감싼 채 TV를 보고 있었다.

그때 대찬의 휴대폰이 울렸다.

서청수 회장이었다.

대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웬만하면 직접 전화하는 일이 잘 없는 서청수 회장이었다.

윤이영은 대찬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래?”

“잠깐 전화 좀 받을게.”

윤이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넌지시 액정을 바라봤다.

그녀의 동공이 커졌다.

“뭐야, 서청수 회장?”

“응? 응.”

“서 회장하고 직통으로 연락하는 사이였어?”

“뭘 놀라. 우리나라에서 제일 핫한 여배우하고 연애도 하는 사람이야, 내가.”

대찬은 씩 웃으면서 소파에서 일어났다.

윤이영도 배시시 웃으며 TV를 음소거 했다.

대찬은 찌뿌듯한 허리를 손으로 짚으며 베란다를 바라봤다.

그리고 전화를 받았다.

“예, 회장님. 조대찬입니다.”

“어, 나랑 술 한잔 할까. 지금.”

대찬은 윤이영을 흘끔 바라봤다.

영 내키지 않는 제안이지만 어쩔 수 있나.

“네,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명동 우리 호텔로 가서 나 만나러 왔다고 하면 안내해줄 거야.”

“알겠습니다, 회장님. 바로 가겠습니다.”

대찬은 전화를 끊고 윤이영에게 말했다.

“어쩌지. 회장님 호출인데, 지금.”

“이 시간에? 가족들하고 단란하게 시간이나 보내시지. 회장님은 와이프하고 사이가 안 좋은가봐.”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안 좋긴 하지.”

윤이영은 웃으면서 일어나 대찬의 외투를 꺼내주었다.

“다녀와.”

“미안해. 자고 가려고 했는데.”

“뭘, 이런 거 하나 시시콜콜 따지면서 어떻게 연애해.”

대찬은 윤이영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고 명동으로 향했다.

대찬이 명동의 필래호텔로 가서 서청수 회장을 만나러 왔다고 하니, 직원이 그를 안내했다.

최상층에 있는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으로 대찬은 안내되었다.

대찬은 안으로 들어가 서청수 회장을 만났다.

“회장님.”

“어, 왔나. 앉게.”

“네.”

대찬은 자리를 찾아 앉았다.

제법 멀찍이 앉자, 서청수 회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면 술을 줄 수가 없잖아. 가까이 와서 앉아.”

“네.”

대찬은 서청수 회장의 숨에 섞인 술 냄새를 감지할 정도로 가까운 곳에 앉았다.

서청수 회장은 술병을 들었다.

그러자 대찬은 공손히 잔을 들어 그가 주는 술을 받았다.

서청수 회장은 대찬을 보며 푸근하게 웃었다.

“편하게 마셔. 괜히 예의 차린답시고 고개 돌리고 마시면 내가 불편하니까.”

“알겠습니다.”

대찬이 술을 마시는 걸 보고, 서청수 회장도 목을 축였다.

서청수 회장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한창 쉴 시간에 불러내서, 밉지?”

“아니라곤 안 하겠습니다.”

“아이구, 이젠 최소한의 가식도 안 떠는군.”

대찬은 점잖게 웃었다.

“농담입니다. 회장님이 저를 따로 찾으신 데는 다 그만 한 이유가 있을 줄로 압니다.”

“음, 편하게 마셔. 그저 오늘은 아들 친한 친구랑 따로 술이나 한잔 하려고 불렀으니까.”

“회장님이든, 친구 아버님이든 여기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에서 편하게 먹기는 글렀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대찬에게 눈을 흘겼다.

“자넨 언제부턴가 나를 별로 안 어려워하는 거 같아.”

“그럴 리가요.”

서청수 회장은 싱겁게 웃고는 말했다.

“친구 아버지 자격으로 묻지. 원웅이, 어떻나?”

“친구 아버지 자격으로 물으셨으니, 저도 친구인 서원웅에 대해서만 말씀 올리면 되겠습니까.”

“내가 묻는 뜻을 알면서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 하나. 맹랑하기는.”

서청수 회장은 독주를 꿀꺽꿀꺽 마시고 탕, 소리를 내며 잔을 탁자에 내려놨다.

그리고는 대찬에게 말했다.

“서원웅의 재목이 어디까지 되겠어. 자네의 생각을 말해봐.”

“능히 한 개 계열사를 이끌어오고 있습니다. 겨우 서른셋인데 말입니다. 조금만 더 경륜이 쌓이면 그룹도 문제없을 겁니다.”

“원웅이한테 그럴 만한 비전이 있나?”

“스스로 그런 비전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그룹을 이끌어갈 재목이 아닌 것이지.”

“회장님께서는 비전 있는 리더이십니다. 하지만 모든 리더가 비전을 가져야 하는 건 아닙니다.”

“비전 없는 리더를 어떻게 리더라고 하겠나.”

“주제넘게 고사 하나만 인용해도 괜찮겠습니까.”

“언제는 주제 안 넘었나? 새삼스럽게.”

대찬은 민망하게 웃었다.

“중국 춘추시대 중에서 최초의 패자가 되었던 제나라 환공을 아십니까?”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알겠네.”

“제나라 환공은 재상 관중과 포숙아의 도움을 받아 가장 강력한 제후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환공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군주의 일은 쉽고도 어렵다.”

서청수 회장은 대본이라도 짜여진 듯, 대찬의 말을 받았다.

“쉬운 것은, 유능한 신하를 재상에 앉혀놓고 그의 말을 듣기만 하면 되니 쉽다.”

“어려운 것은, 그 유능한 신하를 찾기가 어렵다.”

대찬은 웃으면서 마지막 말을 완성해주었다.

서청수 회장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원웅이가 제나라 환공 같은 사람이란 말인가?”

“네, 제 짧은 소견으론 그렇습니다.”

“잠깐, 이제 보니 이거, 순 지 자랑이었군?”

“예? 그게 무슨 말씀…….”

“네놈 새끼가 관중이란 거 아냐?”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뇨, 그럴 리가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원웅이 녀석은 별 능력도 없지만 너를 적극 기용한 탓에 그룹을 이끌어갈 능력이 된다, 이거 아니냐고!”

“오해십니다.”

“뭘 오해했나?”

대찬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환공은 원래 포숙아를 재상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포숙아는 자기의 친구인 관중을 추천했죠.”

“그래, 관포지교에 나오는 그 관중과 포숙아지.”

“포숙아는 나라를 다스리려면 자기를 기용하고 천하를 다스리려면 관중을 기용하라며 관중을 추천했습니다.”

“근데.”

“저는 능력이 모자라서 서 대표에게 CTO 선임을 추천했고, 서 대표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마크 콜먼을 발탁했습니다. 포숙아의 의견만 날름 받아먹은 환공보다 되레 낫죠.”

“그래서 조대찬이는 관중이 아니고 포숙아다?”

대찬은 빙긋 웃었다.

“포숙아 정도로는 쳐줄 수 있잖습니까.”

“정말 조대찬이 네가 포숙아에 그친다고 생각하나? 아니잖아. 서원웅의 관중이라고 속으로는 생각하고 있잖아.”

대찬은 웃음을 머금은 채로 대답했다.

“관중이 되고 싶습니다. 아직은 아니죠. 관중이 관중이려면 환공을 패자의 자리에 올려놔야 합니다.”

“많이 컸어. 처음에는 빌빌거리기만 하는 것 같더니 이제는 대권을 노리는 눈초리를 숨기지 않는군.”

“그때는 노력해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노력하면, 될 것도 같습니다.”

“당돌하긴!”

서청수 회장은 너털웃음을 짓고는 말을 이었다.

“서원웅은 비전은 없는 대신 비전을 실현해줄 사람을 보는 눈은 있다는 거지.”

“네, 그렇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칼칼해진 목을 술로 적시고 말했다.

“그런데 사람만 잘 봐서는 이 큰 기업집단을 거느리진 못해.”

“네, 여타 덕목들이 필요하겠죠. 저는 그 덕목들도 갖췄다고 생각합니다. 아랫사람한테는 온유하고, 맞서야 할 사람한테는 굳세고 강직합니다.”

“으음…….”

“서씨 일문도 아닌 제가 후계문제를 입에 담으려니 조심스럽습니다. 하지만 하문하시기에, 답을 올렸습니다.”

“그래, 그렇게 구태여 부연설명 할 거 없어.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네, 회장님.”

서청수 회장은 주먹을 쥐었다 피며 말했다.

“대찬아.”

“네.”

“만약 네가 서원웅이 아니라 서승학의 관중이었다면.”

“네.”

“그랬다면, 너는 무슨 말로 서승학을 제나라 환공으로 만들었을 거냐?”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환공이 관중을 만든 겁니다. 관중이 환공을 만든 게 아닙니다.”

“그 말은…….”

“외람되지만, 그분은 환공이 아닙니다. 관중을 얻을 수 없는 분입니다.”

“으으음…….”

서청수 회장은 소파에 몸을 한껏 묻으며 깊은 신음을 흘렸다.

그는 깊은 생각에 빠진 눈으로 독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한참 술만 마시고 침묵을 이어가던 그는, 대찬에게 말했다.

“알았어. 나가봐. 직원이 차비 챙겨줄 거야.”

“네, 그럼 가보겠습니다.”

대찬은 허리를 직각으로 숙이고 그의 앞에서 물러났다.

그가 떠나자마자 서청수 회장은 소파의 팔걸이를 꽉 붙잡았다.

“서원웅이 환공이고 자기가 관중이라고……?”

서청수 회장은 대찬의 말이 내내 뇌리를 맴돌았다.

“건방진 자식!”

그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하고 싶은 말은 끝까지 숨겨. 건방진 놈, 건방진 놈……. 관중이 없는 환공이 어떻게 됐는지, 그걸 말하고 싶었으면서. 자기는 고상한 척, 착한 척… 여우같은 놈…….”

관중이 없는 환공의 최후는 어떠했는가.

이러저러한 과정은 생략하고 결과로만 말하자.

굶어죽은 환공의 시신은 구더기가 가득 끓는 지경이 되어서야 겨우 수습된다.

내가 없으면 네놈의 자식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알아라.

그게 서청수 회장의 귀에 울리는 무언의 선언이었다.

“나이도 어린 게, 돈도 없는 게, 직급도 낮은 게… 신경 쓰이게 하는군.”

서청수 회장은 술을 더 마시려다가 잔을 내려놨다.

대찬이 다시 호텔 로비로 내려가려는데, 마침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서청수 회장이 있는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으로 향했다.

고심하며 바닥을 보며 걷던 대찬은,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아.”

대찬은 그를 보고 정중히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누구지?”

대찬의 인사를 받은 사람은 서승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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