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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81화 (280/556)

난 할 수 있어 281화

“귀한 집 자제면 귀한 집 자제답게 목에 힘도 좀 주고 그러세요.”

“그 조언은 잘 듣겠는데, 앞으로 조대찬 관련해서만큼은 더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홍승연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 같으면 어깨를 쓰다듬으며 어린애 다루듯 얼러줬을 서원웅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떠한 위로의 말도 없이 서원웅은 다른 곳을 바라봤다.

신혼부부의 작은 소란을 알지 못한 채, 대찬은 병원으로 향했다.

6인실이었다.

병원 안으로 들어가니 꿉꿉한 공기가 대찬을 엄습했다.

대찬은 병실 안으로 들어가 젊은 배송기사와 만났다.

“안녕하세요. 필래 비바체 혁신경영팀장 조대찬 부장이라고 합니다.”

“아, 조 부장님…….”

배송기사는 대찬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필래유통의 마수에서 택배사업부를 건져준 장본인이 대찬이니 모를 수가 없었다.

대찬은 웃으면서 그의 손을 꽉 잡았다.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요. 아니, 괜찮아지고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배송기사를 보고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척 보기에도 얼굴이 많이 상해있었다.

아무리 세게 때렸기로서니 얼굴을 몇 대 쳤다고 이렇게 망가져버렸다.

‘사람깨나 때려본 인간이었나 보네.’

대찬은 만신창이가 된 그의 얼굴은 안쓰럽게 바라봤다.

“대표님께서 보내셔서 왔습니다.”

“번번이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가해자하고 얘기는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아무래도 합의를 해야 할 거 같아요. 그쪽이 좀 사는 집인지 합의금을 거부 못할 정도로 부르던데요.”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합의하지 마세요.”

“…네? 그래도…….”

“하지 마세요.”

배송기사는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대찬에게 호의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이 인간이 남의 속은 모르고 멋대로 지껄인다며 속으로 욕을 한 사발 퍼부었을 것이다.

대찬은 그의 속이 썩어 들어가지 않도록 부연했다.

“치료비, 전액 회사 측에서 부담하겠습니다.”

“네?”

“그리고 위로금도 지급될 겁니다. 가해자 쪽에서 합의금으로 얼마를 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보단 많을 겁니다.”

“아…….”

“그럼 그쪽하고 합의해줄 이유가 없죠?”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배송기사의 눈에 눈물이 어른거렸다.

“부장님…….”

“아, 지금 울면 안 되는데. 사진 찍을 때 울어야 되는데요.”

그 말이 왜인지 배송기사의 눈물샘을 터트려버리고 말았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아, 지금 울면 안 된다니까요!”

대찬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배송기사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우리 회사 위해서 일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희도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겠습니다. 아니, 해야 하는 일이죠.”

“고맙습니다…….”

“법무팀에서 민사소송도 지원해줄 겁니다. 그 나쁜 놈의 새끼, 제대로 털어먹어야죠.”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회사 명령으로 나온 거니까 저한테 감사하실 필요 없어요. 대신 기사님 잘 뵙고 돌아간다고 증거 남겨야 하니까, 저랑 사진 한 장만 찍어줘요.”

대찬은 배송기사의 팔을 꼭 잡은 채로 카메라 렌즈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정치인처럼 찍고 싶지는 않았다.

카메라 있는 거 뻔히 알면서, 만감이 교차하는 척 표정연기를 하면서 사진을 찍고 싶지는 않았다.

대찬은 배송기사와 카메라를 바라보고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그게 오히려 더 좋았다.

여전히 눈가에 물기가 어른거린 채로 활짝 웃는 어린 배송기사.

그 모습이야말로 포토제닉이었다.

“가해자한테는 꼭 떳떳하게 말하세요. 절대 합의 안 해준다고.”

“아, 네… 그럴게요.”

대찬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뜨려다가, 배송기사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배송기사는 당황해서 대찬에게 물었다.

“왜 그러세요?”

“제가 관상을 좀 볼 줄 아는데요. 유명한 역술가 밑에서 일한 적이 있어서.”

“과, 관상이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근데 우리 기사님은 가해자한테 똑 부러지게 말을 못할 거 같아요. 백 프로.”

“그, 그런가요.”

대찬은 손을 내밀었다.

“휴대폰 잠깐 빌립시다. 그 인간한테 전화 좀 걸어주세요.”

배송기사는 순순히 대찬의 말대로 해주었다.

잠깐의 신호가 가더니, 걸걸한 목소리가 응답했다.

그는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야! 합의금을 얼마나 뜯어내려고 또 전화질이야!”

“강만길 선생님 되십니까.”

“넌 뭐야, 또.”

“누군지도 모르는데 반말부터 하십니까.”

“넌 뭐냐고.”

“필래 비바체 혁신경영팀장 조대찬 부장입니다.”

대찬이 신원을 밝히자 가해자의 언성이 조금 잦아들었다.

“…근데 뭐요.”

“합의를 보시기로 하셨으면 좀 반성의 기미를 보이시거나, 그도 아니면 최소한 피해자한테 예의는 갖춰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미 합의하기로 했는데 여기서 반성의 기미나 예의 같은 게 왜 나와요? 당신이 뭔데 참견이야?”

“피해자 병문안은 한 번이라도 왔습니까?”

대찬이 이렇게 말하며 배송기사를 흘끗 바라보자, 배송기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대찬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떻게 병문안도 안 오고 합의를 봐요. 도리가 아니잖아요.”

“당사자가 아닌 사람하고 지지부진하게 얘기 안 하고 싶은데.”

“조금만 참아주세요. 저도 인간 같지 않은 인간하고 얘기 안 하고 싶은데 하고 있잖아요.”

“뭐야!”

“합의는 없습니다. 형사, 민사 동시에 진행할 거니까 준비 단단히 해두시고요.”

“…그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필래 비바체 법무팀에서 모든 소송을 진행할 겁니다. 형량은 크진 않겠지만 이것저것 많이 귀찮아지실 겁니다.”

“이봐, 잠깐만요.”

“어떤 말씀을 하셔도 번복은 없으니 굳이 입 아프게 여러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순간 가해자의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재판은 처벌도 처벌이지만, 지루하게 이어지는 소송전은 일반인이 아무렇지 않게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아무리 가해자가 형편이 괜찮은 편에 속한다고 해도,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 상대가 대기업의 법무팀이라면 더욱 그렇다.

“잠깐, 부장님. 따로 만나 뵙고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요.”

“아, 진짜 짜증나네.”

대찬은 성마른 목소리로 가해자의 말을 싹둑 잘랐다.

“…….”

“이봐요. 성질머리가 더러우면 눈치라도 있으세요.”

“…….”

“빈말이라도 피해자 보러 오겠다고 해야지, 끝까지 따로 만나잔 얘기가 나옵니까?”

“아니, 그러니까 제 말뜻은…….”

“괜히 굽실거리는 척 연기할 거 없어요. 무슨 말을 해도 번복 안 한다니까. 끊어요.”

대찬은 전화를 처음 걸 때만 해도 합의를 해줄 듯 말 듯 하며 가해자의 애간장이라도 녹여볼까 했다.

하지만 가해자의 태도는 그럴 흥미마저 뚝 떨어지게 했다.

대찬은 배송기사에게 휴대폰을 돌려주며 말했다.

“아마 그 인간이 기사님 찾아올 거예요. 만나주지 마세요. 더러운 관상 마주해봤자 완치만 늦어지니까.”

“하하, 네…….”

“빨리 나으세요. 그래야 회사에서도 얼른 부려먹지.”

대찬은 웃으면서 그에게 준비해온 죽과 과일, 그리고 사비 얼마간을 털어 준비한 금일봉을 주고 병실을 나왔다.

필래 비바체는 그를 6인실에서 2인실로 올려주었다.

극동일보는 대찬과 배송기사가 나란히 찍힌 사진을 제법 큰 크기로 실어주었다.

그건 대내외적으로 홍보의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윤리경영을 간판으로 내거는 건 기업 입장에서는 퍽 부담스러운 일이다.

한 번만 삐끗해도 이미지가 와르르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만 조심한다면, 윤리경영의 이미지는 좋은 쪽으로도 작용한다.

착한 기업으로 정평이 나니, 약간의 제스처만 취해줘도 박수를 받는다.

이 경우가 그랬다.

밖으로는 필래 비바체의 이미지가 개선되었고, 안으로는 택배노동자들의 확고한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대찬은 개인적으로 윤이영의 칭찬도 얻어냈다.

“자랑스러워 죽겠네.”

“자랑스러워 죽겠다는 말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다.”

“칭찬하면 그냥 고분고분 들어.”

“네.”

윤이영은 대찬을 꼭 껴안았다.

“그래, 이런 인간적인 면도 있어야지. 헥헥거리면서 돈만 좇는 건 좀 그래.”

“사실 저 사진도 헥헥거리는 일환으로 찍은 거긴 한데.”

윤이영은 빙긋 웃었다.

“그래도 그게 전부는 아니니까.”

“그건 그래.”

“근데 웬일이야? 저런 건 사장님이 기를 쓰고 출동해서 카메라 마사지 좀 받으려고 하던데.”

“서원웅이 배려해준 거지. 그 와중에 우리 홍승연 여사님은 영 맘에 안 들어 하긴 했지만.”

윤이영은 홍승연을 떠올리고 표정을 구겼다.

“암튼 남자가 아까워, 그 커플은.”

“우리 커플은?”

“여자가 백만 배 아깝지!”

윤이영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대찬은 흐흐 웃으면서 윤이영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윤이영은 고양이처럼 눈을 살짝 감으며 대찬의 손길을 느끼다가, 그를 올려다봤다.

“오늘 저녁은 내가 해줄게.”

“오, 윤이영이 요리를 다해?”

윤이영이 일약 스타덤에 오른 후, 둘의 데이트는 주로 집안에서 이뤄졌다.

집에만 있는 것이 갑갑해서 한번은 뚝섬유원지에 나갔다가 인파에 치여 질식할 뻔했다.

그 이후로 둘은 강제로 소위 집돌이, 집순이가 되었다.

윤이영은 부엌으로 향하면서 말했다.

“맨날 음식 배달시켜먹는 것도 그렇잖아. 몸에도 안 좋고. 그렇다고 자꾸 오빠만 부엌데기 만들 순 없고.”

그들의 식사는 대개 배달음식이나, 대찬이 만든 음식으로 해결되었다.

윤이영이 지금까지 만든 음식이라고는 라면과 계란프라이가 전부.

스스로도 미덥지 못하고 대찬도 그녀를 신뢰하지 못했다.

그래서 앞치마를 매는 건 번번이 대찬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윤이영이 요리사를 자처했다.

대찬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서 직접 음식을 하시겠다?”

대찬은 소파에 앉아 빙긋 웃었다.

“왜, 못 미더워?”

“아니, 그건 아니구. 기대돼서.”

“오늘 아주 작정하고 잔칫상 차릴 거니까 놀랄 준비나 해.”

“나 맛없으면 맛없다고 하는 거 알지?”

“아씨, 이럴 줄 알았으면 오빠가 음식 할 때 아부 좀 떨어놓을 걸.”

대찬은 큭큭 웃었다.

윤이영의 요리는 요란법석했다.

부엌 여기저기에 숨겨놓은 장비들을 다 꺼내 놨다.

새것 냄새가 나는 걸 봐서 이날을 위해 잔뜩 장만해놓은 게 분명했다.

‘불안한데.’

대찬은 생각만 그렇게 하고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기껏 저런 정성을 보여주는데 옆에서 감 놔라 배 놔라, 오지랖 떠는 것만큼 정 떨어지는 짓은 없다.

‘맛있게만 먹어주면 되는 거지.’

대찬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허둥대는 윤이영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대찬은 뭐를 자꾸 썰고 지지고 볶고 찌는 윤이영에게 물었다.

“요리는 어디서 배웠어?”

“요즘 동영상 잘 돼있어. 그거 보고 집에서 연습했지.”

“뭐 도와줄 건 없고?”

윤이영은 식칼을 든 채로 대찬을 돌아봤다.

“손 하나 까딱하지 마.”

“그렇게 무서운 목소리로 말할 거면 칼이나 내려놔.”

“소파에 드러누워서 뉴스나 보고 있어. 나 신경 쓰지 말구. 남이 보면 더 실수한단 말이야.”

“내가 봐주고 있어야 그래도 핑계거리 하나라도 생기는 거 아니겠어?”

“오빠만 안 보면 무조건 성공이니까 제발 신경 끄셔.”

“알았어.”

대찬은 얌전히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향기로운 음식 냄새가 대찬의 코를 자극했다.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윤이영의 한 상이 완성되기까지 꼬박 1시간 30분이 걸렸다.

대찬은 아사 직전에 윤이영의 호출을 받았다.

“와서 앉아.”

“아, 지금은 뭘 먹어도 맛있을 거 같아.”

대찬은 비틀비틀 걸어서 식탁 앞에 앉았다.

식탁을 바라보는 대찬의 눈이 확 커졌다.

“와, 이걸 다 네가 했다고?”

“당연하지. 어때, 이제 좀 달라 보여?”

“달라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이 정도면 배우 때려치우고 요리사 해도 먹고 살겠어.”

대찬은 한 상 떡 벌어지게 차려진 음식들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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