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80화
필래 비바체의 배송은 빠르게 전열을 갖춰나갔다.
완벽한 콜드체인시스템은 물론, 필래택배-필래마트-필래 인 마켓으로 이어지는 체계적인 배송시스템을 정립했다.
이런 필래 비바체의 배송시스템에 있어 핵심은 필래택배였다.
그렇기에 필래 비바체의 명운은 최전선에서 싸우는 필래택배의 배송기사들에게 달려 있었다.
필래택배가 비바체로 넘어오게 된 건, 근본적으로 필래유통의 열악한 처우 때문이었다.
그걸 걸고넘어져 산하로 끌어들인 비바체였다.
그러니 필래유통 시절보다 확실한 처우를 해줘야 하는 건, 도의적으로나 실리적으로나 당연했다.
서원웅은 대찬과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말했다.
“택배노동자들 처우개선에 대한 확실한 액션을 보여줘야 하는데.”
“특히 새벽배송이 본격적으로 박차를 가하는 지금, 더더욱 필요하죠.”
서원웅은 대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직접고용해서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할까?”
“우리 벌써 계산기 두드려봤잖아요.”
서원웅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랬지.”
“그건 무책임한 호의예요. 우리 감당 못하는 거 아시잖아요.”
“…그렇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말은 좋다.
대찬도, 서원웅도 그게 하루아침에 이뤄진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렇게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안전자금을 배후에 쌓아두고 뱃살만 튕기는 회사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필래 비바체는 상황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다.
가파른 성장은 마른 걸레를 쥐어짜듯 있는 돈 없는 돈 탈탈 털어 재투자에 착수한 덕분이었다.
필드 업을 중심으로 한 오프라인 시장과 새벽배송을 앞세운 온라인 시장에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적자의 심화를 막으려는 노력으로 간신히 소폭의 적자행진으로 방어하는 중이었다.
이 와중에 무수한 택배노동자를 직접고용하고, 정규직화 하는 건 독약을 리터로 들이마시는 격.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변명만 늘어놓으며 처우개선에 대한 부분을 차일피일 미뤄만 놓을 일도 아니었다.
대찬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새벽배송에 투입되는 기사들에게는 확실한 보상이 필요합니다. 야간수당에 대한 부분은 적자폭이 커지더라도 관철해야 합니다.”
“그래야지. 그건 택배사업부가 우리 품으로 들어올 때부터 약속했던 거니까.”
대찬은 쯧, 가볍게 혀를 찼다.
“새벽배송이 고객들은 편해도 택배노동자들한테는 쥐약입니다. 건강을 팔아서 돈을 버는 격이에요.”
“그렇지. 일선에서 뛰는 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좋지 않아.”
“그렇다고 우리 주력인 새벽배송을 버릴 수는 없으니… 확실한 흑자로 전환이 되면 노동자들에 대한 처우에 가시적인 변화가 있어야 할 거예요.”
“윤리경영이란 게 쉽지 않아.”
대찬은 미소를 머금었다.
“애초에 기업의 목표는 윤리가 아니니까요.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죠. 이건 착한 척 하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택배노조에서 들고 일어날 게 뻔하니까.”
“그렇지. 그분들 전투력은 우리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잖아?”
“아유, 저는 우리 사옥 앞에서 철의 노동자 쩌렁쩌렁하게 부르는 거 도저히 볼 자신이 없습니다.”
대찬은 서청규의 사지를 물어뜯던 택배노조의 맹렬한 발톱을 떠올렸다.
절로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졌다.
서원웅은 미소로 동조하다가 말했다.
“이런 저런 처우개선 다 좋은데, 사실 눈에 보이지는 않거든.”
“눈에 보이는 스킨십을 원하시는 거죠.”
서원웅은 웃었다.
“응, 밖에 보이는 것도 중요하니까.”
“그럼 이거 어떠세요?”
“음?”
대찬은 웃으면서 보고서 한 부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오늘 눈여겨볼 만한 보고서가 들어와서요.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던 참이었어요.”
“이게 뭐야?”
“택배사업부에서 이슈가 발생했는데요. 젊은 배송기사 한 분이 곤란한 상황에 처하셨답니다.”
“곤란한 상황이라니.”
“이건 보고서보다 동영상으로 보는 게 더 빨라요.”
대찬은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틀어주었다.
어제 날짜의, 제목은 ‘살벌하게 택배기사 조지는 아재ㄷㄷㄷㄷㄷ’였다.
조회 수는 만 하루도 안 되어 20만을 기록했다.
동영상은 열악한 화질로 촬영되어 있었다.
그 열악한 화질로 봐도 앳된 배송기사가 한 중년 남성의 앞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저거, 우리 유니폼이네.”
“네, 우리 기사예요.”
그렇게 말하는 순간, 무어라 기사를 윽박지르던 중년은 기사의 뺨을 냅다 후려쳤다.
그걸 보는 서원웅의 표정이 본능적으로 일그러졌다.
이미 한 번 봤던 대찬의 얼굴도 그랬다.
서원웅은 얼굴을 찡그린 채로 말했다.
“풀스윙이네.”
“저러고도 따귀 몇 번을 더 때리고 발길질까지 했어요.”
대찬은 어차피 더 봐봤자 기분만 상하는 동영상을 껐다.
서원웅은 미간을 잔뜩 좁혔다.
“왜 저러는 거야? 우리 쪽에서 원인제공 한 거야?”
“우리 탑차가 꾸물거리다가 접촉사고가 났대요. 때리는 사람이 사고 난 차주고요.”
“왜 꾸물거렸대? 배송하려면 속도가 생명인데.”
대찬은 보고서를 펼쳐서 사건이 벌어진 장소의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단독주택들이 많은 골목이었어요. 안 꾸물거리면 다른 차를 박을 수밖에 없어요. 재수 없으면 사람 박거나.”
“그러게. 가해자는 보니까 이 동네 사람인 거 같은데. 사정을 모르진 않을 텐데?”
“화가 뻗치는데 인정사정 봐줬겠습니까. 마침 만만한 택배기사니까 너 잘 걸렸다, 했겠죠.”
서원웅은 얼굴을 더 찡그렸다.
“우리 직원은 피해가 어느 정도 돼?”
“전치 5주 나왔답니다.”
“많이도 나왔네.”
“많이 나왔죠.”
“어린나이에 벌써 궂은 일 하는 거 보면 사정이 넉넉하지는 않을 테고, 합의해주겠대?”
대찬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쩔 수 없으니까.”
“이걸 지금 나한테 보고하려고 했다는 건, 이게 우리한테는 좋은 건수라는 거지?”
“맞은 사람이야 억울하고 답답하지만 대표님의 통 큰 배포와 아량을 보여줄 기회죠. 택배노동자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줄 기회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얘기를 나누는 중간, 서원웅의 비서가 안으로 들어왔다.
“대표님, 사모님께서 오셨는데요.”
홍승연을 의미했다.
“아, 지금 조 부장이랑 논의 중이니까 잠깐 밖에서 커피나 한 잔 하시면서…….”
서원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각또각, 홍승연의 구두소리가 대표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공식적인 회의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매몰차요.”
“그래도 업무 관련해서 논의 중이라.”
홍승연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어머, 나는 외부인이니까 나가있으라, 이 말이에요, 지금?”
“그건 아니에요.”
“그럼 여기 잠자코 앉아있을게요. 장 비서, 나 캐모마일 티 한 잔만.”
“캐모마일은 없고 녹차는 있는데, 드릴까요?”
홍승연은 입술을 비틀었다.
“그럼 그냥 냉수 줘요. 다음부터는 꼭 비치해놓고. 녹차가 뭐야, 노티 나게.”
‘그린티라고 했으면 노티 난단 소리 안 했을 거면서.’
대찬은 홍승연의 난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담을 나누는 자리라면 모를까, 어디까지나 업무 얘기를 나누던 자리였다.
시쳇말로 낄끼빠빠, 낄 데 끼고 빠질 데 빠져주는 센스를 탑재해주길 바랐다.
홍승연이 그걸 모르진 않을 터.
대표의 사모님이라면 이런 자리쯤이야 뭉개고 들어올 자격이 충분하다는 생각이 뿌리 깊다는 뜻이었다.
‘아, 암튼 나랑 상성 더럽게 안 맞네.’
대찬은 무표정한 채로 홍승연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홍승연을 대찬을 보며 웃었다.
“우리 조 부장님은 다른 사람들한텐 그렇게 싹싹하시다던데, 저한테는 인사 한번 안 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엎드려 절 받는 거 치고도 너무 건조하다.”
“제가 원래 이래요. 이해하세요.”
홍승연은 웃으면서 서원웅에게 말했다.
“근데 둘이서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요?”
“아, 사업 관련해서 이것 저것요.”
“이것저것 뭐요?”
서원웅은 최대한 점잖게 홍승연을 제지했다.
“일단 조 부장이랑 얘기 끝나고 따로 말해줄게요. 잠깐만 앉아계세요.”
“에이, 뭐야. 나 왕따예요?”
“왕따가 아니고…….”
서원웅이 부연하려는 사이, 홍승연이 탁자 위의 보고서를 날름 집어갔다.
“어? 나도 이 동영상 봤는데. 진짜 찰지게 때리던데요?”
“승연 씨.”
“우리 결혼한 게 언젠데 아직도 그렇게 딱딱하게 부를 거예요. 여보, 하기로 했잖아요, 여보.”
홍승연의 난입으로 순식간에 분위기가 난잡해졌다.
대찬은 따갑게 쏘아대고 싶은 심리를 서원웅을 생각해 꾹 참았다.
홍승연은 다리를 꼬고 보고서를 읽다가 대찬에게 물었다.
“이거 어떻게 처리하실 거예요?”
“사모님한테 보고드릴 의무는 없습니다.”
“와, 너무 쌀쌀맞으신 거 아니에요? 실망이네.”
대찬은 짧게 한숨을 토하고 말했다.
“실망하시면 안 되니까 말씀드릴게요. 가해자와 절대 합의 불가, 치료비 및 위로금 전액 회사에서 부담. 그걸 건의 드리려던 참입니다.”
“그래요? 이왕 잘해주는 거 유급휴가까지 주시지, 왜?”
대찬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우리 배송기사들은 개인사업자로 회사와 계약관계라 휴가를 줄 수가 없습니다. 정해진 급료가 없으니 유급이란 말도 쓸 수 없고요.”
“아, 그래요? 몰랐네.”
“네.”
대찬은 도대체 자신이 지금 왜 홍승연의 개인교사 노릇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 병문안 가서 사진도 찍어야겠네요. 우리 쪽 기자 보내줄게요.”
“마침 그것도 건의 드리려던 참입니다. 어쩌면 대표님께는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일지도 모르겠고요.”
그래도 명색이 언론사 핏줄이라고 이런 쪽으로 감각이 무디진 않다.
피해 배송기사에 대한 대우보다 사진이 중요하다.
환자복을 입고 병상에 누운 어린 배송기사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아주며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는 회사.
거기에 극동일보의 미사여구를 보태면 이보다 좋을 수 없다.
그 말에 서원웅이 대찬을 바라봤다.
“병문안 좋지. 조 부장이 가.”
“네? 제가요?”
대찬은 의아했다.
“내가 가고 극동일보가 찍으면 너무 티 나잖아?”
“티 좀 나면 어때요.”
“싫어. 어차피 나나 조 부장이나 비바체 얼굴인 건 매한가지인 걸, 뭐.”
서원웅은 떠넘긴다는 듯 말했지만, 배려이기도 했다.
자신이야 필래그룹의 핵심 계열사 대표다.
거기에 극동일보의 딸을 부인으로 뒀다.
언론이 고프지 않았다.
하지만 대찬이 아무리 윤이영의 후광을 입어 잠깐 떠들썩했다고는 해도 언론을 탈 일은 많지 않았다.
윤이영의 애인이 아니라 본업인 비즈니스맨의 자격으로서는 더욱 그랬다.
그러니 이런 흔치 않은 기회를 잡아 훈훈한 미담의 주인공이 돼라 배려해준 것이었다.
세 번 사양하는 건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을 때나 필요한 의식이었다.
이 정도의 건수에 세 번은 거추장스러웠다.
대찬은 더 거절하지 않고 서원웅의 제안을 받았다.
그런데 엉뚱한 홍승연이 볼멘소리를 했다.
“그래도 이런 건 대표가 가는 게 맞지 않나?”
“조 부장도 준 대표예요, 여보. 극동일보 기자한테 연락이나 넣어주세요.”
홍승연은 영 마뜩찮은 표정을 지으며 서원웅의 말을 들었다.
대찬은 서원웅에게 말했다.
“치료비 플러스 위로금은 제가 알아서 책정해도 괜찮겠죠?”
“응, 그런 쪽 계산은 조 부장이 확실하니까.”
“그럼, 저는 병원으로 바로 가보겠습니다. 사모님,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래요.”
대찬은 서원웅과 홍승연의 앞에서 물러나왔다.
홍승연은 서원웅에게 가볍게 타박했다.
“왜 죽 쒀서 개 줘요?”
“…대찬이가 개는 아니잖아요.”
“이건 딱 당신을 위해서 만들어놓은 판이었어요. 조 부장도 감히 안 탐내잖아요.”
“이쯤 해요.”
홍승연은 이쯤 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괜히 오지랖 넓게 굴려고 안 했는데, 지금까지 쭉 보니까 좀 심한 거 같아요.”
“심하다니?”
“저는 당신이 왜 그렇게 조 부장한테 목을 매는지 모르겠어요.”
서원웅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우리 관계를 잘 몰라서 그래요.”
“모르긴 몰라도 이렇게 목을 맬 정도는 아니라는 건 알겠어요.”
“여보.”
“솔직히 당신 없으면 조 부장 뭐 별 볼 일 있어요? 당신 없으면 이제 깔딱 대리나 됐을까 싶은데.”
“나도 대찬이 없었으면 비바체 대표는커녕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을 거라고요.”
홍승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