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79화
“저도 다르지 않아요. 쵸 회장의 열정만큼은 따라가기 어렵습니다.”
“그 사람이 클로빌에 거액을 들이밀었다고 했을 때, 단순히 돈 많은 사람이 복권 한 장 지르는 건 줄 알았지.”
“하지만 아니죠?”
서원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투루 돈을 쓰는 사람이 아니야. 이번 만남으로 확실히 알았어. 그 사람에게도 1조는 적은 돈이 아니야. 명운까진 아니더라도 상당한 부담을 감수한 거야.”
“맞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보면서 한참 고민했습니다. 왜 우리 회사가 아니라 클로빌에 그 거액을 찔렀을까.”
서원웅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거야 쵸 회장 본인이 말했잖아. 자기는 늙은 회사가 아니라 젊은 회사가 좋다고.”
“왜 젊은 회사를 좋아할까요?”
대찬의 물음에 서원웅은 즉답하지 못했다.
“어… 쥐고 흔들기 편해서? 1조로 클로빌은 쉽게 좌지우지하지만 우리를 그렇게 하지는 못하니까.”
“그것도 여러 가지 이유 중에 하나겠죠. 하지만 쵸 회장은 투자한 기업의 경영에 시시콜콜 관여하는 편은 아니라던데요.”
“하기야, 그 사람이 투자한 회사가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네.”
“그럼 왜 젊은 회사를 좋아할까? 우리가 노하우도, 인프라도, 자본도 우세한데.”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저도 생각해봤는데요. 딱 하나예요.”
“뭔데?”
“이과가 많아요, 저쪽에는.”
“뭐?”
예상하지 못한, 황당하게도 들리는 대답에 서원웅은 실소를 터트렸다.
하지만 대찬은 진심이었다.
“지금 우리 필래 비바체 경영진은 면면만 보면 그래도 나름 조합이 괜찮거든요?”
“그렇지. 고졸 생산직으로 시작해 상무까지 오른 옥 상무님이나, 도 전무도 사람이 좀 밉긴 해도 유통업계에서만 수십 년 구른 사람이고.”
“대표님은 전례 없이 젊고요.”
“그리고 그 대표를 움직이는 실질적 넘버 투도 마찬가지로 젊고.”
대찬은 피식 웃었다.
“그래요. 쓸데없는 말로 겸손 안 떨게요. 근데 공통점이 있어요.”
“다 문과라는 거지.”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존의 시스템에서는 기막히게 꾸려갈 진용이지만 유통혁신을 선도할 만한 재목들은 아니죠, 전부.”
“혁신이라면 네가 선도하고 있잖아? 우리, 몇 년 전만 해도 다 망해가는 점포 하나짜리 마트였어. 이렇게까지 큰 게 혁신이 아니고 뭐야.”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지금까지 그래왔지만 앞으로는 턱도 없어요. 지금부터는 알량한 아이디어로 승부가 안 될 거예요. 클로빌이 링 위에 올라온 이상 더더욱.”
“그럼 네 의견은 뭐야? 경영진에 이과를 추가하라?”
대찬은 상체를 살짝 숙이고 팔꿈치를 무릎에 갖다 대며 말했다.
“로튼 프룻츠가 배양육 사업을 시작하면서, 은오영 교수와 실리콘밸리에서 함께 일하던 인도 이민자 출신의 다르샨 싱을 CTO에 선임했어요.”
“CTO, 기술 총책임자란 거지.”
“네, 비바체에도 그 자리가 필요해요.”
“경영진에 이과가 없긴 하지만 우리도 나름의 기술인력은 갖추고 있어.”
“네, 제가 왜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해요.”
서원웅은 팔짱을 낀 채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취지는 알겠어.”
“관철해주셔야 합니다. 지금의 경영진으로는 혁신의 물결을 이끌기는커녕 휩쓸려나갈 겁니다.”
서원웅은 웃음을 머금었다.
“네 말대로 하면, 혁신경영팀의 입지가 줄어들 수도 있어.”
“네?”
“네 말을 뒤집으면 CTO를 선임해서 혁신의 물결을 이끌라는 거잖아? CTO가 혁신의 기수가 되면 당연히 혁신경영팀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그 말에 대찬은 웃었다.
“그건 사소한 일이에요.”
“사소하지 않아. 혁신도 좋지만 회사 내부의 질서와 인화도 중요하니까. CTO는 굴러온 돌이잖아. 그쪽에 대뜸 큰 힘을 쥐여 주면 박힌 돌들의 불만이 없을 수가 없어.”
“네, 당연하죠. 그걸 조정하라고 대표님이 계신 거잖아요.”
“…그렇기야 하지만.”
대찬은 미소를 머금었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나요. 장 담그고 구더기는 건져내면 됩니다.”
“내 입으로 너를 구더기라고 부르게 될까봐 그게 겁나서 그래.”
“별 게 다 겁나십니다. 제가 나중에 회사에 걸림돌이 되면, 그래서 정말 구더기나 다름없게 되면 그렇게 하셔야죠. 구더기를 구더기라고 부르지 뭐라고 불러요?”
서원웅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내가 어떻게 그래, 너한테.”
“그렇게 안 되도록 저도 뼈를 깎을 겁니다. 제가 쥐고 있는 한 줌 권력 부스러기 때문에 회사에 걸림돌이 될 거 같아요?”
“그건 아니지만.”
“참 나, 요즘 좀 대범해지셨다 했더니 여태 이렇게 세심하셔.”
대찬은 가볍게 웃어넘겼다.
하지만 저런 서원웅의 조심스러움도 굉장한 강점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모름지기 이만한 기업을 경영하려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다각적으로 뜯어볼 줄 알아야 한다.
젊은 경영인, 그것도 거푸 성공을 거둔 젊은 경영인의 가장 큰 적은 자신이다.
연이은 성공은 자신감을 부른다.
자신감은 땔감이 되어 젊은 경영인의 피를 덥힌다.
더운 피는 열정이지만 끓는 피는 폭주를 부른다.
젊은 경영인은 결국 폭주하는 스스로에게 잡아먹힌다.
그렇기에 서원웅의 저런 세심하고 신중한 성격은 폭주를 방지할 가장 훌륭한 제방이었다.
물론 과유불급이기는 하지만.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사람만 잘 데려오시면 됩니다. 머리에 든 게 많다고 전부가 아니에요. 지식과 감각이 잘 버무려진 인물을 데려오세요.”
서원웅은 대찬을 빤히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원웅은 속전속결로 CTO를 모셔오지 않았다.
굼뜨지만 세심하게 따졌다.
그는 대찬의 제안을 무겁게 받아들였다.
서원웅은 가동할 수 있는 모든 채널을 가동해서 인재를 수소문했다.
그렇게 후보를 추리고, 경력 뒤에 숨은 진면목을 알아내고자 무수한 사람들의 의견을 구했다.
대찬 역시 성심껏 서원웅의 자문에 응했다.
하지만 서원웅을 꼭두각시 삼아 자신의 뜻대로 이끌지는 않았다.
“저는 기술에 있어 문외한이고, 대표님의 여러 자문역 중에 하나일 뿐이에요. 제 의견을 이유 없이 묵살해서도 안 되지만, 필요 이상으로 무겁게 들을 필요도 없어요.”
“알았어.”
그렇게 오래 고심한 끝에 서원웅은 결정을 내렸다.
그의 결정은 생각보다 파격적이었다.
일단 국적부터 한국이 아니었다.
미국 출신의 백인이었다.
나이도 40대로, 임원급에 선임되는 나이 치고는 매우 젊었다.
마크 콜먼(Mark Coleman).
금발 곱슬머리, 크고 깡마른 체구, 움푹 들어간 눈과 그에 반비례해서 치솟은 콧대.
전형적인 백인이었다.
서원웅은 대찬에게, 그들의 미네소타 교환학생 시절 교분을 맺었던 유진 깁슨을 통해 접선한 사람이라고 귀띔했다.
실리콘밸리에서 물류관련 스타트업을 창업해 2천만 불에 매각한 경험이 있는 인재라고 서원웅은 설명했다.
서원웅은 제법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하고 그를 한국으로 모셔왔다.
마크 콜먼은 짧게 취임사를 했다.
“저는 항상 새로운 도전을 즐깁니다. 한국에서의, 필래에서의 업무도 즐기겠습니다. 잘 지냅시다.”
그의 짧은 취임사에 임직원은 박수를 보냈다.
영어가 짧은 이들을 위해 마크 콜먼의 전담 통역사가 짧은 취임사를 통역해주었다.
마크 콜먼은 임직원들과 차례차례 악수를 나눴다.
영어에 유독 약한 옥문영 상무의 인사말은 짧았다.
“나이스 투 미츄! 두 유얼 베스트!”
마크 콜먼은 하하 웃으며 옥문영 상무의 솥뚜껑 같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는 대찬에게도 손을 뻗었다.
“CTO를 선임하라고 조언했다고, 서 대표님이 그러시더군요. 덕분에 취직했습니다.”
“별 말씀을요. 낯선 나라로 오겠다는 결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 결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퇴근 후에 많이 심심할 겁니다. 자주 놀아주세요.”
대찬은 씩 웃었다.
“물론입니다.”
마크 콜먼은 전무급의 대우를 받았다.
보직은 기술경영본부장이었다.
마크 콜먼의 등장은 필래 비바체 임직원들에게 작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람은 합리적인 동물이라고 자신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감의 자극에 더 기민하게 반응한다.
다른 동물에 비하면 훨씬 합리적이지만 사람도 결국은 동물인 까닭이었다.
금발, 흰 피부, 파란 눈.
마크 콜먼의 외모는 직원들에게 회사가 진화하고 있다는 걸 직관적으로 일러주었다.
아마 맥도날드에서 햄버거 패티를 굽던 외국인을 CTO로 모셔 와도 직원들은 마찬가지의 충격을 느꼈을 것이다.
일반 직원들은 그와 경쟁할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위기의식은 느끼지 않았다.
다만 회사가 역동적으로 꿈틀거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도진석 전무, 그리고 옥문영 상무까지 그의 등장을 썩 반기지만은 않았다.
웬 젊은 코쟁이가 난입해서 자기랑 어깨를 나란히 해버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들의 반응에는 관계없이, 서원웅은 마크 콜먼을 중심으로 경쟁업체를 누를 만한 기술혁신을 이뤄내겠다고 천명했다.
마크 콜먼은 등장만으로도 업계에 파장을 낳았다.
대찬은 비바체의 움직임에 묘한 웃음을 띠는 쵸 후쿠히로의 얼굴을 상상했다.
마크 콜먼은 여유 부리지 않고 바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했다.
기업을 직접 일군 경험이 있으니 주도적이고 진취적이었다.
축적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최적의 경로를 탐색하는 기술에 대한 연구에 우선적으로 착수하기로 했다.
장기연구과제와는 별도로 현장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편리한 기술을 우선적으로 도입하기로 했다.
마크 콜먼이 수장으로 임명된 기술경영본부에는 그를 제외하고도 해외의 여러 엔지니어들이 새로 들어왔다.
내국인 엔지니어들의 채용도 그것보다 배 이상 이뤄졌다.
서원웅의 선택은 일단 호평을 받았다.
마크 콜먼은 기대하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만의 영역을 분명히 찾아냈다.
기술전문가로서의 영역과, 외국인으로서의 영역이었다.
그는 기술전문가로서 기술에 어두운 경영진이 제시하지 못한 바를 자신 있게 주장했다.
여태 필래 비바체에 기술자가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위에서 물으면 OX로 대답할 순 있어도, 경영의 물줄기를 바꿀 만한 굵직한 주관식 답안은 제출하기 어려웠다.
괜한 소릴 한다며 쏘아대는 윗선의 눈총을 견딜 위치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크 콜먼은 그 윗선과 동격이거나 오히려 직급이 더 높았다.
그러니 그는 아무 거리낌 없이 전문용어로 점철된 주장을 서원웅 이하 경영진에 펼칠 수 있었다.
외국인 임원이라는 점도 비바체의 조직문화에 좋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한국의 뿌리 깊은 유교식 서열주의와 군대식 업무처리구조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없었다.
그렇기에 암묵적으로 처리되던 것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why?,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 why, 소리를 들을 때면 부하직원들은 설명하기가 어려워 곤란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마크 콜먼의 합류로 필래 비바체의 경영진은 젊은이, 고졸, 외국인이라는, 드문 구성을 갖추게 되었다.
대찬은 서원웅과 둘이 있는 자리에서 말했다.
“대표님이 사람 보는 눈은 있으신가 봐요. 콜먼 본부장님, 잘 뽑으신 거 같아요.”
“그렇지? 확실히 공돌이 뇌구조는 우리랑 다른 거 같아.”
대찬은 하하 웃었다.
“콜먼 본부장님이 공돌이도 그냥 공돌이가 아니시니까. 스탠퍼드 출신이잖아요?”
“그렇지, 그렇지.”
대찬과 서원웅은 편하게 웃었다.
대찬이 CTO의 선임을 강도 높게 주장한 이유가 또 있었다.
회사의 미래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서원웅의 미래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서원웅은 ‘본 투 비’ 재벌이 아니었다.
대찬이 앞에서 끌어줬든 뒤에서 밀어줬든 밑바닥에서 정상을 향해 기어 올라왔다.
사람을 다룬다는 건 한 가지 속성만을 띠지 않는다.
알맞은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도 사람을 다루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사람들의 끝없는 욕망을 제어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사리사욕을 채우고 권력까지 넘보는, 종내 제 주인의 손까지 물려고 드는 인간들을 제어하는 것.
서원웅은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며 알맞은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법은 배웠다.
하지만 구린내 나고 치사하고 비열한 사람들의 욕망을 갖고 노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서원웅이 더 높은 곳에 올라가면, 분명히 위세를 부리려는 자들이 등장할 것이다.
그들을 제어하려면 대체재가 필요했다.
이승만은 광복 후에도 친일경찰을 기용했다.
그들을 대체할 전문인력이 없다는 게 단골 핑계였다.
조선의 숙종은 조선 건국 이래 가장 왕권이 강했던 군주로 평가받는다.
그의 왕권은 대체재의 존재에 기인한다.
한번은 노론을 때려잡고, 한번은 소론을 때려잡아 쑥대밭으로 만드는 이른바 환국을 일으켜 정국을 주물렀다.
노론과 소론이 서로의 대체재로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서원웅이 숙종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랫사람에게 휘둘려 권력이 좀먹힌다든지 싫은 인간을 울며 겨자 먹기로 기용하지 않으려면, 서원웅이 직접 발탁한 사람들이 필요했다.
마크 콜먼은 서원웅의 오른손에 쥐어질 대체재로 차고 넘치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