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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78화 (277/556)

난 할 수 있어 278화

서원웅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맞습니다. 쵸 후쿠히로 회장님이시죠.”

“예, 한국마르로는 장보쿠광입니다. 그쪽이 훠르씬 익숙하시죠.”

“하하, 훨씬 친근하긴 합니다. 편하시면 영어로 말씀하셔도 됩니다.”

쵸 후쿠히로는 눈웃음을 지으며 영어로 말했다.

“뵙고 싶었는데 오늘 기회가 닿았군요. 반갑습니다.”

“쵸 회장님의 명성은 세계적으로 대단한데, 저 같은 걸 뵙고 싶어 하셨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쵸 후쿠히로는 너털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너무 겸손하시군요. 지금 서 대표님 덕분에 요즘 괜히 한국 시장에 끼어들었나 하고 후회가 막심한데요.”

그는 그런 말을 클로빌의 주요 인사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했다.

그건 서원웅에게 건네는 말이라기보다는 도리어 그들에게 건네는 말이었다.

계속 안일한 상태라면 언제든지 투자를 중단할 수 있다는 제법 냉혹한 경고였다.

클로빌의 주요 인사들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경직되었다.

서원웅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말했다.

“쵸 회장님께서 굴리는 돈이 천억 달러에 달한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회장님에 비하면 저는 그야말로 피라미인데, 저 때문에 후회하실 이유는 없습니다.”

“천억 달러가 다 제 돈인 것도 아니고, 스텝이 한번 꼬이면 자칫 도미노처럼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으니까.”

“그거야말로 너무 겸손하신 말씀입니다.”

쵸 후쿠히로는 흐흐 웃었다.

“하지만 지금 필래의 행보에 우리가 조금 당혹스러운 건 사실이에요. 어떻게 내가 돈을 집어넣자마자 이럴 수가 있어?”

“하하, 저희가 뭐 어쨌다고…….”

“우릴 봐도 코웃음치고 취급도 안 해줘야 정상적인 한국 대기업 아닙니까.”

“아, 저희 회사에 후각이 예민한 탐지견이 있어서.”

서원웅은 그렇게 말해놓고 아차, 하며 대찬을 바라봤다.

“미안, 칭찬인데 졸지에 개 취급 해버렸네.”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조대찬이 서원웅 충견 취급 받은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입니까.”

“어, 뭐야. 지금 빈정 상한 거?”

“억측은 마시고요. 쵸 회장님과의 대화에 집중하시죠.”

잠깐의 승강이를 벌이는 둘을 보고 쵸 후쿠히로는 빙긋 웃었다.

“두 분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은 듯하군요.”

“회사에서의 관계에 앞서서 가장 친한 친구입니다.”

대찬은 탐지견으로 병 주고 가장 친한 친구로 약 주는 서원웅이 밉지 않아 미소를 지었다.

쵸 후쿠히로는 서원웅과 대찬을 번갈아보다가 말했다.

“그런데 말씀을 들어보니 여기 계신 분이 필래의 민첩한 움직임에 영향을 주신 거 같은데.”

“맞습니다. 혁신경영팀장으로 있는 조대찬 부장입니다.”

“오호, 그렇군요.”

쵸 후쿠히로는 마치 몸매가 완벽한 모델을 발견한 디자이너의 표정으로 대찬을 위아래로 훑었다.

대찬은 그 눈빛을 느끼면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쵸 후쿠히로는 대찬을 보며 말했다.

“저에게는 참 얄미운 분이시군요.”

“저한테는 회장님이 얄미우십니다. 생태계 교란종이시니까요.”

대찬이 그대로 응수하자 쵸 후쿠히로는 고개를 살짝 젖히고 웃었다.

“틀린 말씀은 아니군요. 그런데 왜 우리에게 그런 과민반응을 보이시는 겁니까?”

“하하, 1분 1초가 귀한 회장님께서 이렇게 저희를 붙들고 계신 것만으로도 저희 조치가 과민반응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얄밉네요, 얄미워.”

“회장님께서 훌륭한 안목을 지니셨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 분이 조 단위의 돈을 허투루 뿌리셨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네, 클로빌은 그럴 가치가 있는 회삽니다.”

“저희로서는 회장님께서 클로빌에 더 그럴 가치를 느끼지 못하도록 몰아붙이는 게 손실을 최소화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찬의 말에 클로빌 사람들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일개 부장이 면전에서 멋대로 지껄이고 있으니 속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대찬이 경쟁자인 그들의 심기를 감안해줄 이유가 없었다.

“필래 비바체의 한 발 앞선 혁신은 저도 흥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 자란 회사에는 투자하지 않는 스타일이라.”

“알고 있습니다.”

“음, 그래도 필래 비바체가 보여준 일련의 혁신은 한국의 늙은 대기업답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서원웅이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간판은 필래지만 저희 비바체는 맨땅에 일군 신생기업이나 다름이 없으니까요.”

“그렇군요.”

쵸 후쿠히로는 손목시계를 흘끔 보고는 말했다.

“마침 식사시간인데, 같이 식사라도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말에 클로빌 사람들은 당혹했다.

대찬의 말마따나 1분 1초가 귀한 쵸 후쿠히로였다.

그런 그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클로빌의 최대 경쟁자의 대표에게 식사제의를 하다니.

신경이 안 쓰일래야 안 쓰일 수가 없었다.

쵸 후쿠히로는 그런 그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러분은 여기에서 다른 경영자들과 많이 접촉하십시오. 모두가 잠재적 경쟁자들이지만 안면을 터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

“아, 네……. 알겠습니다.”

클로빌 사람들은 씁쓸했지만 절대적인 갑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쵸 후쿠히로는 리셉션이 열리는 호텔의 라운지에 위치한 레스토랑으로 대찬과 서원웅을 이끌었다.

호시탐탐 쵸 후쿠히로와 말 한 마디 섞어보려던 다른 이들은 졸지에 닭 쫓던 개가 되었다.

그 개들 중 하나가 된 차재원 대표는 대찬의 뒷모습을 보고 툴툴거렸다.

“저 자식은 도통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니까.”

그는 마냥 불쾌하지만은 않은 표정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들과 마주앉은 쵸 후쿠히로는 와인 한 모금을 마시고 말했다.

“앞으로의 혁신은 어떻게 진행될지, 힌트라도 못 줍니까?”

“저희가 드리면, 회장님도 주시겠습니까?”

쵸 후쿠히로는 빙긋 웃었다.

“나는 경영일선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일개 투자자에 불과해서 잘 몰라요.”

“아무도 안 믿을 말씀을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하십니까.”

“하하.”

서원웅은 대찬을 잠깐 보고 얘기했다.

“회장님의 말씀대로 필래는 늙은 기업이라 회장님의 관심을 끌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 조 팀장이 말입니다.”

“음?”

“우리 회사의 팀장인 동시에 한 사업체의 수장이기도 하거든요.”

쵸 후쿠히로는 대찬을 흘끔 바라보며 웃었다.

“오호, 그렇습니까.”

“워낙 어린 기업들을 좋아라 하시니, 혹시 그 회사가 회장님의 관심을 끌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리다고 마냥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그만 한 비전이 담보가 돼있어야죠.”

“물론 그렇습니다만.”

서원웅은 웃으면서 공을 대찬에게 넘겼다.

대찬은 쑥스럽게 웃었다.

“변변찮은 회사라 회장님께서 관심을 두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건 제가 결정할 일이죠. 지레 체면부터 차리시는군요. 경영자답지 않은 태돈데. 몇 마디 말로 내 쌈짓돈을 받아갈 수도 있는 기회 아닙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쵸 후쿠히로는 손을 앞으로 모으며 물었다.

“말해보세요. 뭐 하는 회삽니까?”

“커피 원두를 수입해 한국에 유통하는 회사입니다. 중국 쪽 판로도 뚫고 있고요.”

“아……?”

쵸 후쿠히로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상상한 것보다도 기대에 못 미쳤다.

그래도 젊은 기업이라기에 현실성은 없어도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세운 정도는 기대했다.

그런데 천하에 널리고 널린 무역회사라니.

쵸 후쿠히로는 그 순간부터 시간이 아까워졌다.

대찬 역시 그의 살짝 일그러지는 안면근육을 감지했다.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원두 무역으로 시드머니(종잣돈)를 확보해서 배양육 사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오, 실험실에서 기르는 고기 말이죠.”

쵸 후쿠히로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래, 이쯤은 되어야지!

그의 얼굴에는 일종의 안도감마저 비쳤다.

그가 기껏 시간을 낸 데는 서원웅과 대찬의 첫인상이 긍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기껏 뚜껑을 따보니 그저 그런 어중이떠중이였다면 쵸 후쿠히로는 그들에게 실망하기에 앞서 자신의 안목에 먼저 실망했을 터였다.

그는 안목이 자신을 배신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가장 먼저 안도했다.

쵸 후쿠히로는 더 흥미가 동한 목소리로 물었다.

“배양육 사업이 쉬운 길은 아닐 텐데요. 특히 한국에서 하기에는.”

“네, 대체로 실리콘밸리에서 선도하고 있고, 네덜란드와 이스라엘 등지에서만 제한적으로 연구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쵸 후쿠히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한국은 불모지나 다름없는데 용기가 대단합니다.”

“용기라고 해야 할지, 만용이라고 해야 할지.”

대찬이 웃으면서 말하자, 쵸 후쿠히로는 다소 정색했다.

“그건 결과가 증명할 겁니다. 성공하면 용기, 실패하면 만용.”

“쿠데타와 똑같군요. 성공한 쿠데타는 쿠데타가 아니다.”

“조 부장, 아니 조 사장님의 용기를 그런 저속한 단어에 빗대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하.”

쵸 후쿠히로는 몸을 대찬 쪽으로 살짝 틀었다.

그는 서원웅에게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서원웅도 그의 편애를 이해했다.

서원웅은 용기보다는 쿠데타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서원웅이 빠르게 성공할 수 있는 길은, 용기를 발휘해 혁신으로 성공하는 게 아니었다.

쿠데타를 성공시켜 필래의 정통을 잇는 것이었다.

그런 집안싸움에 쵸 후쿠히로가 무관심한 건 당연했다.

쵸 후쿠히로는 대찬에게 말했다.

“하고 많은 사업 중에 배양육을 시도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보아하니 그쪽을 전공한 것 같지도 않은데. 학자의 눈빛이 아니에요.”

“네, 저는 그쪽에 까막눈입니다.”

“그런데 왜.”

“모든 후발주자들의 전략과 같습니다. 그쪽은 블루오션이니까요.”

“블루오션은 다른 말로 망망대해입니다. 확실한 비전과 기술이 없으면 그대로 표류하거나 침몰하는 수밖에 없는데.”

“실은 알고 보니 바다가 아니라 구정물일 수도 있고요.”

쵸 후쿠히로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저는 배양육이 미래의 핵심산업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필연이니까요. 그런 와중에 제 이상을 구현할 기술자를 얻었습니다.”

“그 기술자가 정말 기술자일지, 사이비일지 알 수 없잖습니까.”

대찬은 살짝 웃었다.

“회장님의 유명한 격언도 제 결정에 영향을 미쳤죠.”

“음?”

“승률이 90%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건 너무 늦다. 70%가 됐을 때 목숨을 걸고 달려들어야 한다.”

“하하, 이거 제 보잘 것 없는 말이 조 사장의 결정을 도왔다니 부끄럽군요.”

“보잘 것 없는 말씀이었다면 기억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저는 그 말씀대로, 70%에 걸었습니다.”

“음.”

“그리고 목숨 걸고 달려드는 중입니다.”

대찬의 말에 쵸 후쿠히로는 소리 내어 웃었다.

“재밌군요. 앞으로 주시하겠습니다, 조 사장의 행보를.”

“너무 빤히 보지는 말아주십시오. 남이 보면 잘하던 것도 못하는, 그런 소심한 사람들이 있잖습니까.”

“최소한 조 사장은 그런 부류는 아닌 거 같은데.”

그 말에 서원웅이 대찬 대신 말했다.

“네, 절대 아닙니다. 남이 보면 더 잘하는 부류거든요.”

“허.”

대찬은 기막힌 듯 헛웃음을 터트렸고, 쵸 후쿠히로와 서원웅은 그런 대찬을 보고 쾌활하게 웃었다.

쵸 후쿠히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서원웅과 가볍게 악수하고 대찬에게도 손을 뻗었다.

대찬도 기분 좋게 손을 맞잡았다.

쵸 후쿠히로는 대찬의 손을 잡은 채로 말했다.

“일본 속담에 이런 말이 있어요. 도깨비가 나올까 부처님이 나올까.”

“들어봤습니다.”

쵸 후쿠히로는 빙그레 웃었다.

“다음번에 만날 때, 조 사장은 나에게 도깨비일지 부처님일지 궁금해지는군요.”

“저도 그렇습니다. 부디 다음번의 회장님은 부처님이길 빕니다.”

“나도 그래요.”

셋은 웃으면서 헤어졌다.

쵸 후쿠히로가 나중에 대찬의 우군이 될지도 모르지만 당장은 적군이었다.

적군에 군자금을 대주는 큰손이었다.

대찬은 쵸 후쿠히로가 클로빌에서 하루 빨리 손을 털기를 기도했다.

또 그렇게 되도록 가능한 모든 힘을 동원해 클로빌의 목을 조를 작정이었다.

한국의 유통업계는 그렇지 않아도 이런저런 기업들로 북적였다.

클로빌과 나눠 먹을 파이는 없었다.

어줍지 않은 자비는 기실 그들의 존재를 애써 인식하지 않으려는 게으름일 뿐이었다.

대찬은 철저히 부지런해지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서원웅과 면담했다.

“쵸 후쿠히로 회장과는 잠깐 만났지만,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

“동감이야. 우리보다 나이는 많지만 우리보다 감각이 확실히 젊어. 아, 잘못 말했네. 우리가 아니라 나보다.”

대찬은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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