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77화
그의 의견을 채택하면 서원웅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대찬의 견해를 채택하면 자금조달이나 사업추진에 있어 더 큰 부담을 짊어져야 했다.
서원웅은 의자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그리고 대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이 건은 도 전무님 방식대로 대응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대찬은 서원웅의 판단을 이해했다.
도리어 그쪽이 상식적이었다.
어차피 시가총액이 아직 4조에 불과한 필래 비바체가 아예 체질을 바꿀 정도의 혁신을 단기간에 이룩할 수 있다고는 대찬도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미 벌려놓은 사업만 해도 상당한 자금이 들어가는 것들이었다.
필드 업만 해도 조 단위의 자금이 투입되고 있었다.
필래 비바체는 이미 폭발적인 성장 후, 숨을 고르며 다음 도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비바체를 이끌고 있는 서원웅이니, 대찬의 제언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대찬은 크게 낙담하지 않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커머스 분야에서의 역량강화에 조금만 더 박차를 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서원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이번 이사회에서 우리사주를 추가로 배정하는 안도 고려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게 유상증자를 해서 조달된 자금을 이커머스 분야의 역량강화에 투자해라?”
“맞습니다.”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제안에 도진석 전무가 이죽거렸다.
“지금 너무 노골적으로 사익추구를 하는 건 아닌가?”
“사익추구라뇨.”
대찬은 표정을 굳혔다.
회사의 미래를 의논하면서 갑론을박이 오가는 건 바람직한 일이고, 대찬도 감정이 상하진 않았다.
그런데 이런 음해성 인신공격에는 화가 치밀 수밖에 없었다.
도진석 전무는 계속 대찬을 건드렸다.
“지금 우리사주조합장으로서 사내 입지를 늘리려고 우리사주를 추가로 배정하라고 하는 거 아닌가?”
“억측은 삼가주십시오.”
“이런 경우는 보통 억측보다는 합리적 의심이라고 하지?”
대찬은 그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감정적으로 나가봤자 득 될 게 없었다.
여기서 대찬도 덩달아 언성을 높였다가는, 말싸움의 중심이 시시비비에서 싸가지가 있네, 없네로 바뀐다.
이 싸가지 다툼에서 20년은 더 연하인 대찬이 절대적으로 불리함은 당연했다.
그런데 이 상황이 못내 짜증나는 건 비단 대찬뿐만이 아니었다.
대찬과 도진석 전무의 입씨름을 지켜보고 있던 옥문영 상무가 입을 열었다.
“도 전무님이야말로 사적 감정 때문에 괜한 분풀이하지 마세요.”
“뭐야? 분풀이?”
도진석 전무는 옥문영 상무를 향해 도끼눈을 부릅떴다.
그런 위압에 눈 하나라도 깜짝할 그녀가 아니었다.
“전무님 저번에 우리사주조합장 선거 조 부장한테 밀려서 떨어졌잖아요.”
“그 얘기가 지금 왜 나와!”
“이것도 뭐, 합리적 의심 아닙니까.”
“옥 상무! 말 좀 가려서 해!”
발성에 있어서는 도진석 전무보다 옥문영 상무가 한 수 위였다.
도진석 전무가 언성을 높였을 때, 대찬은 가만히 있었지만 옥문영 상무는 가만히 참고 들어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 눈을 부릅뜨고 드럼통 같은 덩치에서 복식호흡으로 맞받아쳤다.
“도 전무님이나 말을 가려서 하십시오!”
“이, 이런 건방진……!”
“우리사주를 추가로 배정하는 게 그르다고 생각하시면, 그걸로 발생할 문제를 지적하시면 됩니다. 왜 인신공격을 하십니까?”
“내, 내가 언제 또 인신공격을 했다고 이러는 거야, 지금?”
“가슴에 손을 얹고 아니라고 하실 수 있어요?”
“조 부장이 우리사주조합장으로서 본인의 권한에 직접적으로 유리한 건의를 해서 정당한 지적을 했을 뿐이야!”
“우리사주 지분이 늘어난다고 조 부장 지갑이 두꺼워지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사익추구가 됩니까?”
옥문영 상무가 조금도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도진석 전무는 서원웅에게 흘끗 눈빛을 보냈다.
서원웅은 웃으면서 둘을 다독였다.
“자, 그만들 하세요. 얼굴 붉혀서 좋을 게 뭐 있습니까.”
“…….”
도진석 전무와 옥문영 상무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채로 서로 다른 곳을 바라봤다.
서원웅은 대찬을 보며 말했다.
“유상증자는 예상돼 있었어요. 우리사주를 추가로 배정하면, 임직원들이 기꺼이 청약을 넣어줄까?”
“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처음으로 청약을 시작했을 땐 긴가민가해서 다들 망설였거든요.”
“그랬지. 그럼에도 적지 않은 직원들이 청약을 넣었지만.”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 망설이던 직원들도 추가로 배정을 한다고 하면 부리나케 청약을 넣을 겁니다. 주변에 재미 좀 본 직원들 때문에 배가 아프거든요.”
그 말에 대찬과 서원웅은 점잖게 웃었다.
“좋아. 그럼 빠른 시일 내에 우리사주를 추가로 배정하는 안을 이사회에서 논의 후, 통과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도진석 전무는 대찬에게 눈을 흘겼지만, 대찬은 일일이 그 시선을 받아주지 않았다.
서원웅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유상증자를 서둘렀다.
우리사주가 추가로 배정되었다.
대찬의 예상대로 추가로 배정된 우리사주에 청약을 넣으려는 임직원들의 열기는 뜨거웠다.
필래 비바체의 성장세는 뚜렷했다.
게다가 첫 번째 배정 때 우리사주를 사들였던 임직원들은 쏠쏠한 재미를 보던 차였다.
처음 배정 때는 100억 원 어치만 시범적으로 청약을 실시했다.
하지만 두 번째는 과감하게 지분을 확 늘렸다.
첫 번째보다 열 배 늘린 천억 원을 배정했다.
그 결정을 제안한 건 대찬이었다.
서원웅은 그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했다.
“그게 다 팔릴까? 청약이 미진하면 주가에도 영향이 미칠 거야.”
“걱정하지 마세요. 충분히 됩니다.”
대찬은 소위 완판을 자신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이 무색해지지 않게, 두 번째 우리사주는 모두 팔렸다.
1차 청약에서는 발행한 주식의 75퍼센트만 팔렸지만, 이어진 추가 청약에서는 도리어 남은 주식을 훨씬 상회하는 청약이 몰려 깔끔하게 모두 팔아치웠다.
필래 비바체의 우리사주조합은 기존의 0.25퍼센트에서 3퍼센트에 가까운 지분을 보유하게 되었다.
3퍼센트라면 대주주라고 부르기에 아무런 손색이 없었다.
회사의 경영에 깊숙이 개입할 수 있는 정도의 지분이었다.
필래 비바체에서 우리사주조합보다 많은 지분을 가진 세력은 많지 않았다.
지주회사로서 상당한 지분을 확보한 필래지주를 제외하고는, 우리사주조합이 손 뻗으면 닿을 정도의 대주주들뿐이었다.
그러니 우리사주조합장인 대찬은 필래 비바체에서 한 손에 꼽히는 대주주로서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이쯤 되니 사익추구 어쩌고 하던 도진석 전무의 심술이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대찬은 대주주로서 위세를 떨치니 뭐니 하는 사업에는 아직 관심이 없었다.
필래 비바체의 경영진은 쵸 후쿠히로와 클로빌의 합작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주 방관할 정도는 아니지만 비상한 대책을 꾸려야 될 정도도 아니라고 여겼다.
이를 테면 호우주의보가 내려져 밖에 걸어놓은 빨래를 걷어야겠다고 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대찬이 느끼는 쵸 후쿠히로와 클로빌은 호우주의보가 아니라 태풍경보였다.
미리 빨래를 걷어놓는 것은 물론, 유리창에 신문지도 붙여놔야 견뎌낼 수 있다.
쵸 후쿠히로와 클로빌이 태풍보다 무서운 건, 태풍은 금방 휩쓸고 지나가 소멸해버리지만 클로빌은 그렇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클로빌의 목표는 필래 비바체를 위시한 기존의 한국 유통대기업들을 몰아내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 독과점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대찬은 이커머스 분야의 역량강화에 깊숙이 개입했다.
관련 부서와 빈번하게 회의를 열었다.
대찬은 관련 부서와의 회의에서 말했다.
“우리가 실시하고 있는 새벽배송의 가장 큰 장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경쟁업체에 비해 빨리 배송하는 것 그 자체가 장점 아니겠습니까.”
대찬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하지만 모든 상품을 무리를 해서까지 새벽에 배송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새벽에 배송하는 만큼 빛을 발하는 상품들이 있죠.”
대찬이 여기까지 말하자 직원도 말하는 바를 알아챘다.
“신선식품을 말씀하시는 거죠.”
“네, 맞습니다. 고객들은 다른 제품은 손쉽게 온라인으로 구매하지만 신선식품의 구매율은 현저히 떨어집니다.”
“제품의 질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이죠.”
“네, 배송이 지연될수록 그 신뢰는 더 떨어지고요.”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벽배송을 앞서 실시하는 우리는 신선식품 판매에 있어 상당한 강점을 지니고 있는 겁니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대찬은 그 직원 쪽으로 살짝 몸을 더 기울였다.
“우리는 이걸 전면에 내세울 겁니다.”
“알겠습니다. 마케팅팀과도 협의해서, 여기에 주안점을 둔 광고기획안을 올리겠습니다.”
“네, 그리고 설비 부분에서도 신경을 써주셔야 합니다.”
“네? 설비라면…….”
“콜드체인시스템을 본격적으로 도입했으면 합니다.”
“아.”
콜드체인시스템은 우리말로 풀면 저온유통이었다.
신선식품의 품질을 가장 신선하게 유지한 채로 배송하기 위해서 콜드체인시스템은 필수였다.
물론 식품을 배송하는 데 흔한 냉동탑차 하나 안 쓰는 업체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대찬이 원하는 건 단순히 차가운 상태로 배송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대표님께서는 이번 유상증자로 확보된 자금의 상당부분을 이커머스 분야의 역량강화에 투자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신선식품의 구매율을 끌어올려야 우리가 실시하는 새벽배송의 이점을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직원은 웃으면서 대찬의 쿵짝을 맞춰주었다.
“적극적인 기술개발을 도모해보겠습니다.”
“네, 자체개발도 좋고, 협력업체를 발굴해 제휴하는 것도 좋습니다. 모쪼록 확실한 방법을 찾아주세요.”
지금껏 대찬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해 직접 발로 뛰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현장에서 비지땀을 흘리지 않아도, 그의 생각을 구현해줄 충분한 손발이 갖춰져 있었다.
대찬은 흐뭇하게 웃었다.
더 발전된 콜드체인시스템을 확충해서 신선식품의 구매율을 끌어올리는 동시에 새벽배송의 이점을 소비자에게 더 강하게 어필했다.
이건 쵸 후쿠히로와 클로빌을 향한 필래 비바체의 포효였다.
여기는 내가 꽉 잡고 있으니 언감생심 노리지 말라는 경고의 포효였다.
필래 비바체는 콜드체인시스템의 강화로 신선식품의 질을 극도로 끌어올리는 한편, 여러 방면으로 동시에 혁신을 진행했다.
흡사 의자 뺏기 게임이었다.
사람 수보다 적은 의자를 갖다놓고, 그 주위를 빙빙 돌다가 딱 시간이 됐을 때 남을 밀쳐내고 의자를 차지하는 게임.
대찬, 그리고 필래 비바체는 엉덩이가 펑퍼짐하고 우악스러운 아줌마였다.
쵸 후쿠히로와 클로비가 들이미는 연약한 궁둥이를 그 우악스러운 궁둥이로 쳐냈다.
그러니 의자 뺏기 게임의 우악스러운 궁둥이였고, 축구로 치자면 이탈리아의 빗장수비였다.
쵸 후쿠히로가 1조를 붓든, 2조를 붓든 얼마를 붓든 소위 ‘건덕지’가 있어야 했다.
클로빌이 다른 업체보다 우위에 있는 강점이 있어야 돈을 붓는 보람이 있을 것이다.
대찬의 첫 번째 삶, 그때 클로빌의 강점은 빠른 배송이었다.
그걸 필래 비바체가 날름 가로채버렸으니 지금의 클로빌은 어쩔 수 없는 빈손이었다.
그들 역시 빠른 배송을 강점으로 내세우겠다고 광고를 했다.
하지만 단기간에 필래 비바체를 따라잡기는 어려웠다.
이미 필래 비바체는 대형마트-택배 물류기지-필래 인 마켓으로 이어지는 체계적인 배송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다.
맨손으로 시작해야 하는 클로빌에 비하면 한참 앞서 있었다.
필래 비바체의 늘어난 보폭은 다분히 쵸 후쿠히로와 클로빌을 의식한 결과였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쵸 후쿠히로와 클로빌로 하여금 필래 비바체를 의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필래 비바체가 발 빠른 체질개선이 한창이던 3월, 쵸 후쿠히로가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클로빌의 경영진과 면담을 하고, 한국에서의 이런저런 일정을 소화했다.
개중에는 한국유통경영협회, 즉 코다의 정기회의도 있었다.
대찬이 업하우스의 차재원 대표, 그리고 이제는 백수가 됐지만 당시 해뜰녘의 대표였던 방태열 사장과 처음으로 안면을 텄던 현장이었다.
대찬은 이제 회사 내부의 모사꾼이 아니었다.
주머니 속의 송곳이 바깥으로 뚫고 나오듯, 이제는 어엿한 유통업계의 요인 취급을 받았다.
그는 서원웅과 함께 코다 정기회의에 참석했다.
이런저런 공식행사가 끝나고 리셉션이 열렸다.
이 자리의 인기스타는 누가 뭐래도 쵸 후쿠히로였다.
나비넥타이를 매고 단정하게 머리를 빗겨 넘긴 그는, 클로빌의 주요 인사들과 동행했다.
그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업하우스의 차재원 대표도 어울리지 않게 자꾸 쵸 후쿠히로 쪽을 흘끔흘끔 쳐다봤다.
그런데 쵸 후쿠히로의 관심은 다른 사람에게 있었다.
그는 웃음을 띤 채 서원웅에게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아노, 서원웅 다이표 되십니까.”
쵸 후쿠히로는 그다지 유창하지 않은 한국어 발음으로 서원웅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