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76화
“결혼에서 남녀상열지사는 잠깐의 단잠이고 결국 집안에 보탬이 돼야 한다고 일곱 살 때부터 들어온 애란 말이야.”
“예예, 잘 알아요.”
“그 애도 잘 알아. 제 소임이 뭔지. 두고 보라고.”
부인의 표독스런 눈초리에 시누이의 시선이 저절로 아래로 향했다.
부인은 단호한 발음으로 말했다.
“고모도 잘 봐둬. 우리 승연이, 똑 부러지는 평강공주가 돼서 제 남편을 꼭대기에 세울 테니까.”
“…예.”
“그래서 필래를 우리 극동일보의 든든한 진딧물로 만들어줄 테니까.”
그 다음으로 또각또각, 부러 크게 내는 구두소리가 들렸다.
부인이 화장실 밖으로 나가고는 시누이끼리 다시 수군거렸다.
“재수없어, 홍씨도 아닌 게 홍씨처럼 굴고 있어.”
“아유, 언니, 말조심해. 또 들을라.”
“제 년이 뭐 소머즈야? 너도 그렇게 쫄 거 없어.”
“졸기는 언니가 아까 다 쫄아놓곤…….”
“이년이, 너도 저년 편이야?”
“뭘 또 편을 갈라, 집안사람끼리…….”
“저년은 우리 집안 아니라니까?”
시누이들의 목소리도 점점 멀어지고 나서야, 윤이영은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대찬과 다시 만나자마자 말했다.
“극동일보 집안은 어떻게 아줌마들도 저렇게 살벌할까.”
“무슨 말이야?”
윤이영은 자기가 들은 걸 짧게 간추려서 대찬에게 전해주었다.
대찬은 극동일보 여자들의 사나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다만 홍구완 사장의 부인이자, 홍승연의 모친이자, 서원웅의 장모가 했던 말이 신경 쓰였다.
“필래를 극동일보 진딧물로 만들어? 그리고 홍승연이 자기 소임이 뭔지 잘 알고 있다고?”
“응, 그렇게 말하더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렇게 말했어.”
대찬은 심기가 불편했다.
“뭐야, 그딴 소리가 어디 있어? 그것도 결혼식 당일부터.”
“아무래도 찜찜하지?”
“응, 그렇다고 우리가 뭘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윤이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이제 막 결혼식 시작하려는데 신랑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초 치는 말 해봤자 기분만 상하니까.”
대찬은 여전히 찜찜함이 가득한 얼굴로 윤이영의 팔짱을 꼈다.
“오늘은 잠자코 자리나 채우자.”
“알았어.”
그렇게 식장으로 들어가는 대찬과 윤이영을 기자들의 셔터 소리가 따라갔다.
‘잠깐 유명세 좀 탔다고 저런 셔터소리에도 금방 익숙해지네.’
대찬은 쓰게 웃었다.
식은 호화스럽게 진행되었다.
대찬의 시선은 자연스레 신랑 측 부모의 자리를 향했다.
백양옥 여사는 냉정한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옆의 서청수 회장의 표정이 괜히 불편해 보였다.
그리고 그쪽에 둘러앉은 서씨들의 표정도 불편함 그 자체였다.
서승학은 아예 대놓고 딴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찬의 시선은 이어 화려한 웨딩드레스를 입은 홍승연과 그의 부모에게로 향했다.
‘구렁이 같은 인간들. 그 사이에서 나온 딸도 구렁이 같을까.’
대찬은 자질구레한 돈과 권력의 일을 제쳐놓고서라도, 절친한 친구의 결혼생활이 행복하기를 기도했다.
서원웅은 홍승연과 나란히 서서 서청수, 백양옥 내외에게 고개를 숙였다.
백양옥은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은 얼굴로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렇게 인사하는 서원웅의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대찬은 그걸 맘 편히 보기가 어려워, 윤이영의 팔을 살짝 만졌다.
“우리 먼저 일어나서 나가있자.”
“벌써? 이따 사진도 찍어야 할 텐데.”
“사진 찍을 때 다시 들어오자. 갑갑해서 그래.”
“아, 응…….”
대찬은 윤이영을 데리고 식장 바깥으로 조심스럽게 나갔다.
밖으로 나가니 갑갑한 공기가 조금은 가셨다.
그때 대찬의 시야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양윤희가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을 정도로 소박한 차림으로 서있었다.
그녀는 아들의 결혼식임에도 식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아마 재벌가의 결혼식이 아니었다면 신랑 측 부모 자리에 앉지는 못해도 적어도 앉을 자리 정도는 얻었을 것이다.
그녀도 현실을 알기에, 덤덤한 표정이었다.
한참을 바라보던 그녀는 몸을 돌려 식장을 나갔다.
혹여 시간을 끌다가 백양옥의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었다.
몸을 트는 그 순간, 양윤희와 대찬의 시선이 맞았다.
대찬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양윤희는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대찬에게 시선을 오래 두지 않았다.
그녀는 시종 덤덤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는 체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대찬은 침을 살짝 삼키고 그녀의 뜻대로 해주었다.
윤이영이 대찬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왜 그래? 아는 분이야?”
“아니야.”
대찬은 윤이영을 향해 웃었다.
그렇게 웃으면서도 대찬의 시선은 자꾸 식장을 걸어 나가는 양윤희에게 향하려고 했다.
서원웅은 하와이로 3박4일 간 신혼여행을 떠났다.
얼마든지 더 호화로운 여행지에서 더 오래 머물 수 있는 능력이 됐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업무가 산적해있었다.
게다가 서원웅이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유통업계의 수위로 떠오르겠다는 야심을 지닌 필래 비바체로서는 신경 쓰일 만한 소식이 들려왔다.
-‘마이더스의 손’ 쵸 후쿠히로, 한국스타트업에 ‘1조’ 파격 투자
그 소식은 바로 필래 비바체의 확대간부회의에서 다뤄졌다.
옥문영 상무가 입을 열었다.
“쵸 후쿠히로가 투자한다는 한국 스타트업이 다름 아닌 클로빌입니다. 우리로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긴장 정도가 아니라 빨간불이 들어온 거죠.”
서원웅은 낯빛을 흐렸다.
쵸 후쿠히로는 재일교포 3세 출신의 일본 사업가였다.
한국명은 장복광, 쵸 후쿠히로(張 福広)는 장복광의 일본식 독음이었다.
빈손으로 시작해 일본에서 한 손에 꼽히는 거부가 된 그는, 투자의 귀재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런 쵸 후쿠히로가 한국의 스타트업 기업인 클로빌에 관심을 가진다.
옥문영 상무의 말을 듣는 대찬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첫 번째 삶하고 궤적이 같아.’
첫 번째 삶.
처음에는 고만고만한 규모로 시작한 클로빌은, 전자상거래 시장의 블루칩으로 일약 뛰어오른다.
그건 역시 쵸 후쿠히로의 막대한 자금지원이 든든한 자양분으로 작용한 까닭이었다.
클로빌은 쵸 후쿠히로의 자금살포를 무기로, 차근차근 유통 인프라를 갖춰나가는 동시에 당일배송이라는 파격적인 시스템으로 파이를 늘려나갔다.
매년 엄청난 적자를 기록했지만, 그에 비례하여 매출까지 급상승, 대기업의 덩치를 믿고 여전히 기고만장하던 기존 강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그건 기존의 유통공룡이었던 필래유통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 삶, 유통업계의 구도는 사뭇 달라져있었다.
기존에 클로빌이 추진했던 유통 인프라에 대한 막대한 투자와 파격적인 배송은 이미 대찬이 입안하여 필래 비바체의 주무기로 탑재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시장에 발을 들이시겠다.’
대찬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회의에 참석한 도진석 전무가 말했다.
“크게 긴장할 건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서원웅 전무가 확인하자, 도진석 전무는 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차피 미풍에 그칠 겁니다. 쵸 후쿠히로, 그냥 편하게 장복광이라고 합시다. 장복광이 바봅니까? 몇 번 간 보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바로 발 뺄 겁니다.”
“그렇게 만만하게 볼 사람이 아니에요.”
옥문영 상무가 반론을 제기했다.
도진석 전무의 눈썹이 잠깐 꿈틀했다.
“왜지?”
“장복광의 투자가 실패로 끝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장기간의 치킨게임(상대가 물러날 때까지 어떤 출혈과 위험도 감수하는 전략)은 불가피합니다. 자원소모는 필연입니다.”
도진석 전무는 피식 웃었다.
“옥 상무가 뭘 잘 모르네.”
“네?”
“장복광은 과대평가됐어. 신의 손이니 마이더스의 손이니 개 풀 뜯어먹는 소리지.”
“감이 좋은 사람인 건 분명하죠.”
“그래도 지레 겁먹을 건 없어. 어차피 클로빌은 이 시장에서 버텨낼 체력이 안 돼.”
도진석 전무의 단정에 대찬이 딴죽을 걸었다.
“저는 좀 생각이 다릅니다.”
“뭐?”
도진석 전무는 표정을 구겼다.
번번이 자기의 앞을 가로막는 대찬에게 고운 표정이 지어지지 않았다.
“우리가 가볍게 여기고 제대로 대응하지 않는다면, 생각보다 후폭풍이 클 겁니다.”
“클로빌 체급은 우리의 십분의 일도 안 돼. 마냥 거만한 것도 문제지만, 작은 일에 큰 수고를 하는 것도 방만 경영이야.”
“클로빌의 체급은 우리에게 상대가 안 되지만, 장복광의 체급은 상대하기 버겁습니다.”
“장복광이 클로빌의 명줄을 늘리는 데 사력을 다할 리가 없잖나.”
“하지만 몇 조쯤은 우습게 뿌릴지도 모릅니다.”
“이제 1조일 뿐이야. 그것도 파격적이라고 떠들어대는 판에.”
도진석 전무의 판단은 현실적이었다.
클로빌에게는 1조도 차고 넘쳤다.
고작 1조를 들고 클로빌이 기존의 강자들 사이에서 살아남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에 도진석 전무의 낙관론이 가장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대찬은 첫 번째 삶의 클로빌, 그리고 장복광의 행보를 알고 있었다.
대찬은 진지하게 말했다.
“1조, 2조는 우리에게는 회사의 명운이 달린 돈이지만, 장복광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장복광이 우리보다 형편은 조금 나아도 아무렇지 않게 1, 2조를 뿌려댈 정도로 정신 나간 갑부는 아니야.”
“네, 하지만 한국 이커머스(e-commerce·전자상거래) 시장에서 투자한 이상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장복광의 투자는 1, 2조에 그치지 않을 겁니다.”
도진석 전무는 이 입씨름에 짜증이 돋았다.
“그러니까, 한국 시장에서 약체인 클로빌을 밀어서 본전이나 찾을 수 있겠냐고.”
그걸 보고 서원웅이 그를 압박했다.
“도 전무님, 회의에서는 어떤 견해도 경청될 가치가 있습니다. 너무 날이 서계신 거 같네요.”
“…아, 예.”
“조대찬 부장, 계속 말씀해보세요.”
서원웅에게서 발언권을 받은 대찬이 계속 말했다.
“미국 시장은 아마조네스의 독주체제가 굳어졌습니다. 중국은 바바터콰이가 압도적이고. 일본의 경우도 두 회사만큼은 아니지만 이쿠텐이 군계일학입니다.”
“그런데?”
“하지만 한국에 저 정도 점유율을 지닌 회사가 있습니까?”
“…….”
“한국 이커머스 시장은 지금 춘추전국시대입니다. 장복광은 100조 원 규모의 자기 이름의 이니셜을 딴 CFH펀드를 운용하고 있습니다.”
도진석 전무는 실소마저 머금었다.
“그럼 뭐 그 100조 원이 고스란히 클로빌 손아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는 거야?”
“그렇진 않겠죠. 하지만 고만고만한 규모의 기업들이 난립하는 한국시장은 충분히 배팅할 가치가 있다는 겁니다.”
“거액을 배팅하면 한국 이커머스 시장에서 클로빌 중심의 독과점 체제를 구축할 수 있다?”
“네, 성공여부를 떠나 그게 장복광과 클로빌의 목표일 겁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무리라고 생각해.”
대찬은 도진석 전무를 잠깐 바라보다가, 서원웅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결정권자는 서원웅이었다.
“도 전무님의 말씀도 옳습니다. 저도 클로빌이 우리를 비롯한 여타 대기업들을 삽시에 집어삼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음.”
“하지만 조기에 대응하지 않으면 클로빌, 그리고 그 배후의 장복광이 벌이는 치킨게임에 휘말릴 겁니다.”
서원웅은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놓았다.
“그럼 골치 아파지겠지. 상당한 출혈을 감수해야 하니까.”
“네, 한국시장이 장복광이 돈 폭탄을 떨어뜨릴 정도로 매력적이지 않다는 걸 보여줘야 합니다.”
“그걸 보여주려면 미국의 아마조네스, 중국의 바바터콰이 같은 독과점 체제를 우리가 구축해야 하는데, 단기간에 그건 불가능하잖아?”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신 장복광과 클로빌이 구사할 전략을 우리가 선점해서 들어올 여지를 주지 않으면 됩니다.”
“그게 뭔데?”
“경쟁업체와 확연히 구분될 정도의 빠른 배송시스템과 배송비 무료를 우선적으로 도모해야 합니다.”
“그거라면 우리가 이미 몇 년 전부터 준비하던 거잖아?”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완벽하게 상용화되지는 않았습니다.”
“예정보다 고삐를 더 바짝 쥐라는 얘기지?”
“네, 비집고 들어올 여유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도진석 전무는 우려를 표했다.
“그러려면 단기간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야 합니다. 이게 도리어 장복광에 지레 겁을 먹고 우리 스스로 리듬을 깨는 일이 될 겁니다.”
“전무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제 견해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도진석 전무와 대찬의 입장이 평행선을 달렸다.
서원웅은 이 둘 중 한 사람의 견해를 채택해야만 했다.
이건 대찬과 친하다고 덜컥 그의 손을 들어줄 일이 아니었다.
그의 선택에 따라 막대한 자금의 향방이 갈리는 중차대한 결정이었다.
서원웅은 내심 도진석 전무의 의견에 마음이 갔다.
그 역시 장복광, 쵸 후쿠히로의 클로빌을 향한 투자가 단발성에 그칠 것이라고 예측했다.
클로빌의 장래성을 보고 1조 정도야 통 크게 투자할 순 있다.
하지만 성과가 없으면 바로 흥미를 잃을 것이라, 서원웅은 확신했다.
그렇기에 클로빌 때문에 호들갑을 떨며 이쪽에서 부산을 떠는 일이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도진석 전무의 말은 서원웅에게 달콤한 유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