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75화
할머니는 대찬을 흘끔 보고 말했다.
“아저씨, 다음에 또 와.”
그 말에 대찬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정말요? 저 또 와도 돼요?”
“아저씨가 내 새끼 잘 돌봐주니까. 또 와.”
대찬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네, 그럴게요! 또 뵙겠습니다, 할머니.”
고수혁이 배양육 연구의 선구적인 학자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잘 될 거야. 스무 살 때 구체적인 계획 있는 사람 치고 실패하는 사람은 못 봤으니까.’
대찬은 가뿐한 기분으로 출근했다.
이른 시간이었는데 사무실에는 허운이 벌써 출근해있었다.
허운은 흐흐 웃으며 그에게 인사를 했다.
“커피남 부장님 오셨습니까.”
“웬일로 이렇게 일찍 출근했어?”
“이번에 팀장님의 엄정한 인사기준을 보니까 허투루 다녀서는 제때 진급 못하겠더라고요.”
“당신은 이미 제때 진급 안 했는데? 원래 같았으면 지금도 대리로 푹 썩고 있어야 정상인데.”
“아침부터 쏘시네.”
“얼굴 보자마자 커피남 어쩌고 하면서 그쪽이 먼저 시비 걸었거든?”
“왜요, 영광스러운 칭호잖아요. 충무로 블루칩의 연인이라니, 팀장님 혼자 다 해 드세요.”
대찬은 책상 위의 서류를 정리하며 퉁을 놨다.
“과분한 와이프랑 살고 있는 양반이 누굴 부러워해. 확 유 과장한테 일러바친다.”
“그것만은.”
대찬은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팀도 이제 다 제 짝이 있네? 김산호, 오다혜는 언제 식 올리나. 연애만 몇 년째야, 이게.”
“홍은주 대리도 누구 만난대요?”
“얼핏 들으니 그러는 거 같던데?”
“세상에, 천하의 얼음공주가 연애를 다 하는구나.”
“홍 대리가 뭐, 어때서.”
“아니, 뭐 어떻다는 건 아니구요.”
대찬은 미소를 머금었다.
“우리 대표님도 슬슬 장가가실 때가 된 거 같은데.”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전에 대표실에서 전화 왔었어요.”
“아직 출근시간 되려면 꽤 남았는데 웬 전화?”
“팀장님 출근하시면 대표실로 좀 오라시던데요. 팀장님 정시보다 일찍 출근하시는 거 아니까, 사적인 얘기라 업무시간 전에 하시겠다면서.”
“그래? 그럼 나 대표실에 다녀올게.”
“예입.”
대찬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서원웅을 찾아갔다.
서원웅은 대찬을 보자마자 말했다.
“나 결혼해.”
“드디어.”
“양가 부모님께서 자질구레한 절차 생략하고 바로 결혼하라고 성화셔서.”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돈 문제로 이것저것 따질 것도 없으니 당사자만 마음먹으면 금방이죠.”
서원웅은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급하게 흘러가서 긴장할 틈도 없어.”
“그게 좋아요. 남들은 좋은 날에 결혼하려면 1년 전부터 식장 잡아야 한다던데. 대표님은 그럴 필요도 없겠네요.”
서원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필래호텔 예식장에서 하기로 했어.”
“프러포즈는 어떻게 했어요?”
“그냥, 싱겁게.”
“심플 이즈 베스트니까. 잘하셨어요.”
“우리 조 팀장을 사회자로 쓰려고 했는데, 격식 운운하시면서 전문사회자 쓰시겠다더라. 미안.”
대찬은 손사래를 쳤다.
“미안할 건 없고요. 제 생각에도 그 편이 좋은 거 같네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생각해보니까 하객이 보통 사람들이겠어요? 그 앞에서 떠벌리라고 하면, 자신 없어요.”
“그래도 윤이영 씨랑 같이 식장에는 와줘야 돼.”
대찬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사회자 안 시켜줬다고 삐쳐서 결혼식도 안 올 줄 알았어요? 지금까지 조대찬을 뭐라고 생각하신 거야.”
“하하, 윤이영 씨하고 꼭 같이 와야 해. 그래야 기자들 관심이 분산되지.”
“그래도 주인공이 조명 받아야죠. 저희는 저기 구석에 짱 박혀있겠습니다.”
서원웅은 웃으면서 청첩장을 건넸다.
“원래 근사한 밥이라도 한 끼 사면서 줘야 한다던데, 내가 요즘 시간이 너무 없어. 식 끝나고 꼭 밥 살게.”
“밥은 무슨, 됐어요.”
대찬은 청첩장을 받고 열어보았다.
근사하게 예복을 차려입은 서원웅과 홍승연이 서로를 보며 빙긋 웃고 있었다.
“선남선녀네.”
대찬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둘의 결혼식은 4월에 열렸다.
벚꽃이 한창인 때였다.
대찬은 윤이영과 함께 결혼식에 참석했다.
윤이영은 결혼식 민폐 소리를 듣기 싫어 수수한 차림으로 등장했다.
그녀는 식장에 들어가기 전, 차 안에서 대찬을 보며 말했다.
“이 정도면 괜찮겠어?”
대찬은 윤이영을 빤히 바라봤다.
화려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올블랙의 정장이었다.
대찬은 웃으며 말했다.
“미모가 안 숨겨지긴 하는데, 이 정도면 최선을 다했다.”
“놀리지 말고!”
“놀리기는. 거울 봐라. 이 양반은 자기가 예쁜 줄도 몰라.”
윤이영은 대찬에게 주책이라는 눈빛을 쏘면서도 입꼬리는 히죽 올라갔다.
그녀는 대찬의 팔짱을 꼈다.
“들어가자.”
둘은 차에서 내려 식장을 향해 걸어갔다.
필래호텔 안팎에는 무수한 기자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재계5위의 재벌가 차남과 한국에서 가장 많은 부수를 팔아치우는 신문사의 여식의 결혼식이었다.
과장 조금 보태면 세기의 결혼식이라 할 만했다.
보통 이런 결혼식은 비공개로 약소하게 치르기 마련이었다.
언론의 지나친 관심이 부담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결혼식은 도리어 쏟아지는 관심을 즐기는 듯했다.
지나가는 하객들마다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에 눈살을 찌푸려야만 했다.
이는 이제 곧 사돈지간이 될 서청수 필래그룹 회장과 홍구완 극동일보 사장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둘은 관심을 갈구했다.
서청수 회장은 서원웅의 이름값을 높일 필요가 있었다.
필래 비바체를 맡아 혁신의 연속으로 회사를 키워나가는 서원웅에게 언론들도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홍구완 사장 역시, 필래그룹과 사돈을 맺는다는 사실을 내세워 여전한 위세를 과시하고 싶었다.
그리고 본디 떠벌리고 위세 떨기를 좋아하는 성품이었다.
재계와 언론계의 유력 가문이 합치는 자리.
참석한 하객들 역시 비범했다.
이름난 정재계 인사들이 다수 참석했다.
간판만 바꿔 달면 여기서 한국경제의 미래를 의논해도 좋을 정도였다.
필래그룹 서씨 일문들도 다수 참석했다.
일전에 창업주 서광구 회장의 제사에서 서원웅이 봉변을 당할 때만 해도 애써 모른 척 하며 침묵하던 사람들이었다.
이제는 서원웅에게 가서 제법 친근한 알은체까지 했다.
대찬은 그 자리에서 서인태 차장과 오랜만에 만났다.
그는 부인이자 대찬의 손윗누이인 조수진과 동행했다.
그는 대찬에게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건넸다.
“이제 이런 일 아니면 얼굴 보기 힘드네, 처남.”
“제가 자주 찾아뵀어야 했는데 바쁜 척 하느라 못 그랬어요.”
“자기 사업도 알뜰하게 챙기고 부장으로 진급도 했다면서? 어째 따라잡을 만하면 도망가고 그래.”
대찬은 미소를 머금었다.
“당분간 부장 자리에서 푹 썩을 예정이니까 얼른 추월해가세요. 아, 그리고 여기는 저랑 사귀는 윤이영 씨.”
서인태는 대찬을 만날 때보다 더 활짝 웃으며 윤이영에게 꾸벅 인사를 건넸다.
“이야, 우리 처남 진짜 출세했네요. 안녕하십니까. 저 조대찬 부장 매형인 서인태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윤이영이에요. 이런 자리가 아니라 진즉 찾아뵀어야 하는데.”
서인태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유, 요즘 한국에서 가장 바쁘신 분 아닙니까.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여기는 제 와이프예요. 그러니까 조 부장 누나 되는.”
조수진은 대찬의 팔을 찰싹 때렸다.
“말로만 들었을 땐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까 실감 난다, 야. 조대찬 운빨 부럽다, 부러워.”
윤이영은 조수진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윤이영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형님.”
“형님은 무슨 형님이에요. 이런 대배우한테 형님 소리를 들으니까 가슴이 너무 쿵쾅쿵쾅 뛰네요.”
윤이영은 살갑게 웃었다.
“편하게 대해주세요.”
“우리 조대찬이 좀 까칠하게 굴어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주세요. 꼭 결혼까지 골인하시길 바라요.”
“까칠하긴요. 오히려 제가 까칠하게 구는데요.”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는 안 새나 보네. 다행이에요.”
여자 둘이 서로를 보면서 웃자, 대찬도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둘을 떼어놨다.
“자, 이쯤해서 갈라져요. 우리는 서씨 집안 아니니까 저 구석에 박혀 있을게요.”
“아, 우리도 그냥 처남 따라 구석에 박히고 싶은데.”
서인태는 씁쓸하게 웃었다.
대찬이 그를 보고 물었다.
“왜요?”
“딱 봐도 분위기 싸할 거 같거든. 청규 삼촌은 안 오신다지만 일단 승학이 형도 오고.”
“서승학 사장님이 오신대요?”
서인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도 내키지는 않겠지만 안 오면 속 좁아 보이잖아.”
“그렇긴 하지만 지금까지 행보를 생각하면 다소 의외네요.”
“슬슬 긴장되는 거지. 전처럼 망나니짓으로 일관하면 정말 원웅이한테 후계자 자리를 뺏길 수도 있다는 긴장.”
대찬은 가볍게 웃었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긴 하는군요.”
“듣자하니 처남이 주도했던 웜샤인 바깥으로 내쫓고 자기가 비슷한 자회사를 다시 만들었다며?”
“아, 네. 따빛이라고.”
“결과가 영 좋지는 않다고는 해도, 그런 것 역시 다 원웅이를 의식한다는 증거지.”
“앞으로 더 치열해지겠네요.”
서인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승학이 형도 오고, 그리고 신랑 측 어머님으로 참석하신 분이…….”
“아.”
서원웅의 생모는 양윤희다.
그러나 서원웅의 결혼식에 그녀를 위한 자리는 마련되지 않았다.
그건 누구도 바라지 않았다.
심지어 양윤희 본인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백양옥 여사는 하객을 맞이할 때는 꾸며진 미소를 내보였지만, 보는 눈이 없을 때는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녀로서는 당연히 이 자리가 내키지 않았다.
대찬은 서인태를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매형이 불편해 하실 만하네요.”
“가시방석이어도 어쩔 수 없지. 이따 또 보자고.”
서인태는 조수진과 함께 일문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대찬은 윤이영의 어깨를 살짝 잡으며 말했다.
“자, 우리는 볕 안 드는 곳으로 갑시다.”
“얼른 가자.”
둘은 아무런 심적인 부담이 없는 구석자리로 대피했다.
과연 재벌집의 결혼이라 그런지 축의금은 정중히 사양한다고 적혀 있었다.
식장에 들어가려는 찰나, 윤이영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어, 그래. 천천히 다녀와.”
“오래 안 걸릴 거거든?”
“누가 뭐라고 했나.”
대찬이 웃자 윤이영은 그를 한번 노려보고 종종걸음으로 화장실을 향했다.
윤이영이 화장실에 들어가 있는 사이, 바깥의 소리가 들렸다.
중년 여성쯤으로 생각되는 사람 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괜찮을까?”
“뭐가?”
“우리 승연이 말이야. 아무리 재벌가라지만 서자가 뭐니, 서자가.”
이에 윤이영의 안테나가 그쪽으로 바짝 곤두섰다.
윤이영의 존재를 모르는 그들은 마음 놓고 얘기했다.
“서자라도 차기 회장이 될 수도 있다잖아.”
“아유, 모르는 말 말아. 필래가 서씨 혼자만의 회사가 아니라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필래가 서씨 거지, 그럼.”
“회장 사모님 있지? 백양옥 여사. 그쪽 집안 입김도 장난 아니야.”
“그래? 그럼 그쪽에서 태클 걸면 서자가 뒤 잇는 건 힘들겠는데.”
둘의 대화가 그렇게 마무리되려고 할 즈음, 또 다른 목소리가 개입했다.
“아유, 고모야말로 모르는 소리 마. 우리 이이가 그렇게 허술해 보여?”
“아, 형님.”
“고모는 우리 이이랑 오십 년 넘게 알고 지냈으면서 이렇게 지 오빠를 몰라?”
또 다른 목소리의 가벼운 질책에 원래의 목소리가 절절 맸다.
또 다른 목소리가 이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홍구완 사장 같았다.
그럼 그 목소리는 홍구완 사장의 부인이었고, 호칭으로 따졌을 때 그녀의 말을 듣는 쪽은 홍구완 사장의 여동생인 듯했다.
“노파심에 그런 거죠, 형님.”
“그래도 말을 곱게 써야지. 듣는 사람이 기분 나쁘잖아.”
“조심할게요.”
“우리가 유독 예뻐라 하는 승연이를 아무 쓸모없는 서자 놈한테 던져줬을 거 같아?”
“아니겠죠. 아유, 죄송해요. 제가 입방정을.”
대화가 갑자기 일상적인 집안의 잔소리로 흘러가자 윤이영은 흥미를 잃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런데 홍구완의 부인이 윤이영의 걸음을 붙들었다.
“결혼은 비즈니스야. 승연이도 우리 홍씨 집안 피를 받았으니 그걸 잘 알고 있고.”
“아무렴요.”
홍구완 사장의 부인은 평소 시누이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듯, 따따부따 쏘아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