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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74화 (273/556)

난 할 수 있어 274화

촉이 좋은 연예신문 기자가 몇 번의 수소문 끝에 정답을 알아냈다.

-윤이영의 남자, 알고 보니 CF 속 그 썸남! ‘충격’

그 기사를 신호탄으로 대찬이 어느 회사에 다니고 직급은 무엇이고 어떤 일을 하는지까지 소상히 밝혀졌다.

그러던 와중, 대찬의 둘도 없는 친구인 최재한은 잔뜩 격분한 목소리로 대찬에게 전화했다.

“야, 이 호랑말코 같은 놈아!”

“왜 이러세요, 최 기자님…….”

“왜 이러세요? 왜 이러세요오? 지금 그걸 몰라서 묻냐?”

“정말 모르겠는데요.”

최재한은 분이 조금도 삭여지지 않은 목소리로 따졌다.

“야! 윤이영하고 사귀는 거 터트릴 거였으면 나한테 먼저 언질을 줬어야지!”

“아.”

“아? 너 진짜 오늘 죽어볼래?”

최재한은 미친 원숭이처럼 길길이 날뛰었다.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아, 그게… 내 신상까지 밝힐 생각은 없었거든.”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네 신상쯤이야 방구석에서 코 후비면서도 알아낼 수 있거든?”

“내가 요즘 세상을 잘 몰랐네.”

“너, 나한테 건수 하나 주기로 한 거 여태 안 주고 있는 거 알지?”

“…잘 알고 있습죠.”

“자꾸 이런 식으로 우리의 파트너십을 불량하게 끌고 가면 진짜 재미없다, 너?”

“야, 파트너십이라니, 섭섭하게. 우리 30년 우정이 이거밖에 안 돼?”

“뚫린 입이라고……!”

대찬은 어깨를 움츠리며 최재한을 달랬다.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조만간에 특종 안 던져주면 널 잡아 죽이고 윤이영 남친 부고기사를 특종으로 내겠어.”

“아유, 살벌해라. 알았어! 조만간 큰 덩어리로 던져줄 테니까 진정해.”

“윤이영 남친이 내 절친인데 낙종이라니. 이게, 이게 도대체 맞는 얘기야?”

“아이고…….”

대찬은 최재한의 분노를 푸는 데 꽤 긴 시간을 들여야만 했다.

이렇듯 대찬의 신원은 기사와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물을 통해 널리널리 퍼져나갔다.

미처 대찬의 신원이 이렇게까지 털릴 줄은 예상하진 못했던 윤이영은 다급히 대찬에게 전화했다.

“오빠, 미안해. 사람들 정보력이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어.”

“그것도 모르고 터트렸단 말이야?”

대찬은 웃으면서 대꾸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소속사에서 신원 밝히는 기사는 내려달라고 할 거야. 안 되면 법적으로 조치하고.”

“됐어. 굳이 그럴 필요 뭐 있어.”

“그래도 오빠 생활에 지장 있잖아.”

“어차피 그렇게 해봤자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지. 지장 없어, 괜찮아.”

윤이영은 안쓰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 아니면 아니라고 얘기해야 돼.”

“괜찮아. 사실 오히려 기분이 좋은 것도 있어.”

“괜찮은 건 몰라도 좋을 거까지야.”

대찬은 어깨를 한번 으쓱였다.

“한창 주가 올리는 여배우가 내 애인이라고 남이 대신 자랑해주는 거잖아. 솔직히 은근히 티내고 싶기도 했거든?”

“얼마나 불편한데, 그게. 오빠도 지금 준연예인 될 판이야.”

대찬은 흐흐 웃었다.

“유명인 취급 받는 것도 나쁘진 않지.”

“아유, 그거 처음에나 조금 신나지 나중에는 얼마나 거추장스러운지 알아?”

“그 거추장스러운 느낌 나도 한번 느껴보자.”

윤이영은 점잖게 웃었다.

“조만간 느끼게 될 거야, 커피남 씨.”

“커피남?”

“요즘 인터넷에서 오빠를 그렇게 부르더라. 나랑 같이 커피 CF에 나왔다고.”

“커피남, 나쁘지 않네.”

대찬은 피식 웃었다.

대찬은 그렇게 잠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세를 타는 게 나쁘지 않았다.

다만 사무실 사람들에게 커피남 부장님으로 불리면서 솟는 짜증을 감수하기는 해야만 했다.

윤이영 주연의 소풍 가는 날은 최종 관객 729만 명으로 막을 내렸다.

초대박이었다.

윤이영은 쏟아지는 시나리오에 정신을 못 차리겠다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얘기했다.

“아무래도 당분간 자주 만나긴 힘들겠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진 마. 열흘에 한 번씩은 꼭 시간 낼 테니까. 나도 오빠를 만나야 일할 기분이 생겨.”

“피차일반이야. 그렇다고 없는 시간 일부러 낼 거 없고. 나중에 몰아서 보면 되니까.”

윤이영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찬의 삶은 정신없이 돌아갔다.

그건 첫 번째 삶과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때와 다른 건, 지금은 삶을 자의로 돌리고 있고 그때는 삶이 타의에 돌아갔다는 점이었다.

필래 비바체의 마트사업부, 택배사업부, 면세점사업부.

대찬이 모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부분이었다.

점포 하나짜리 필래마트를 필래그룹에서도 손꼽히는 거대 계열사로 키워낸 데는 대찬의 공로가 분명했다.

겉으로 내세우진 않았지만 내심 흐뭇했다.

결과에 의거한 자부심은 대찬이 삶을 꾸려나가는 추동력이었다.

그리고 로튼 프룻츠의 원두 수입과 캔음료 제조, 사회공헌사업과 이제 막 첫 발을 뗀 배양육 사업까지.

모든 것이 대찬의 손때가 묻어있는 사업들이었다.

하다못해 대찬의 연인인 윤이영의 소속사 왈라비 엔터와도 업무적으로 얽혀 있었으니, 그야말로 대찬의 두 번째 삶은 비즈니스 그 자체였다.

체력적으로야 힘에 부쳤다.

하지만 첫 번째 삶처럼 허덕이지는 않았다.

첫 번째 삶의 대찬을 망친 건 비단 업무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를 둘러싼 주변인의 핍박과 폭력.

망가진 생활패턴.

과한 알콜과 버티기 위해 들이 부었던 과한 카페인.

그런 업무 외적인 것들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그것에서 해방된 지금, 스스로 만들어내는 업무에 짓눌리기는 했지만 그건 즐거운 고통이었다.

고통이 즐거운 건 순전히 업무가 타의에서 자의로 바뀐 것, 들인 땀과 눈물에 대한 확실한 보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면 내가 고통 즐기는 취향으로 바뀌었거나.’

대찬은 떨떠름하게 웃었다.

1월 하순.

대찬은 고수혁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아저씨, 저 짜장면 좀 사주시면 안 될까요.”

“왜 안 되겠어. 할머님도 모시고 나올 거지?”

“할머님은 오늘 필래복지재단에서 말벗 봉사 받기로 해서 안 나오셔도 돼요.”

대찬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 그럼 집 근처에서 볼까? 퇴근 좀 일찍 하면 7시쯤 될 거 같은데.”

“아녜요. 제가 아저씨 사무실로 갈게요.”

“굳이? 버스 타고 오려면 멀 텐데.”

고수혁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이제 자유의 몸이라 바깥으로 좀 나가고 싶어요. 얻어먹는 주제에 바쁘신 몸 오라 가라 하는 것도 싸가지 없잖아요.”

“정 그렇다면 그래라. 잠실에 필래타워 알지? 그 앞에서 보자.”

“네, 아저씨.”

“너도 이제 스무 살이잖아. 형이라고 해주면 안 될까.”

“겨우 한 살 더 먹었는데 아저씨가 형이 돼요?”

“10대가 30대한테 아저씨라고 하는 건 봐줄 수 있지만, 이제 20대가 됐으니 너도 준아저씨라고. 준아저씨한테 아저씨 소리 듣고 싶지 않아.”

“그래도 아저씨가 좋은데요.”

“너도 대충 내 동년배 대열에 들어온 거라니까.”

“제 또래는 동년배라는 말 안 써요.”

“…나도 안 쓸게. 제발 형이라고 해줘라.”

대찬과 고수혁은 필래그룹의 사옥 앞에서 만났다.

고수혁은 끝 모르고 높이 뻗은 건물을 보고 말했다.

“건물이 멋있네요. 여기가 아저씨 회사라는 거죠?”

“내 회사는 아니고. 나도 여기 부품일 뿐인데. 그리고 아저씨 소리 그만하라고 했다.”

“조금만 참아요. 형 말고 다른 좋은 호칭으로 불러드릴 테니까.”

“그게 뭔데.”

“조금만 있다가 알려드릴게요. 식사하러 가시죠?”

대찬은 싱겁게 웃고는 고수혁을 사옥 지하의 중식당으로 데려갔다.

진시황릉을 도굴했다고 믿을 정도로 고풍스러운 소품으로 꾸민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식당이었다.

으레 그렇듯 이런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는 음식의 가격에 포함되기 마련이었다.

그 말인즉슨 가격깨나 나가는 식당이었다.

고수혁은 찜찜한 얼굴로 말했다.

“그냥 3천 원짜리 짜장면도 잘 먹는데요.”

“그래도 귀하신 몸이 여기까지 거동하셨는데 3천 원짜리는 좀 그렇지.”

“잘 먹을게요.”

고수혁은 짜장면 얘기가 했는데 식탁에는 고급요리들이 척척 올라왔다.

고수혁이 또 애늙은이 같은 말을 늘어놓을 게 뻔해 대찬이 선수를 쳤다.

“내가 사주고 싶어서 사주는 거니까 그냥 아무 말 말고 먹읍시다?”

“저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뭐라고 할지 내가 모를 줄 알아? 씀씀이가 헤프시네요 어쩌고 잔소리만 잔뜩 늘어놓을 거잖아.”

“아니라곤 안 할게요. 잘 먹겠습니다.”

고수혁은 사준 보람을 느끼도록 먹성 좋게 먹었다.

그는 한참 먹다가 대찬에게 말했다.

“아 참, 아까 아저씨 대신 다른 좋은 호칭으로 불러드린다고 그랬죠.”

“그랬지. 뭐냐?”

“선배님이요.”

대찬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내가 왜 네 선배야?”

“저 고원대 합격했거든요.”

그 말에 대찬의 얼굴이 확 펴졌다.

“정말이야? 아, 그럼 동아리는 꼭 로튼 프룻츠에 들어가도록.”

“그거 선배님 회사 아니에요?”

“회사인데, 대학동아리에서 출발했어.”

고수혁은 입을 살짝 벌리며 놀랐다.

“멋있네요. 그런데 왜 하필 이름이 썩은 과일들이에요?”

“그건 들어가면 네 선배님들이 친절하게 설명해줄 거다. 나도 동아리에서 도움 많이 받았어. 가입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네, 꼭 들어갈게요.”

대찬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전공은?”

“생명공학과요.”

“생명공학과? 원래 그쪽에 관심이 있었어?”

고수혁은 입 안에 우물우물 씹던 것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원래 잡식이라 이것저것 관심이 많았는데, 여기로 진학하기로 한 건 순전히 선배님 믿고 결정했어요.”

“나?”

“네, 이번에 배양육 사업 시작하셨다고 들었는데.”

“그건 또 누구한테 들었어.”

“은오영 교수님이 원서마감 전날까지 중림대 넣으라고 계속 전화하셨거든요.”

그러자 대찬은 젓가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 인간이 끝까지!”

“그래도 사탄의 유혹에 안 넘어갔으니까 안심하세요.”

“그래, 잘했다.”

“중림대에는 관심이 없지만 배양육에는 관심이 가더라구요.”

“전공을 그쪽으로 잡은 것도 그럼……?”

고수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배양육 사업을 진지하게 연구하고 싶어요. 물론 학부에서는 기초지식을 탄탄히 쌓는 데 집중할 거고요.”

“뭐든 하고 싶은 걸 해야지. 근데 나 처음 만났을 땐 무조건 돈 많이 버는 직업 갖겠다고 안 했어?”

고수혁은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네, 그래서 이쪽으로 진로 잡았어요.”

“처음부터 초 치긴 싫다만 덮어놓고 성공을 자신할 순 없는 분야야.”

“네, 알아요. 근데 선배님이라면 무조건 해낼 거 같은 느낌이 들어서.”

대찬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럼 뭐, 우리 회사 들어오게?”

“돈 다발 싸들고 절 스카웃하게 만들 거예요.”

“좋아. 재단에서 학비랑 생활비 일부 보조해주니까 학업에만 전념해. 나중에 꼭 무릎으로 박박 기면서 모셔갈 테니까.”

“상상만 해도 즐겁네요.”

“넌 좀 애가 이상한 거 같아.”

대찬과 고수혁은 서로를 보면서 비식비식 웃었다.

“저도 이제 성년인데 선배님이랑 술 한잔 하면 안 돼요?”

“안 될 거 없지. 근데 소주는 안 돼. 뻗어버리면 곤란하거든.”

“저 술 잘 마셔요.”

“성인 된 지 얼마나 됐다고 자기 주량을 알아?”

“할머니가 그랬거든요. 네 애비새끼는 다른 건 다 젬병인데 술은 잘 처먹었다고. 그 피가 어디 가겠어요?”

대찬은 피식 웃었다.

“그래도 안 돼. 맥주나 마시자고.”

“소주 마셔요. 제가 뻗으면 형이라고 불러드릴게요.”

“구미 당기는 제안이네. 좋아, 얼마나 되나 보자.”

대찬은 웃으면서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한 시간 후.

고수혁은 얼굴이 새빨간 홍당무가 되어 꼬부라진 혀로 중얼거렸다.

“형아, 미안해요……. 내가 이렇게 나약한 인간인 줄 몰랐어…….”

“내참, 한 병에 그렇게 골로 갈 거면서 허세 부리기는.”

대찬은 피식 웃고 택시를 잡아 그를 태우고 함께 그의 집으로 향했다.

혹시나 술 취한 고수혁이 자기 할머니를 제대로 돌보지 못할까 걱정된 탓이었다.

대찬은 완전히 술에 절어 뻗어버린 고수혁을 흘끗 보고 웃었다.

고수혁은 사지를 제멋대로 놀린 채로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해장국 사놨으니까 속 풀어라. -대찬이 형’

대찬은 흐흐 웃으며 쪽지를 써 놨다.

고수혁은 이제 해장의 짜릿함도 아는 성인이 될 것이다.

대찬이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니, 할머니가 멍한 눈으로 의자에 앉아있었다.

“할머니, 일찍 일어나셨네요.”

대찬은 새벽잠을 잊은 할머니에게 꾸벅 인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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