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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72화 (271/556)

난 할 수 있어 272화

대찬은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송희근 과장을 따로 불렀다.

한동안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실 날이 없었다.

대찬은 말 한 마디로 그 웃음기를 일거에 증발시켜버렸다.

“이번 정기인사에서 한태윤 과장이 차장으로 진급할 겁니다.”

“…네?”

“송 과장님께서는 다음번 정기인사를 노리셔야 할 거 같습니다.”

“…….”

송희근 과장의 입꼬리가 시든 이파리처럼 축 처졌다.

“충격 받으셨겠죠. 제 판단을 원망하시겠죠. 하지만 번복은 없을 겁니다.”

“아니, 차장님…….”

“한태윤 과장은 송 과장님보다 훨씬 나은 업무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제 판단이 틀리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송희근 과장은 침을 꼴깍 삼키며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동자는 마구 요동쳤다.

“차, 차장님, 하지만 연차가…….”

“연차는 차순위의 고려사항입니다. 능력과 성과를 우선적으로 고려했습니다.”

“제 능력이 그렇게 부족했습니까?”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 과장은 좋았습니다, 능력이.”

“너무 냉정하신 거 아닙니까?”

송희근 과장의 얼굴은 망연자실 그 자체였다.

“몇 마디 위로를 보탠다 한들 그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래도 다음번에는 꼭 될 거다, 내가 밀어줄 거다, 빈말이라도 그렇게 말씀해주실 수는 없나요?”

“무책임한 약속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송 과장님의 노력을 외면하진 않을 겁니다.”

대찬은 송희근 과장의 성품을 잘 알았다.

헛된 약속을 해주면, 그 약속이 헛된 걸 알고도 송희근 과장은 그 약속에만 매달릴 거다.

약속대로 이번에는 꼭 해주셔야 합니다.

아니면 저 진짜 회사 못 다닙니다.

사람의 정이 협박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송희근 과장이 보여줄 것이다.

대찬은 그걸 알기에 냉랭하기까지 한 태도를 견지했다.

송희근 과장은 탁자를 붙잡으며 허리를 푹 숙였다.

“힘 빠지네요.”

“심정은 이해하고도 남아요. 조금만 더 땀을 흘려주세요. 그럼 그 땀에 대한 보답은 충분히 하겠습니다.”

“노력만 하면 뭘 합니까. 알아주질 않는데.”

“노력도 능력이 될 수 있다는 거, 아시잖아요.”

대찬은 송희근 과장의 팔뚝을 얌전히 잡았다.

물렁한 근육이 대찬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저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다음번에는 송 과장님이 생각하는 순리와 제가 생각하는 순리가 맞아떨어지길 바랍니다.”

대찬은 그렇게 말하고 먼저 자리를 떴다.

송희근 과장은 다리가 후들거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선택은 송희근 과장의 몫이었다.

정말 이대로 주저앉을 것인가, 아니면 이 악물고 악으로 깡으로 달릴 것인가.

2015년.

정기인사는 송희근 과장이 동의하지 않는 순리대로 처리되었다.

대찬은 부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나이 서른셋에 부장 소리를 듣기가 낯 간지러웠다.

그래서 한사코 조 부장님 대신, 조 팀장님 호칭을 고집해달라 신신당부를 했다.

한태윤 과장이 차장이 되었다.

그리고 유채경 대리가 과장이 되어 집에서 당한 설움을 회사에서 직급으로 찍어 누르던 허운의 전략이 폐기되었다.

홍은주 주임은 홍은주 대리가 되었다.

대찬은 피도 눈물도 없이 송희근 과장에게 매몰찼지만, 그래도 마음이 안 쓰일 수는 없었다.

대찬은 시시때때로 송희근 과장에게 곁눈질하며 기색을 살폈다.

그는 한동안 침울함의 화신이 되어 있었다.

저러다 우울증 오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송희근 과장도 어른이었다.

닷새간 우울함에 끙끙 앓던 그는, 주말이 지나고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출근했다.

“홍 대리! 그거 내가 할게, 냅둬.”

“네? 이거 원래 제가 하던…….”

“지금 한가해서 내가 도와주려고 그래. 그러니까 냅둬.”

“아, 네…….”

송희근 과장은 대찬에게 시위라도 하듯 남의 업무마저 빼앗아서 했다.

“김 대리, 영업부하고 미팅 내가 갔다 올 테니까 하던 일 마저 해.”

“네? 네…….”

그는 야근마저 자청했다.

승진누락의 아픔을 위로해주려는 허운의 술자리 제안도 단칼에 거절했다.

“먼저 들어가. 나 일 좀 마저 하고 들어갈 테니까.”

“과장님, 이러다 돌아가세요.”

“이렇게 해야 과장으로 회사생활 안 쫑나지! 이대로 끝날 거면 그냥 뒤지는 게 낫지!”

“아이고.”

“들어가.”

그는 닥치는 대로 일했다.

대찬은 깜깜한 사무실에 스탠드를 켜놓고 혼자 일하는 송희근 과장을 보고 안쓰럽게 웃었다.

“과장님, 여태 안 가셨어요?”

“마무리만 하고 들어가려고 합니다.”

“몸 상하세요.”

“…….”

송희근 과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째 여전히 앙금이 남아있는 듯했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이렇게까지 하실 거 없어요.”

“이 정도는 해야 티가 나죠.”

“하하, 이러시면 제가 죄송해서 어떡해요.”

송희근 과장은 그제야 픽 웃었다.

“죄송해 하실 건 뭡니까? 능, 력, 에 따라 적절히 인사를 진행하신 건데?”

“그러지 마시고 저랑 맥주나 한잔 하러 가시죠. 이만 하면 됐습니다.”

“…….”

대찬은 송희근 과장을 억지로 끌고 나와 맥주를 나눠 마셨다.

말라비틀어진 옛날식 치킨을 뜯으며 대찬은 말했다.

“과장님, 지금 보여주시는 거에 반만 유지하셔도 내년 차장 진급은 확실합니다.”

“…그런가요.”

“네, 그러니까 너무 힘쓰지 마세요. 오래 못 가는 거 아시잖아요.”

송희근 과장은 맥주를 들이켜고 말했다.

“그래요, 맞아요. 심술 좀 부려봤습니다.”

“뭐, 부서장 입장에서 좋은 심술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갑자기 소처럼 일만 하시니까.”

송희근 과장은 눈빛을 쐈다.

“그럼 그 심술 좀 더 부려드릴까?”

“아이고, 그 정도면 됐다니까요.”

“흐흐흐.”

대찬은 편안하게 웃으면서 송희근 과장의 손을 붙들었다.

“지금 출력의 반만 내서 쭉 가주세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에휴, 처음 팀장님한테 누락 소식 듣고 하늘이 무너지고 억장이 무너지고 그랬습니다.”

“왜 아니겠어요. 제가 송 과장님이었어도 며칠간은 소주를 입에 달고 살았을 텐데.”

송희근 과장은 무릎에 탁, 손을 얹으며 입맛을 다셨다.

“지금은 그래도 좀 낫습니다. 팀장님 입장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고. 따져보니 제가 한태윤이보다 나은 것도 없고.”

“송 과장님의 가치도 분명하지만 한 차장의 가치도 분명하니까요. 모든 면에서 송 과장님이 절대열위에 있는 건 아니에요.”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고맙네요.”

송희근 과장은 조금도 고맙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대찬은 그를 보고 소리 죽여 웃었다.

둘은 그날 맥주만으로 취했다.

그날 이후, 송희근 과장은 승진누락의 아픔을 툭툭 털고 일어났다.

물론 흉터는 남았지만 깊지는 않았다.

사흘 간 아내와 딸을 데리고 겨울바다로 휴가를 다녀왔다.

그는 거기서 쓰린 속을 달래고 다시 업무에 복귀했다.

‘그래, 내가 영 못 미덥게 지내오긴 했지.’

송희근 과장은 깊은 한숨을 겨울바다에 던져놓고 다음 정기인사를 기대했다.

‘나쁜 놈의 새끼, 끝까지 빈말으로나마 다음번엔 꼭 승진시켜준다고 안 하네.’

송희근 과장은 대찬의 독한 성격에 혀를 내둘렀다.

‘두고 봐라. 개처럼 굴러서 내년엔 꼭 보란 듯이 차장 달아줄 테니까.’

송희근 과장은 스스로 기합을 불어 넣었다.

* * *

“연말연시 극장가의 다크호스로 떠오르던 영화 ‘소풍가는 날’이 개봉 4주째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절대강자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관객은 어느덧 600만을 돌파했습니다.”

뉴스에서는 대찬에게 반가운 소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대찬은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영화 ‘소풍 가는 날’은 소위 대박을 쳤다.

유명배우가 주연을 맡은 것도 아니고.

잔혹한 장면이 다수 삽입되어 미성년자 관람불가 딱지가 붙고.

내용 자체도 암울한 영화였다.

그렇기에 누구도 이 영화가 흥행하리라 예측하지 않았다.

그저 훌륭한 작품성에 평론가들이나 흐뭇하게 바라보던 영화였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흥행을 한 까닭에 어지간한 성적 이상으로 더 인구에 회자되었다.

특히 독보적인 연기력으로 서사를 이끌어가는 윤이영이 주목받았다.

‘진흙 속의 진주’니, ‘한국 영화계 10년을 이끌어갈 재목’이니 하는 찬사가 매스컴에 대서특필되었다.

‘아, 윤이영은 나만 알고 있어야 되는데.’

대찬은 윤이영의 날로 치솟는 유명세에 행복한 푸념을 했다.

물론 현실적으로 윤이영의 유명세가 둘의 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소지도 다분했다.

‘빵 떠서 이런저런 남자 연예인들이 집적대면 어떡하나.’

대찬이 벌써 이런 고민을 하는 것부터가 그랬다.

윤이영은 어딜 가나 알아보는 유명인이 되었다.

그 덕분에 맘 놓고 길거리를 활보하는 일도 아주 어렵게 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각자 바라보는 곳이 달라진다는 점이었다.

대찬은 첫 번째 삶에서도, 지금도 주야장천 넥타이를 매고 일에 매달리는 비즈니스맨이었다.

그의 관심사는 돈과 사업이었다.

윤이영은 소풍 가는 날을 시작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녀의 입에서는 이제 시나리오, CF, 드라마 따위가 오르내릴 것이다.

그저 그런 배우였던 시절보다 더 자주.

바라보는 곳이 달라지면 공통분모가 작아진다.

공통분모가 작아지면 말수도 줄어든다.

말수가 줄어들면 관계가 약해진다.

물론 관계를 위해 윤이영에게 조금만 덜 잘 나가라고 억지를 부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다만 다른 곳을 바라보며 자라나는 둘의 관점이 언젠가 아예 엇갈려버리지는 않을지.

대찬은 그것이 괜히 걱정되었다.

‘벌써부터 이런 걸 걱정한다는 것부터가 내가 윤이영을 많이 좋아한다는 뜻이겠지.’

대찬은 피식 웃었다.

그때 대찬의 전화가 울렸다.

윤이영이었다.

“오빠, 집이야?”

“응, 오랜만에 소파에서 뒹굴거리고 있어.”

“가족들은?”

대찬은 옆에서 무표정으로 TV를 보는 가족들을 흘끗 보고 대답했다.

“다들 있어.”

“그렇구나. 오늘 나 연예가현장 나오거든? 지금 TV 보고 있으면 틀어서 봐봐.”

“아, 그래? 알았어. 다 보고 나서 전화할게.”

대찬은 전화를 끊고 리모컨을 찾았다.

소파 위에 누워 잠이 든 아버지의 배 위에 올려져 있었다.

대찬은 살금살금 손을 뻗어 리모컨을 쥐었다.

평소 같으면 아빠 안 잔다, 할 법도 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푸푸 숨을 고르고 뱉으며 잠에서 깨지 않았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연세가 드시니까 이젠 리모컨 가져가도 모르시네.’

대찬은 채널을 돌렸다.

TV에는 별로 관심도 두지 않고 책을 뒤적이던 어머니가 대찬을 흘끗 바라봤다.

“웬일로 생전 안 보던 연예뉴스 프로를 다 트냐.”

“뭐든 편식하면 안 좋잖아요.”

“TV는 그냥 안 보는 게 좋아. 회사에서 종일 컴퓨터 들여다봤으면 주말에는 좀 전자파에서 멀어져야지.”

“그럼 또 심심하니깐.”

대찬은 대충 얼버무리며 TV에 집중했다.

윤이영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기습데이트!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요즘 가장 핫한 여배우, 소풍 가는 날의 주연을 맡은 윤이영 씨입니다!”

리포터의 발랄한 목소리가 윤이영을 소개했다.

대찬은 소파 위에서 무릎을 오므려 자기 몸 쪽으로 잡아당기며 집중했다.

“윤이영 씨! 요즘 하루하루가 꿈같으실 텐데, 소감이 어떠세요.”

“정말 말씀하신 대로 꿈같아요. 매일 감사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저희는 외모와 연기력을 겸비한 여배우의 탄생에 감사하고 있는데요.”

윤이영은 얼굴을 붉혔다.

“아유, 부끄럽습니다.”

“영화에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사람을 그렇게 죽이시더니 오늘 모습은 너무 소녀다우시네요.”

“이게 원래 제 성격이에요.”

윤이영과 리포터는 홍대 한복판을 걸었다.

저녁의 홍대는 어마어마한 인파가 운집해있었다.

그 인파의 큰 덩어리 하나가 윤이영을 중심으로 형성돼있었다.

한참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리포터는 그 인파를 향해서 외쳤다.

“여러분! 윤이영 씨 좋아하세요?”

“네에!”

개중에 튀는 녀석이 있기 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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