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71화
식사가 끝나고 홍승연이 맥주 한 잔 하자는 걸 대찬과 윤이영은 극구 뿌리치고 헤어졌다.
앞으로 시사회와 무대인사가 연달아 있어 윤이영을 만나기 어려울 터였다.
게다가 이 ‘소풍 가는 날’이 흥행에 성공하면 기자들도 더 달라붙을 테니 지금처럼 여유로운 데이트는 어려워질 터였다.
이 아까운 시간을 남들에게 쪼개주고 싶지 않았다.
대찬과 윤이영은 잠실에서 성수동까지 걸어서 갔다.
아무도 걸어가지 않는 한밤의 잠실대교는 둘의 은밀한 데이트코스였다.
윤이영은 대찬의 팔을 두 손으로 꼭 잡으며 말했다.
“홍승연 씨, 생각보다도 피곤한 스타일이더라.”
“너도 그렇게 느꼈어?”
윤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본인 말대로 사랑만 받고 자라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고 하지만.”
“차라리 그렇게 새침데기에 말괄량이 스타일이라면 괜찮지.”
윤이영은 대찬을 올려다봤다.
“그럼 어떤 스타일이 안 괜찮은데?”
“그런 스타일은 쉽게 읽히잖아. 그럼 답도 쉽게 나오지. 근데 저렇게 막무가내이면서 속이 검은 사람들은, 상대하기 무지 어렵다고.”
“그거야 원웅 씨가 알아서 잘 풀어야지.”
“당연하지. 나는 내 연애사업 하기도 바쁜걸.”
그 말에 윤이영은 쿡쿡 웃었다.
“나는 무슨 스타일인데?”
“음, 곰인 척 하는 여우 스타일?”
“뭐? 내가 왜 여우야!”
대찬은 흐뭇하게 웃었다.
“아까 홍승연 씨가 나한테 조 차장, 조 차장 하는 거 거슬렸거든.”
“아, 나도 독하게 쏘아붙이려다가 관계가 있어서 참았어.”
“그게 여우같다는 거지. 괜히 독하게 쏘아붙이면 받아칠 명분을 주니까. 딱 절제된 투로 잘 말했어. 고마워.”
“고맙긴. 면전에서 내 남자 깎아내리는 걸 참고 있으란 말이야, 그럼?”
대찬은 말없이 웃으면서 윤이영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윤이영은 기분 좋게 웃으며 뺨을 대찬의 팔뚝에 살포시 갖다 댔다.
한밤의 잠실대교에는 오가는 자동차 소리와 빠르게 흐르는 한강물 소리만 번갈아 들렸다.
다음날.
대찬과 서원웅은 회사에서 만났다.
서원웅은 대찬을 따로 불러 사과했다.
“미안해. 승연 씨가 했던 말, 불편했을 텐데.”
“아, 제가 불편할 건 없죠. 있다고 해도 이영이 덕분에 다 풀렸고. 근데 대표님이 좀 걱정돼서.”
“내가?”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의 연애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거, 오지랖인 건 알아요. 근데 좀…….”
“무슨 말 하고 싶은지는 알겠어.”
대찬은 머쓱하게 웃었다.
“네, 어련히 잘하시겠지만 연애할 때 최소한의 주관은 있어야 해요. 져주는 연애에서도.”
“알았어. 나도 충분히 느끼고는 있었어. 그러도록 해볼게.”
대찬은 그 이상의 말은 잔소리에 불과하기에 입을 다물었다.
그는 서원웅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렇게 자리를 뜨려는데 서원웅이 대찬을 붙잡았다.
“아, 잠깐만.”
“네.”
“내년 상반기 정기인사 실시할 건데, 혁신경영팀에서도 대상자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홍은주 주임은 대리 승진이 거의 확실하고요.”
“유채경 대리도 제 몫은 제대로 해주니까 조금 이르긴 해도 과장으로 진급시키려고 하는데.”
“대표님 동기 라인 덕 좀 보는 건가요.”
서원웅은 피식 웃었다.
“동기 라인으로 치면 조대찬 라인 잡는 게 좋지. 허운은 엉겁결에 진즉 과장 됐잖아.”
“하긴 유채경이 허운보다 못한 건 같이 목욕탕을 못 가는 정도밖엔 없죠.”
서원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홍은주, 유채경은 얼추 정해진 수순이라지만 문제가 있어서.”
“문제요?”
“응, 이번에 혁신경영팀장을 차장급에서 부장급으로 올리려고 하거든.”
“그럼 저를 부장으로 올리시게요?”
서원웅은 대찬을 흘끗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차장으로 오래 있었잖아. 그리고 애초에 그 자리가 차장급으로 둘 만한 보직이 아니야.”
“그래도 부장 되면 완전 아저씨 된 거 같아서요.”
“말도 안 되는 변명 늘어놓지 마. 그냥 부장 해. 이걸로 입씨름하기 싫으니까.”
대찬은 웃음을 흘렸다.
“알았어요. 할게요, 부장.”
“좋아.”
“문제 있다는 게 저를 부장으로 올리는 거였어요?”
서원웅은 고개를 저었다.
“부장으로 올리면 누군가를 차장으로 올려야 하잖아.”
“연차로 따지면 송희근 과장님 차례죠.”
“응, 그렇긴 하지.”
대찬은 서원웅이 주저하는 이유를 알았다.
“한태윤 과장님 사이에서 고민하고 계시구나.”
“사실 내가 고민할 일은 아니야. 고과 매기는 사람은 우리 조대찬 차장님이니까. 누가 좋겠어?”
대찬은 당연히 송희근 과장 아니냐고 말하려다가 입술을 닫았다.
서원웅은 피식 웃었다.
“선뜻 누구라고 못하겠지?”
“그러네요. 조금 더 생각해보고 인사팀에 고과 전달하겠습니다.”
“어련히 잘 결정해주리라 믿을게.”
대찬은 옅은 웃음을 머금고 서원웅의 곁을 떠났다.
대찬은 사무실로 돌아오는 짧은 걸음에서 생각이 많아졌다.
송희근과 한태윤.
둘에게는 진급을 시켜야 할 이유가 명확했고, 또 시키지 말아야 할 이유가 명확했다.
송희근의 연차는 꽉 찼다.
차장으로 올릴 만하지만 한태윤에 비해 업무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한태윤 과장은 차장이 될 만한 자질이 충분했지만 연차가 약간 모자랐다.
하지만 송희근 과장을 차장으로 올리면 한태윤 과장의 진급은 늦어질 수밖에 없다.
혁신경영팀에 차장을 두 명 두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또 그런 파격을 베풀 정도로 한태윤 과장의 퍼포먼스가 군계일학은 아니었다.
결국 고민과 결정은 대찬의 몫이었다.
‘송이냐, 한이냐.’
대찬은 사무실로 향하다가 속이 답답해져 담배를 피우러 갔다.
마침 허운이 있었다.
허운은 대찬을 보고 알은체를 했다.
“오늘따라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으세요? 무슨 일 있어요?”
“허 과장님 완전 궁예네.”
“왜요, 제가 타먹는 월급의 8할은 우리 조 차장님 어심을 헤아리는 덕택이니까 털어놔 봐요.”
“어심은.”
대찬은 피식 웃으며 일축했다.
하지만 허운은 집요했다.
“아, 빨리요. 말씀 안 해주시면 저 혼자 소설 쓰게 되잖아요. 그냥 시원하게 털어놔요.”
“쓸데없이 티 안 낸다고 약속해.”
“당연한 말씀을.”
대찬은 담배를 피우며 허운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허운은 팔짱을 끼고 대찬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제가 차장님이래도 고민되겠는데요.”
“사실 내부자인 그쪽한테 털어놓을 일은 아닌데.”
“에이, 섭섭하게 왜 그래요. 저는 차장님의 영원한 걱정인형이거든요.”
“이렇게 징그럽게 생긴 인형도 있어? 암튼, 그냥 들어만 둬. 일언반구 의견 내지 말고.”
허운의 의견이 무엇이든, 대찬의 결정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
그건 대찬을 위해서도 허운을 위해서도 지켜져야 했다.
허운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근데 송 과장님, 이번에 진급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계시던데.”
“…그래?”
“네, 뭐 회사일이 인정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지만 괜히 찝찝하긴 해요.”
“그렇지, 찝찝하지.”
“만약 한 과장님을 차장으로 올릴 거면 차장님이 위로는 좀 해주셔야 될 거 같은데.”
대찬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결국 알게 모르게 허운의 말이 대찬의 판단에 개입하게 되었다.
대찬이 사무실로 돌아가니 송희근 과장의 목소리가 유독 낭랑하게 들렸다.
누가 봐도 승진을 앞두고 들뜬 사람 같았다.
대찬은 사무실에서 자신의 고민을 내색하지 않았다.
결단을 주저하는 걸 팀원들에게 내비친다면 대찬의 리더십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다.
조금의 동요도 없는 목소리로 무 자르듯 결단해야만 분란을 최소화할 수 있다.
그렇게 마음 한 편에 이 불편한 고민을 안고 업무를 보던 중.
옥문영 상무가 대찬을 찾아왔다.
“조 차장, 오늘 바빠?”
“아뇨, 평소랑 비슷합니다.”
“그럼 퇴근하고 간단히 대포나 한잔 할까.”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고민이 있으니 미소도 억지미소로 지어졌다.
“옥 상무님이랑 마시면 간단히 한잔이 안 되는데요.”
“나도 요즘 영 속이 쓰려서 과음은 금물이야. 간단히 한잔 하자고. 이따 연락하지.”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찬은 퇴근 후 옥문영 상무와 그야말로 대폿집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허름한 가게에 마주앉았다.
술이 두어 순배 돌자, 옥문영 상무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죽겠지? 누굴 차장으로 올릴지 고민돼서.”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그렇게 티 났어요?”
옥문영 상무는 흐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티는 안 냈는데 견적이 딱 나오잖아. 송희근 그 양반, 과장자리에 앉아있는 지금도 계륵 같은 존재야. 그러니 차장은 어림도 없지.”
“하지만 송 과장님을 제치고 한 과장님을 점프시키는 것도 부담은 따라요.”
“그렇기야 하지. 근데 그건 뭐에 대한 부담일까?”
대찬은 눈을 한번 깜빡이고 대답했다.
“사무실 분위기에 대한 부담이죠.”
“분위기? 무슨 분위기? 송 과장이 부하직원들한테 무시당할까봐? 아니면 연공서열 무시한 인사 때문에 아노미 상태에 빠질까봐?”
옥문영 상무의 질문에 대찬은 곰곰이 생각했다.
그녀의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기엔 하찮은 이유였다.
근데 아니라고 대답해봤자 그 다음 말이 궁색했다.
그럼 왜?
옥문영 상무는 피식 웃었다.
“조 차장이 신경 쓰는 건 그저 송 과장의 기분뿐이야.”
“…상무님 말씀이 맞습니다.”
“일개 부하직원의 기분을 신경 쓰느라 그릇된 판단을 한다, 그런 사람을 제대로 된 리더라고 할 순 없지.”
“네, 그 말씀도 맞습니다.”
옥문영 상무는 웃으면서 대찬의 잔을 채웠다.
“사무실 분위기라고 했어? 한태윤을 차장으로 올리면 분위기가 어떻게 될까.”
“서먹해지지 않을까요.”
“그건 당장의 분위기지. 장기적으로 봤을 때 오히려 분위기도 좋아질 거라 봐.”
“좋아진다는 건…….”
옥문영 상무는 잔을 내밀었다.
대찬은 잔을 부딪쳤다.
그녀는 술을 죽 들이켜고 젓가락으로 파전을 죽 찢어 먹었다.
“능력만으로 승진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줄 수 있지.”
“하지만 조직의 안정적인 기류가 일순 정글로 돌변할 수도 있습니다.”
“안정적인 기류는 달리 말하면 나태한 기류야.”
“팀워크가 망가진다고 생각할 순 없을까요.”
“팀워크가 망가져?”
“색깔 진한 물감만 써서는 훌륭한 그림이 안 나오잖습니까. 진한 놈 묽은 놈 잘 다뤄야 걸작이 나오죠.”
옥문영 상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소한 팀장의 바로 아래에서 팀을 조율해야 할 차장은 무조건 진한 색이어야 할 거 같은데?”
“냉혹하시군요.”
옥문영 상무는 흐흐 웃었다.
“어쩔 수 없어. 나는 태생이 그쪽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니까.”
“어째서죠?”
“한 과장 대신 송 과장이 올라가는 조직이었다면 옥문영은 그저 공장노동자로 회사생활 끝냈을 테니까.”
“그렇긴 하네요.”
“피터의 법칙이라고 들어봤어?”
대찬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람은 자신이 무능력해지는 한계까지 도달하려는 경향이 있다.”
“유능한 사람도 최대한으로 진급하면 결과적으로 무능한 사람이 된다는 거지.”
“네, 그러니 능력과 성과에 기초한 인사가 이뤄져야 하는 거고요.”
옥문영 상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 차장은 큰일 할 사람이야. 필래든 로튼 프룻츠든 어디서든. 잔정에 이끌리면 안 돼.”
“그거야 명심하고 있습니다만.”
옥문영 상무는 의자에 허리를 붙이며 익살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큰일 할 사람은 남의 말에 휘둘려서도 안 되지. 내가 한태윤 영업한다고 그 말만 쪼르르 따라가는 것도 웃기는 거야.”
“이제 와서 그렇게 말씀하시기 있어요?”
대찬의 가벼운 항의에도 옥문영 상무는 몇 마디를 더 얹었다.
“송 과장도 장점은 분명히 있어. 확실한 지시만 있으면 1인분은 하거든. 좀 사람이 가볍고 좀스러워서 그렇지.”
“송 과장은 이래서, 한 과장은 저래서. 어느 장단에 춤을 출까요.”
대찬이 웃으면서 말하자 옥문영 상무도 따라 웃었다.
“장단이 어디 있어. 조 차장은 지금 무반주 댄스 춰야하는 거야.”
“고민 좀 덜어주시려고 불러내셨나 했더니 오히려 고민을 더 얹어주시네요.”
“고민 좀 덜어줄까?”
옥문영 상무의 말에 대찬은 얼른 대답했다.
“네.”
“뭐가 됐든 어줍지 않은 위로는 하지 마. 듣는 사람에게도 그다지 이롭지 않고, 조 차장한테는 독약이니까.”
대찬은 옥문영 상무의 말을 묵묵히 듣기만 했다.
대찬은 그녀와 헤어지고 결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