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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70화 (269/556)

난 할 수 있어 270화

그렇게 영화에 집중하던 대찬은, 시계를 흘끗 봤다.

19시 42분 20초.

윤이영이 적어놓은 시간까지는 1분 30초가 남았다.

윤이영이 연기한 여주인공이 첫 번째 복수의 대상을 죽인 다음의 장면이었다.

‘뭐야, 나한테 협박이라도 하려고 시간 적어놓은 거야?’

대찬은 등골이 오싹했다.

피 묻은 옷을 입은 채 뚜벅뚜벅 성당으로 걸어가는 여주인공.

한밤중에 성당을 찾은 그녀는 고해성사를 하게 된다.

반대편에 앉은 젊은 신부.

김은호 디모테오.

그는 고아인 그녀와 함께 보육원에서 자란 친구였다.

여주인공은 삭막한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사람을 죽였어요. 죽어도 싼 놈을 죽였어요. 잘한 건가요, 잘못한 건가요.”

이야기를 듣는 신부는 잠깐의 침묵 후에 답변한다.

“죄의 심판은 오로지 하느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내려집니다. 자매님에게는 그런 권능이 없습니다. 회개하십시오. 그것뿐입니다.”

“회개하기 싫으면요?”

“…회개하십시오.”

“하기 싫다고, 은호야.”

“자매님은 저를 모르고 저 또한 자매님을 모릅니다.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마십시오.”

“건너편 고해소에도 누구 들어있는 거 알지? 저 인간은 뭘 잘못했게.”

“저 형제님께는 아직 고해창을 열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 자매님의 고해성사를 듣고 있습니다.”

“은호야, 왜 이래. 빡빡하게.”

“자매님.”

“건너편의 저 새끼는 날 강간했어. 내 친구도 강간했어. 저런 새끼도 회개하면 구제해주니?”

“하느님이 심판하실 겁니다.”

“재미없네.”

여주인공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 건너편의 고해소로 갔다.

벌컥, 문을 여니 단단히 결박된 중년이 눈을 크게 뜨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여주인공은 품고 있던 식칼을 들어 중년의 심장을 쑤셨다.

돼지 멱따는 소리가 극장 안에 소란스럽게 울렸다.

대찬은 시계를 봤다.

다행히 윤이영이 말한 시간은 아니었다.

‘어우, 연기 한번 살벌하게 하네.’

대찬은 진저리를 쳤다.

여주인공은 계속 중년을 쑤시며 덤덤하게 말했다.

“알았어. 회개할게. 근데 어차피 한 번 죄 지으나 두 번 죄 지으나 회개는 한 번이면 되잖아? 가성비 좋게 살아야지.”

그러자 마침내 김은호 디모테오도 더 버티지 못했다.

고해소를 뛰쳐나와 주인공의 손목을 잡아챘다.

김은호 디모테오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오주영!”

주인공, 오주영은 김은호 디모테오를 봤다.

내내 건조한 표정.

식칼에 난자당한 중년은 죽어가고.

오주영은 김은호 디모테오의 손에 칼을 쥐여 준다.

“있지도 않은 하느님 대신 네가 나를 심판해. 네 손이라면 난 죽어가면서 회개할 수 있어.”

“넌 미쳤어.”

“미친 게 아니야. 미치게 된 거야.”

김은호 디모테오는 칼을 내팽개치고 구급차를 부르려다 중년의 숨이 멎은 걸 보고 우두망찰했다.

오주영은 김은호 디모테오의 어깨를 짓누르며 마구 키스를 퍼붓는다.

그러면서 말했다.

“두 번 죄 짓고 회개하느니 세 번 죄 짓고 회개할게.”

윤이영이 적어준 시간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날 사랑해줄 순 없어? 이렇게 망가진 나를 사랑해줄 순 없어?”

“그럴 순 없어.”

“순진한 남자의 마음으로, 그게 아니면 어린 양을 구원하는 사제의 마음으로라도 사랑해줄 순 없니?”

“…….”

“김은호로도, 디모테오로도 날 사랑해줄 수 없는 거야?”

“깨끗했던 그때의 네가 사랑을 고백했더라면, 난 사제복을 벗었을 거야.”

“…지금의 나는……?”

“지금의 넌, 너무나도 더러워졌어.”

“…….”

“내가 지금 사제복을 벗으면 널 조금도 동정하지 않을 거야. 증오할 거야. 경멸할 거야. 사람으로 취급 안 할 거야. 내가 지금 사제복을 입고 있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

여자의 눈에는 절망이 가득 찬다.

김은호 디모테오는 조금의 동정도 없는 목소리로 말한다.

“값싼 회개를 하려면 적어도 속세의 심판을 받아. 그래야 디모테오가 아니라 김은호로서 너랑 말을 섞을 테니까.”

김은호 디모테오는 그렇게 말하고 휙 주인공을 등지고 사라졌다.

윤이영이 말한 시간은 그게 끝이었다.

대찬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뭐야……? 이걸 왜 굳이 강조한 거지?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대찬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영화가 끝나고, 윤이영은 감독, 배우들과 더 시간을 보내지 않고 대찬에게로 왔다.

대찬은 살짝 놀랐다.

“동료들이랑 시간 같이 안 보내도 돼?”

“내일부터는 계속 무대인사 다녀야 돼서 종일 붙어있을 거거든. 그래서 오늘은 찢어졌어.”

“아, 잘됐네.”

그녀는 부끄럽게 웃으며 말했다.

“영화 어땠어?”

“저번에 연기 못한다고 한 거 취소할게. 아직도 닭살 돋아있어.”

“막 주인공이랑 내가 겹쳐 보이거나 그런 건 아니지?”

“방금 보고 나와서 아니라고는 못하겠는데.”

“그럼 안 돼, 진짜.”

“식칼로 내 창자 쑤실까봐 지금 막 자동으로 가드 올라가는 거 보이지.”

“너무해.”

대찬은 익살스럽게 웃었다.

“그만큼 연기가 실감났다는 거지.”

“영화 보니까 어때? 흥행할 거라는 말, 취소하고 싶어졌지?”

“아니, 전혀. 잘될 거라니까.”

“두고 보자고.”

“내가 할 소리.”

대찬은 윤이영과 옥신각신하다가 물었다.

“일단 여기는 떠나야지? 보는 눈이 너무 많으니까.”

“그래도 톱스타가 주연이 아니라서 구름 같은 팬들이 진 치고 있지는 않아서 다행이야.”

“머지않아 그렇게 될 테니까 지금 실컷 즐겨둬. 그럼 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러자. 배고파.”

둘이 보는 눈을 의식해 적정거리를 유지하며 식당으로 향하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붙들었다.

“잠깐만요!”

대찬과 윤이영은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홍승연이었다.

그녀는 대찬과 윤이영을 향해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서원웅은 느릿느릿 뒤를 따랐다.

대찬은 홍승연을 보고 말했다.

“아, 승연 씨.”

“두 분이서 어디 가세요?”

윤이영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식사나 하려고요.”

“이영 씨, 영화 너무 잘 봤어요. 연기 진짜 소름 끼치더라.”

“감사합니다, 하하.”

윤이영은 머쓱하게 웃었다.

홍승연은 흐뭇하게 웃고는 그들에게 제안했다.

“식사하러 가는 거면 우리랑 같이 갈래요?”

“네?”

“왜, 그래도 이번에 막 개봉하는데 괜한 스캔들에 휘말리느니 우리랑 같이 식사하는 편이 좋지 않아요?”

윤이영은 살갑게 웃었다.

“꼭 스캔들 걱정을 할 게 아니더라도 다 같이 식사하면 좋죠. 대찬 씨도 괜찮죠?”

“아, 네.”

존댓말로 말하는 윤이영에게 대찬도 고개를 끄덕이며 덤덤히 대답했다.

서원웅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진짜 괜찮겠어요? 둘이 오붓하게 시간 보내려는데 우리가 반응하는 건 아닌지.”

“원웅 씨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돼요?”

“아, 그런가요. 미안해요.”

홍승연의 가벼운 질책에 서원웅은 다시 멋쩍게 웃었다.

대찬은 그 사이 윤이영과 시선을 교환했다.

무언의 의사소통이 이뤄졌다.

‘같이 먹어도 괜찮아?’

‘괜찮아, 정말.’

윤이영의 웃음을 보고 대찬이 서원웅과 홍승연에게 말했다.

“같이 식사하시죠. 승연 씨가 말씀하신 대로 개봉 때부터 쓸데없는 스캔들로 초 칠 수는 없죠.”

“역시 조 차장님은 합리적이시네요.”

그 말에 윤이영이 웃으면서 말했다.

“에이, 회사 밖에서까지 차장님으로 부를 필요는 없지 않아요?”

“네? 그럼 조 차장님을 조 차장님으로 부르지 뭐라고 부를까요?”

“그냥 조대찬 씨, 조금 친밀하게는 대찬 씨로 부르면 되잖아요. 대찬 씨도 홍승연 씨를 승연 씨라고 하는데.”

홍승연은 빙긋 웃었다.

“이영 씨는 조 차장님 보자마자 대찬 씨라고 했나 봐요?”

“아뇨, 저도 처음에는 조 차장님이라고 했어요. 비즈니스로 처음 뵀으니까 그렇게 부르는 게 당연하잖아요.”

“음, 뭐…….”

윤이영은 더 해사하게 웃었다.

“여기 원웅 씨도 있는데 계속 조 차장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남자 둘이 불편하지 않겠어요?”

홍승연은 서원웅의 허리를 쿡 찔렀다.

“지금 불편해요?”

“아, 불편할 건 없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조 차장보다 대찬 씨가 낫죠.”

“…그럼, 그래요. 그래도 원웅 씨는 이럴 때 내 편 들어줘야 하는 거예요.”

“내가 또 하나를 놓쳤네.”

서원웅은 빙긋 웃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넷은 한 고급 레스토랑에서 마주앉아 식사했다.

대찬은 역시 윤이영하고 둘이 먹는 게 좋았겠다고 생각했지만, 스캔들을 염려하는 홍승연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물론 홍승연은 정말로 그들이 걱정되어 한 말은 아니겠지만.

한창 식사를 하던 중에 서원웅과 홍승연이 서로 속닥거렸다.

그 틈을 타 대찬이 윤이영에게만 말했다.

“근데 초대권에 적힌 숫자.”

“숫자? 아, 그 시간.”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간에 맞춰서 딱 집중했는데, 별다른 감상은 못 받았는데? 내가 너무 둔한 건가?”

“아, 아니……. 그게 내가 본 편집본에서는 그 시간대에 영화 분위기랑 딴판인 풋풋한 고백씬이 들어 있었거든.”

“근데 최종본에서 잘렸구나.”

윤이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영화 분위기를 해친다고 해서. 그래서 그 시간에 엉뚱한 부분이 나왔던 거야. 지웠어야 했는데 깜빡했네.”

“그래도 의미가 아주 없지는 않았어. 완전히 정신이 무너진 오주영의 고백을 들은 김은호한테 감정이 이입됐다니까.”

둘의 말을 듣던 홍승연이 팔꿈치를 식탁 위에 올리며 관심을 보였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해요?”

“아, 잠깐, 영화 얘기 좀……. 그, 고해성사하는 장면이요.”

윤이영의 말에 홍승연은 손뼉을 쳤다.

“아, 그 장면! 은호가 너무 밉더라.”

“그러셨어요?”

“무슨 일이든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고 감싸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오주영이 재미로 사람 죽인 것도 아니고.”

그 말에 윤이영은 반대했다.

“저는 생각이 조금 달라요.”

“그래요? 어떻든 배역에 몰입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생각이 다른데 어떻게 몰입을 하셨을까.”

“오주영의 감정에는 몰입했어요. 그런데 김은호가 오주영의 사랑을 받아줄 필요가 없다는 거죠.”

“왜요? 김은호도 오주영을 사랑했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살인자랑 엮이기 싫은 거지.”

“그게 당연하지 않아요?”

윤이영의 말에 홍승연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사랑이 어떻게 변해요? 그런 남자 매력 없더라.”

윤이영은 대찬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내가 나중에 저 지경까지 되면 절대로 나 받아주지 말아요, 알았죠?”

“어, 이거 지금 테스트인가?”

“테스트 아니고, 진지하게요! 나는 대찬 씨가 저래도 경찰부터 부를 거니까.”

대찬은 팔짱을 끼면서 웃었다.

“뭐, 저렇게 될 일도 없지만 가정만 하자면, 오주영의 고백은 폭력이죠. 자신의 비극을 남에게도 전가하는.”

“참 쿨한 걸 넘어서 냉혹한 커플이시네.”

홍승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찬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럼 승연 씨는 원웅이가 사람 죽이고도 결혼하자고 하면 할 거예요?”

“음, 원웅 씨가 조금 더 확실한 사랑을 보여주면?”

“에이, 그게 뭐예요.”

홍승연은 대찬의 말을 가뿐히 무시하고 서원웅에게 말했다.

“원웅 씨는 어때요. 내가 오주영처럼 고백하면 나 버릴 거예요?”

“나도 조금 더 확실한 사랑이 필요하겠는데요?”

“실망이에요.”

홍승연은 찌릿 눈빛을 쐈다.

윤이영은 살짝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승연 씨는 되고, 원웅 씨는 안 돼요?”

“저는 사랑 받는 데 익숙하다고요. 구애는 항상 제 상대의 몫이었어요. 근데 원웅 씨가 이렇게 미적대면, 재미없지.”

“아… 참 행복한 인생 사셨네요.”

“지금 비꼬는 거예요?”

윤이영은 웃으며 손사래쳤다.

“그럴 리가요. 부러워서 그래요, 진심으로.”

홍승연은 파스타를 돌돌 말던 포크를 내려놓고 서원웅에게 물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줄게요. 어떡할래요?”

“네? 하, 하하… 무슨 일이 있어도 받아줘야죠. 승연 씨가 고백하기 전에 제가 먼저 고백해버릴게요.”

“좋았어, 만점이야!”

그 장면을 대찬과 윤이영은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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