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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69화 (268/556)

난 할 수 있어 269화

사람의 약한 온기가 느껴질 거리였다.

대찬은 말없이 슬그머니 윤이영의 어깨를 감쌌다.

윤이영은 푸근하게 웃으며 대찬의 팔에 얼굴을 살짝 기댔다.

그 자세로 윤이영이 대뜸 물었다.

“근데 아까 있잖아.”

“응?”

“이것저것 생각 안 하고 대놓고 나 만나게 된 게 내가 좋아져서라고 했지.”

“응.”

“그럼 처음에 내가 막 매달렸을 때는 별로였어, 내가?”

대찬은 윤이영을 흘끔 내려다봤다.

윤이영도 대찬의 시선을 느끼고 흘끔 올려다봤다.

대찬은 말없이 몇 걸음 더 걷다가 대답했다.

“그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어.”

“그럴 만한 이유가 뭔데?”

“그때는 사귀던 사람이랑 헤어진 지 얼마 안 됐을 때였어.”

“아.”

윤이영은 그렇게 반응하고 다시 몇 걸음을 걷다가 물었다.

“그 사람은 몇 번째 사귀던 사람이야?”

“처음.”

“뭐? 서른두 살 먹도록 여자를 한 번밖에 안 만났다구?”

“그럴 수도 있지.”

대찬은 어쩐지 부끄러워져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윤이영은 흐흐 웃었다.

“아니 뭐, 그럴 수도 있긴 한데 조대찬 씨는 여럿 후리고 다녔을 거 같아서.”

“내가 그렇게 제비 관상이야?”

“아니 그건 아니구.”

윤이영은 대찬의 팔을 양팔로 꼭 껴안으며 말했다.

“그럼 전에 사귀던 분은 어떤 분이었어?”

“사귀는 사람한테 전에 사귀던 사람 얘기를 하라고?”

“내가 물어봐서 대답하는 건데 뭐 어때.”

“나는 당신 전 남친 얘기들은 별로 안 듣고 싶거든.”

“난 듣고 싶다니까.”

“싫어. 안 말해. 그런 얕은 수작에 넘어갈 줄 알아?”

윤이영은 웃으면서 대찬의 배를 꼬집었다.

대찬은 무방비상태로 당했다.

“뭐, 뭐야!”

“이래도 안 말해?”

“아, 하지 마!”

“애! 해지 매!”

“이상하게 따라하지 마.”

“이섕해개…….”

윤이영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장난치는 걸, 대찬은 그녀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막으며 제지했다.

윤이영은 놀란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그윽하게 감았다.

중간에 고장 난 가로등 하나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대찬이 아침에 일어나 넥타이를 매고 있는데, 윤이영이 컵을 불쑥 내밀었다.

대찬은 그것을 흘끔 보며 물었다.

“이게 뭐야?”

“요구르트랑 마 같이 넣고 갈았어. 몸에 좋아.”

“…맛이 있을까?”

윤이영은 대찬을 째려보며 말했다.

“꿀도 타서 맛있어. 얼른 먹어. 맛이 없어도 감사합니다, 하고 먹어야지.”

“감사합니다.”

대찬은 그걸 죽 들이켰다.

그 사이에 윤이영이 말했다.

“혹시 수요일 저녁에 시간 돼?”

“수요일? 왜?”

대찬은 한 번에 다 들이켜고는 컵을 싱크대로 갖다 놓으면서 물었다.

“돼, 안 돼?”

“돼. 바쁜 일은 다 끝나서 요즘 좀 한가하거든.”

“그래? 그럼 그날 잠실 필래시네마로 올 수 있어? 7시까지.”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잠실 필래시네마면 사무실 바로 근천데? 포복으로 가도 7시까지 갈 수 있어.”

“잘 됐다.”

윤이영은 웃으면서 말했다.

대찬은 윤이영의 의도를 대충 짐작했다.

“다른 사람이 극장에서 보자면 같이 영화 보자는 걸로 알겠는데, 우리 대배우께서 그러시는 걸 보니 무슨 행사라도 있나봐?”

“응, 시사회 있거든.”

“오, 소풍 가는 날?”

“응, 오빠가 추천해줬잖아. 꼭 하라고.”

“그랬지. 한창 촬영하더니 이제 개봉하는구나. 흥행할 거야. 장담해.”

윤이영은 미소를 머금었다.

“사실 이게 흥행할지 아직 미심쩍긴 한데, 그래도 작품성도 좋고 캐릭터도 매력적이었으니까. 그걸로 만족이야.”

“이렇게 사람 말을 못 믿어서야. 흥행한다니까.”

“흥행 못하기만 해봐라. 밥 열 번 사야 돼.”

“벌금이 너무 귀여운데? 흥행하면 어떡할 거야?”

“흥행하면 뭔들 못해줄까.”

“백지수표는 위험한데.”

대찬은 흐흐 웃었다.

윤이영은 눈을 잠깐 흘기더니 티켓 한 장을 내밀었다.

대찬은 티켓을 살폈다.

“VIP시사회 초대권. 이거 나 가도 되는 거야? 난 VIP 아닌데.”

“주연배우 애인이 VIP가 아니면 누가 VIP야?”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비공개 애인이잖아.”

“부담 가질 거 없어. 유명인들도 많이 오지만 일반인들도 많이들 오거든.”

“알았어. 시간 내서 꼭 갈게.”

윤이영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네 사장님하고 미래 사모님께도 초대장이 갔을 거야.”

“우리 사장님? 서원웅?”

“응, 바빠서 오실지 안 오실지 모르겠지만.”

대찬은 피식 웃었다.

“걱정 마. 요즘 그 양반도 많이 심심할 걸? 회사가 전체적으로 한가해.”

“그래?”

“응, 불참하면 안 온 거지 못 온 게 아니니까 내가 억지로 끌고라도 갈 거야.”

“그 애인 분도 같이 오시라고 해. 잘 어울리더라.”

“알았어. 나 이제 출근할게”

대찬은 빙긋 웃으며 윤이영에게 가볍게 키스했다.

“잘 다녀와.”

“다녀오라니까 퇴근하고 다시 여기로 와야 할 거 같잖아.”

“으이그, 꼭 그렇게 딴죽을 걸어야 속이 풀리지?”

대찬은 씩 웃었다.

“갈게.”

“그래, 가라, 가!”

윤이영은 배시시 웃고 탁자에 몸을 살짝 기대며 대찬을 배웅했다.

수요일.

대찬은 일찌감치 퇴근했다.

서원웅과는 함께 퇴근했다.

“오늘 시사회, 가실 거죠?”

“가야지. 약속도 이미 잡아놨는데.”

“홍승연 씨는 극장으로 바로 오신대요?”

“응.”

서원웅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헤벌레 웃는 그의 낯을 보고 대찬은 지청구를 했다.

사옥을 나서자마자 대찬은 칼같이 반말로 돌아왔다.

“그렇게 좋냐?”

“몰라.”

서원웅의 대답이 귀여워서 대찬은 피식 웃었다.

“좋으면 좋은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몰라는 뭐야?”

“말했잖아. 처음이라 떨리는 건지 진짜 좋은 건지 모르겠다고. 이유 불문하고 좋냐면, 좋지.”

“잘 되는 거 같아서 나도 좋네.”

서원웅은 쭈뼛거리면서 말했다.

“양가 어른들께서는 빨리 날짜 잡으라고 성화셔. 아마 곧 잡지 않을까 싶어.”

“결혼식 날짜를? 벌써? 하긴 회장님이나 극동일보 홍 사장이나 너희 로맨스에는 관심이 없으시겠지. 이건 일종의 혼인동맹이니까.”

“나도 마냥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해.”

“와, 너 진짜 푹 빠졌구나.”

대찬은 실실 웃었다.

천하의 숙맥 서원웅의 입에서 과감한 결혼얘기까지 나온다.

하기야 서원웅의 나이가 해를 넘기면 벌써 서른셋.

본인이나 어른들이나 서두르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됐다.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사회는 나한테 맡겨줄 거지?”

“그럼, 네가 아니면 누구한테 맡기겠어.”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대찬과 서원웅은 시사회장으로 향했다.

잠실 필래시네마는 사무실에서 대로만 하나 건너면 되었다.

극장에 도착한 대찬은 홍승연에게 인사를 건넸다.

“승연 씨, 일찍 오셨네요.”

“아, 조 차장님.”

홍승연은 꼭 대찬을 조 차장이라고 불렀다.

어떻게 부르든 관계야 없었지만 회사 밖에서도 직급으로 불리는 게 반갑지만은 않았다.

더군다나 홍승연의 연인인 서원웅이 대찬의 상사라는 걸 고려하면 모종의 의도가 깔려있는지, 쓸데없는 의심까지 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괜히 한 마디 보태기에는 홍승연의 표정이 너무나도 천진난만했다.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 저는 없는 사람인 셈 치세요. 두 분 분위기 방해할 생각 없으니까.”

“에이, 배려하는 척 하시기는.”

홍승연의 반응에 대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척이라뇨. 진짜 배련데.”

“조 차장님도 어차피 저희한테 관심 없으시잖아요. 오늘 시사회, 피앙세가 무려 주연배우이신데.”

“…제가 뭐 그런 낌새를 보이고 다녔나요?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씀을…….”

홍승연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저는 뭐 듣는 귀 없는 줄 아세요? 지난번에 우리 스포츠신문 기자한테 뒤 밟히셨잖아요. 보도는 막았어도 퍼질 얘기는 다 퍼졌죠.”

“아, 네.”

대찬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저 하는 인사치레에 알았다고 하면 될 일이지, 구태여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마저 끄집어낸다.

대찬은 간단히 목례했다.

“암튼, 영화 재밌게 보세요.”

“조 차장님도요.”

대찬은 그들과 찢어져 시사회장으로 들어갔다.

그러는 사이에 익숙한 얼굴들이 등장했다.

VIP 시사회답게 연예계 스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도체 공장의 클린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에어샤워를 꼭 해야 하듯, 그들은 시사회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한바탕의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꼭 받아야만 했다.

대찬은 그들을 신기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면면이 대단하네.’

윤이영 주연의 ‘소풍가는 날’은 상업영화치고는 저예산이었다.

아직 유명세가 크지 않은 윤이영을 원톱 주연으로 내세웠을 만큼 상업성보다는 작품성에 초점을 맞춘 영화였다.

그럼에도 웬만한 한국 사람들은 얼굴을 알아볼 연예인들이 얼굴을 비췄다.

‘외부에서 거는 기대가 크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원래 다 이런 건지…….’

대찬은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새삼 감탄했다.

그리고는 초대권을 꺼내 좌석을 확인했다.

“F10. 명당자리네.”

대찬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런데 초대권에는 좌석 옆에 다른 숫자가 쓰여 있었다.

컴퓨터로 입력한 활자가 아니라 손으로 쓴 숫자였다.

19:43:50~19:44:11.

‘뭐야, 이게……?’

대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사회는 오후 7시, 그러니까 19시에 시작된다.

대찬은 그게 시간을 의미한다는 걸 알았다.

‘영화 내내 시계만 보게 생겼네.’

대찬은 피식 웃으며 착석했다.

서원웅 커플은 대찬보다 세 줄 앞에 있었다.

둘이서 복작대는 꼴을 보니, 괜히 눈꼴이 시려서 대찬은 부러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했다.

윤이영을 비롯한 출연진과 감독이 관객들의 앞에 나서서 무대인사를 했다.

대찬은 윤이영의 말에만 관심이 있었다.

윤이영은 마이크를 잡고 민망하게 웃었다.

“부족한 제가 주연배우의 자격으로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인사드리게 되어 참 감개무량합니다.”

그녀의 말에 대찬은 박수로 화답했다.

그가 먼저 박수를 치자, 박수를 칠 생각이 없던 관객들도 덩달아 박수를 쳤다.

윤이영은 대찬 쪽을 바라보며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이번 영화는 제 첫 주연작이라 부담이 많았습니다. 혹시 저 때문에 훌륭한 시나리오를 망치지 않을까 염려도 됐는데요.”

‘거짓말. 흥행 안 될까봐 간 본 거면서.’

대찬은 혼자만 아는 비밀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저한테 힘을 줬어요. 이 영화 꼭 해라. 잘될 거다. 너한테도 좋은 기회이고, 이 역할도 너 아니면 안 된다고.”

“그 한 사람이 누구였을까요?”

영화 시사회만 숱하게 해왔던 사회자가 슬쩍 윤이영에게 물었다.

윤이영은 겸연쩍게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그건 비밀이에요. 소중한 사람이에요.”

“소중한 사람이면, 애인?”

“소중한 사람이 다 애인은 아니잖아요. 그냥 소중하다고만 할게요.”

노련한 사회자는 이상의 질문은 분위기만 더 불편하게 만들 뿐이란 걸 알고 웃으며 물러났다.

윤이영은 웃으면서 마저 말했다.

“아무튼, 이 자리를 빌려서 그분께 감사하다는 말 전할게요. 그리고 이 자리를 채워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무대인사가 끝나고 영화가 상영되었다.

대찬은 첫 번째 삶에 이어 두 번째 관람이었다.

‘나도 이 영화가 흥행할 줄은 몰랐지.’

대중의 취향을 비껴간 영화였다.

철저히 몰락한 여자가 철저히 타락하여 철저히 복수의 쾌락을 즐기는 영화.

결국 주연을 맡은 여배우의 연기력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 영화였다.

영화는 내내 삭막하고 먹먹하고 답답했다.

대찬에게는 더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처절한 삶을 영위하는 여자가 윤이영의 모습을 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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