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할 수 있어-266화 (265/556)

난 할 수 있어 266화

“어차피 초기 투자비용은 많이 필요 없어요. 은 교수도 그렇게 말했고요. 로튼 프룻츠의 여유자금이랑 제 사비를 좀 털어서 해볼 생각이에요.”

“그럼 나도 회사 돈은 못 털지만 사비를 좀 털어볼까.”

“그러실 거 없어요.”

서원웅은 씩 미소를 지었다.

“왜? 나도 로튼 프룻츠 주주야. 이건 필래 비바체 대표가 아니라 로튼 프룻츠 주주 자격으로 쾌척하는 자금이라고.”

“안 그러셔도 되는데.”

“아무리 초기비용이 적게 들어간다고 해도 부담 안 될 순 없잖아.”

“틀린 말씀은 아니죠.”

서원웅은 대찬의 손을 톡톡 건드렸다.

“받아둬. 어차피 나도 많은 돈 내놓을 작정은 아니니까.”

대찬은 서원웅을 마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럴게요.”

“연구에 진척이 있으면 나한테도 귀띔해줘. 돈 싸들고 타이밍만 재고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대찬은 서원웅으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안고 그의 앞을 나섰다.

은오영 교수의 PT가 열리는 당일.

대찬은 로튼 프룻츠 사무실의 좁은 회의실에 앉았다.

그의 좌우로 로튼 프룻츠의 직원들이 착석했다.

개중 몇몇은 직원으로 위장한 사람들이었다.

대찬은 첫 번째 삶이나 지금이나 철저히 문과적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은오영 교수가 조금 난해한 말로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해도 알아챌 재간이 없었다.

그렇기에 대찬을 대신해 은오영 교수가 참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분별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대찬은 주변을 수소문해 믿을 만한 사람들로 진용을 꾸렸다.

관련 분야의 교수 몇몇과 변리사를 섭외해 앉혔다.

은오영 교수는 전혀 긴장하지 않는 모습으로 그들 앞에 섰다.

대찬은 물 한 모금으로 입을 축이고 말했다.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그리고 최대한 쉬운 말로. 여기는 다 문외한이니까.”

“그렇게 하죠.”

은오영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이 했던 사업을 설명했다.

은오영 교수가 만든 PT 자료는 일목요연했다.

군더더기가 없이, 간단한 도식과 짧은 설명으로만 이뤄져 있었다.

자료에 담기지 못한 자세하고 난해한 내용은 은오영 교수가 말로 풀어 설명했다.

“영국의 처칠은 일찍부터 배양육의 가능성을 예견했습니다. 미래에는 닭 날개를 먹으려고 닭을 기르는 게 아니라, 닭 날개만 배양하게 될 것이라고 했죠.”

마이크를 잡고 대찬을 비롯한 진짜와 가짜가 섞인 직원들에게 설명하는 은오영 교수의 목소리는 진중했다.

“처칠의 예견은 점점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2050년이 되면 지구의 인구는 100억이 되고, 가축을 길러 도축하는 지금의 방식으로는 필요한 단백질을 충분히 공급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한 박자 쉬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먼 미래의 일은 조 대표님을 비롯한 여러분께 흥미롭지 않을 겁니다. 솔직히 미래의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투자하시려는 게 아니잖습니까.”

“돈을 벌려는 거죠.”

대찬이 말하자 은오영 교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돈을 벌려고. 저도 거창한 목적 없습니다. 돈을 벌려고 이걸 연구했고, 또 연구하고자 합니다.”

은오영 교수는 슬라이드를 넘겼다.

“배양육 기술은 기존의 축산업에 비해 매우 경제적입니다. 왜냐. 기존 축산업에 비해 토지는 99%, 물은 98%, 탄소는 60%, 에너지는 56% 절감할 수 있습니다.”

그는 다음으로 넘어갔다.

“게다가 동물의 도살을 방지할 수 있기에 윤리적 우위에 설 수 있고요, 제반기술이 마련되면 대량생산을 통해 엄청난 저비용으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기술이 고도화되면 근육세포와 지방세포를 절묘하게 결합해, 한우 1++등급에서나 구경하던 마블링을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은오영 교수는 물로 목을 살짝 축이고 말을 이었다.

“저는 전기 자극을 통해 배양한 조직세포를 3D 프린터로 진짜와 다름없는 쇠고기를 만들어내는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충분한 지원만 있다면, 수 년 내에 구현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는 이어 한동안 기술적인 부분을 심도 있게 설명했다.

은오영 교수는 필사적이었다.

어떻게든 저 젊은 투자자를 매혹시키기 위해 가장 쉬운 단어로 가장 짧은 문장을 만들어 설명했다.

대찬이 주변의 조언이 없이도 알아들을 만큼 쉬운 말이었다.

“물론 갈 길은 멉니다. 도깨비방망이처럼 뚝딱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상당한 시간과 돈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제게 시간과 돈을 허락한다면, 해낼 자신이 있습니다. 자신 있습니다. 자신 있습니다.”

은오영 교수는 자신 있다는 말을 분명한 발음으로 여러 번 말했다.

그가 발표를 마치자 대찬과 직원들은 작은 박수로 호응했다.

은오영 교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질문 있으신 분?”

그러자 직원으로 위장한 전문가들이 손을 들었다.

“한동안 떠들썩했던 GMO(유전자변형식품)에 대한 의문들을 아실 겁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고기 역시 이와 같은 의문에 부딪칠 수밖에 없습니다. 믿고 먹어도 되는가. 이건 소비자들의 선택과 직결되는 문젭니다. 이 의문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습니까.”

은오영 교수는 바로 대답했다.

“배양육과 GMO는 아예 별개의 메커니즘으로 만들어집니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저 대중에게 낯설다는 것뿐이죠. 제 설명에 유전자를 변형한다는 대목이 있었나요?”

“없었습니다.”

“네, 단지 가축에게 사료를 먹여 키우는 게 아닌 세포를 떼어내 전기로 자극시켜 키워낼 뿐입니다. 오히려 후자가 안전하죠. 소나 돼지한테 항생제가 가득 들어간 사료가 주어진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니까요. 이 부분을 마케팅 포인트로 삼아야 합니다.”

다른 이가 은오영 교수에게 질문했다.

“단순히 근육세포만 배양해서는 고기 특유의 풍미를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고기의 맛은 수많은 아미노산의 결합으로 이뤄집니다. 이걸 어떻게 해소할 겁니까.”

“그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여러 방법이 논의돼야 하겠죠.”

“한 가지 방법만이라도 제시해보시죠.”

“헤모글로빈의 색소 성분인 헴(HEME)을 첨가하면 고기의 맛과 풍미를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헴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진다면 문제는 쉽게 풀릴 겁니다. 이를 위해 원천기술을 개발하든지, 아니면 기술제휴를 하든지 양자택일해야겠죠. 그건 돈줄을 쥔 여러분의 몫입니다.”

은오영 교수는 이후로도 쏟아지는 질문을 여유롭게 받아쳤다.

과연 그가 지금까지 말했던 게 허언은 아닌 듯했다.

그는 차분하고, 조리 있고, 자신감에 차있었다.

사기꾼, 세 글자에 길길이 날뛰어 민승기의 얼굴을 피 반죽으로 만들었던 망나니와 동일인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들에게 질문을 쏟아내던 전문가 집단의 목소리가 잦아들자, 대찬은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 교수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저, 합격인가요?”

“네, 로튼 프룻츠는 은오영 교수님과 함께 배양육 사업을 추진할 겁니다.”

그제야 은오영 교수는 안도의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잠깐 은오영 교수를 밖에 내보낸 자리에서, 섭외된 전문가들은 말했다.

“저희가 은 교수만큼의 지식을 갖추지 않아 확언하긴 어렵습니다만.”

“네, 은 교수만큼의 지식이 있으셨다면 교수님들께 투자를 했겠죠.”

“하하, 실력만큼은 분명한 듯합니다. 잡으십시오.”

대찬은 말로 대답할 것도 없이 입술을 꾹 다문 채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찬은 은오영 교수와 단둘이 식사를 함께했다.

메뉴는 설렁탕에서 참치로 바뀌어 있었다.

대찬은 은오영 교수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떨리네요.”

“저만큼 떨리시겠어요?”

“교수님이 떨릴 건 뭐랍니까. 하던 걸 그대로 계속하면 되는데.”

은오영 교수는 잔을 받고 대찬에게 술병을 넘겨받아 잔을 채워주었다.

“네, 하던 걸 계속하게 돼서 기뻐요. 기뻐서 떨립니다. 무지 떨립니다.”

“하하, 그 열의라면 분명히 성과가 나올 겁니다.”

“하지만 이 사업을 제대로 해내려면 저 혼자만의 힘으로는 부족합니다.”

“연구실에 제자들이 있잖습니까.”

대찬은 그렇게 말하며 잔을 내밀었다.

은오영 교수는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술로 목을 축인 뒤 말했다.

“솔직히 말하죠. 그 친구들은 함량미달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제자들인데.”

“허드렛일은 할 수 있지만 연구에 보탬이 되진 않습니다. 전인미답의 영역을 걷는 일이니까요. 그 친구들은 공부 더 해야 합니다.”

“하긴 그렇겠군요. 그럼 혈혈단신으로 돌파하셔야 하는데, 아무리 은 교수님이라도 힘드시겠죠.”

은오영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원군이 필요합니다.”

“원군이라뇨.”

“다르샨 싱.”

“다르샨 싱?”

은오영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배양육 회사를 같이 운영하던 대학 동기 중에 한 명입니다. 인도 이민자 2세 친구예요.”

“동기들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셨는데…….”

“그 친구는 달랐어요. 제 옆에 끝까지 있어줬던 친굽니다.”

대찬은 술로 목을 축이고 말했다.

“실력은 어떤지요.”

“원래 이쪽 분야에서 머리 좋기로는 인도 사람들이 왔다잖아요.”

“그런 분이 별 달리 연고도 없는 한국생활을 받아들이실까요?”

은오영 교수는 흐흐 웃었다.

“다르샨 그놈, 선천적인 보헤미안입니다. 저랑 마찬가지로 처자식도 없고 오로지 연구만 아는 친구예요.”

“실력이 확실하다면 얼마든지 미국에서 연구를 계속할 수 있을 텐데요.”

“그 친구가 찬밥 더운 밥 따질 상황이 아니거든요.”

“음?”

“우리가 세웠던 회사는 망하진 않았습니다. 거의 걸레짝이 되긴 하지만 아직 존재해요.”

“아직 존재한다고요?”

은오영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 다르샨 싱 혼자서 낑낑거리며 연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1인 기업인 셈이죠.”

대찬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래요? 특허라도 팔아서 원금이라도 회수하려고 했을 텐데.”

“다르샨이 아주 결사반대를 했죠. 회사를 처음 세울 때, 그 친구가 양말 한 짝까지 안 남기고 다 팔아서 자본을 투자했거든요.”

“원래 돈이 좀 있으신 분인가 보죠? 혼자 지분으로 여태 회사를 지켜온 걸 보면.”

은오영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인도 이민자인데 갖은 고생 다 하셔서 사업을 제법 크게 일구셨죠.”

“아버지 자금을 등에 업고 사업에 뛰어든 거네요.”

“네, 결과가 이래서 살림 쫄딱 말아먹고 우리로 말하자면 호적에서 이름을 파네 마네 하는 단계까지 왔지만.”

“그래서 여태 사업을 놓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네요.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 면도 분명히 있죠. 암튼 이 친구, 한국에 자리만 만들어주면 옳다구나 하고 올 겁니다.”

대찬은 흐뭇하게 웃었다.

“말씀을 들어보니까 그냥 전화 한 통화로 부를 일이 아닌 거 같은데요.”

“네?”

“저랑 미국 좀 다녀와 주셔야겠습니다.”

“으잉?”

대찬은 은오영 교수를 거의 납치하다시피 하여 급거 실리콘밸리로 떠났다.

은오영 교수의 말이 사실이라면, 단순히 다르샨 싱을 초청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다르샨 싱의 1인 기업을 로튼 프룻츠에서 인수해야 했다.

그럼 배양육 개발에 대한 기본적인 기술을 로튼 프룻츠가 확보할 수 있다.

가만히 앉아서 다르샨 싱이 한국으로 오기만을 기다릴 순 없었다.

대찬은 민승기의 병실을 찾아가 이를 설명하고, 바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대찬은 잠시도 쉬지 않고 바로 다르샨 싱을 만나러 갔다.

우버 택시를 불러 다르샨 싱의 사무실로 향했다.

대찬은 차창으로 스쳐 지나가는 실리콘밸리의 풍경을 응시했다.

줄리아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와 비슷한 자세였다.

첨단의 첨단을 달리며 문명을 선도하는 도시.

그러면서도 지진대의 영향 때문에 마천루는 보이지 않는 도시.

살인적인 땅값과 물가를 자랑하는 도시.

숱한 젊은이들이 떨쳐 일어나고, 망해 무너지는 도시.

대찬은 차창으로 스치는 그 도시의 풍경을 묵묵히 바라만 봤다.

은오영 교수는 그런 대찬을 흘끗 보며 웃었다.

그리고는 다르샨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르샨, 우리 지금 알려준 곳에 거의 다 왔어. 뭐라고? 거기가 아니라고?”

은오영 교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대찬은 그를 흘끗 봤다.

“그럼 지금 어디야? 알았어, 그쪽으로 갈 테니까 거기서는 움직이지 마. 그래.”

은오영 교수는 전화를 끊고 한숨을 쉬며 우버 기사에게 말했다.

“목적지가 바뀌었어요.”

그들이 탄 차량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향했다.

대찬은 의아한 낯빛으로 은오영 교수에게 말했다.

“왜 갑자기……?”

“가보시면 압니다.”

차가 멈춘 곳은 실리콘밸리의 중심과 상당히 동떨어져 있었다.

그럴 듯한 건물조차 없었다.

어리둥절한 대찬에게 은오영 교수가 말했다.

“여기가 다르샨 싱의 사무실입니다.”

“잘난 인도 과학자께서 건물을 투명하게 짓는 기술도 개발하신 건가요?”

“재미없는 농담이네요.”

대찬이 발끈했다.

“저한테는 교수님 말씀이 더 농담처럼 들리거든요? 당최 여기 사무실이라고 할 만한 곳이 없잖습니까?”

“왜 없어요. 바로 눈앞에 있는데.”

“제 눈앞에는 죽 늘어선 캠핑카밖에 없는데요? 그럼 뭐 캠핑카가 사무실이기라도 한단 말이에요?”

“네.”

“네?”

“잘 보세요.”

대찬은 은오영 교수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