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64화
대찬은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선 채로 은오영 교수에게 말했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교수씩이나 되시는 분이 다짜고짜 주먹질부터 하는 게 말이 됩니까?”
“…….”
“민 선배 몰골 보셨죠? 저 정도면 백 프로 은 교수님 형사처분 받으십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할 일을 하지 마셨어야죠.”
대찬의 단호한 반응에 은오영 교수의 마음도 복잡해졌다.
사람은 뭐든지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이해한다.
전적으로 자기 잘못이라고 해도, 꼭 빠져나갈 변명의 구실을 창조해내기 마련이다.
은오영 교수는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말했다.
“그, 그래도 이건 그쪽 책임도 큽니다!”
“제 책임이요?”
대찬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 그러길래 누가 알지도 못하면서 사기꾼 운운하랍니까?”
“아, 사과를 원하시면 사과드리죠. 일면식도 없는 분을 사기꾼으로 몰아서 죄송합니다. 근데 제가 틀린 말을 하진 않았습니다. 틀렸습니까?”
“틀렸지요!”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얼러대는 줄 아십니까?”
“그럼 댁이 뭘 안다고 그럽니까!”
“경찰조사결과, 그리고 학교 내부조사결과가 말해주는데요. 은오영 당시 박사과정 대학원생이 실무적인 조작을 벌였다고. 그래서 파면까지 당하셨잖아요?”
“내가 조작을 벌였다는 사실이 조작된 겁니다!”
대찬은 이 문제를 더 물고 늘어져봐야 실익이 없음을 직감했다.
대찬은 얼굴을 찡그렸다.
“네, 사과드리죠. 사기꾼이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려면 고소하세요. 사실적시도 명예훼손이니까.”
“사실이 아니라니까!”
은오영의 목소리가 확 높아지자 경찰관이 권태로운 음성으로 제지했다.
“아, 거 조용조용 해결하세요.”
대찬은 경찰관을 보며 말했다.
“법리적으로 해결하겠습니다. 가해자가 본인 잘못 인정도 했으니까 빼도 박도 못하는 폭행죄죠? 잡아 처넣어주세요.”
“자, 잠깐만!”
“됐어요. 당신 같은 인간이랑 이 밤중에 입씨름하고 싶지 않습니다.”
대찬의 단호한 태도를 보고 은오영 교수는 덜컥 겁이 났다.
정말 폭행죄로 입건이라도 되면 큰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중림대학교는 전임교원을 감축하는 추세였다.
건수가 터지면 학교는 자신을 비호하지 않고 미련 없이 파면할 것이다.
머리에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은오영 교수는 대찬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자, 잘못했습니다!”
“네, 잘못하셨어요.”
“하, 합의가 어떻게 안 될까요?”
“네, 어떻게 안 될 거 같네요. 돈 몇 푼 받자고 폭행범이 교단에서 교수님 소리 듣게 놔둘 수가 없네요.”
은오영 교수의 입술이 바싹 말랐다.
“무턱대고 주먹부터 나간 건 제 잘못입니다. 죄송합니다. 술 먹고 퓨즈가 나갔습니다.”
“지겹습니다, 그런 변명. 술 드셨으니 뭐 어쩌라는 겁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하겠습니다. 그러니 합의해주십시오. 뭐든 할게요. 저 교수 자리 잘리면 진짜 살 길이 막막합니다, 네?”
대찬은 얼굴을 구겼다.
“이봐요, 지금도 본인이 망친 남의 얼굴이 아니라 본인 신세부터 걱정하고 있잖아요. 이런 인간을 나더러 동정하라는 겁니까?”
“아니, 그게…….”
“더 말하면 입 아파요. 그만 얘기합시다. 유치장에서 반성이나 하세요.”
대찬은 경찰관에게 말했다.
“합의 없습니다. 법대로 처분해주세요. 필요하면 이쪽으로 연락 주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대찬은 은오영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고 그대로 경찰서를 떠났다.
은오영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대찬은 바로 민승기가 입원한 응급실로 향했다.
거동이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대찬은 그를 보자마자 사과했다.
“선배, 죄송해요. 원래 저를 노리고 했던 건데 선배를 저로 착각했다네요.”
“그래? 아이고.”
민승기는 허탈하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네가 왜 사과를 하냐. 때린 놈이 잘못이지. 경찰차로 오면서 얘기 좀 들었는데, 사기꾼 어쩌고 한 게 너였구나?”
“네, 면전도 아니고 수혁이랑 통화하다가 얘기한 건데 그게 용케 그쪽 귀에도 들어갔나 봐요.”
“수혁이 걔도 중늙은이처럼 굴더니 애는 애네.”
“많이 아프시죠. 드릴 말씀이 없네요. 참…….”
“차라리 너한테 똑바로 찾아갔으면 제대로 두들겨 맞고 교육 좀 받았을 텐데, 하필 나한테 와서는.”
대찬은 복잡한 감정을 실어 웃었다.
“…그러게요.”
“그래서. 유치장에 넣어두고 왔어?”
“네, 합의 없는 거죠?”
“글쎄.”
“돈 문제는 제가 해결할게요. 저런 괘씸한 인간 풀어주면 안 되죠. 단단히 혼을 내야지.”
민승기는 쓴웃음을 지었다.
“돈 문제가 아니라, 그 양반하고 경찰서 가면서 잠깐 얘기했는데 나름 사정이 있는 거 같더라고.”
“핑계 없는 무덤이 어디 있겠어요.”
“그렇기야 하지만, 사기꾼 소리에 발끈할 만했어.”
“그 지경이 되시고도 그 자식 생각부터 하시네요. 생불이세요?”
주먹을 휘두른 은오영은 자기 팔자부터 걱정하는데 민승기는 가해자부터 걱정한다.
대찬은 이 극명한 대비에 실소를 머금었다.
민승기는 하하 웃었다.
“그 양반 입장에서는 네가 아니라 날 친 게 다행이겠는데? 너였으면 바로 믹서기에 넣고 갈아버렸을 테니까.”
“선배도 괜한 자비 베풀지 마세요.”
“마음 곱게 써야 해. 그러다 앙심 품고 나중에 다시 나 찾아와서 칼로 쑤시면 어떡해?”
“아무래도 필래 가있는 마강국 스카웃해서 선배한테 붙여야겠어요.”
“화장실에서도 살인나는 세상이야. 마강국한테 나 똥 싸는 거까지 구경시키려고?”
“선배, 그렇게 장난으로 눙칠 상황이 아니라니까요.”
“일단 합의금 받아내자고. 받아낼 수 있는 최대한도로. 나 요즘 용돈 궁한데 그걸로 맛있는 거나 사먹어야겠다.”
대찬은 속 좋은 민승기를 마냥 속 편히 바라볼 수만은 없었다.
민승기가 저 모양 저 꼴이 된 데는 자신의 지분도 적지 않기 때문이었다.
민승기는 대찬을 바라보며 그의 손등을 툭툭 두드렸다.
“괜히 마음 쓸 거 없어. 회복기간이 길어서 그렇지 심각할 정도는 아니야. 병원에 오래 입원하고 임플란트 두 개만 하면 그만이야.”
“아휴, 선배…….”
“그냥 합의해줘. 그리고 그 사람한테 설렁탕이나 한 그릇 사줘.”
“합의는 합읜데 설렁탕은 또 뭐예요?”
“그 인간, 어지간히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살았더라. 얘기라도 한번 나눠봐.”
“꿈에서 뭐 하나님이나 부처님 만났어요? 착하게 살면 천국이나 극락 보내주겠대요?”
민승기는 픽 웃었다.
“됐고, 내 말대로 해. 직원들 시시콜콜 병문안 오지 말라고 하고. 머리 아프니까. 다음에 올 때 게살죽이나 한 그릇 사와라. 아프니까 갑자기 죽이 당기냐.”
“…알았어요.”
대찬은 민승기의 결정에 더 딴죽을 걸지 않았다.
그렇게 하라면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대찬은 일단 은오영 교수를 유치장에서 꺼내주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민승기의 얼굴이 저렇게 됐던 것처럼, 은오영의 얼굴도 짓뭉개고 싶었지만 참았다.
은오영은 대찬을 보고 반색했다.
“하, 합의해주시는 겁니까?”
“일단 밥이나 먹읍시다.”
대찬은 민승기의 말을 유치원생처럼 착실히 따랐다.
설렁탕 한 그릇씩이 둘의 앞에 놓였다.
대찬은 깍두기를 와그작와그작 씹는 은오영을 보고 이죽거렸다.
“지금 피해자는 깍두기는커녕 죽도 못 넘겨서 하루하루 말라가는데, 잘 드시네요?”
“…산 사람은 먹고 살아야죠.”
“참 나, 사람 죽였습니까? 아니, 합의해준다니까 바로 입담이 확 풀려버리시네요?”
대찬은 어이가 없었다.
은오영은 멋쩍게 웃었다.
대찬은 설렁탕을 숟가락으로 휘적이며 물었다.
“일단 민 선배가 그쪽 사정 들어보라고 해서 나온 겁니다. 합의를 해줄지 안 해줄지는 아직 결정 안 했어요.”
“…….”
“성질 같아서는 진짜 있는 힘, 없는 힘 다 동원하고 싶은데, 당사자가 들어보라니까 들어볼게요. 말씀해보세요. 사기꾼 어쩌고 하는 말에 왜 이런 짓까지 벌인 겁니까?”
“사기꾼이 아니니까요.”
대찬은 숟가락을 탁 내려놨다.
할 얘기 있으면 해보라는 뜻.
은오영 역시 숟가락을 내려놓고, 입 안에 있는 깍두기를 잘근잘근 씹어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일단 제가 노태진 교수 연구실에서 대학원 생활을 보낸 건 맞아요.”
“네.”
“저는 정말 이쪽 분야에 헌신하고 싶었거든요. 연구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어요.”
“네.”
“노태진 교수한테 충성하면서 정말 개처럼 공부, 연구만 했다고요. 그리고 그분이 시키는 거, 한 점 의심 없이 다 열심히 했고요.”
“네.”
“저는 노태진 교수가 그런 대담한 사기를 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대찬은 피식 웃었다.
“몰랐을 리가.”
“정말 몰랐다니까요? 저는 리서치만 했지 논문 작성에는 끼어들지도 못했어요.”
“그럼 책임도 별로 없었으니 학교에서 제명까지 당할 이유가 없잖아요?”
은오영 교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노태진 교수의 지시로 몇 가지 데이터를 임의로 조작했거든요.”
“그걸 알고도 하셨다는 말씀이죠?”
“알았지만 노태진 교수는 대의를 위해 꼭 필요한 거라고 하셨어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조작은 필요에 의해서 이뤄졌어요. 불필요한 조작은 존재하지 않아요.”
“방향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 데이터가 아직 뒷받침이 안 된다. 펀딩을 더 받아서 우리 연구가 박차를 가하려면 이 정도 얼룩쯤은 어쩔 수 없다. 그게 그분 말씀이셨어요.”
대찬의 얼굴에 노기가 번졌다.
“어쨌든 당신도 그 사기극의 공범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단 말입니다.”
“맞아요. 내 과실이죠. 근데 처벌의 강도가 너무 과했다고요. 노태진 교수는 자신의 지시가 아니라 내 공명심 때문에 자의적으로 저지른 조작이라고 주장했어요.”
“물론 그쪽의 반론은 먹히지 않았겠죠.”
“네, 그래서 저도 중대한 책임을 물어 학교에서 제명된 겁니다.”
대찬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억울한 구석이 없지는 않으신데요, 사기꾼이란 말에 울컥해서 주먹을 휘두른 이유로 참작되기는 너무 궁색하네요.”
“사기꾼 소리에 이성을 잃게 되는 건 더 사연이 있습니다.”
대찬은 식어가는 설렁탕에 흘끗 시선을 한번 주고 말했다.
“기왕 듣기로 했으니 다 들어드리죠.”
“제명되고 나서, 어떻게든 연구는 계속해야하니까 미국으로 갔습니다. 캘리포니아로요.”
대찬은 팔짱을 끼고 물었다.
“한국에서도 어려울 텐데 미국까지 가셨다고요?”
“이미 낙인 찍혔는데 한국에서 어떻게 더 있을 수 있었겠어요.”
“그건 그렇네요.”
“학부는 미국 퍼듀대 나왔어요. 그래도 이쪽에서는 알아주는 학교예요.”
“중부권의 명문대라는 건 저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제가 교환학생으로 있던 미네소타랑 가까우니까요.”
“그쪽 대학원 연구실에서도 스카웃 받았는데, 노태진 교수가 그때 제 우상이라 무작정 서울로 돌아왔었거든요.”
“그럼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원을 다니셨다는 거죠.”
은오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형편 때문에 위상보다는 가장 학비가 싼 곳을 골라 갔지만요.”
“그렇군요.”
“그렇게 박사학위를 따고, 실리콘밸리에서 사업을 구상하던 대학 동문들 틈바구니에 꼈죠.”
“재주도 좋으셔라.”
대찬의 이죽거림에 은오영 교수는 퍽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라 그렇지, 제 실력은 확실합니다.”
“누가 뭐래요?”
은오영 교수는 한숨을 팍 쉬고 말했다.
“근데 거기서도 끝이 좋지 못했어요.”
“좋았으면 지금 이러고 계시지도 않겠죠. 무슨 일이 있었죠?”
“실리콘밸리 하면 무슨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은오영 교수가 대뜸 묻자 대찬은 생각나는 대로 말해주었다.
“젊음, 야망, 천재, 창의성, 첨단기술, 뭐 이런…….”
“제가 생각하는 이미지를 말해볼까요? 야망, 음모, 배신, 사기, 냉혹, 패가망신이에요.”
“제가 듣던 거랑은 많이 다르네요?”
은오영 교수는 이를 악물었다.
“당연하죠. 지금 떵떵거리면서 세계적인 리더로 군림하고 있는 실리콘 밸리의 기린아들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니까.”
“음…….”
“그 기린아들의 발밑에는 도태되어 만신창이가 된 패배자들이 즐비하다고요. 열에 일고여덟은 망해나가는 게 그 바닥이에요.”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치는 얼핏 들은 것 같은데, 미처 그 일고여덟에 대한 생각은 못했네요. 어딜 가나 다수는 그렇게 망하기 마련이죠.”
“얼마나 치사하고 비열한지 모를 겁니다. 저랑 동기들은 배양육 연구회사를 차렸어요.”
“배양육?”
“실험실에서 만드는 고기예요. 떼어낸 근육세포에 전기 자극을 줘서 고기를 배양하는 거죠.”
대찬은 그제야 알은체를 했다.
“아, 들어봤어요. 그런데 그게 단기간에 수익을 창출할 아이템은 아닌 걸로 아는데.”
대찬이 은오영 교수와 대화하고 있는 이 시점에도 배양육은 상용화까지 가는 데 엄청난 여정을 남겨둔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