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63화
대찬은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조건이 연고대 버리고 중림대 갈 정도로 매력적이진 않은데?”
“그런가요?”
“응, 어차피 등록금이야 네 형편에는 국가에서 전액 지원할 거고, 필래장학회 지원을 받기로 잠정합의가 됐으니 자질구레한 장학금들도 네가 군침 흘릴 정도는 아니야.”
“음.”
“그리고 잠깐만, 그 양반 뭐라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학자?”
“네, 그렇다던데요. 본인 말로는”
“잠깐만 있어봐. 조금 있다가 내가 다시 전화 걸 테니까. 이름이 은오영이라고 했지?”
“네, 은오영 교수.”
고수혁의 말을 들으니 대찬은 필연적으로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학자가 이름도 없는 중림대학교의 교수 노릇에 만족할 리가 없었다.
그저 흘려듣고 넘기면 그만이었지만, 괘씸해져서 그 정체를 알아내고 싶은 마음이 동했다.
은오영.
이름이 특이해서 찾아내기 쉬웠다.
대찬은 그의 오래된 증명사진을 보고 툴툴거렸다.
‘사짜 관상이구만.’
전적으로 선입견에 입각한 감상이었다.
대찬은 뿔테안경을 쓰고 더벅머리를 한 증명사진을 한참 바라보다가 그의 이력을 살폈다.
“학부는 미국 퍼듀대에서 나왔고, 석사는 서울대, 박사는 또 미국에서?”
학력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하지만 걸어온 궤적이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미국에서 학부를 나오고 석사를 서울대에서 한 다음에, 또 박사는 미국으로 다시 나가서 땄다.
박사를 딴 미국 대학이 서울대보다 낫느냐, 그건 아니었다.
‘이런 쪽에 정통하지 않은 내가 봐도 이 정도니.’
구태여 비싼 학비를 들여 다시 미국으로 갔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게다가 석사를 마치고 박사 학위를 딸 때까지 상당한 공백이 있었다.
물론 박사 학위가 시간만 지난다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그걸 감안해도 공백은 길었다.
대찬은 꽤 공을 들여 수소문한 결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당시 서울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은오영.
그는 당시 논문을 조작했던 노태진이라는 교수의 연구실에 있었다.
노태진 교수의 논문조작에 은오영이 상당히 개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학계에 작지 않은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은오영은 일개 박사과정 대학원생에 불과했음에도, 그 죄질이 나쁜지 몇몇 소식지와 언론에 이름이 언급되었다.
대찬은 이를 갈았다.
‘이런 인간쓰레기가…….’
실력은 어떨지 몰라도 연구윤리가 개판인 주제에, 반성하기는커녕 감언이설로 고수혁을 꼬드기다니.
대찬은 이를 악물고 고수혁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는 대뜸 말했다.
“그 사기꾼 새끼한테 다시는 접근하지 말라고 단단히 말해.”
“사, 사기꾼이요?”
평소 어떤 일에도 동요하지 않던 고수혁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래, 사기꾼. 다시는 상대하지 마.”
“…알겠습니다.”
“그냥 그 인간하고 말 자체를 섞지 마. 똥물 옮는다.”
대찬은 신신당부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고수혁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이례적인 대찬의 분노에 고수혁도 다시는 은오영과 접촉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은오영은 이런 입시설명회 철이면, 격주로 일터인 중림대가 있는 경북의 중소도시와 서울을 오갔다.
지금도 서울 구석진 곳에 모텔 방을 잡아놓고 있던 참이었다.
그는 시시때때로 고수혁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고수혁에게서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
다른 학교에서도 별다른 수확이 없던 차.
은오영의 가슴이 바싹 타들어갔다.
‘그래, 저런 잡놈 새끼 하나 없다고 무슨 큰일이라고.’
그렇게 자위하다가도, 아쉬운 마음이 계속 언뜻언뜻 솟았다.
오랜만의 입질인데 이대로 보내기 아쉬웠다.
결국 먼저 고수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 수혁 군? 요새 연락이 통 없어서 무슨 일 있나 하고 전화했지.”
“아저씨 사기꾼이라면서요.”
대뜸 쏘아대는 직격탄에 은오영 교수는 정신이 어질했다.
“뭐?”
“사기꾼이라던데요?”
“어, 어떤 새끼가 그래! 사기꾼은 무슨 사기꾼!”
“누가 그랬는지 제가 알려드릴 이유는 없죠. 더 이상 연락하지 마세요. 그럼 사기 많이 치고 다니세요.”
고수혁이 전화를 끊으려는 은오영 교수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야! 어디서 보잘 것 없는 놈한테 헛소리 듣고 와서는 누구한테 사기꾼이래!”
바로 전화를 끊으려던 고수혁은, 그 보잘 것 없는 놈이란 말에 신경이 곤두섰다.
아무리 또래보다 성숙하다고 해도 아직 애는 애였다.
자기가 위하는 사람을 욕하는 걸 그저 흘려듣지 못했다.
“보잘 것 없다고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얘기하세요?”
“그럼 뭐, 방귀 좀 뀌는 놈이냐?”
“그쪽은 나한테 사기나 쳤지 뭐 해준 거 있어요? 그분은 저한테 돈으로 마음으로 도와주신 분이거든요.”
은오영 교수는 쓸데없이 촉이 좋았다.
“아, 뭐 광고라도 찍게 해준 놈인가 보지?”
“네, 그러니까 그쪽에서 함부로 씹어댈 정도의 사람이 아니라고요.”
은오영 교수는 부러 고수혁을 더 도발했다.
“그래봤자 대리나 과장 나부랭이겠지, 뭐. 내가 아무리 지방대 교수라도 그런 하잘 것 없는 놈보다는 신세가 낫거든?”
“대리나 과장 아니거든요. 대표님이시거든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맘대로 떠들지 마세요. 입에서 나온다고 다 말이 아니니까.”
고수혁은 그렇게 쏘아붙이고 전화를 끊었다.
은오영은 분노가 끓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광고 찍은 회사 대표 놈이란 말이지……. 잘 알지도 못하는 놈이 뭐? 사기꾼? 이 개새끼…….”
주먹을 불끈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때 은오영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그는 액정을 확인하고 얼른 전화를 받았다.
“아, 네! 입학처장님!”
입학처장의 전화에 은오영의 눈빛에 서려 있던 분노가 일순 사라졌다.
“아, 다음 주는 대전에서 입시설명회요? 네, 가야죠……. 저, 근데 지난번에 건의해주신다던 새 강좌 설치는…….”
은오영의 말은 고분고분했다.
“아, 하하… 네, 일단 학생들이 와야 새 강의를 열기야 하겠죠. 다녀오겠습니다, 그럼.”
은오영 교수는 입학처장이 전화를 끊자 휴대폰을 냅다 집어 던졌다.
아직 약정이 남아있는 터, 던지기 전에 푹신한 소파로 눈이 한번 갔다.
던져진 휴대폰은 소파에 안착했다.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쳐? 네가 나를 알아? 은오영이를 알아? 이런 씨이……. 내 인생을 네가 아냐고.”
얼굴도 모르는 인간에게 사기꾼 소리를 들었다.
그 낱말 하나가 비수가 되어 은오영의 심장을 후벼 팠다.
그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삭이고 싶었다.
돈 없고 늙은 남자에게, 가장 값싼 처방약은 소주 한 병이었다.
한 병이 두 병이 되고, 두 병이 세 병이 됐다.
은오영은 만취했다.
그는 풀린 눈으로 한 인터넷 기사를 검색해 열심히 읽었다.
“이 광고의 촬영은 로튼 프룻츠……. 로튼 프룻츠의 대표…….”
그는 소주를 마시면서도 증오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 활자를 똑똑한 머리에 입력했다.
그 시각, 로튼 프룻츠 사무실.
민승기는 직원들을 먼저 퇴근시키고 자신에게 남은 일을 마무리했다.
직원들은 대표의 눈치를 보며 먼저 퇴근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민승기는 극구 그들을 내보냈다.
“가서 푹 쉬고 내일 말끔한 정신으로 출근하는 게 회사에 좋은 거예요. 왜 할 일도 없으면서 사무실에 붙어있습니까.”
단호하게 직원들을 내쫓은 민승기는 마지막으로 사무실을 점검하고 퇴근했다.
그는 깜깜한 복도를 익숙한 걸음으로 걸었다.
그렇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차.
갑자기 어둠 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민승기를 불렀다.
“로튼 프룻츠 대표님 되십니까?”
“아, 깜짝이야. 네, 맞는데요. 누구세요?”
대답하자마자 갑자기 거센 완력이 민승기를 덮쳤다.
기습공격에 민승기는 무게중심을 잃고 그대로 무너졌다.
“뭐, 뭐야……!”
“다시 지껄여봐! 사기꾼이라고 지껄여봐!”
“왜, 왜 이러세요……!”
“사기꾼이라고 해보라고, 이 쳐 죽일 새끼야!”
남자의 입에서는 술 냄새가 확 풍겼다.
은오영 교수였다.
민승기는 그를 제압하려고 했지만, 술 취한 사람의 절제되지 않는 힘은 우악스러웠다.
그는 경멸에 찬 눈으로 민승기를 내려다봤다.
“말해봐! 사기꾼이라고 또 해봐! 뚫린 입으로 지껄여보라고!”
“아니, 도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내가 언제 사기꾼이라고 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시치미 떼는 거 보니까 네놈 새끼가 사기꾼 같은데?”
“도대체가……!”
민승기는 활개를 열심히 저었지만 은오영 교수의 악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기괴하게 웃었다.
“너는 좀 맞아야 돼, 응? 잘 알지도 못하면서 주둥이 나불거렸으면 값을 치러야지!”
“으악!”
은오영 교수는 주먹을 들어 있는 힘껏 민승기의 턱주가리를 후렸다.
튕겨져 나간 이빨 몇 개가 통통, 대리석 바닥에 튀었다.
* * *
“뭐? 괴한이 습격해요? 이빨이 나갔다고요? 경찰서요? 알았어요. 바로 갈게요.”
퇴근 후 쉬고 있던 대찬은 연락을 받고 급히 집을 나섰다.
‘이게 무슨 일이야.’
대찬이 경찰서에 도착하자, 완전히 만신창이가 된 민승기가 있었다.
대찬의 눈이 커졌다.
“선배!”
“…와야.”
왔냐,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날아간 치아 사이로 바람이 샜다.
대찬은 민승기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일단 응급실 먼저 가세요. 경찰하고는 제가 얘기할게요.”
“부탁 좀 할게.”
“혼자 가실 수 있으시겠어요?”
민승기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승기를 보내고 대찬은 경찰에게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가해자가 누구예요?”
그러자 경찰은 슬쩍 턱짓으로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분이 치셨어요.”
대찬은 그를 돌아봤지만 그가 누군지는 알아보지 못했다.
대찬은 그에게 다가가 노기가 실린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뭔데 민 선배를 저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겁니까?”
“…미안합니다.”
술기운이 달아난 은오영은 종전보다는 목소리가 고분고분해졌다.
관공서의 묵직한 공기도 영향이 있었다.
여기서 더 난동을 부려봤자 죄만 가중될 것이다.
교수의 신분을 생각하면 자중하는 게 옳았다.
“지금 미안하다면 답니까? 하……. 왜 그랬어요? 묻지마 폭행입니까?”
“때린 건 죄송합니다. 근데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왜죠?”
대찬은 최대한 냉철하게 분을 삭이고 머리를 식혔다.
자초지종은 알아야 했다.
은오영은 대뜸 말했다.
“날더러 사기꾼이라고 했으니까!”
“…민 선배가요?”
대찬이 아는 민승기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그리고 저런 얘기가 나오려면 최소한 거래관계로라도 얽혀야 할 텐데, 로튼 프룻츠는 거래처와의 관계가 매우 양호했다.
대찬의 의문은 은오영 교수의 부가설명이 따르고 나서 풀렸다.
“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사기꾼이라잖아요! 그럼 한 대 때려줘야지, 이걸 그냥 참아요?”
“사기꾼……?”
은오영 교수의 말을 따라하는 대찬은 그 말이 낯설지 않았다.
대찬은 잠깐 혼란을 느끼며 침묵했다.
“혹시 은오영 교수세요?”
“…날 알아요?”
대찬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말은 대찬이 뱉었는데 주먹은 번지수를 잘못 찾아갔다.
대찬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그 말, 평우고 3학년 고수혁 학생한테 들은 거 아닙니까?”
“그, 그걸 어떻게…….”
대찬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짚었다.
“아휴, 애먼 짓을 할 거면 사람이라도 제대로 찾으시던가.”
“…네?”
“무슨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그 말을 한 장본인은 납니다. 그쪽이 두들겨 팬 사람은 아무 잘못도 없다고요.”
“뭐, 뭐라고요……. 분명히 대표라고 했는데…….”
“공동대푭니다.”
“…….”
“참 나.”
대찬은 한숨을 푹 쉬었다.
뭐부터 말해야 할까.
혼란스러웠다.
사기꾼이라고 뒷공론을 했던 걸 사과부터 해야 하나.
고수혁이 뭐라고 했길래 용케 알고 여기까지 찾아왔냐고 해야 하나.
사기꾼 맞는데 아니라고 박박 우기면서 사람까지 때리냐고 따져야 하나.
아니면 뭐가 됐든 사람을, 그것도 무고한 사람을 두들겨 팼으니 콩밥 먹을 준비나 하라고 화를 내야 하나.
복잡한 상황에 대찬은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그러다 판단이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