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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62화 (261/556)

난 할 수 있어 262화

“대표님께서 싫으시다면 거두겠습니다.”

“포르노와 다를 게 없어요. 그게 전파를 타고 대중에게 전해지면, 동정을 얻을지언정 낙인까지 동시에 찍힌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

“이건 안 됩니다.”

박 부장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찬을 바라봤다.

“대표님.”

“네.”

“당사자의 의견을 물은 연후에 처리해도 늦지 않습니다.”

“…뭐라고요?”

박 부장은 주먹을 살짝 쥐며 말했다.

“빈곤 포르노. 그건 대표님의 생각이지 당사자의 생각이 아니잖습니까.”

“박 부장님.”

“대표님의 말씀은 짐짓 그 사람들을 위하긴 하지만 당사자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설령 돈 몇 푼에 그러겠다고 해도, 우리는 그래선 안 되는 겁니다.”

“왜 안 되죠?”

박 부장의 물음에 대찬의 눈이 커졌다.

“의사를 물어보는 것 자체가 실례입니다.”

“실례를 범할지언정, 그럼에도 그들이 원한다면, 그들이 원하는데도 기획을 관두는 게 옳은 겁니까?”

“…….”

“이건 기가 막힌 스토립니다. 공익적이고, 필래제과의 버터코코넛, 필래 비바체의 필래 인 마켓이 시행하는 치매노인보호 서비스를 동시에 띄울 수 있습니다.”

“…….”

“아프리카의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을 화면에 내보내 기부금을 얻는 걸, 대표님처럼 배운 사람들은 빈곤 포르노라고 부르는 걸 저도 잘 압니다만.”

대찬은 박 부장을 가만히 응시할 뿐 말하지 않았다.

박 부장은 이미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을 끝까지 했다.

“그들은 기꺼이 포르노배우가 돼서라도 당장의 재물을 원할지 모릅니다.”

“그런 모욕적인……!”

박 부장은 입술을 살짝 떨면서도 할 말을 계속했다.

“우리가 그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게 마냥 점잔빼는 것보다 더 나은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난이란 그런 겁니다.”

“박 부장님의 말씀은 잘 알겠어요.”

“그럼…….”

“좋아요. 당사자의 의견을 존중하죠.”

“그럼 제가 그 학생과 컨택하겠습니다.”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직접 만나겠습니다.”

“…예, 그러신다면…….”

대찬은 자리를 떴다.

고수혁에게 전화를 걸까, 한참을 망설였다.

박 부장의 말에 대찬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무엇이 옳은가.

옳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익함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정당한 걸 의미하는가.

실익인가, 당위인가.

대찬은 켜진 액정을 한참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다 시간이 오래되어 꺼진 액정을 다시 켰다.

어렵사리 고수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대찬은 고수혁과 마주앉았다.

대찬은 어렵게 운을 띄웠지만, 고수혁의 대답은 대찬의 망설임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간단하고 싱거웠다.

“할래요.”

“…어?”

“그거 하면 돈 주는 거 아니에요? 할래요.”

“그렇게 간단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에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대찬은 얕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TV를 통해 네 얼굴, 할머님 얼굴, 그리고 형편. 그게 까발려지는 일이라고.”

“그걸 알면서 저한테 제안하시는 거예요?”

“나는 반대했지만.”

“부하직원의 성화에 못 이겨서 오셨겠죠. 하긴, 부족할 거 없는 아저씨가 보기에 이 일은 너무 큰 치욕이고 불명예니까.”

“…….”

“근데 저는 치욕이든 불명예든 안 보여요. 돈에 눈이 멀어서요.”

“하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죠. 근데 저는 명예를 팔아서 돈을 받을래요. 범죄도 아닌데요, 뭐.”

대찬은 깊은 시름을 토하며 허공을 바라봤다.

고수혁은 대찬에게 상반신을 살짝 기울였다.

“얼마 주실 건데요?”

대찬은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고수혁을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결국 할머니와 고수혁이 등장하는 CF가 전파를 탔다.

여전히 개운치 않은 기분과는 별개로, CF의 반응은 좋았다.

기꺼이 그들에게 기부하겠노라며 뭉칫돈을 쾌척하는 호인들도 있었다.

필래제과의 버터코코넛은 판매량이 급상승했다.

필래 인 마켓이 시행하는 치매환자와 실종아동 보호서비스를 충분히 홍보했다.모든 것이 좋게 끝났다.

그래도 찬물에 싸구려 커피믹스를 탄 것처럼, 대찬의 마음에는 불편한 앙금이 남아있었다.

대찬은 고수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광고 봤어?”

“네, 잘 만들었던데요. 저도 광고 보다가 10년 만에 처음으로 울 뻔했어요.”

“하하……. 주변 반응은?”

“생각보다 나쁘진 않아요. 저 못 사는 거 친구들이 모르는 것도 아니고, 나름 스타 대접 받는다고요.”

“다행이네.”

“2탄 찍으면 좋겠어요. 광고수입이라는 게 생각보다 짭짤하네요.”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네 이미지는 우리가 단물을 쪽쪽 다 빨아먹었거든.”

“냉혹한 자본주의자들 같으니.”

“내가 지금까지 본 최고의 자본주의자는 수혁이 너였어.”

“칭찬은 아닌 거 같은데 칭찬처럼 들리네요.”

대찬이 대화를 하면서 진이 빠진다는 느낌이 드는 건 고수혁이 유일했다.

고수혁의 신상에 큰 변화는 없다는 걸 확인한 대찬은 얼른 그와의 통화를 종료했다.

“그래, 잘 살아라. 조만간 할머님이랑 한번 뵈러 갈게.”

“저번에 대게였으니까 이번에는 참치예요.”

“염치도 없어라.”

대찬은 싱겁게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당분간은 고수혁과 전화할 일이 없을 줄만 알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훨씬 이른 시일 내에 그의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되었다.

이번에는 고수혁이 대찬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아저씨.”

“우리 호칭 좀 바꾸자. 그냥 형이라고 해주면 안 될까?”

“저 10대예요. 30대가 어떻게 형이 돼요. 아저씨는 50대 아저씨 보고 형이라고 하세요?”

“됐다. 말을 말자. 그래, 왜 전화했냐.”

“여쭤볼 게 있어서요.”

대찬은 피식 웃었다.

“모르는 게 없는 똘똘이 고수혁이 나한테 물어볼 게 뭐가 있어?”

“오늘 대학입시설명회가 있었거든요. 중림대학교라고 들어보셨어요?”

대찬은 바로 송희근 과장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 응. 우리 팀 직원 중에 한 분이 중림대 출신이신데, 왜?”

“제 성적에 중림대 들어가는 건 좀 아니죠?”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아깝지. 얼마든지 더 좋은 학교 갈 수 있는데. 입시설명회에서 무슨 일 있었어?”

“그게요…….”

고수혁은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수험생들은 대학입시설명회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즈음의 학생들은 모두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걸 지상과제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대학이 환영받는 건 아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게 지상과제이지 그냥 대학에 들어가는 게 지상과제는 아니기 때문.

이름난 대학에서 나오면 학생들은 열의에 차서 질문을 쏟아낸다.

하지만 이름 없는 대학에서 나오면 관계는 역전된다.

입시설명회의 기회도 학교 측에 애걸복걸해서 겨우 얻어냈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그렇게 기회를 얻어서 학생들 앞에 서봤자 학생들은 딴청만 피운다.

어차피 저거 안 들어도 저기보다 좋은 대학 들어간다는 생각이 팽배하다.

이런 입시설명회에 나서는 사람들 중에는 교수도 껴있다.

학생들이 와서 등록금을 내줘야 학과가 유지되고 자신들의 인건비를 벌 수 있다.

학문의 상아탑에서 교편을 잡겠다는 청운의 꿈은 꿈으로 그친다.

그들은 숫제 약장수다.

이 약이 약발이 없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팔아내야 하는 약장수다.

중림대학교에서 나온 은오영 교수도 그 약장수 중 한 명이었다.

어딘가 불온하고 음산한 기운을 뿜는 눈빛.

세파에 찌들어 움푹 팬 뺨.

정리가 전혀 돼있지 않은 머리칼.

학생들에게 보인 그의 인상은 두 글자로 줄이면 ‘별로’였다.

그는 말주변도 없었다.

가뜩이나 이름 없는 대학에서 나와 관심이 없다시피 하는 와중에, 말도 재미없게 하니 몇몇 학생들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저런 싸가지 없는 새끼.’

은오영 교수는 속으로 상욕을 퍼부었다.

그러다 그의 레이더에 한 녀석이 걸렸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옳거니, 광고에서 봤다. 치매 걸린 할망구랑 산다던 고놈이다. 이름이 뭐더라 고, 고…….’

아!

“고수혁 군!”

은오영 교수의 입에서 고수혁의 이름이 나왔다.

그러자 딴청을 피우고 있던 고수혁은 고개를 들어 은오영 교수를 바라봤다.

은오영 교수는 흐흐 웃으며 고수혁에게 말했다.

“고수혁 군, 맞죠? 필래 CF에서 봤는데?”

“네, 맞아요.”

고수혁은 건조하게 대답했다.

“우리 수혁 군은 공부 좀 하나?”

“전교 5등 안에는 들어요.”

“아이고, 우등생이네, 우등생!”

“…….”

은오영 교수는 안경다리를 들썩이며 안경을 고쳐 쓰고는 말했다.

“그 광고가 사실이라면, 우리 수혁 군은 형편이 많이 어렵겠네요?”

고3 학생 전원이 모인 자리에서 그런 모욕적인 말을 잘도 늘어놓았다.

고수혁은 역시 건조하게 반응했다.

“네.”

“자, 그럼 수혁 군은 내 말을 귀 기울여 듣는 게 좋을 겁니다. 구미가 당길 만한 내용을 막 소개하려고 하거든?”

“…….”

은오영 교수는 프레젠테이션 슬라이드를 넘기며 말했다.

“이름하야 중림엘리트 프로그램!”

그는 거창하게 말했지만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엘리트가 아닌 녀석들은 자기 일이 아니라 뜨뜻미지근, 엘리트인 녀석들은 어차피 저런 학교에 갈 일이 없으니 뜨뜻미지근.

은오영 교수는 주눅 들지 않고 계속 말했다.

“자, 엘리트라고 해서 기준이 마냥 빡빡한 게 아니에요. 수능에서 국영수 등급을 합쳐 4 이하가 나오면, 이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고수혁은 손으로 턱을 괸 채로 은오영 교수의 말을 들었다.

“자 어떤 혜택이냐? 등록금은 당연히 전액지원 되고요. 장학금을 비롯해 품위유지비, 교재구입비, 외부활동비 등 연 1천만 원 지원! 최고의 인재로 육성하기 위해 세계적인 석학과 1 대 1 멘토링! 그리고 총장 명의의 추천서까지 발급이 된답니다.”

은오영 교수는 그렇게 말하고 고수혁의 얼굴을 흘끗 봤다.

좀 전보다는 그래도 관심이 있는 눈치였다.

‘오늘 타깃은 저놈이다.’

입시설명회가 끝나고도 은오영 교수는 고수혁에게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학생들이 대학을 다 같은 값으로 보는 게 아니듯이, 대학도 모든 학생을 다 같은 값으로 보지 않는다.

고수혁 정도의 준척을 낚아오면 학교 입장으로서는 상당한 이득이다.

등록금 한두 푼의 문제가 아니었다.

저런 될성부른 떡잎을 잘만 키워내면 학교를 대표하는 인재로 자라난다.

고수혁이 이름값 좀 얻는 위치에 오르면, 덩달아 중림대학교의 브랜드 가치도 올라가는 것이다.

중림대학교가 올해 배출한 최고 인재들은 3명의 9급 공무원들.

고수혁 정도의 학생이라면 총장과 일 대 일 면담도 가능할 터였다.

“이봐, 수혁 군, 수혁 군!”

“그만 좀 따라오세요. 원서는 제가 알아서 쓸 테니까.”

“헤헤, 누가 뭐래? 얘기 좀 더 듣는다고 손해나는 건 없잖아.”

“이미 충분히 들었어요.”

“좀 더 들어봐. 내가 지금 이렇게 추레해도 나름 알아주는 학자다?”

“설마 일 대 일 멘토링 해준다는 석학이 교수님은 아니죠?”

은오영 교수는 머쓱하게 웃었다.

“무, 물론이지. 그래도 나 너무 무시하지 마라? 이래봬도 몇 년 전까지 한국에서, 아니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줄기세포 연구소의 멤버였어, 내가!”

“그래요?”

“그래! 하하, 내 명함 줄 테니 꼭 연락 한번 줘라, 응? 밥이라도 살 테니.”

은오영 교수는 고수혁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넸다.

고수혁은 명함을 흘끗 바라봤다.

“생명공학과요?”

“그래, 생명공학과!”

“알았어요. 연락드릴게요.”

“꼭 연락해야 한다!”

고수혁은 입시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원래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입시에 어둡기 마련이다.

그저 스카이만 바라보고 공부하니 그 밑으로는 다 똑같은 아랫물일 따름.

더군다나 별달리 입시에 조언을 구할 형편이 아닌 고수혁은 정도가 더했다.

그러니 은오영 교수가 줄줄 읊은 꿀 같은 혜택에 마음이 조금 동했다.

고수혁은 은오영 교수에게 전화를 하기 앞서 대찬에게 먼저 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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