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61화
왕핑웨이는 대찬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대찬을 향해 좋은 감정이 들 수가 없었다.
그는 불쾌한 얼굴로 비바체 해외영업부 직원들과 다시 대면했다.
왕핑웨이는 툴툴거렸다.
“조대찬 차장, 어떻게 생각합니까?”
“네? 어, 어떻게 생각하냐뇨?”
“좀 오만한 스타일 아닙니까?”
그 말에 해외영업부 직원은 흠칫 놀랐다.
“오, 오만요?”
“네, 얘기해보세요. 그쪽도 차장이니까 눈치 안 보고 얘기해도 되잖습니까.”
“아유, 아, 아닙니다. 우리 회사에 조 차장님만 한 분이 또 어디 있다고…….”
순탄한 계약을 위해 거짓으로라도 맞장구를 쳐줄 만하건만.
직원은 극구 왕핑웨이의 말을 부정했다.
“뭘 그렇게 조 차장 눈치를 보고 그러십니까?”
“일단 조 차장님하고 일하면서 오만하다는 느낌은 조금도 받은 적이 없고요, 그리고 저희 필래 비바체와 거래를 트시려면 그런 말씀은 극히 삼가셔야 합니다.”
“으, 으응?”
해외영업부 직원은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얼굴로 소곤거렸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왕핑웨이에게 조대찬 차장의 회사 내 위상에 대해 소상히 일러주었다.
그러자 왕핑웨이도 입을 합 다물었다.
왕핑웨이는 로튼 프룻츠와 필래 비바체, 그리고 예정된 다른 업체와의 만남을 끝내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톈진정봉무역유한공사는 로튼 프룻츠, 필래 비바체와 합의된 조건으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대찬과 민승기는 하이파이브를 했다.
“수고하셨어요, 선배.”
“너야말로 수고 엄청 많았다.”
“이제부터는 중국 쪽 채널도 신경을 써야겠네요.”
“음, 그렇지. 파푸아뉴기니 사무실에 근무하는 조나단 쪽 직원도 중국어에 능통한 사람은 없는 것 같더라.”
“어쨌거나 여기 한국 사무실에서 정봉무역 측과 계속 소통을 도맡아서 해야 할 거예요.”
민승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 쪽 채널을 담당해줄 직원이 필요하겠는데.”
“진위생 씨 쓰시죠.”
“어?”
“이번에 나쁘지 않았잖아요. 아니, 좋았잖아요.”
민승기는 난색을 표했다.
“그렇긴 하지만 사무업무를 해내려면 애로사항이 많을 텐데.”
“책임자는 우리 직원들 중에 한 명을 골라 앉히면 되고요, 진위생 씨는 중국 쪽과 소통하고 실무를 담당해주면 괜찮을 겁니다.”
“으음.”
“HSK 6급 있으면 뭐해요. 그 나라 정서나 문화를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그저 생체 번역기에 불과하다니까요.”
“그건 그래.”
“진위생이 훨씬 나은 카드예요. 진위생으로 하시죠. 자질구레한 이력서 스펙에 얽매이지 않는 게 우리 같은 회사의 장점이잖아요.”
민승기는 대찬을 흘끗 보며 웃다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근데 우리가 제안해봤자 진위생 씨가 싫다고 할 수도 있어.”
“하긴 그도 그렇죠. 제가 제의해볼게요. 직급은?”
“주임. 대신 승진 가능성은 훨씬 열려있지.”
“알겠습니다. 나중 되면 그 시시콜콜한 직급은 한번 손봐야겠어요. 주임이 뭐야, 동사무소 같아.”
민승기는 피식 웃기만 했다.
대찬의 제안에 진위생을 뛸 듯이 기뻐했다.
“정말임까? 정말 제가 조 대표님 회사에서 일할 수 있는 검까?”
“네, 정말이에요. 좋아해주시니까 저도 기분이 좋네요. 근데 월급은 수영실업에서 일할 때보다 크게 오르진 않을 거예요.”
“하하, 어차피 혼자 사는 인생, 200만 돼도 족함다. 그 이상 돈푼이야 뭐을래 필요하겠슴까?”
“아휴, 암만 혼자 살아도 돈은 무조건 많이 받고 볼 일이죠.”
“그, 그렇슴까?”
“당연하죠. 편하실 때 로튼 프룻츠 사무실로 오세요. 연봉협상 하셔야죠.”
“아이구 참, 연봉협상은…….”
“안 그러면 이 지독한 악덕사장이 최저시급 쳐줄지도 몰라요.”
“아, 고거이 말이 되는 말씀임까?”
“그러니까 하자고요, 연봉협상. 편할 때 전화 한 통만 주고 오세요.”
대찬은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진위생 주임은 로튼 프룻츠의 열여섯 번째 직원이 되었다.
민승기는 파푸아뉴기니로 가서 중국으로 가는 첫 컨테이너가 실리는 작업을 꼼꼼히 확인했다.
호주와 파푸아뉴기니를 수시로 오가는, 로튼 프룻츠의 사업 파트너인 조나단은 웃으면서 민승기에게 말했다.
“굳이 바쁜 와중에 선적하는 걸 보려고 여기까지 왔어요?”
“너무 가슴이 떨려서요. 마라와카 오지에서 거둔 커피가 우리 손을 타고 중국으로 간다는 게 신기하잖아요.”
조나단은 피식 웃었다.
“한국으로 가나 중국으로 가나 매한가지인 걸.”
“그래도 처음이니까.”
“오우, 하긴 뭐든 첫 경험은 짜릿하고 두근거리는 법이죠.”
민승기는 조나단을 보며 멋쩍게 웃었다.
“물량을 슬슬 늘려야 할 것 같은데, 마라와카의 농장만으로는 충당하기 어려울 것 같네요.”
“맞습니다. 고로카 지역의 농장들과 접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그곳 원톡을 뚫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
민승기는 조나단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죠, 많이 어렵죠.”
“그래서 말인데, 요즘 미스터 초는 뭐한답니까? 원톡 뚫는 건 미스터 초가 도사던데.”
민승기는 하하 웃으며 대답했다.
“미스터 초는 워낙 바빠서.”
“아쉽군요. 파푸아뉴기니에 눌러앉으면 모든 원톡을 통일할지도 모르는 재목인데.”
“그 말을 들으면 미스터 초의 입이 귀에 걸릴 겁니다.”
“하하, 조금 과장이 섞이긴 했지만 노력하는 자세나 친화력이나 그만한 사람이 또 없으니까요.”
민승기와 조나단은 나란히 서서 거대한 화물선에 실리는 컨테이너를 바라봤다.
둘은 대찬을 떠올리며 미소를 머금었다.
왕핑웨이와의 거래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후, 대찬은 로튼 프룻츠의 양대 사업 중 사회공헌사업에 더 공을 들였다.
커피 원두의 수출입에 있어서는 민승기가 대찬보다 능력이 탁월했다.
물론 주당 중국인 바이어와 대작을 한다든지 하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서.
반면에 사회공헌사업에 있어서는 대찬이 나았다.
웜샤인의 산파 역할을 한 장본인이 대찬이었다.
거기에 민승기가 커피숍 프랜차이즈 업체에 몸담는 동안, 계속 웜샤인과 사업을 추진한 것도 대찬이었다.
결과적으로 필래의 투자를 받아 사업이 유지되도록 하는 것 역시 대찬의 공로였다.
그런 까닭으로 사회공헌사업에 있어서만큼은 대찬의 권위를 민승기는 확실히 인정해주었다.
필래 비바체의 업무 때문에 전력을 쏟지 못하는 대찬은 박 부장에게 대부분의 업무를 일임하고 자신은 굵직한 사무를 처리하고 결정했다.
그러던 중에 박 부장이 대찬에게 말했다.
“대표님, 건의드릴 게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우리 사회공헌사업부문을 한 차원 진화시키면 어떨까 합니다.”
대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차원 진화시켜요?”
“네.”
“진화는 좋지만 진화의 방향이 중요하겠죠. 멍게는 자라면서 뇌를 소화시켜 없앤다잖아요. 멍게처럼 진화하면 안 되니까요.”
“물론입니다.”
대찬은 웃으면서 박 부장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럼 들어볼까요?”
“네, 지금 우리가 웜 샤인 시절부터 벌여온 사업은, 기본적인 포맷은 사회적 기업이지만 어떻게 보면 광고회사이기도 했습니다.”
그 말에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사회공헌이라는 명분으로 필래그룹의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기 위한 사업들이 적지 않았죠.”
“네, 그런데 지금 로튼 프룻츠에 흡수된 뒤로는 그런 면모가 잘 드러나지 않는 듯합니다.”
대찬은 편안히 웃었다.
“당연하죠. 필래기획에서 쫓겨난 마당에 필래그룹의 광고를 우리가 맡아서 하기엔 무리가 있으니까요.”
“그게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건 아닌가 해서요.”
“음, 우리는 필래 비바체로부터 투자를 받고 있어요. 그럼 비바체의 브랜드 이미지를 제고시키는 사업을 해야 하는데.”
“맞습니다.”
“그럼 서원웅 대표가 같은 그룹인 필래기획이 아니라 우리 쪽에 일감을 던져주는 그림이란 말입니다.”
박 부장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습니다.”
“서 대표 입장에서 좀 부담스럽지 않을까요?”
“그럴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퍽 도전적인 제안이네요.”
“우리가 필래기획보다 나은 역량을 보유했다면, 당연히 우리한테 일감을 맡겨야죠. 그게 공정한 거래 아닙니까? 우리가 더 잘할 수 있는데 필래기획에 맡기는 게 도리어 내부거래입니다.”
“말씀이야 옳은 말씀인데.”
박 부장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단순히 비바체의 투자를 받아 사업을 벌이는 것이야말로 멍게처럼 진화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음?”
“비바체가 계속 투자를 하니까 사회공헌사업이라는 틀에 갇혀 발전을 도모하지 않는 것. 그게 멍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으음…….”
실컷 투사처럼 언변을 늘어놓던 박 부장인 대찬이 으음, 소리만 내며 답하지 않자 살짝 긴장했다.
나이가 자기보다 한참 어리다지만 어쨌거나 대표.
멍게론에 멍게론으로 받아쳤으니 너무 감정적으로 말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박 부장은 언성을 다시 조심스럽게 낮췄다.
“대표님, 오해하지 마시고 그러니까 제 말은…….”
“네, 부장님 말씀이 맞네요.”
“네?”
“우리 회사의 절반이 넘는 인원이 오로지 비바체가 던져주는 투자금만 축내고 있었으니, 문제는 문젭니다. 물론 열심히 일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만.”
대찬의 공감에 박 부장은 자신감을 되찾았다.
“네, 맞습니다.”
“그러니까, 박 부장님 말씀은 사회적 기업이라는 틀은 유지하되, 광고기획사로서의 역량을 발휘해서 수익도 추구하자는 말씀이시죠.”
“바로 그겁니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기존의 사회공헌사업도 망치고, 광고를 수주하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습니다.”
박 부장은 각오한 듯 눈빛을 발하며 말했다.
“제가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
“사업의 손실을 박 부장님 개인이 어떻게 책임지겠습니까. 달러 빚내서 손실 갚아주실 것도 아니잖아요.”
“무, 물론 그렇지만 제 각오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실패하면, 옷 벗겠습니다.”
“옷 벗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시겠다는 말씀이시죠.”
“맞습니다.”
대찬은 흐흐 웃었다.
“중소기업이 이런 장점이 또 있네요? 장점이라고 해야 하나 잘 모르겠지만.”
“네?”
“필래에 있을 때는 필래라는 울타리가 어떻게든 우리를 지켜주긴 하니까 타성에 젖게 되잖아요. 물론 다른 쪽으로 눈 돌리지도 못하게 부려먹기도 하지만.”
“아, 하하, 그렇죠…….”
“그런데 여기는 완전 야생 아닙니까.”
“네, 맞죠, 야생.”
“박 부장님이 이런 열정도 먹이를 구해오지 못하면 본인부터 굶어죽을까 하는 걱정에서 비롯된 거 아닙니까?”
“아니라고는 못하겠군요. 만약 사업이 잘못되면 늙은 직원부터 고려장 시키니까요.”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역시 아니라고는 못하겠네요. 저나 민 대표님이나 인성이 막돼먹진 않았지만 코너에 몰리면 군자도 짐승이 되니까.”
“네, 그래서 제가 직접 먹거리를 고민하게 되더군요. 나쁘지 않은 방법 같습니다만.”
“음, 서원웅 대표도 마냥 껄끄러운 관계인 형님의 회사에 광고를 맡기긴 좀 그럴 겁니다.”
“네, 필래 쪽의 인맥을 잘 가동하면 의외로 쉬울지도 모릅니다.”
대찬은 웃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내놓고 상업광고를 지향해선 안 됩니다. 일단 우리는 사회공헌사업부문이에요.”
“네, 맞습니다. 양의 탈을 쓴 늑대가 되면 안 되죠.”
“브랜드 이미지를 제고할 수 있는 공익적 광고를 주안점으로 두고 연구해보세요.”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님.”
대찬은 박 부장에게 속닥거렸다.
“이거 망하면 나도 민 대표님한테 혼나고 옷 벗어야 될지도 모릅니다. 진짜 죽을 동 살 동 해주셔야 합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대찬은 박 부장과 마주보며 웃다가 자세를 편하게 바꾸며 물었다.
“그래, 생각해둔 아이템은 있으세요?”
“음, 저번에 대표님께서 한 학생을 만나셨다고.”
“학생이요?”
“네, 치매 걸린 할머님과 둘이 산다는 그.”
“아, 수혁이. 네, 그런데요?”
박 부장은 대찬의 앞으로 찔끔 다가오면서 말했다.
“그 친구의 스토리가 퍽 박하지 않습니까?”
“그래서요?”
대찬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느낌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마침 또 학생 할머니께서 버터코코넛, 우리 필래제과 제품에 사연이 있으시고 하니.”
“학생과 할머니의 스토리를 내세우자?”
“맞습니다.”
그 말에 대찬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언뜻 분노도 어려 있었다.
“그건 당사자에게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수, 수치스럽다뇨?”
“그 사람들의 고난을 기업 이미지 제고에 써먹자는 말씀 아닙니까.”
박 부장에게도 논리는 있었다.
“이미 일전에 황금루의 노근기 사장님을 섭외했을 때도, 경북 청도의 보육시설을 광고에 등장시켰습니다.”
“단체를 조명하는 것과 개인을 조명하는 것의 차이를 박 부장님이 모르시진 않을 텐데요.”
대찬의 싸늘한 반응에 박 부장은 침을 꼴깍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