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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60화 (259/556)

난 할 수 있어 260화

탕, 왕핑웨이는 잔을 일부러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좋소. 45퍼센트. 세 번째 발주까지 위안화. 그렇게 결정합시다.”

“훌륭한 결단이십니다. 귀사와 오랜 시간 발전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면 합니다.”

민승기는 웃으면서 왕핑웨이에게 공손히 술을 따랐다.

왕핑웨이는 잔을 받으면서도 대찬을 노려봤다.

대찬은 굳이 왕핑웨이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는 옅은 웃음기를 머금은 채 구운 아기돼지의 부드러운 살점을 젓가락으로 발라먹었다.

왕핑웨이는 다시 건배 제의 없이 술을 꿀꺽 마셨다.

비즈니스가 해결된 술자리는 긴장 없이 일상의 신변잡기로 채워졌다.

그렇게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갈 즈음.

왕핑웨이는 대찬에게 불만스러운 눈빛을 쐈다.

대찬은 그 눈빛을 웃음으로 받으며 술병을 내밀었다.

“한 잔 따르겠습니다, 왕총.”

왕핑웨이는 대찬에게 잔을 내밀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이번 출장은 참 재미없었소.”

“왜 그렇습니까?”

왕핑웨이는 대찬에게 술을 따라주지 않았다.

대찬은 자작했다.

왕핑웨이는 제 할 말만 했다.

“한국이란 나라가 작은 반도의 절반만 차지하고 있어서 애초에 기대도 크지 않았지만.”

“…….”

왕핑웨이는 맘대로 끌고 가지 못한 계약으로 분노가 쌓여 있었다.

그 분노를 한국에 대한 조롱과 중국인으로서의 우월감을 뽐내는 것으로 해소할 모양이었다.

대찬은 우선 들어주었다.

“경복궁이란 것도 자금성에 비하면 화장실 수준이고.”

“화장실이라니…….”

“수원화성이 유네스코 어쩌고에 등재됐대서 가봤더니 장성의 귀퉁이에도 못 미치던데요.”

그 말을 진위생은 곤란해 하면서 통역해주었다.

“저 왕서방이 이제 아주 미쳐버린 것 같슴다. 너무 개의치 말기요.”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제가 중국에 가본 적은 없지만 규모로 치자면 중국에 당해낼 게 없죠.”

“그게 다 지리적 이유에서 오는 거라니까요.”

대찬은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지리적 이유요?”

“그, 제레미 다이아몬드가 총균쇠라는 책에서 말하는 게 바로 그거잖아요.”

대찬은 왕핑웨이가 할 뒷말을 대신 해주었다.

“문명의 수준은 지리적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

“맞아요. 한국사람들 똑똑한 거야 알아주지만.”

“주지만?”

“이 좁은 반도 때문에 문명의 발전이 더딘 셈이죠.”

“하하…….”

대찬은 별다른 반박 없이 웃기만 했다.

그러자 기세가 오른 왕핑웨이가 멋대로 떠들었다.

“반도에 갇혀 자기들끼리 복작거리며 사니까 문명이 거북이걸음을 하는 거 아니겠소?”

“왕총의 말씀이 옳습니다.”

대찬은 아무런 동요 없이 순순히 자신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자 도리어 왕핑웨이가 당황했다.

“옳다고요?”

“네, 중국은 활짝 열린 대륙에서 기지개를 켜서 화려한 문명을 활짝 꽃피웠잖습니까.”

“아, 뭐, 맞는 말이지…….”

“사실 저는 그 중국 사람들의 개방적인 태도가 부럽습니다.”

왕핑웨이는 고분고분 찬사를 늘어놓는 대찬의 말이 미심쩍었다.

“부럽다고요?”

“네, 사실 우리나라는 아집이 심해서 우리끼리 똘똘 뭉쳐서 어떻게든 외세를 튕겨내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근데 중국은 그게 아니라 갖은 이민족에게 가슴을 벌려서 문명을 꽃피웠잖습니까.”

왕핑웨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라고요?”

“선비족이 세운 수나라가 찢겨진 땅을 통일해주고.”

“…….”

“그걸 이어받아 다시 선비족 혼혈이 세운 당나라가 세계제국으로 키워주고요.”

“조 사장.”

가벼운 제지에도 대찬은 멈추지 않았다.

“제가 중국역사를 잘 모르긴 하지만 들은 건 얼추 있습니다.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가 유라시아 대륙에서 떵떵거리게 만들어주고요.”

“비약이 심하잖습니까.”

“그런가요. 한족이 세운 명나라가 정덕·가정·만력·천계 멍청한 황제들 때문에 시름시름 앓았는데.”

“…….”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워서 강희·옹정·건륭황제가 다시 대륙을 살려줬잖아요.”

왕핑웨이의 언성이 높아졌다.

“역사를 허투루 배우신 거 같군요.”

“아, 건륭제는 평가가 갈린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허투루 안 배웠어요.”

“불쾌하군요.”

“불쾌하게 만들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근데 총균쇠 말씀을 하셔서요. 저는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거든요.”

“…….”

“한족의 한나라, 명나라가 개판 치는 걸 오랑캐의 당나라, 원나라, 청나라가 바로잡아줬잖습니까. 그럼 문명을 결정하는 건 지리적 환경이 아니라 사람이 아닐지…….”

대륙의 문명을 결정해온 건 한족이 아니라 오랑캐가 아닐지…….

노골적인 말은 생략되었다.

하지만 왕핑웨이를 흥분시키기에는 차고 넘쳤다.

왕핑웨이는 식탁을 탕 내리치며 벌떡 일어섰다.

“그러니까 지금 한족이 열등한 민족이라 이 소립니까!”

“왕총이야말로 비약이 심하시네요. 저는 전혀 그런 의도로 말씀드린 게 아닌데.”

“나를 지금 바보로 보는 겁니까?”

“아뇨. 뭘 그렇게 화를 내십니까? 왕총의 핏줄에 흐르는 피에도 오랑캐의 지분이 있을 텐데. 자랑스러워하세요, 자국의 역사를.”

왕핑웨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우리 조국을 이렇게 깔아뭉개고도 우리랑 제대로 된 비즈니스를 할 수 있을 거 같습니까!”

“왜 못합니까. 저는 경복궁이 자금성 화장실이란 소리를 듣고도 비즈니스를 하려고 하는데요.”

“이익…….”

대찬은 얼굴을 뻣뻣하게 굳혔다.

“여기서 계약을 뻥 차버리시면 인정하시는 셈입니다. 문명은 땅이 아니라 사람이 결정한다는 제 엉터리 이론을요.”

“사과하시오. 아니면 이 자리에서 계약을 파기하겠소.”

대찬은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러시렵니까. 그러면 귀사의 동사장께서 실망이 크실 텐데.”

“뭣……!”

정곡을 확 찔린 왕핑웨이의 말문이 막혔다.

대찬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 말이 왕총을 불쾌하게 만들었다면 사과드리죠.”

“…….”

“제 사과를 받으시면 왕총께서도 사과하십시오. 그리고 서로의 이익을 위해 이 좋은 비즈니스를 계속하시죠.”

“…….”

“손, 안 잡으실 겁니까.”

왕핑웨이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대찬의 손을 맞잡았다.

“역시 왕총께서는 호협이십니다.”

대찬은 웃으면서 가볍게 잡은 손을 흔들었다.

왕핑웨이는 멋쩍은 시선으로 다른 곳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화장실 좀 다녀오겠소.”

“하하, 그러십시오.”

눈 가리고 아웅.

왕핑웨이는 최종협상결과를 동사장에게 보고하러 가는 것이다.

대찬은 그의 부재를 여유롭게 기다려주었다.

그렇게 왕핑웨이가 자리를 비우자 진위생이 히죽히죽 웃었다.

대찬이 그를 보며 미심쩍은 시선을 보냈다.

“뭘 그렇게 웃어요?”

“저도 말임다, 조 대표임 생각에 전적으로 공감하지 말임다.”

“제 생각에요?”

진위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명이란 땅이 아이라 사람에 의해 갈린다는 거 말임다. 저두 중국 땅에서 났지만 한국사람 아이겠슴까.”

“조선족 분들은 본인이 중국 사람이라고 생각하신다던데요.”

“서류상으론 그렇지만 생각은 아임다. 모… 중국 사람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는 함다. 사람마다 다 생각은 다른 거 아이겠슴까.”

“그렇죠. 생각 다 다르죠, 사람마다.”

대찬은 빙긋 웃었다.

왕핑웨이가 다녀오자, 대찬은 그를 친절하게 대했다.

계약이 잘 성사된 마당에 더 이상 그와 불꽃을 튀길 이유가 없었다.

대찬은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왕총께서는 내일 톈진으로 돌아가십니까?”

“아, 별도의 건이 있어서 바로 내일 돌아가진 않습니다.”

“그렇군요. 혹시 커피를 취급하는 회사입니까?”

왕핑웨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귀사와의 계약에는 어떠한 영향도 없을 테니 안심하시오.”

“하하,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아무튼 조 사장은 쓸데없이 꼼꼼해서 탈이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칭찬 아닙니다!”

왕핑웨이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그르르, 맹견처럼 화를 삭였다.

그런데 어떠한 영향도 없을 것이라던 왕핑웨이의 ‘별도의 건’은 대찬에게 모종의 영향이 있었다.

필래 비바체로 출근한 대찬은 업무 차 해외영업부에 들렀다.

해외영업부 직원들 사이에 여러 말이 오갔다.

그런 와중에 귀가 쫑긋하는 소식이 있었다.

“회의실에 덩치 산만 한 사람 있던데, 누구야?”

“아, 이번에 보이차 특별전 하기로 했잖아요.”

“응.”

“그래서 여러 업체 알아보고 있었는데 개중 한 업체 임원이 방문해주셔서 미팅하는 거예요.”

“손님이 중국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접대라도 좀 거하게 하지 않고.”

“관광하고 술은 됐다던데요.”

“그래? 척 보기에는 술 엄청 잘 마시게 생기셨더만.”

그 말을 유심히 듣던 대찬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저 혹시, 그 중국손님이 톈진정봉무역 부총경리 아니에요? 왕핑웨이 부총경리.”

“조 차장님이 그걸 어떻게 아세요? 저 조 차장님이 가끔 이럴 때면 너무 소름 돋아요. 신기 있으신 거 같아.”

직원의 호들갑에 대찬은 웃음을 지었다.

“어쩌다 인연이 닿아서요.”

‘별도의 건이라는 게 비바체 말하는 거였어?’

대찬은 세상 참 좁다고 속으로 곱씹었다.

직원은 기대하는 표정으로 대찬에게 물었다.

“저 분하고 꽌시 있으세요?”

“꽌시는 아니고 그냥 몇 번 뵀어요.”

“잘됐다. 저 업체가 취급하는 제품들이 괜찮아서 유심히 보고 있었는데. 조 차장님이 가볍게 인사라도 한번 해주시면 안 돼요?”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대찬은 몸을 일으켜 왕핑웨이가 있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를 발견한 왕핑웨이의 눈빛이 흔들렸다.

“웨, 웨이셤머(为什么, 어째서)…….”

“닌 하오, 왕총.”

“조 사장이 어떻게 여기 있습니까?”

“제가 명함이 좀 많습니다. 로튼 프룻츠 공동대표면서 여기, 필래 비바체 사원입니다.”

“이럴 수가.”

왕핑웨이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하기야 회사를 경영하면서 또 다른 회사의 직원으로 있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런 흔치 않은 경우 중에서도 대부분은 기업의 대표를 맡으면서 다른 기업의 사외이사를 맡는 것이었다.

이렇게 양쪽에서 활발하게 주역으로 활동하는 경우는 전무하다고 봐도 좋았다.

그러니 왕핑웨이가 당황하는 것은 당연했다.

대찬은 그와 오래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없었다.

대찬은 왕핑웨이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모쪼록 귀사와 우리 회사가 좋은 관계로 발전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잘될 겁니다.”

대찬이 그렇게 말하고 회의실을 나오는데, 왕핑웨이가 뒤따랐다.

그는 영어로 말했다.

“조 사장님이 여기 계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저도 왕총께서 여기 계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잘하시네요? 영어.”

“혹시 직급이…….”

“차장입니다. 중국에서는 차장을 뭐라고 하는 줄 몰라서 말씀을 못 드리겠네요.”

“아닙니다. 대충은 알고 있으니.”

왕핑웨이는 로튼 프룻츠의 대표인 대찬을 대할 때보다 필래 비바체의 차장, 그것도 업무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는 차장인 대찬을 대할 때 더 깍듯했다.

“저, 조 사장님.”

“네, 왕총.”

“이번 비바체와의 계약, 저희한테 중요합니다. 힘 좀 실어주시죠.”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저는 해외영업부 업무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람입니다. 제 권한 밖입니다.”

“으음, 하지만 비공식적인 루트로…….”

“하하, 해외영업부 쪽에서 저한테 조언을 구하면 그때 제 의견을 전하겠습니다. 그 이상으로는 부적절합니다.”

“조 사장님이 밀어주시면 로튼 프룻츠와의 계약도 더 힘 있게 추진될 겁니다.”

대찬은 왕핑웨이의 눈을 바라보며 웃었다.

“위험한 말씀이십니다. 그건 못 들은 걸로 하죠. 이건 별개입니다.”

“저는 별개로 생각하기 어렵군요.”

“왕총의 생각까지 제가 어쩔 수는 없죠.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

대찬은 왕핑웨이 쪽으로 몸을 틀고는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갔다.

“비바체와의 계약 때문에 로튼 프룻츠와 귀사의 계약이 흔들리면, 제가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할 겁니다.”

“지금 협박하는 겁니까.”

“전혀요. 도리어 왕총께서 협박 비슷한 걸 하셨죠.”

“조 사장님이 이렇게 딱딱하고 강경한 사람인 줄은 몰랐습니다.”

“이왕이면 공명정대하다고 해주시죠.”

대찬은 그렇게 말하고 왕핑웨이의 앞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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