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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59화 (258/556)

난 할 수 있어 259화

대찬은 진위생을 흘끗 보며 말했다.

“오줌보가 너무 결정적인 타이밍에 터지죠?”

“저는 모르겠슴다. 조 대표님 직감이 글타믄 그런 것 아이겠슴까.”

“으음…….”

대찬은 왕핑웨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다시 냉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안주를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물 때문에 헛배가 불렀다.

“하하, 이거야 나이가 들어가니까 화장실을 자주 가게 돼서…….”

“아직 젊으신데요, 뭐. 마침 저도 한번 다녀올 때가 돼서…….”

“아, 다녀오시오.”

대찬은 화장실로 가서 진위생이 주선해준 더듬이를 찾아갔다.

“계속 냄새 나는 화장실에 계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임다. 확실히 고급식당이라 그런지 화장실에서두 라벤다 향내가 은은해서 괜찮슴다.”

대찬은 약속한 십만 원에서 오만 원을 먼저 건네며 물었다.

“방금 들어온 중국인 사장님이 볼일만 보시던가요?”

“볼일은 아이 보시고 어디로 전화만 걸었슴다.”

“전화요?”

대찬의 눈이 빛났다.

더듬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한테 거는지는 모르겠지마는, 별로 떳떳한 목소리는 아니었슴다.”

“뭐라던가요?”

“자세한 건 녹음파일을 다시 들음서 녹취록을 써야겠지만서도…….”

“역시 진위생 씨가 추천한 대로 꼼꼼하시군요.”

칭찬에 더듬이는 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핸들링 어쩌구를 그쪽에서 부담하고…….”

“핸들링 차지요.”

“예, 맞슴다. 핸들링 차지를 그쪽에서 부담하고 런민비로 결제하는 대신…….”

“런민비가 위안화를 말하는 것이죠.”

“맞슴다. 그렇게 하는 대신으로 물량을 반절이나 더 추가하라는데 이거이 쫌 말이 아이 되지 않느냐 했슴다.”

대찬은 팔짱을 끼며 손가락으로 팔뚝을 톡톡 건드렸다.

“윗선과 상의를 하는 거 같은데.”

“네, 맞슴다. 말하는 투가 퍽 구차하더란 말임다.”

“그러니 전화 받는 쪽에선 어떻게 반응하는 것 같던가요?”

“제가 쏘머즈 귀가 아이라서 받는 쪽 목소리는 못 들었습니다만, 그 사자임 말씀하시는 기 마치 혼나는 것 같았슴다.”

“혼나요?”

더듬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그 사자임이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니 이랬슴다.”

대찬은 더듬이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제가 생각이 마이 짧았슴다. 미래를 생각하고 잘 처리하겠슴다. 한국 회사와 서로 잘 되는 방법으로 계약까지 성사시키겠슴다, 라고.”

“오호라.”

“그리고 일케도 말했슴다. 반드시 이번 계약을 제대로 일궈내서 자리에 맞는 그릇임을 증명해보이겠다고 말임다.”

“자리에 맞는 그릇임을 증명해보이겠다…….”

대찬은 그 말을 천천히 곱씹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는 더듬이의 팔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일이 잘 풀릴 거 같군요. 일단 나머지 금액 받으시고요.”

“아이고, 고맙슴다.”

“더 안 계셔도 되겠지만 혹시 모르니 조금만 더 수고해주세요. 일이 잘되면 더 얹어드리겠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함다.”

대찬은 웃으면서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더듬이가 일러준 대화내용을 종합해보면, 왕핑웨이 부총경리는 아마 자신의 아버지와 통화했을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이자, 톈진정봉무역유한공사의 동사장인 왕 아무개.

왕핑웨이는 대찬이 제시한 조건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왕 동사장은 그의 생각을 정면으로 꾸짖었다.

‘게다가 왕핑웨이는, 이번 계약을 잘 성사시켜서 자리에 맞는 그릇임을 증명하겠다고 했지.’

그 말을 뒤집으면, 이번 계약을 망치면 자신의 그릇이 작다는 걸 대내외에 알리는 꼴이라는 뜻이다.

‘그럼, 왕핑웨이는 회사의, 아버지의 인정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왕핑웨이는 이 계약을 반드시 성사시켜야 한다.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왕핑웨이는 이 거래의 갑이 아니었어. 우리도 을, 왕핑웨이도 을이다.’

왕핑웨이의 상투를 잡았다.

게임은 공평해졌다.

들뜬 기분에 역한 술기운이 일거에 날아가는 듯했다.

대찬이 돌아오자 왕핑웨이는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많이 드셔서 많이 나왔나봅니다.”

“하하, 오랜만에 술을 과음했더니 배가 살살 아파져서…….”

“에이, 조 사장님 같은 분이 이렇게 엄살을 부리셔서야. 우리 대범하게 마십시다.”

“하하, 그러시죠.”

대찬은 왕핑웨이와 잔을 부딪치고 물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렸던 조건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승낙해주시는 겁니까.”

“일단 오늘은 술만 드십시다.”

왕핑웨이는 슬며시 한 발 뒤로 뺐다.

그것 역시 대찬에게 좋은 신호였다.

대찬은 기쁜 마음으로 그가 하자는 대로 해주었다.

왕핑웨이의 잔을 돌리는 속도가 확연히 느려졌다.

초반의 기세가 아니었다.

그렇게 자리는 어영부영 끝났다.

왕핑웨이는 자신의 비서와 함께 먼저 자리를 떴다.

대찬이 호텔까지 에스코트하겠다고 했지만 사양했다.

그렇게 왕핑웨이를 떠나보낸 대찬은 비로소 한숨 돌렸다.

“오랜만에 미친 듯이 마셨네.”

“고생 많으셨슴다.”

“진위생 씨도 고생 많으셨어요.”

대찬은 진위생에게 일당보다 더 돈을 얹어 값을 쳐주며 말했다.

“추가수당의 절반은 뚝 떼서 진위생 씨 친구 갖다 주세요. 두 분 수고가 많았으니 이걸로 맛있는 거 사드세요.”

“이미 맛있는 거는 잔뜩 먹어서 괜찮슴다.”

“진위생 씨나 맛있는 거 잔뜩 드셨죠. 친구 분은 라벤더 향기만 잔뜩 드셨거든요.”

진위생은 머쓱하게 웃었다.

둘을 보낸 대찬은 완전히 뻗어버린 민승기를 들쳐 메고 택시를 잡았다.

민승기의 집에 도착해 그를 침대에 눕혔다.

자신은 바닥에 담요를 깔고 드러누웠다.

‘일단 물꼬는 텄다.’

대찬은 그렇게 웃으며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술기운이 몰고 오는 잠기운이 강했다.

옷도 재킷까지 입은 그대로, 머리도 도시의 먼지를 씻어내지도 못한 그대로였다.

대찬과 민승기는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으, 머리야…….”

민승기는 깨질 듯한 두통을 느끼며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러자 침대 옆에 미라처럼 곱게 누워있던 대찬이 입술만 움직였다.

“일어나셨어요?”

“아, 깜짝이야.”

“얼마 드시지도 않으셨으면서 뭘 그렇게 고통에 몸부림치세요.”

“야, 나도 많이 마셨거든.”

“제가 마신 양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예요. 지금 제 혈관에 흐르는 게 피인지 술인지 모를 정도라고요.”

“…그래, 고생했다.”

“일단 말할 힘이 없으니까 우리 10분만 이러고 있어요.”

“…그래.”

대찬은 정확히 10분 동안 꼼짝도 안 하고 누워있었다.

10분이 지나자 대찬은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은 퀭하고 피부는 푸석하고 머리는 까치집이었다.

대찬은 참을 수 없는 갈증에 생수를 페트병채로 들이켰다.

민승기는 여전히 무기력한 목소리로 대찬에게 물었다.

“왕총하고 얘기는 어떻게 됐어.”

“그쪽에서 키로 당 2불씩 깎아달라고 하던데요.”

“뭐? 안 돼!”

대찬은 다시 물을 들이켜고 말했다.

“그래서 그건 안 된다고 했어요.”

“당연하지!”

“대신 대금을 위안화로 결제 받고 핸들링 차지를 우리가 부담하겠다고 했어요.”

“2불씩 깎는 것보단 낫지만 그것도 우리한테 불리하긴 마찬가지야.”

“네, 그래서 그렇게 해주는 대신 물량을 50퍼센트 늘려달라고 했어요.”

민승기는 침대 위에 앉은 채로 팔짱을 꼈다.

“그건 정봉 쪽에서 고개를 갸웃거릴 텐데.”

“네, 그래서 그날 자리는 흐지부지됐어요.”

“쩝, 최소한 내준 건 없으니 그걸로 위안삼아야 하나.”

“위안거리가 하나 더 있어요. 아마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될 거예요.”

“응? 뭔데?”

대찬은 더듬이에게 들은 것을 자신의 해석을 덧붙여 민승기에게 설명했다.

그러자 민승기의 눈이 빛났다.

“이러면 판이 또 달라지는데?”

“네, 달라졌죠.”

“그 자리에 너 데려오길 잘했다. 해장하자. 뭐 먹을래?”

“짬뽕이요.”

“너는 전복차돌짬뽕 먹어라.”

“어차피 법카 긁으실 거잖아요?”

민승기는 대찬의 머리를 살짝 퉁 밀며 말했다.

“내 걸로 긁을 거야, 짜식아.”

“잘 먹겠습니다.”

민승기는 가뿐한 얼굴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둘은 허겁지겁 짬뽕을 먹으며 해장했다.

그들의 속을 풀어준 건 기실 짬뽕이라기보다는 협상의 실마리였다.

왕핑웨이와의 두 번째 만남은 주말이 끝나고 돌아오는 화요일이었다.

아직 주말에 마신 술 때문에 속이 술을 거부하는 날이었다.

그럼에도 대찬은 다시 왕핑웨이를 만나기 위해 나섰다.

‘이러다 또 죽는 거 아니야?’

대찬은 퇴근하고 왕핑웨이를 만나러 가는 도중에 약국에 들렀다.

“숙취해소제 주세요.”

대찬은 약의 힘을 빌려서라도 간을 보호할 작정이었다.

그는 약을 받자마자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심기일전하고 왕핑웨이를 만나러갔다.

왕핑웨이를 다시 만났을 땐, 초면의 두려움이 많이 가신 상태였다.

처음 만났을 때는 어떻게든 취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술을 많이 먹어서 주저리주저리 공수표를 남발하면, 다음날 그걸 구실로 무리한 요구를 해올까 두려웠던 탓이었다.

그런데 저 녀석도 반드시 한국에서 성과를 내야만 하는 입장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전혀 두렵지 않았다.

왕핑웨이는 흡사 가위 눌릴 때 등장하는 귀신이었다.

그 귀신이 실은 내 기억이 만들어낸 허상임을 깨닫고 나서는 그리 두렵지 않은 것과 비슷했다.

대찬은 자신 있게 웃으며 왕핑웨이에게 악수를 건넸다.

“오늘은 적당히 달려주십시오. 황새 쫓아가는 뱁새 다리가 찢어진답니다.”

“여기 민 대표는 뱁새일지 몰라도 조 사장은 황새 아닙니까?”

“황새인 척 하는 뱁새입죠.”

대찬은 웃으면서 왕핑웨이에게 자리를 권했다.

역시나 이날도 그는 멀쩡한 정신에서는 비즈니스를 얘기하지 않았다.

대찬은 이제 그의 입이 열리기를 마냥 기다려주지 않았다.

먼저 포문을 열었다.

“왕총, 일전에 제안 드린 조건에 대해 이제 슬슬 대답을 들을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술맛 안 좋아지게 벌써 그 얘기를 해요?”

“얼른 얘기를 끝내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술맛 즐기려고 이럽니다.”

대찬이 사람 좋게 웃으면서 말하는데도 왕핑웨이는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으려 했다.

“좀 더 마시고 합시다.”

“왕총, 호협(豪俠, 호탕하고 의협심이 투철한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왕핑웨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들었습니다만……?”

“대륙만큼 너그럽고 호탕한, 그야말로 호협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호협다운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그럼, 지금 내 태도가 호협답지 않다는 겁니까?”

“너그럽고 호탕하시진 않지요, 하하.”

일전과는 다른 대찬의 날선 태도에 왕핑웨이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는 술잔을 내려놨다.

“처음보다 퍽 혀가 날카로워지셨군요.”

“그럴 리가요. 얼른 계약을 따내고 즐겁게 술잔을 나누고 싶은 소인배스러운 생각뿐입니다.”

“조 사장의 그 태도가 계약을 무효로 돌릴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하십니까?”

반 협박조에 가까운 말에도 대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왕총께서 결례도 아닌 말 한 마디에 판을 엎을 위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으음…….”

“왕총, 일전에 대범하게 마시자고 하셨죠. 대범하게 결단하고 대범하게 드시죠.”

“30퍼센트.”

“…….”

“그쪽에서 위안화 대금결제, 포워딩 차지를 부담하면, 발주물량을 30퍼센트 늘리겠소.”

대찬은 그 제안을 받을 생각이 없었다.

이미 50퍼센트로 물량을 늘리는 조건은 그의 상사인 왕 동사장으로부터 오케이 사인을 받은 것이었다.

대찬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시다면 위안화 결제를 세 번째 발주까지가 아니라 두 번째까지만 하겠습니다.”

“조 사장은 호협답게 계약할 용의가 없습니까?”

“하하, 왕총께서 50을 30으로 줄이셨을 때부터 호협다운 거래는 어렵게 된 것 아닙니까.”

“…….”

대찬과 왕핑웨이가 서로 강경한 태도를 보이자, 민승기가 끼어들었다.

민승기는 엄연히 대찬과 한 패였다.

그런데 대찬이 강경한 태도를 보이니, 민승기가 슬며시 중립적인 중재자처럼 끼어들었다.

“자자, 두 분 굳이 얼굴 붉히실 거 없습니다. 진정들 하시죠.”

“…….”

“왕총, 그럼 45퍼센트로 하시죠. 저희는 세 번째 발주까지 위안화로 대금을 받겠습니다.”

“으음…….”

“거래만 잘 되면 다음 대금도 위안화로 받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왕핑웨이는 건배도 제안하지 않고 독주를 혼자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저놈의 간땡이는 비브라늄으로 만들었나.’

대찬은 그걸 보고 얼굴이 찡그려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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