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58화
“그럼, 너 접대 한번 할래?”
“네? 접대요?”
민승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중국 톈진 정봉무역에서 우리 커피에 관심을 보였어.”
“오, 그래요? 근데 중국 출장 갈 정도의 여유는 안 날거 같은데요.”
“한국으로 오겠대.”
“아, 그럼 가능하겠네요. 정봉무역? 규모는 어떤 편이에요?”
민승기가 대답했다.
“아주 큰 기업은 아니야. 그래도 내실은 있어 보이더라. 규모가 컸으면 우리한테 관심 보이지는 않았겠지.”
“알겠습니다.”
“비즈니스적인 건 내가 처리할 거야. 주말 접대에도 내가 나가긴 할 텐데, 굳이 널 찾는 건 이유가 있어.”
대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유가 뭔데요?”
“그 인간, 엄청난 말술이래.”
“그러니까 술상무 하라는 얘기군요.”
민승기는 부정하지 않았다.
“중요한 계약이라 동원할 수 있는 건 뭐든 동원해야 돼. 근데 알다시피 내가 말술 소리 들을 정돈 아니잖아.”
“그 말씀은 전 말술 소리 들을 정도라는 거예요?”
민승기는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대학 새터 때 종이컵에 소주 담아서 물처럼 마시면서 유백기 조지던 기억이 눈에 선한데?”
“그건 순한 이슬이잖아요. 중국에서 말술 소리 들으려면 빼갈을 물처럼 마셔야 할 텐데.”
“그래도 나보단 네가 낫잖아. 부탁 좀 하자.”
“알았어요. 그래도 그 인간 상대로 끝까지 버틴다고는 장담 못 합니다?”
민승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 양반, 한국에 언제 온대요?”
“바로 다음 주야. 일주일 일정으로 오겠대.”
“참 나, 커피 사러 왔으면 그냥 사갖고 가면 될 것이지 뭘 그렇게 오래 눌러 있겠대요?”
“모처럼 관광도 좀 할 모양이지. 경복궁하고 박물관이나 DDP 정도 구경시켜줄까 하는데.”
“네, 그거야 선배가 알아서 잘 하시겠죠.”
민승기는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그건 내가 알아서 잘 할 테니까 너는 그냥 술이나 잘 먹여.”
“그럴게요. 그래도 통역은 있어야 될 거 같은데.”
“음, 우리 쪽 김 대리가 영어랑 일어는 잘하는데 중국어는 잘 못해서 내 일정에는 내가 잘 아는 사람 섭외해놨어. 너 올 때도 그렇게 하려고 하는데.”
“아뇨, 굳이 밤까지 모르는 사람 섭외할 필요 없고요.”
“아는 사람 있어?”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진위생 씨요, 수영실업의.”
“아무리 그래도 공장노동자를 통역으로 쓰는 건 좀…….”
“왜요. 수영 오찬식 사장님 통역으로도 종종 일해 봐서 기본적인 양식은 알고 있던데요.”
“괜찮을까?”
“되레 모르는 사람보다는 나아요. 접대 자리에서는 순발력 있게 주고받는 게 필요한데 데면데면한 사이에서는 아무래도 좀 어렵거든요.”
“음.”
“진위생 씨하고 저하고 죽이 잘 맞는 편이에요. 척하면 척이죠. 진위생 붙여주세요. 그거면 돼요.”
당사자가 그렇다니 민승기는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그걸로 맥주 값은 갚은 셈 치는 겁니다?”
“쩨쩨하게 맥주 한 잔 가지고 갚네 마네 하기는.”
민승기는 싱겁게 웃으면서 맥주를 들이켰다.
대찬은 주말이 될 때까지 민승기로부터 바이어에 대한 정보를 전해 들었다.
“그쪽 부총경리가 왔어.”
“부총경리면, 부사장이란 뜻이죠?”
“응, 동사장(중국에서 대표이사를 일컫는 말) 아들이라더라.”
“나이가 꽤 젊겠네요?”
“그렇지도 않아. 마흔이 넘었대. 호방한 기질이라니까 잘 대하도록 해.”
“좋게 말해 호방한 기질이지 조폭 형님 기질이 다분하단 거잖아요.”
민승기는 웃음만 띠었다.
틀린 말은 아니란 뜻이었다.
대찬은 민승기로부터 바이어의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틈틈이 진위생에게 중국어를 배웠다.
“이번에는 차오니마 어쩌고 하는 저속한 말 가르쳐주면 큰일 납니다, 진짜.”
“하하, 저도 천지분간은 하는 사람임다.”
“당최 믿을 수가 있어야지.”
“자꾸 이러시면 저 접대자리 가서 사고 한번 거하게 칩니다?”
“아구, 무서워라. 알았어요. 고분고분 배울게요.”
진위생은 씩 웃고는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주말이 돌아왔다.
대찬은 진위생과 함께 접대장소로 향했다.
결전의 장소는 서울 시내의 고급 중식당이었다.
중국의 바이어들은 입맛이 까다롭다.
어쭙잖게 한국의 음식을 먹이겠다고 한정식 집으로 데려가느니, 자기들이 원래 먹던 음식을 고급스럽게 내놓는 쪽이 안전했다.
대찬은 그 자리에서 정봉무역의 부총경리와 만났다.
민승기가 서로를 소개해주었다.
“왕총(总), 여기는 우리 로튼 프룻츠의 공동대표인 조대찬 대표입니다.”
주로 총경리를 줄여 총으로 불렀는데, 대체로 예우 상 한국의 이사에 해당하는 경리 이상이면 총이라고 불러주었다.
왕씨 성을 가진 이 바이어 역시 직급이 부총경리였으니 왕총이라고 불렀다.
왕총을 본 대찬의 첫 감상은 ‘술 잘 마시게 생겼다’였다.
경주의 신라 왕릉처럼 툭 불거진 배는 고량주를 100리터는 족히 저장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대찬이 그의 배에 잠깐 정신이 팔린 사이, 민승기가 대찬에게 말했다.
“조 대표, 여기는 톈진정봉무역유한공사의 왕핑웨이(王平伟) 부총경리.”
“아, 닌 하오. 워 쓰 조대찬.”
“니 하오.”
왕핑웨이는 웃으면서 악수를 건넸다.
대찬은 얼른 손을 붙잡았다.
작지 않은 대찬의 손을 넉넉히 감쌀 정도로 왕핑웨이의 손은 컸다.
그는 넉살 좋게 웃으면서 말했다.
“민 대표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술을 그렇게 잘 드신다고.”
왕핑웨이의 말을 진위생이 통역해주자, 대찬은 질색했다.
“민 대표가 절 죽이려고 작정했군요. 왕총께서 대단하신 주호(酒豪)라고 들었습니다. 제가 어딜 비기겠습니까.”
“하하하, 주호는 무슨. 자, 사업 얘기는 민 대표와 많이 했으니 조 대표는 그저 실컷 먹고 마시면서 즐기시죠.”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왕총께서도 부디 실컷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아, 좋아요. 자, 그럼 마셔봅시다.”
그는 웃으면서 술을 따르려다가, 앞에 놓인 작은 잔을 보고 못마땅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에 따라 먹어서 어느 세월에 취한답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맥주나 담아 마시라고 갖다놓은 유리잔에 40도가 넘는 고량주를 콸콸 부었다.
그걸 보는 한국인들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대찬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저 미친놈…….’
유리잔에 가득 채워지는 술만 봐도 벌써 취하는 기분이었다.
1시간 후.
민승기는 그대로 아웃.
대찬의 스피커 역할을 하는 진위생은 그나마 왕핑웨이의 술 세례를 비껴나가 아직 생존 중이었다.
대찬은 왕핑웨이의 고량주 공세를 온몸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넷이서 700ml짜리 고량주를 네 병이나 비웠다.
1인당 한 병씩 비운 꼴이었다.
기실 진위생은 다른 이의 절반 정도만 마셨고 민승기 역시 조기에 나가떨어졌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대찬과 왕핑웨이가 대부분을 먹어치운 것이었다.
대찬은 정신이 핑 돌 지경이었다.
그런데 왕핑웨이는 얼굴에 약간의 홍조만 띨 뿐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저 홍조 역시 알콜에 잔뜩 절어있는 징조라기보다는, 활발한 혈액순환의 증거인 듯하여 도리어 건강해보였다.
“조 사장은 술 좀 하시는군. 자, 오늘 계속 가봅시다. 오랜만에 대작할 만한 사람을 만나서 기분이 좋습니다.”
“하하, 네…….”
왕핑웨이의 대작할 만한 사람을 만났다는 말이, 대찬의 귀에는 대적할 만한 사람이라고 들렸다.
대찬은 가까스로 버텨냈다.
한창 술을 마시던 왕핑웨이가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화장실 좀.”
“네, 다녀오십시오.”
왕핑웨이는 화장실로 향하면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대찬은 완전히 뻗어버린 민승기를 바라보다가 그래도 정신이 온전한 편인 진위생에게 말했다.
“좀 이상하지 않아요?”
“네? 뭣이 말임까?”
“화장실을 너무 자주 가잖아요.”
진위생은 흐흐 웃었다.
“술을 저리 처마시니 화장실 안 자주 가고 배기겠슴까.”
“아니, 그래도 너무 심해요. 나 한 번밖에 안 다녀왔는데 지금 1시간 사이에 서너 번을 가잖아요?”
진위생은 피식 웃었다.
“괜히 저 왕 서방이 미우니까 트집 잡는 거 아임까.”
“트집이 아니에요. 저기서 꿍꿍이를 벌이는 게 분명해.”
“꿍꿍이라믄 먼 꿍꿍이를 벌인단 말임까.”
“그걸 알아야겠어요. 진위생 씨, 혹시 이 주변에 있는 친구 중에 용돈벌이 할 친구 없답니까?”
“그건 갑자기 왜서 물어봄까?”
“있어요, 없어요. 빨리. 왕 서방 오기 전에.”
“방구석에서 불알 긁고 있는 동무 중에 돈 급한 놈들이야 쌔고 쌨디요.”
“하나만 부릅시다. 참을성 좋고 두뇌회전 빠릿빠릿한 친구로.”
“얼마 줄 검까?”
“십만 원.”
“아이구야, 경쟁이 치열하겠는데.”
진위생은 대찬의 말대로 해주었다.
그 결과, 식당 화장실의 변기 칸에 대찬의 더듬이가 하나 심어졌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왕핑웨이는 계속해서 술을 따랐다.
대찬은 요령껏 마셨다.
그러면서 최대한 잔과 잔 사이의 시간을 오래 두기 위해 계속 말을 걸었다.
“민 대표가 왕총을 모시고 서울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드렸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즐거우셨습니까?”
“아, 뭐, 나쁘지 않았소. 근데 조 사장도 내 몸뚱이를 보면 아시겠지만 여기저기 쏘다니는 것보다는 진득이 앉아서 술 마시는 걸 좋아하는지라.”
“하하, 저도 그 편을 더 좋아하긴 합니다.”
“뭐, 경복궁이니 종묘니 하는 것들을 둘러봤지만 자금성이나 만리장성에 비할 규모가 아니니까 좀 심심하기도 하고.”
대찬은 은근히 신경을 건드리는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저희가 취급하는 커피는 입에 맞으셨는지요.”
“마시기에 나쁘진 않았지만.”
“않았지만?”
“조금 단가가 비싼 것 같기도 하고.”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 들이는 쪽에서는 그렇게 느끼실 수도 있지만 다른 비슷한 품질의 원두와 비교했을 때 충분히 합리적인 가격입니다.”
“뭐,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더 괜찮은 가격에 들여가고 싶은 게 솔직한 욕심입니다.”
왕핑웨이는 은근슬쩍 단가를 후려칠 속셈을 내비쳤다.
대찬이 민승기에게 전해 듣기로, 왕핑웨이와의 협상은 의외로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고 했다.
별 달리 트집 잡는 것도 없이 선선히 계약서에 사인해줄 기세였다고 했다.
그런데 사업 얘기는 슬쩍 뒷전으로 미루고 기분 좋게 술이나 푸는 자리에서 왕핑웨이는 점점 발톱을 드러냈다.
‘이런 식으로 비즈니스를 하시겠다.’
대찬은 정신 줄을 꽉 붙들었다.
왕핑웨이는 자신의 장점을 비즈니스에 십분 활용했다.
상대방의 정신이 혼미한 틈에, 자기는 맨 정신으로 원하는 바를 관철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술자리에서 어영부영 떠들어댄 말이 고스란히 계약에 반영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사는 쪽이 파는 쪽보다 우위에 설 수밖에 없다.
왕핑웨이가 술자리에서 얼렁뚱땅 과도한 요구를 관철시켜놓고 다음날 구두로 약속했지 않느냐며, 들어주지 않으면 계약은 원천무효라고 주장한다면.
로튼 프룻츠 쪽에서는 그 요구를 들어주거나 그것보다 조금 나은 조건으로 계약하는 수밖에 없다.
당하는 쪽이 느끼기엔 비열했지만 문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익과 손해만이 협상의 성패를 판단할 수 있는 잣대가 된다.
대찬은 왕핑웨이의 알콜 전술에 넘어가줄 의사가 전혀 없었다.
왕핑웨이는 슬그머니 웃으며 대찬에게 잔을 내밀었다.
대찬은 잔을 부딪쳤다.
역한 알콜이 사정없이 식도를 타고 흘렀다.
대찬은 술을 마시자마자 그의 다섯 배에 달하는 물을 마셔서 최대한 술기운을 희석했다.
왕핑웨이는 간단한 안주만을 한 점 집어먹었다.
“타이꿰이러.(太貴了, 너무 비싸)”
왕핑웨이의 말에 대찬은 진위생의 입을 빌리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꺼우피엔이.(夠便宜, 충분히 쌉니다)”
“원두 킬로 당 가격을 2불만 낮춥시다. 그럼 바로 사인할 수 있어요.”
대찬은 난색을 표했다.
“왕총, 그럼 정말 저희 남는 게 없습니다. 앞으로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서로 살아야죠.”
“으음,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조 사장이 나한테 이익이 되는 사람이어야지. 그러려면 우리 편의를 좀 봐줘야 하잖습니까?”
대찬은 냉수를 마셔 입 안의 술기운을 헹구고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어떻게?”
“이번 첫 대금 결제를 시작으로 세 번째까지는 달러 대신 위안화로 받겠습니다.”
“오호.”
“그리고 핸들링차지도 저희가 부담하겠습니다.”
“확실히 그런 조건이라면…….”
왕핑웨이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승낙하려는 순간 대찬이 말을 덧붙였다.
“대신, 거래물량을 50퍼센트 늘려주십시오.”
“음? 50퍼센트나?”
“네, 저희가 짐을 짊어지는 만큼 왕총도 그 정도 결단은 내려주셔야 합니다.”
“으음, 잠시 나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왕핑웨이는 자리를 떴다.